비틀즈

록 밴드 비틀즈의 10집 앨범에 대해서는 비틀즈(앨범) 문서를, 오리온사의 가공식품에 대해서는 비틀즈(가공식품)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이름비틀즈
THE BEATLES
분야음악
입성날짜1998년 12월 25일
위치7080 Hollywood Bl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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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Love Me Do' 싱글 발매 당시의 사진. 왼쪽부터 링고스타, 폴 매카트니, 존 레논, 조지 해리슨1964년 2월 7일, 미국의 JFK 공항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 왼쪽부터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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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6월 30일,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왼쪽부터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존 레논1969년 8월 22일, 비틀즈의 마지막 사진 촬영. 왼쪽부터 조지 해리슨, 폴 매카트니, 존 레논, 링고 스타.

The BEATLES

1 소개

여러 대중음악 장르의 탄생과 발전에 큰 영향을 준 선구자이자 혁신가

영국 출신의 4인조 록밴드인 비틀즈는 세계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중요한 아티스트이자, 대중문화의 영원한 아이콘이다.
끊임없이 새롭고 창의적인 시도들을 통해 대중음악 영역의 확장과 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록 밴드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들에게 음악의 다양한 즐거움을 일깨워 준 뮤지션이기도 하다.

언제나 제일 앞장서서 새로운 문을 연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음악인으로서의 면모와, 대중적인 인기 수퍼스타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독특한 존재였다.

비틀즈가 활동했던 기간은 고작 8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대중 음악의 역사는 비틀즈의 탄생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중 음악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으며, 당대에는 물론 현재까지도 수많은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비틀즈의 등장은 20세기 문화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여겨지며, 흔히 대중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꼽힌다.[1]
상업적으로도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 가장 많은 빌보드 차트 1위곡을 보유한 아티스트 등 여러 기록을 갖고 있다. 즉 '음악성'과 '대중적 인기' 양면 모두에서 최고의 성과를 이루어낸 뮤지션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 표기는 비틀가 아닌 비틀다.

2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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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

3.1 1957–62: 결성, 함부르크, 영국 정복

3.1.1 The Quarrymen 쿼리멘


초창기 쿼리멘 시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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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6월 6일 울튼 교회에서 공연하던 존 레논


1958년 7월 12일에 녹음된 "In Spite of All the Danger".[2]

1956년 존 레논은 비틀즈의 전신이 되는 쿼리멘[3]이라는 밴드를 결성하였다.[4] (자세한 밴드 결성 이야기는 존 레논 항목 참고) 존은 에릭 그리프스와 같은 친구들을 대여섯명 모아 동네 공연을 다녔다. 1957년 6월 6일, 이들은 리버풀 울튼 근교의 성 베드로 교회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바로 여기서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 이뤄진다.

I remember coming into the fete and seeing all the sideshows. And also hearing all this great music wafting in from this little Tannoy system. It was John and the band. I remember I was amazed and thought, 'Oh great', because I was obviously into the music. I remember John singing a song called Come Go With Me. He'd heard it on the radio. He didn't really know the verses, but he knew the chorus. The rest he just made up himself. I just thought, 'Well, he looks good, he's singing well and he seems like a great lead singer to me.' Of course, he had his glasses off, so he really looked suave. I remember John was good. He was really the only outstanding member, all the rest kind of slipped away.

- 폴 매카트니

폴은 공연이 끝난 후 존을 만나 "Twenty FLight Rock"과 "Be-Bop-A-Lula", 그리고 리틀 리처드의 노래들을 연주하며 자신의 실력을 보여줬고, 며칠 후에 폴은 정식으로 쿼리멘에 가입하게 된다. 폴 매카트니의 정식 데뷔는 1957년 10월 18일에 있었다. 투어를 다니는 중에 폴 매카트니는 "I've Lost My Little Girl"을 작곡하여 존에게 들려주었고, 존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Hello Little Girl"이라는 곡을 작곡했다. 센스도 참..
이듬해 폴은 자신의 학교 친구였던 조지 해리슨을 존에게 추천해주었다. 당시 조지 해리슨은 15살이었고 존 레논은 17살이었기 때문에 조지 해리슨이 어리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그의 실력을 보고 조지도 가입시켰다.
이후 쿼리멘의 멤버는 자주 바뀌었는데, 이 중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은 존 레논과 함께 끝까지 남으며 밴드 활동을 하였다. 쿼리멘이라는 이름은 존, 폴, 조지가 다녔었던 쿼리뱅크 고등학교에서 따온 것이었기 때문에 존이 미술대학에 진학하면서 이름을 바꾸고 비정기적으로 공연을 하게 된다.
존 레논, 조지 해리슨, 폴 매카트니[5]는 캐럴 레비스의 스타 찾기라는 프로그램에 조니 앤 문독스(Johnny and the Moondogs)[6]라는 이름으로 나가서 꽤 환호를 받았지만 당시 캐럴 레비스의 스타 찾기는 마지막에 모든 그룹이 나와 노래를 몇 마디 연주하고 관중의 박수소리로 우승자를 결정하는 시스템이었는데, 마지막까지 있었으면 리버풀행 기차를 놓쳤기 때문에 중간에 나와야 했다.

이후 존은 미술 대학교에서 화가를 꿈꾸던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라는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가 마침 존 무어스 전시회에 입선하여 60파운드를 얻자 베이스를 사게 꼬드겨서 밴드에 끌어들인다. 하지만 서트클리프 본인은 "이게 내 적성에 맞나?"라며 활동 내내 회의감에 젖었다고. 일설에 의하면 존한테 속았다고 불평했다.(…) 스튜어트의 여자친구는 사진작가였는데 그녀가 스튜어트를 따라다니며 찍은 사진들은 몇 남지 않은 비틀즈 초기 사진이 되었다.

1959년 후반, 존 레논은 당시 잘나가던 밴드 The Crickets(귀뚜라미)[7]같은 이름을 생각하다가 서트클리프가 제안한 Beetles(딱정벌레)라는 단어에서 Beat의 단어를 사용해서 Beatles로 쓰고 이게 비틀즈의 이름의 유래가 된다. 그 이름을 들은 친구는 키다리 존과 실버 비틀즈(The Long John and the Silver Beatles)[8]가 어떠냐고 하고 당시에는 그냥 넘겨버렸다. 이들은 래리 판스의 오디션에서 약속했던 드러머가 오지 않아서 이름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래리 판스의 조수가 이름을 묻자 '실버 비틀즈'(The Silver Beatles)라는 이름을 댔고 이 이름은 1959년 남은 기간동안 그들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래리 판스의 오디션에서는 오디션에 왔던 다른 그룹의 조니 허치(Jonny Hutch)가 대신 드럼을 쳐줬다. 실버 비틀즈는 결국 오디션의 원래 목적이었던 빌리 퓨어리의 반주를 맡지는 못하게 됐지만 래리 판스가 그가 거느리고 있던 가수 중 가장 무명이었던 조니 젠틀의 반주를 2주간의 스코틀랜드 연주 여행을 제안했다. 실버 비틀즈는 이를 받아들이고 토마스 무어(Thomas Moore)라는 드러머를 찾아내 연주 여행을 떠났다.

이 실버 비틀즈 시절 중에 폴 매카트니는 장난 삼아 폴 라몬(Paul Ramon)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훗날, 비틀즈의 팬이었던 펑크록 밴드 라몬즈의 멤버들은 밴드 결성시에 폴 매카트니가 썼던 이 가명 Ramon을 멤버들의 공통성으로 차용하고 밴드 이름도 라몬즈로 짓게 된다.

3.1.2 함부르크 시절


함부르크 시절 비틀즈의 초기 멤버. 왼쪽부터 피트 베스트, 조지 해리슨,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1962년, 함부르크 스타 클럽에서 연주한 "A Taste of Honey".

스코틀랜드에서의 연주 여행을 끝마치고 어퍼 팔러먼트 스트리트의 스트립 클럽에서 몇 번 출연하고 매튜 스트리트의 캐번 클럽에서도 출연한다. 하지만 재즈가 인기였던 캐번 클럽에서는 비트곡을 연주하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서로의 집을 돌아다니거나 돈이 있으면 클럽에서 시간을 보내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다 매니저 앨런 윌리엄스의 함부르크 투어 제안으로 그들은 평소 알고 지내던 카스바 클럽의 주인의 아들 피트 베스트(Pete Best)와 같이 함부르크 투어를 떠나게 된다.

함부르크 투어는 매우 성공적으로 끝난다. 이 때를 두고 존 레논은 "난 리버풀에서 태어났지만 함부르크에서 자랐다"라고 한 바 있다. 당시 이들은 쉬는 시간도 충분치 않아서 거의 12시간 동안이나 연주를 해야 했고[9] 약물에 아예 관심이 없었던 피트 베스트를 제외하면 모두 약물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서트클리프는 자신이 음악적 재능이 있는가에 대해 회의감이 더해져서 더욱 고초를 겪었다. 사실 그는 미술학도가 되고 싶었는데 위에서 말한 대로 존에게 낚여서 끌려온 셈이나 다름없었고,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스트리드 키르헤(Astrid Kirchherr. 이에 대해선 맨 아래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항목에서 묶어서 설명)의 충고도 있고 하여 많이 방황했다.

도 많이 늘었지만 조지는 당시 미성년자였던 것이 독일 당국에 적발되어 추방당하고 나머지 멤버들도 확실하지 못한 이유로 다시 리버풀로 돌아가게 되었다. 비틀즈 평전의 저자 헌터 데이비스는 클럽 간의 분쟁으로 인한 결과라는 추측을 냈다. 레이 코널리의 존 레논 전기에 따르면, 폴 매카트니와 피트 베스트가 방화사건을 일으켜서 추방당했다고 한다.[10] 비틀즈가 카이저 켈러 클럽에서 탑텐 클럽으로 이적하자 카이저 켈러 클럽 주인 코르슈미트가 조지 해리슨이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독일 경찰에 신고해 버렸고, 조지 해리슨이 추방당한 데에 앙심을 품은 폴 매카트니와 피트 베스트는 클럽 극장 벽에다 방화를 하고 The Beatles라고 글씨를 남겼다. 이것 때문에 두 사람도 역시 독일에서 방화범 혐의로 추방당했고 뒤에 남은 존 레논과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도 어쩔 수 없이 리버풀로 돌아가게 되었다. 서트클리프는 아스트리드와 재회했지만 솔로인 레논은 그런 거 없다는 건 안 자랑

3.1.3 캐번 클럽


캐번 퍼브 앞에 세워진 존 레논의 동상.[11]


1962년 8월 22일, 캐번 클럽에서 연주한 "Some Other Guy".[12]

리버풀로 돌아온 비틀즈는 카스바 클럽에서부터 공연을 시작하며 1960년 12월 27일, 그들의 가장 중요했던 첫 공연인 리더랜드 회관에서 공연을 했다. 1961년부터 리더랜드의 대성공을 이어 나가는 연주 계약이 계속 이루어지며 비틀즈는 리버풀 최고의 그룹이었던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즈(Rory Storm and the Hurricanes)를 따라잡고 있었지만 그들 자신은 그들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비틀즈는 1961년 1월부터 캐번에 정기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하며 처음에는 스윙잉 블루진스(Swinging Bluejeans)라는 세미 재즈 그룹과 번갈아 공연했다. 이 당시 즉흥 연주로도 유명해진 비틀즈는 캐번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이 덕분에 캐번 클럽은 비틀즈의 본무대 비슷한 곳이 되었다(물론 그 외의 다른 유명 밴드들도 이 곳을 거쳐갔다.). 이후 1961년 4월, 두 번째 함부르크 여행을 시작하며 탑텐 클럽에서 매일 밤 7시부터 새벽 2시까지(토요일은 새벽3시까지였다.) 공연을 했고 밤을 세우는 연주를 버티기 위해 피트 베스트를 제외한 멤버들은 각성제에까지 손을 댔다.

이 여행에서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는 함부르크에 남아 아스트리드와 결혼해서 다시 미술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고 에두아르도 파올로치(Eduardo Palozzi)라는 스코틀랜드 태생의 유명한 조각가 출신 객원 교수의 도움으로 미술대학에 등록하고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다. 그의 탈퇴로 베이스는 폴 매카트니가 맡게 된다. 그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 백비트(1994)에서 병들어 있다는 이유로 탈퇴하는 걸로 나오는데, 실제로 그는 1962년 겨우 22살에 뇌출혈로 병사했다. 피트 베스트와 더불어 비틀즈의 또다른 멤버로 거론되는 것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90년대 중순에서야 그가 초창기에 참여한 앨범들이 발매되면서 유족들이 그 수익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함부르크에서 그들의 첫 음반[13]으로 토니 섀리던이라는 탑텐 클럽 출연 가수의 반주를 맡아 녹음하게 됐다. 이 앨범에서 비틀즈는 비트 브라더스(The Beat Brothers)[14]라는 이름으로 참여했으며 몇 곡같은 경우는 비틀즈의 곡이었다.

3.1.4 메이저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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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고를 영입하며 드디어 완성된 비틀즈


그들의 데뷔 곡 "Love Me Do".

이후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만나게 되면서 그와 계약을 체결한다. 본래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가, "비틀즈? 완전 미친 X들이야"라는 지인의 평가에 궁금증이 생겨 그들의 공연장을 방문했고, 그들의 열정에 선뜻 매니저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죽을 때까지 비틀즈를 지원했다.[15] 그러나 그의 노력에 비해 대가는...엡스타인과 관련 인물들에 대해선 맨 아래에 문단 참고.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매니저가 된 이후 그들의 열정을 보고 음반을 내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엡스타인은 몇 번이고 런던으로 날아가서 레코드 회사들[16]과 수 차례 면담을 가졌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러던 중 엡스타인은 "데카 레코드 사(Decca Records)"에서 오디션을 한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도 신청을 넣는다. 1961년 12월 31일에 비틀즈는 닐 애스피놀(Neil Aspinall)과 함께 런던으로 여행을 떠났지만, 애스피놀이 길을 잃는 바람에 가는 데 10시간이 걸렸다. 결국 저녁 10시에나 도착했고, 존 레논은 "트라팔가 광장에서 술주정뱅이들이 뛰어댕기는 시간대"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인 1962년 1월 1일, 그들은 데카 레코드 사에서 오디션을 보며 15곡[17]을 1시간 동안 연주하게 된다. 게다가 비틀즈는 나중에야 엡스타인이 스튜디오에서의 녹음을 위해 데카 레코드 사의 프로듀서인 토니 미한(Tony Meehan)에게 돈을 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데카 측에선 비틀즈를 탈락시켰다. 이유인 즉 "기타 그룹은 쇠퇴할 것이며, 비틀즈는 공연 사업에서 미래가 없다"는 것.[18] 어쨌든 미한은 비틀즈와 같은 날에 오디션을 보고, 현지 그룹인 "트레몰로스"를 선택했다. 이 일은 흔히 대중음악 역사상 최악의 오판으로 꼽히며 데카 레코드 사는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계속 까이고 있다.연예계 최강의 새옹지마 황금알 낳는 거위 걷어찬 정도가 아니라 마이다스의 손모가지를 갖다 버린 꼴

엡스타인은 데카 말고도 EMI 레코드 사와도 접촉을 취하고 있었는데, (프로듀서가 아니었던) 마케팅 총괄담당자 론 화이트(Ron White)가 엡스타인과 만난 뒤 프로듀서들을 설득했다. 여기서 좋은 반응이 나오자 함부르크로 연주 여행을 다니고 있던 비틀즈는 런던으로 돌아와 EMI의 하위회사인 파를로폰(Parlophone)과 계약을 맺고, 거기서 '코미디 앨범'을 만든 조지 마틴과 만나 앨범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된다.

1962년 6월 6일, 런던의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마틴의 지휘 하에 첫 레코딩 세션을 가졌다. 마틴은 드러머 피트 베스트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아 불평했고, 결국 8월 중순 링고 스타가 피트 베스트를 대신하여 영입되었다. 뒷이야기에 따르면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핑계였을 뿐, 그 실질적인 이유는 오리지널 멤버들(존, 폴, 조지)과의 불화였다고 한다. 학창시절부터 함께해왔던 이들 세 명과 피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있었고 이를 계속 불편하게 생각했던 오리지널 멤버들은 메이저 데뷔 직전 마틴에게 피트의 탈퇴를 부탁했고 그것을 받아들인 마틴이 연주를 핑계로 피트를 링고로 교체시킨 것이다.

1962년 10월 5일에 발표된 첫 싱글 "Love Me Do"가 리버풀 팬들의 성원으로 차트 17위에까지 진입하며 성공적으로 데뷔했다[19]. 다음 해 1월에 발표된 두 번째 싱글 "Please Please Me"는 마틴의 예상대로 그들의 첫 차트 1위 곡이 되었다.[20][21]

3.2 1963–66: 비틀매니아, 투어 기간들

3.2.1 Please Please Me, With the Beat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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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에 환호하다 기절하는 빠순이여성 팬들이 속출하기 시작. 비틀매니아의 상징 이는 1년 후 미국으로 이어진다.

1963년, 영국에서의 그들의 인기를 대변하는 "She Loves You" 라이브 영상.[22]

두 싱글의 성공에 이어 1963년 1월, 9시간 45분 동안 10곡을 녹음하여 발표된 그들의 첫 정규 앨범 Please Please Me도 각종 차트에서 1위에 등극한다. 7주간 1위를 차지한 세 번째 싱글 "From Me to You"에 이어 8월에 발표된 네 번째 싱글이자 그들의 첫 밀리언 셀러인 "She Loves You"는 6주간 1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 영국에서 가장 빨리 팔린 음반이자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다.(후자는 1978년에 폴 매카트니의 "Mull of Kintyre"가 경신함.혼자 다해먹는)

첫 전국 투어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그들의 인기는 영국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수천 명의 팬들이 그들을 따라다니며 비명을 질러댔는데, 바로 비틀매니아의 시작이었다. 당시 영국 최고의 TV 프로그램이었던 'Sunday Night at the London Palladium'에서의 공연은 약 1500만 명이 시청했고 그동안 그들을 애써 무시하던 보수 언론과 기성세대들마저 굴복시키며 비틀매니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비틀즈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었고 각종 신문과 잡지, 방송에서 그들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30주 동안 차트 1위를 고수하던 데뷔 앨범 Please Please Me는 그들의 두 번째 앨범 With The Beatles에게 1위 자리를 내준다. With The Beatles는 영국 차트 역사상 두 번째로 백만 장 이상 판매한 앨범이 되었다.

3.2.2 브리티시 인베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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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60년대의 아이돌 등극 야 밀지 마라고 야


JFK 공항에 도착했을 떄의 모습. 영상에서 보이듯 수 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촉매가 된 "I Want to Hold Your Hand". 1964년 2월 9일 에드 설리번 쇼.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미국 진출을 위해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4만 달러를 들여 마케팅 캠페인을 벌였고, '에드 설리번 쇼' 출연 계약을 체결한다. 라디오 전파를 탄 "I Want to Hold Your Hand"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그들의 빌보드 차트 첫 1위 곡이 되었고 미국에서만 5백만 장 판매되었다. 그동안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미국 시장의 문이 열리는 순간.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시작이었다.

1964년 2월 7일, 비틀즈가 존 F.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을 때 수천 명의 팬들이 그들을 맞이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 출연한 '에드 설리번 쇼'는 무려 2300만 가구, 7300만 명 이상(당시 미국 인구의 38퍼센트 이상)이 시청했는데 닐센에 따르면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시청한 미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되었다.[23] 비틀매니아로 뒤덮힌 워싱턴 콜리세움과 카네기 홀에서의 공연 이후 두 번째로 출연한 '에드 설리번 쇼'도 또 한 번 7천만 명의 시청자를 불러 모았다.

미국 전역이 비틀매니아로 초토화되었는데, '오빠 부대'빠순이가 항상 그들을 따라다녔고 그들이 덮고 잤던 담요가 조각으로 나뉘어 팔리기도 했으며[24] 그들이 목욕할 때 사용한 물을 병에 담아 팔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흠좀무. 그들의 인기는 전대미문의 사회 현상이었다.

3.2.3 A Hard Day's Night

세 번째로 빌보드 1위를 차지하며 많은 기록이 만들어지게 한 "Can't Buy Me Love"의 라이브 영상.

1964년 3월, 비틀즈는 6주간 그들의 첫 영화인 A Hard Day's Night 촬영에 돌입하는데,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 비평적으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다. 동명의 사운드트랙 앨범은 영국에서 21주간, 미국에서 14주간 1위를 차지했는데 그들의 자작곡으로만 구성된 첫 앨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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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4월 4일, 빌보드 핫 100 차트

비틀즈 열풍으로 인해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한 비틀즈의 곡을 비틀즈의 다른 곡이 밀어내고 1위에 등극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그들의 노래 셋이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는데[25], "Can't Buy Me Love"가 1위에 올랐던 4월 4일에는 대중음악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다. 싱글 차트에서 1위부터 5위까지 독식하며 100위 안에 모두 12곡을 포함시켰으며 앨범 차트에서도 1, 2위를 독점한 것. 충격과 공포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헤어스타일과 복장을 반항의 상징으로 여기며 따라했다. 비틀즈의 엄청난 성공에 힘입어 롤링 스톤즈, 더 후를 비롯한 영국 록밴드들도 미국에 성공적으로 데뷔하게 되었고 그 후로도 삼 년간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미국 전역을 휩쓸었다.

8월, 저널리스트 알 아로노비츠의 주선으로 밥 딜런과의 만남이 성사된다. 밥 딜런은 비틀즈의 음악이 가진 활력에 매료되어서 비틀즈와의 만남을 원하고 있었던 반면, 비틀즈는 딜런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딜런은 비틀즈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마리화나를 선물로 준비한다. [26] 이 만남은 이후 비틀즈와 딜런 상호간에 음악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 계기가 되었다.

3.2.4 Beatles for Sale, Help!, Rubber 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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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0월 26일, 버킹엄 궁에서 여왕으로부터 MBE 훈장을 수여받을 때. 우측하단 담배[27]는 무시하자 [28]


1965년 첫 빌보드 1위 곡이 된 "Eight Days a Week".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 아니 애초에 영국에서는 싱글로 발매조차 안 됐던 곡이다. 미국 음반사였던 캐피톨 사가 멋대로 낸 싱글들 중에 하나였는데, 이것이 얻어걸려 1위를 한 것. 이런 예가 몇 번 더 있는데, Yesterday 역시 그런 경우 중 하나였으며, 비틀즈의 마지막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곡인 The Long and Winding Road도 캐피톨 사가 독단적으로 낸 싱글이었다. 게다가 1966년까지는 싱글 뿐만 아니라 정규 앨범까지 멋대로 바꾸어 발매를 하는데, 영국에서 7장의 정규 앨범이 나오는 사이에 미국 캐피톨 사는 무려 12장의 앨범을 냈다. 이는 당시까지 미국 캐피톨 사가 비틀즈보다 갑의 위치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는데, 나중에는 비틀즈가 역으로 갑의 위치가 되자 "이딴 식이면 캐피톨에서 더 이상 발매 못하게 할 거임"이라고 나왔고, 결국 캐피톨 사가 데꿀멍하여 1967년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부터는 영국과 동일하게 발매한다. (1967년 말에 영국에서는 6곡 EP로 발매된 Magical Mystery Tour를 멋대로 싱글 5곡까지 끼워넣어 LP로 발매하기는 했지만 이는 미국에서 EP가 사장된 포맷이었던 점 때문이다. 더욱이 이 앨범은 1976년 영국에서도 이 형식으로 발매되었으며, CD 시절로 넘어온 이후부터는 아예 비틀즈의 공식 카달로그에 포함되기까지 한다.) 다만 비틀즈가 해체에 다다른 1970년에는 그 버릇을 못 버리고 Hey Jude를 발매한다.</ref>

네 번째 앨범인 Beatles for Sale은 상업적 압력과 창작욕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혹독한 스케줄과 피로로 인해 모든 곡을 자작곡으로 채우지는 못했으나 A Hard Day's Night를 차트 1위에서 끌어내리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다.1집부터 자기 앨범을 자기가 갈아치우고 있다

1965년 6월 11일,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비틀즈를 MBE로 임명하자 논란이 일었다.그 전까지 MBE 훈장은 군 베테랑과 시 지도자에게만 수여되었던 것으로 뮤지션에게 훈장이, 그것도 젊은 로큰롤 가수가 받은 것은 처음 있던 일이었다. 이 여파로 이때 몇몇 보수 MBE 서훈자들이 훈장을 반납하는 일이 벌어졌다. 훈장은 가장 낮은 등급이었지만 당시 보수적이던 영국 사회에는 하나의 큰 파장이었다.


1965년 8월 1일 블랙풀, Yesterday가 세상에 최초로 공개되던 순간.

7월에 개봉한 비틀즈의 두 번째 영화 Help!는 상반된 반응을 얻었으나, 사운드트랙 앨범이자 다섯 번째 앨범인 Help!는 음악적으로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들의 일대 변신을 예고했다. 특히 현악 사중주가 도입된 "Yesterday"는 역사상 가장 많은 커버 버전을 가진 곡이 된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팝송 100선 같은 데에 절대로 빠지지 않는 곡 중 하나다.) 이 앨범에 수록된 "You've Got to Hide Your Love Away"는 비틀즈 최초로 세션맨을 도입한 곡이다.
비틀즈는 Help! 영화 촬영을 위해 바하마로 촬영을 갔었는데, 조지 해리슨이 여기서 시타르를 접하게 된다.


역사적인 셰어 스타디엄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Twist and Shout".

8월 15일, 뉴욕 셰어 스타디엄(Shea Stadium)에서의 공연은 역사상 최초로 대형 스타디엄에서 펼쳐진 공연이었다. 또한 55,600명의 관중으로 세계 기록을 경신했다.[29] 투어는 연일 성황을 이루었으며 엘비스 프레슬리가 그들을 비버리 힐즈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만남을 가졌다.


Rubber Soul의 앨범 커버. 처음으로 그들의 이름이 커버에 쓰이지 않았다.

10월, 비틀즈는 처음으로 아무런 방해 없이 앨범 제작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투어도 잠시 쉬는 시간이었지만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을 노려 앨범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거의 한 달 만에 앨범을 만들었다. 이 앨범이 Rubber Soul이다. 한 달 만에 만들어서 곡들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주제 등이 하나의 흐름처럼 느껴졌고 덕분에 앨범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여긴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의 사례로 평가 받았다. 비평가들은 놀라울 정도로 성숙된 그들의 모습에 찬사를 보냈다. 팬들은 시적인 노랫말의 의미를 파헤치려고 애썼고, 해리슨이 시타르를 도입한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는 대중음악의 경계를 넘은 새로운 시도였다.[30]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5위를 차지했다.

3.3 1966-70: 논란, 스튜디오 기간들, 해체

3.3.1 마지막 투어까지의 사건들


비틀즈의 음반을 불태우는 바이블 벨트의 기독교 신자들

1966년 6월, Yesterday and Today[31]흠좀무한 커버[32]로 인해 대소동이 일어났다. 그들의 앨범을 "도살하던[33]" Capitol에 대한 비틀즈의 항의가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지만, 사실 사진작가 로버트 위태커의 의도였다. 앨범은 전량 회수되어 새로운 커버로 교체되었고, 원래 버전은 2005년 12월, 경매에서 10,500달러에 낙찰되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해리슨이 시타르의 거장 라비 샹카르에게 지도를 받았다.

비틀즈의 일본 콘서트가 계획된 적이 있었는데 일본 정부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지 않으면 콘서트고 지랄이고 없다고 했고 비틀즈는 '그럼 안 가지 뭐.'라고 거부했다. 존 레논은 "귀신들도 우리 콘서트가 보고 싶나보군."이라고 황당함을 표했다. 이 일화는 일본 소설인 아빠는 가출 중에도 소개되어있다. 가출한 '아빠'가 청소년 시절 비틀즈가 일본에 오기로 했다 취소되었단 소식을 듣자 "이 죽일놈들!" 하면서 몇날며칠을 길길이 날뛰는 내용이다. 결국 비틀즈의 공연 중단 직전인 1966년 일본 무도관에서 공연을 하기는 했는데 그 당시 무도관은 일왕이나 높으신 분들이 연설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비틀즈 팬을 제외한 일본인들은(특히 극우 인사들) '비틀즈가 덴노와 일본인을 욕보였다'며 비틀즈를 일본도로 썰어버리겠다니 하며 위협했다.

한 달 후의 필리핀 투어는 비틀즈가 겪은 최악의 경험이 되었다. 비틀즈가 의도치 않게 퍼스트 레이디 이멜다 마르코스를 모욕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참사가 일어난 것. 공적인 자리는 피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던 엡스타인이 비틀즈를 대신하여 대통령궁에서의 아침식사 초대를 정중하게 거절하자 이멜다가 빡쳤고, 모든 경찰들이 보호를 거부하면서 그들은 성난 국민들에게서 살아남아 필리핀을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필리핀을 빠져나가는 데에 성공했고[34], 이 일은 이미 공연에 대한 회의를 느끼던 그들이 마음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필리핀에서 돌아온 그들에게는 KKK를 포함한 미국의 종교, 사회 보수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발이 기다리고 있었다. 3월, 모린 클리브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예수보다 인기가 많다"예수보다 전능하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유명하다는데 그거가지고고 한 레논의 발언이, 영국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다섯 달 후인 8월, 미국의 청소년 잡지인 데이트북(Datebook)에 의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바이블 벨트예수쟁이기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논란이 일어난 것. 바티칸이 항의 성명을 발표했고,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라디오, 남아프리카의 국영 방송에서 비틀즈의 음악이 금지되었다. 엡스타인은 의도적으로 편집한 데이트북을 고소했고, 레논은 기자 회견에서 해명을 해야 했다. 비틀즈/예수 발언 참조. 후일 링고 스타의 회고에 따르면, 그 때 앨범 불태웠던 사람들한테 나중에 다시 사줬다고 땡큐.

공연을 보러 온 팬들은 그들의 음악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들은 비틀즈를 직접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분했고,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는 팬들로 인해 비틀즈는 자신들의 음악 소리조차 듣기 힘들어졌다. 점점 공연에 흥미를 잃어가던 비틀즈는 그토록 중시해왔던 공연의 중단을 고려하게 되었고, 위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그들의 결심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8월의 미국 투어가 비틀즈의 마지막 순회공연이 되었다.

3.3.2 Revolver,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년, "Strawberry Fields Forever"의 프로모셔널 필름(지금의 뮤직 비디오)을 촬영할 무렵.

해리슨과 매카트니의 연주에 대한 찬사와 함께, 과소평가 받아왔던 그들의 연주 실력을 재평가받게 한 싱글 "Paperback Writer / Rain"을 발표할 때 그들은 짧은 프로모셔널 필름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최초의 뮤직비디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클라우스 부어만이 작업한 Revolver의 커버 아트. 1966년 그래미에서 최고의 앨범 커버 상을 받았다.

1966년 8월, 마지막 투어 한 주 전에 발매된 Revolver에서는 Rubber Soul에 이어 또 한 번의 중대한 발전을 이루었다. 혁신적인 클래시컬 현악 편곡에서부터 사이키델릭 록에 이르기까지 더욱 다양해진 레퍼토리와 복잡하고 정교한 노랫말과 함께 실험 정신이 첨예하게 드러난 Revolver대중음악의 영역을 새로이 정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앨범에서 가장 실험적인 곡 중의 하나인 "Tomorrow Never Knows"는 사이키델릭 록의 선구자격인 걸작으로 꼽히고, 현악 팔중주와 보컬만으로 이루어진 "Eleanor Rigby"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짜 하이브리드"라는 평을 받았으며, 해리슨은 자신의 곡을 셋이나 포함시키며 존재감을 부각했다.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3위를 차지했다.

미국 투어 중 Revolver의 곡은 하나도 연주되지 않았는데, 크리스 잉엄의 말에 따르면 "라이브의 비틀즈와 스튜디오의 비틀즈가 완전히 다른 짐승이 되면서" 그러한 스튜디오에서의 작품을 라이브로 (계속 소리만 질러대는 팬들 앞에서는 더욱) 제대로 해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결국 8월 29일, 샌 프란시스코의 캔들스틱 파크에서의 공연을 끝으로 4년간 무려 1,400회 이상의 공연을 해왔던 비틀즈의 공연 역사는 막을 내렸다.[35]


Sgt. Pepper의 커버.

투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비틀즈는 1966년 11월 말부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앨범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이하 Sgt. Pepper)의 녹음을 시작하면서 보다 더 실험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엔지니어였던 제프 에머릭에 따르면, 앨범을 녹음하는 데에 700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그들이 "Sgt. Pepper는 모든 것이 달라야 한다"고 고집하며 파격적인 실험을 계속했기 때문. 1967년 2월에 발매된 "Strawberry Fields Forever"/"Penny Lane"과[36] 6월에 발표된 Sgt. Pepper는 동시대의 음악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비치 보이스의 리더 브라이언 윌슨Smile을 작업하던 도중 "Strawberry Fields Forever"를 듣고 비틀즈와의 경쟁을 포기해 버렸고, "서양 문명사의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논평한 타임즈의 케네스 타이넌을 비롯하여 평론가들은 Sgt. Pepper에 거의 일방적인 지지를 보냈다. "She's Leaving Home"은 레너드 번스타인을 비롯한 클래시컬 음악계의 찬사를 받았고, 40인조 오케스트라가 기용된 레논과 매카트니의 합작품 "A Day in the Life"는 수많은 비틀즈 팬들에게 그들의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1위를 차지했다.

Sgt. Pepper는 커버에 전곡의 노랫말이 수록된 최초의 앨범이었고 그 노랫말들은 문학 비평가 리처드 포이리에를 비롯한 학자들에게 연구 대상이 되곤 했다. 또한 각 분야의 유명인사들과 그들 자신이 그려진 Sgt. Pepper앨범 커버가 화제가 되어 앨범 커버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며 수많은 모방을 낳았다.


All You Need Is Love

6월 25일, 24개국, 3억 5천만 명 이상이 시청한 세계 최초의 위성 생중계 방송 'Our World'에 출연하여 "All You Need Is Love"를 연주했다. 이 곡은 사랑의 여름에서 플라워 파워(히피 문화)의 찬가로 선정되었다.
두 달 후 비틀즈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그들이 마하리시 마헤시 요기를 만난 후 초월 명상 수련을 위해 인도로 떠나 있었을 때 그동안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그들을 조율하며 함께 비틀즈 신화를 창조했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카비톨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것. 그의 죽음으로 그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고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37]

3.3.3 Magical Mystery Tour, White Album, Yellow Submarine


영화 Magical Mystery Tour매미투에서 "I Am the Walrus"를 연주할 때.

1967년 12월, 사운드트랙 앨범 Magical Mystery Tour가 영국에서는 EP로, 미국에서는 LP로 발매되었다. 언터버거는 "Sgt. Pepper와 맥을 같이하는 사이키델릭 사운드"이지만 "I Am the Walrus"와 같은 일부는 "더욱 몽롱하게 느껴지며" 싱글로 발표되었던 5곡은 "아름답고 혁신적"이라고 평가했다. 첫 3주 만에 가장 빨리 판매된 Capitol의 LP가 되었고, 후에 비틀즈의 정규앨범으로 채택된 유일한 Capitol의 컴필레이션이 되었다. 매카트니의 주도로 제작되어 복싱 데이에 처음 방송된 동명의 TV 영화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그들의 첫 작품이 되었다.[38] Daily Express는 "완전한 쓰레기"라고 일축했고 Daily Mail은 "엄청난 자만"이라며 비난했으나 The Guardian은 "조악함과 따뜻함 그리고 청중의 어리석음에 대한 판타지 도덕극"이라고 평가했다. 제법 괜찮은 실적을 거두기는 했으나 언론의 혹평으로 인해 미국에서까지 방송되지는 못했다.


영화 Yellow Submarine의 한 장면.

1968년 1월, 비틀즈는 그들 자신이 만화 캐릭터로 그려져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 Yellow Submarine에 출연했다. 영화는 6월에 개봉하여 평론가들로부터 음악과 유머[39], 혁신적인 비주얼[40]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영화를 통해 네 개의 신곡이 공개되었는데 이 곡들이 포함된 사운드트랙 앨범은 이듬해가 되어서야 발매되게 된다.


문제의 The Beatles 미니멀리스트 커버. 이것은 진정한 여백의 미 순간 이미지를 찾을수 없다인줄

그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시피 한 커버로 유명한, 흔히 '화이트 앨범'으로 알려진 더블 앨범 The Beatles가 발표되었다. 기존과 다른 새로운 방향에서 앨범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엡스타인의 부재로 방황하던 그들은 마하리시를 그들의 정신적 스승으로 삼아 인도 리시케시에 있는 그의 아시람(ashram)으로 향했다. 그들이 인도에서 머문 세 달 동안은, 앨범에 수록된 30곡 중 18곡을 비롯하여 수많은 곡이 만들어지면서 그들이 가장 많은 곡들을 쏟아낸 시기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링고는 10일 만에 떠났고 지루함을 참지 못한 매카트니도 한 달 후에 영국으로 돌아갔으며 남아 있던 레논과 해리슨도 마하리시가 그들을 이용해 먹으려 한다는 말을 듣고 의문을 품게 되었다. 마하리시가 여성 참가자들에게 성적인 접근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레논도 결국 두 달 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되었고 확신이 서지 않았던 해리슨과 나머지 일행들도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분노한 레논은 법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해 "Sexy Sadie"로 이름을 바꾸어 마하리시를 까는 곡을 만들었고 매카트니는 "우리의 착각었다. 그에게 무언가가 더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고 밝혔다.

앨범의 레코딩 세션이 5월부터 10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동안 비틀즈의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링고가 2주 동안 밴드를 떠나 버리는 바람에 "Back in the U.S.S.R."과 "Dear Prudence"를 녹음할 때에는 매카트니가 드럼스틱을 잡아야 했고[41] 매카트니와의 협업에 흥미를 잃은 레논은 매카트니가 만든 "Ob-La-Di, Ob-La-Da"를 "할매들용 똥음악 (granny music shit)"라며 멸시했다. 설상가상으로, 애인은 스튜디오에 데리고 오지 않는다는 그들의 암묵적인 합의를 무시하고 전위 예술가 오노 요코와 사랑에 빠져 있었던 레논이 그녀를 세션에 데려올 것을 고집하면서 긴장감이 더욱 심화되었다. 레논은 "모든 트랙이 개개인의 트랙이고 비틀즈의 음악은 없다. 존과 그의 밴드, 폴과 그의 밴드, 조지와 그의 밴드"라며 앨범에 대한 생각을 밝혔고 암묵적으로 까이는 링고 매카트니는 앨범을 "만드는 일은 즐겁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와 레논 모두 이 레코딩 세션이 비틀즈 해체의 시작이었다는 점에 동의했다.

앨범은 11월에 발표되었는데 그들이 설립한 애플 레코드의 첫 앨범 발매였다. 2백만 장 이상의 선주문을 기록했는데 발매 후 한 달 만에 4백만 장 가까이를 팔아 치웠고 수록곡들이 미국의 라디오 방송국들을 휩쓸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Sgt. Pepper와 달리, "최고의 능력, 최악의 성향"이라며 훌륭하지만 목적이 없다고 깐 타임을 비롯하여 당시 평론가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점차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오히려 개개인의 역량이 돋보이는 점이 새롭게 조명되었고 역대 최고의 더블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10위를 차지했다.

동명의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이자 그들의 열 번째 정규 앨범인 Yellow Submarine은 이듬해 1월에 발매되었다. 비틀즈의 신곡은 넷뿐이었고 마틴이 작곡한 기악곡 일곱이 포함된 앨범이었기에[42] 당연히 "불필요한" 음반이라는 평도 있었지만 해리슨의 "It's All Too Much"는 "신곡들 중 보석"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3.3.3.1 인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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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앉아있는 사람이 마하리시.

(내용 보완, 추가 필요)
1967년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죽은 이후로[43] 비틀즈는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존 레논은 영화계에 잠시 발을 담그는 등[44] 방황하다가 조지 해리슨의 충고에 따라 당시 영국에 머무르고 있었던 인도의 마하리시를 찾아갔고 마하라시의 사상에 관심이 생겨 다른 멤버들과 함께 마하라시의 초월 명상 캠프에 들어간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이 속았다며 불평하고는 다시 돌아왔다. 조지 해리슨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멤버들을 따라 역시 돌아왔다. 마하리시와 의견이 맞지 않았다는 게 속았다는 이유 중 하나이다. 마하리시는 비틀즈의 수입의 25%를 요구했고, 비틀즈를 홍보에 이용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3.3.4 Abbey Road, Let It Be, 해체

1969년 1월 30일, 전설이 된 비틀즈의 애플사 옥상 공연 중 연주된 "Don't Let Me Down".

비록 발매 시점으로 따지면 Let It Be가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었지만 이미 Abbey Road를 발표하기 전에 거의 다 만들어진 상태였다. 프로젝트는 "기본으로 돌아가" 스튜디오 기술과 오버더빙이 없는 새로운 앨범을 만들고 와해되어 가는 밴드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라이브 공연을 재개하자는 매카트니의 제안으로 추진되었다. 최초의 계획은 1969년 1월부터 트위크넘 스튜디오에서 마이클 린제이-호그가 촬영한 리허설 장면들로 대부분이 구성된, "Beatles at Work"라는 제목의 한 시간 분량의 TV 프로그램이었다. 마틴은 "멤버들 사이의 관계가 최악이었던 시기라 전혀 즐겁지 않은" 프로젝트였다고 말했고 당시의 즉흥적인 세션에 대해 레논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해리슨은 "내 평생 최악의" 세션이었다고 설명했다. 레논과 매카트니 모두에게 짜증이 난 해리슨은 5일 동안 밴드를 떠났고, 돌아오자마자 라이브 공연에 대한 논의를 중단하고 TV 프로그램에 쓰일 곡들로 채워진 새 앨범 Get Back[45]에 대한 작업에 집중하지 않으면 완전히 떠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또한 트위크넘 스튜디오에서의 작업을 중단하고 새로 지어진 애플 스튜디오로 옮길 것을 요구했다. 이에 나머지 멤버들도 동의했고 TV 프로그램용으로 제작된 영상들은 피쳐 필름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키보드 라이브 연주가 필요한 곡들이 있어서 해리슨이 키보디스트 빌리 프레스턴을 데려와 세션의 마지막 9일 동안 함께했다. 프레스턴은 "Get Back" 싱글에 참여함으로써 비틀즈의 공식 음반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인물[46]이 되었다. 리허설을 마무리한 후 공연을 촬영할 장소를 선정해야 했는데, 바다의 배 위, 정신병원(...), 튀니지 사막, 콜로세움 등 많은 아이디어가 나왔으나 끝내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1월 30일, 결국 그들은 런던 새블 로우에 위치한 애플사의 옥상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여 촬영을 마쳤는데,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공연으로 남게 되었다. 5주 후, 그들은 프로젝트에서 손을 뗐고 앨범에 관한 작업은 엔지니어 글린 존스에게 모두 맡겨졌다.

엡스타인을 대신할 재정 고문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멤버들 사이에 또다시 긴장감이 감돌았다. 레논, 해리슨, 링고는 롤링 스톤즈샘 쿡과 일했었던 앨런 클라인을 선호한 반면 매카트니는 아내 린다 이스트먼[47]의 형제인 존 이스트먼을 원했고,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여 일시적으로 두 명이 동시에 기용되면서 더 많은 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결국 5월 8일, 클라인이 단독으로 비틀즈의 매니저가 되었다.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해 낸 Abbey Road의 앨범 커버.

Get Back 세션이 "비참한 경험"이었기에 "그들에게 끝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꼈던 마틴은 앨범을 하나 더 만들자는 매카트니의 요청에 놀랐다. 이것이 사실상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 된 Abbey Road였고 주 레코딩 세션은 7월 2일에 시작되었다. 레논은 그와 매카트니의 곡이 서로 다른 면을 차지하기를 원했고 결국 매카트니의 제안대로 첫 면은 각자가 작곡한 곡으로, 다음 면은 메들리로 구성하는 방식으로 타협하게 되었다. 7월 4일, 레논이 플라스틱 오노 밴드로 발표한 "Give Peace a Chance"는 비틀즈 멤버의 첫 솔로 싱글이었고, "I Want You (She's So Heavy)"에 대한 작업이 이루어진 1969년 8월 20일은 비틀즈 네 명 모두가 한 스튜디오에서 함께한 마지막 날이 되었다. 9월 20일, 레논은 나머지 멤버들에게 밴드를 떠날 것을 알렸지만 다가올 앨범의 판매량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기 위해 발표를 하지 않는 것에 동의했다.

6일 후 발매된 Abbey Road는 3달이 안 되어 4백만 장이 팔렸고 17주 동안 영국 차트 정상을 지켰다. 프랭크 시나트라"지난 50년 혹은 100년 간 최고의 러브 송"이라고 극찬한[48] 두 번째 트랙 "Something"은 싱글 A면을 차지한 해리슨의 유일한 곡이 되었다. 전년의 The Beatles처럼 당시의 평론가들은 앨범에 대해 엇갈린 반응을 보였지만 메들리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찬사를 보냈고, 시간이 흐르며 "그들다운 백조의 노래",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하모니 중의 하나"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마틴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비틀즈 앨범으로 꼽았지만 레논은 "만족할 만하지만 생명력이 없다"고 깠다.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14위를 차지했으며 2009년의 독자 투표에서는 가장 위대한 비틀즈 앨범으로 선정되었다.

1970년 1월 3일, 그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Get Back 앨범을 위해 녹음해야 할 하나 남은 곡, 해리슨의 "I Me Mine"을 위해 모였지만 덴마크에 있었던 레논은 참여하지 못했다. 3월, 앨범의 타이틀은 Let It Be로 바뀌었지만 매니저 클라인은 글린 존스가 작업해 놓은 앨범을 거부하고 세션 테이프를 레논의 솔로 싱글 "Instant Karma!"를 프로듀싱했던 필 스펙터에게 넘겼다. 스펙터는, 원래의 의도였던 "살아 있는" 음원과 상관없이 자르고 편집하고 오버더빙하는 작업을 시도했고, 이에 매카트니는 불만을 감추지 못했는데, 특히 14인 합창과 36인 합주를 비롯한 호화로운 오케스트레이션이 동원된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듣고 분노했다. 그러나 자신의 곡을 원래대로 돌리려는 요구는 무시되었고 첫 솔로 앨범을 발매하기 한 주 전이었던 1970년 4월 10일, 매카트니가 기자 회견을 열어 비틀즈 탈퇴를 발표함으로써 비틀즈는 약 8년 간의 짧은 활동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영화 Let It Be에서 연주된, 그들의 마지막 싱글 "The Long and Winding Road".

5월 8일, 스펙터가 프로듀싱한 Let It Be가 발매되었고, 사실상 그들의 마지막 싱글인 "The Long and Winding Road"는 그들의 스무 번째 빌보드 1위 곡[49][50]이 되었다. 1위로 시작해서 1위로 끝. 앨범은 미국과 영국 차트를 정복했으나 평론가들 사이에는 당연히 평이 엇갈렸고, 롤링 스톤은 앨범을 윤색한 스펙터의 오버프로듀싱을 깠다.[51] 한 달 후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해서 초기에는 부정적인 평이 주를 이루었으나 점점 우호적인 평이 많아졌고, 몇몇 곡들은 앨범에서보다 더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 등 사운드트랙은 일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이듬해 아카데미그래미에서 '최고의 주제가' 상을 수상했다. 1970년 12월 31일, 매카트니는 비틀즈의 계약 파트너쉽을 해소하기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 비틀즈 해체 후에도 오랫동안 법적인 분쟁이 계속되었고 1974년 12월 29일이 되어서야 그들의 계약이 해소되었다.

3.4 1970–현재: 해체 이후

(내용 추가, 보완 필요)

모두 비틀즈가 해체된 해인 1970년 각자의 솔로음반을 발표하게 되고,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길을 걷는다. 당시 멤버들의 사이가 안좋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부분인데, 폴은 해체 바로 다음 주에, 링고 스타는 해체 하기도 전에 앨범을 발표했다. 폴 매카트니는 두 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한뒤 1971년부터 존 레논이 암살된 해인 1980년까지 자신의 아내 린다 매카트니와 기타리스트 데니 래인을 주축으로 하는 윙스란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했었다. 밴드의 형식을 취했지만, 거의 폴 매카트니의 개인 밴드로 봐도 무방하다. 각 멤버들의 솔로 활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각 참고 바람.

영국과 미국의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27곡이 수록된 컴필레이션 앨범 1이 2000년 11월 13일에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평단으로부터 일방적인 찬사를 받은 것은 물론 세계적으로 3,100만 장 이상이 팔려 나갔고, 미국에서 21세기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2006년에는 비틀즈 노래들을 리믹스한 Love(비틀즈)라는 앨범이 나왔다. 팬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좀 갈리는 편이지만 전체적인 평으로 봐서는 괜찮은 편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태양의 서커스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어 현재 라스베가스에서 공연 중에 있다.

3.4.1 비틀즈 앤솔로지

1980년 존 레논이 암살된 후, 비틀즈의 재결합은 영원히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나머지 세 멤버가 모인적은 있었다. 1995년을 전후해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3명이 모여 비틀즈의 미공개 음원들과 자료들을 정리해 "The Beatles Anthology 1"의 작업을 함께 했다. 여기서 나온 음원들과 멤버들의 인터뷰 등을 엮어 동명의 다큐멘터리가 나왔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비틀즈 팬들에게 있어서 꼭 한 번쯤은 봐야 하는 교과서 정도의 위치에 있다.

사실 이러한 기획은 1985년 경부터 "Sessions"라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EMI는 비틀즈의 미공개곡을 묶어서 LP 한 장 분량으로 발매하려고 기획하였으나 죽은 존 레논을 제외한 나머지 세 멤버들이 퇴짜를 놓는 바람에 한 차례 취소된 바가 있었다. 그러다가 1994년에 "Live at the BBC"를 시작으로 이 기획이 오히려더 확대되어 부활한 것이다.

또한 존 레논이 남긴 카세트 테이프에 세 멤버의 연주를 입혀 "Free As A Bird"와 "Real Love"를 싱글로 발표했다. "Free as a Bird"의 경우 미완성 부분이 많아서 나머지 멤버들이 일부를 새로 만들었다. 그래서 작곡자 표시에 네 멤버가 모두 적혀있다. 반면 "Real Love"는 존 레논이 거의 작곡을 다 한 상태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중간의 조지 해리슨 기타 솔로를 제외하고는 크게 바뀐 점은 없다. 따라서 이 곡은 존 레논 단독으로만 표기되어 있다.

앤솔로지 작업이 끝난 뒤에는 다시 각자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2001년 조지 해리슨이 폐암으로 사망했다. 남은 두 멤버인 폴 매카트니와 링고 스타, 그리고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의 유족들은 비틀즈 관련 행사에 간간히 만난다. 특히 폴 매카트니와 링고 스타는 자주 만나는 편.

4 디스코그래피

비틀즈/음반 목록 참조.

4.1 싱글

(괄호 안은 발매년도)
순서는 차트 달성일 순

4.1.1 빌보드 1위

4.1.2 빌보드 2위

  • Twist And Shout (1964)
  • Do You Want To Know A Secret (1964)
  • Yellow Submarine (1966)

4.1.3 빌보드 3위~10위

  • Please Please Me (1964)
  • P.S. I Love You (1964)
  • She's A Woman (1964)
  • Day Tripper (1965)
  • Nowhere Man (1966)
  • Strawberry Fields Forever (1967)
  • Lady Madonna (1968)
  • The Ballad Of John And Yoko (1969)
  • Got To Get You Into My Life (1976)[56]
  • Free As A Bird (1995)

4.1.4 빌보드 11위~20위

  • I Saw Her Standing There (1963)
  • Ain't She Sweet (1964) [57]
  • And I Love Her (1964)
  • Matchbox (1964)
  • Eleanor Rigby (1966) [58]
  • Revolution (1968)
  • The Beatles Movie Medley (1982)
  • Real Love (1996)

4.1.5 해체후 멤버별 빌보드성적(싱글)

비틀즈는 해체 후에도 4명 모두 빌보드 Hot 100 1위를 한 번 이상 해봤다. 이렇게 활동 중에도 1위를 하고 해체 후에 멤버들 모두 1위를 한 밴드는 비틀즈가 유일하다.

Hot 100 1위만 소개한다.

폴 매카트니는 70년대 빌보드 총 결산에서 솔로 아티스트 중 엘튼 존 다음인 2위로 쳐준다. (엘튼 존은 15주, 폴은 13주를 랭크시켰다) [60] 60년대 1위는 누구나 떠올리다시피 비틀즈 혼자 다해먹는구만

해체 이전에 스무 곡 넘게 1위에 올렸고, 해체 후에는 16곡이나 1위에 올렸다. 반 이상이 폴 매카트니인 것 같지만 무시하자

4.2 앨범

"비틀즈는 해마다 신곡이다."[64]

- 故신해철

(괄호 안은 발매년도)
순서는 빌보드 앨범 차트 달성일 순

4.2.1 빌보드 1위

4.2.2 빌보드 2위

4.2.3 빌보드 3위~10위

4.2.4 빌보드 11위~20위

  • Reel Music (1982)
  • Yellow Submarine Songtrack (1999)
  • The Beatles Stereo Box Set (2009)

사실 비틀즈의 모든 정규 앨범들과 대부분의 라이브 앨범들이 10위 안에 들어서 11위 밖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 더구나 그냥 앨범도 아니고 박스 셋이 20위 안에 들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

4.3 항목이 분리된 비틀즈 노래들

(A Hard Day's Night와 같이 앨범과 노래의 제목이 같은 경우도 포함)

4.4 업적

In all likelihood, there will never be another band as popular and critically acclaimed. They win at music.

#

4.4.1 비틀즈의 주요 업적

  • 록음악의 각종 하위 장르들을 비롯해 대중 음악의 여러 장르들의 탄생과 발전에 기여하고 영향을 줬다. 록음악의 경계를 넓히고 사운드와 표현법의 다양성이 증대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포크록, 사이키델릭 록, 쟁글 팝, 파워 팝, 프로그레시브 록, 브라스 록 등의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그 외의 장르들에도 비틀즈의 영향을 안 받은 분야가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비틀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거나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중에 비틀즈를 꼽는 뮤지션들을 보면 어떤 장르에서든 무수하게 많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폭넓고 막대하다.
  • 한 두가지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하고 다채로운 사운드를 실험하고 융합했다. 심지어 화이트앨범 단 한 장의 앨범만 봐도 로큰롤, 록, 팝, 하드록, 발라드, 사이키델릭, 블루스, 프로그레시브, 포크, 재즈, 컨트리, 스카[65], 펑크, 자장가, 헤비메탈, 아방가르드까지 이 모든 장르가 단 한 앨범에 들어있다.[66] 이 중 상당수는 그 당시엔 아직 해당 장르가 채 생기기도 전이었다.
  • 대중음악의 판도를 작곡가, 작사가, 연주자, 가수가 각각 따로 있는게 전형적이었던 기존의 시스템에서, 스스로 자작곡을 만들고 연주와 노래까지 자체적으로 다 하는 '록밴드'가 대중음악계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 침체되어 있었던 로큰롤의 부활과 대중화, 세계화, 그리고 더 나아가 새로운 음악으로의 발전과 확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전까지 로큰롤에 대한 인식은 철없는 어린애들이나 듣는 시시한 유행가라는 인식 정도였다. 게다가 비틀즈가 등장하던 시점은 미국에서 기존 로큰롤 뮤지션들이 이런저런 사건/사고들과 새로운 아이디어의 부재 등으로 인해 활동을 멈춘지 수년째 되던 상태였기 때문에 로큰롤은 한때(50년대 중,후반) 반짝했다가 생명력이 이미 다 해버린 철지난 장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67]. 그러던 중 비틀즈가 등장하여 대대적인 로큰롤 음악 열풍을 일으키며 많은 젊은이들이 다시 로큰롤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별도의 작곡자와 세션맨을 고용하지 않고도 열정과 재능만 있으면 돈 없는 청년들도 도전할 수 있는 음악이라는 인식을 주면서 수많은 로큰롤 밴드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게 됐고, 이런 많은 록밴드들이 생기면서 이후 다채로운 록음악 르네상스가 열리게 된다. 또한 이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밑발판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 어떤 곡도 싱글로 발표되지 않은 Rubber Soul은 대중음악계에서 앨범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 된 최초의 사례로 여겨지며, 싱글 위주였던 기존 록음악계를 앨범 위주의 작품 활동으로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비치보이스, 롤링 스톤즈, 더 후, 킹크스, 버즈 등의 다른 주요 뮤지션들에게도 영향과 자극을 줘서 그 밴드들도 앨범 위주의 명반을 만들기 시작한 계기이자 기폭제가 되었다.
  •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앨범 중 하나인 페퍼상사콘셉트 앨범의 토대를 제시했으며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초로도 평가받는다. 히피 문화와 사이키델릭 록은 이 영향을 받아 1960년대 후반에 정점을 이루었다.
  • 이렇게 창작과 감상을 모두 '앨범' 위주로 바꿔놓으면서 록음악계에서 앨범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강조한 비틀즈는 앨범의 커버아트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앨범 커버도 단순히 껍데기 표지가 아닌 하나의 예술이 되도록 한 것.
  • "I Feel Fine"에서 역사상 최초로 '피드백' 전기기타 연주를 시도하였다.
  • "Norwegian Wood"에서 서양음악 역사상 최초로 인도 악기인 시타르를 도입하였고, 이후 시타르는 다른 락뮤지션들도 널리 사용하게 된다. 후에 "Love You To"에서도 사용되며 라가 록의 탄생에 기여했다. 이런 제3세계 음악 악기의 도입과 퓨전 실험은 이후 많은 록뮤지션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 테이프 역회전을 사용한 사이키델릭한 사운드 실험 기법(백마스킹)을 싱글 "Rain"과 Revolver의 수록곡들에서 록음악 사상 최초로 사용하였다.
  • "Think for Yourself"는 역사상 최초로 퍼즈 베이스(Fuzz Bass)[68]를 사용한 곡 중 하나이다.[69]
  • 1969년 1월의 옥상 공연은 기습적으로 대중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소위 게릴라 콘서트의 시초이다.
  • 최초로 야외 대형 스타디움 경기장에서 록 공연을 한 것도 비틀즈가 시초이다. 이후 다른 밴드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따라하면서 이런 스타디움 라이브 공연이 일반화되었다.
  • 음악과 영상을 결합한 뮤직비디오도 비틀즈가 최초로 시도한 것이다.
  • '오블라디 오블라다'는 서양음악 최초로 레게적인 사운드를 담고 있는 곡이다.
  • 애플레코드를 설립하면서 뮤지션들이 자기들의 독자적인 독립 음악레이블을 설립하는 선구적인 사례가 되었다.
  • 스쿨밴드에서 기존 곡들을 카피하며 연습 -> 정식 록밴드 결성 -> 소규모 클럽에서 공연하며 실력을 기르고, 카피곡에서 점차 자작곡으로 전환 -> 데모 테잎에 곡들을 녹음해서 레코드 레이블에 오디션 -> 데뷰 -> 성공한 뒤 독자적인 레이블 설립. 비틀즈가 밟아온 이런 행로는 고스란히 롤모델화 되어 이후 모든 록밴드들의 전형적인 행로 패턴으로 정착된다.
  • 현악 4중주가 도입된 "Yesterday"는 팝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이 커버된 곡으로 기네스에 등재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곡 중의 하나로도 인정되었다.
  • Abbey Road의 마지막 트랙인 "Her Majesty"는 최초의 히든 트랙이다.
  • 록을 단순한 기존의 로큰롤에서 여러 다양한 분파가 존재하는 상위 음악이 되도록 만드는데 공헌했다. "Helter Skelter"는 헤비 메탈의 시조격인 곡으로 여겨지고 있고, "Everybody's Got Something to Hide Except Me and My Monkey"는 펑크락의 원조격인 곡들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는 게 대표적 예.
  • 이런 이유들 때문에 기존의 '로큰롤'을 '록음악'으로 발전, 확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존재로 평가받는다.[70]

4.4.2 비틀즈에 대한 평가

  • 그들의 등장은 20세기의 가장 큰 문화적 사건 중의 하나였고, 각종 사회적 현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1999년 타임지에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말론 브란도, 찰리 채플린, 파블로 피카소, 밥 딜런 등과 함께 선정되었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비틀즈를 "우리 시대의 슈베르트(the Schuberts of our time)"라고 칭하며 그들의 음악이 슈만의 음악보다 뛰어나다고 했고, 대중 음악을 클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며 대중 음악이 재평가받게 된 것이 비틀즈의 공헌이라고 했다. 로버트 그린필드는 "대중음악계에서 아무도 이보다 더 혁신적이고 창조적일 수 없을 거"라며 그들을 피카소와 비교했다.
  • 음악 평론가 임진모는 비틀즈의 의의을 이렇게 요약했다. - "비틀즈가 '20세기의 문화유산'으로 역사를 두텁게 장식하는 이유는 예술성을 낳은 창조적 무한 열정 때문이다. 그들은 성공 공식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향해 치열하게 달려갔다. 끊임없이 창의적인 음악, 새로운 음악, 대안의 음악을 찾아 아낌없이 실험하고 탐구했다. 비틀즈가 현재 진행형 뮤지션으로 지금도 살아있는 것은 그들의 음악 혁명 때문이다. 자기 혁신을 통해 음악 세상의 혁명을 이룩한 것이다. 비틀즈의 동의어는 음악 혁명이다."
  • 각종 매체의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아티스트' 류의 리스트에서 언제나 1위를 차지한다.
  • '역대 최고의 명반' 리스트들에서도 비틀즈의 앨범들이 가장 많이 포함된다. 평론가들이 선정하든, 여러 뮤지션들에게 설문조사한 결과로 선정하든, 해외 음악팬들의 설문/투표에 의해 선정하든 다 마찬가지다. 그리고 비틀즈는 이렇게 여러 앨범들이 두루 명반으로 꼽히기 때문에 여러 비틀즈 앨범들에게 표가 고루 분산됨에도 불구하고 1위도 비틀즈의 앨범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4.4.3 비틀즈가 가진 각종 기록들

  •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다. EMI에 따르면 2001년까지 10억 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산되었고 '베스트셀링 그룹'으로 기네스에 기록되었다. 영국에서 가장 많은 싱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71]
  • 가장 많은 빌보드 차트 1위 곡을 보유한 아티스트(20곡)[72][73] 등 수많은 타이틀을 갖고 있다.
  • 미국 앨범 판매량 1위 - RIAA 확정치 1억 7800만 장.
  • 가장 많이 커버된 곡 - Yesterday. 1965년 8월 6일 발표된 이후 1986년 1월 1일까지 약 1600가지 버전으로 커버되었다. 2014년 2월 CBS News 보도 자료에 의하면 3천 명 이상의 아티스트가 커버했다 한다.
  • 가장 빨리 팔린 앨범 - 1 앨범이 2000년 11월 13일 발매 이후, 발매 첫 한 달 동안 1350만 장이 팔리며 발매 첫 한 달 가장 빨리 팔린 앨범이 되었다.
  • 최다 빌보드 차트 1위 곡/앨범 - 빌보드 Hot 100에서 총 20곡[74]을 1위에 올렸고 빌보드 200에서는 19개의 앨범이 1위를 차지했다.
  • 최다 UK 차트 1위 앨범 - 15개의 앨범을 1위에 올렸다. 싱글 차트에서는 17곡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두 번째 기록.
  • 한 해 최다 빌보드 1위 - 6개(1964년). 참고로 2위도 비틀즈로 5개(1965년)이다.
  • 빌보드 최장기간 1위 - 총 113 주 (약 2년 2개월)
  • 미국 내 최다 다이아몬드 인증 앨범[75] 보유 - 6장
  • 연속 기록들 - 영국 싱글 차트 연속 1위(11곡)[76][77], 영국 크리스마스 싱글 최다(3년, The Spice Girls와 동률이다, 빌보드 1위 3회 연속[78][79]
  • 동시 기록들 - 빌보드 차트 싱글/앨범 동시 기록(7개, U2와 The Monkees와 동률), 빌보드차트 Hot 100 동시기록(14곡), 빌보드 Hot 100 1,2,3,4,5위 와 앨범 차트 1,2위 동시 차지
+ 1964년 싱글 레코드 중 비틀즈 싱글 판매 비율 : 약 60%
  • 공연 횟수 : 캐번 클럽 (294회), BBC (275회)
  • 가장 성공한 듀오 - 레논-매카트니 항목 참고

4.5 음악적 행보 [80]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큰 역할을 해냈고 조지 해리슨은 비록 초반에는 둘에게 밀리지만 중반 이후 곡의 질에서는 절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최후의 앨범 Abbey Road에서 조지 해리슨의 Something과 Here Comes the Sun을 본 링고 스타는 '이제 비틀즈는 2명의 천재가 아닌 3명의 천재가 이끄는 밴드가 되었다 이제 난 시발 뭐하라고'라며 탄식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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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논은 비틀즈의 영혼이었고, 해리슨은 정신이었다." 마틴은 말했다.[81] "또한 매카트니는 마음이었으며, 링고는 드러머였다.(…)" (원문 기사)

불편한 진실 버스의 역사에 길이남을 전설인가

다만 매트로놈 링고 스타는 좀 안습. Abbey Road, + a 내에서 작곡한 곡은 달랑 2곡에 The Beatles 작업 당시 폴 매카트니보다 드럼 기술에서 밀린다는 평가도 받는 등 이 쟁쟁한 그룹 내에서 가장 이름값이 밀린다.[82] 하지만 특유의 따뜻한 목소리 때문에 Yellow Submarine 등 여러 곡의 보컬로 활약을 했다. 드럼 기술이 폴 매카트니보다 밀린다고 평가받으며 굴욕을 겪었지만 Strawberry fields forever나 Rain등의 곡들에서의 링고의 드러밍은 유니크한 사운드로 꽤나 호평을 받고 있다.

그래도 성격이 좋아 사람들과 잘 지냈다고 한다. 조지 마틴링고의 대인배적 성격이 아니었으면 비틀즈는 1집Please Please Me만 내고 해체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 실제로 비틀즈 해체 후 서로 싸우던 멤버들을 화해하게 한 것도 링고였다. 게다가 링고 스타도 1971년에는 조지 해리슨과 공동으로 작곡한 곡 "It Don't Come Easy"로 빌보드 차트 2위를 했으며, 조지 해리슨과 공동 작곡한 곡 Photograph는 1973년 1위를 했다!!


간지나는 레논-매카트니 콤비

전무후무한 기록들을 세우며 미국을 점령한 비틀즈는 1965년부터 음악적인 변화를 겪는다. "노랫말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했던 존 레논도 밥 딜런의 영향으로 노랫말에 속마음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초기의 비틀즈가 쓴 곡은 대부분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노래였으며 가사 내용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초창기에도 지금까지도 빛을 잃지 않는 명곡들도 많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예술적 업적은 러버 소울(Rubber Soul)부터 본격적으로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버 소울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대중음악 사상 최초로 '싱글'보다 '앨범'에 신경을 써서 만든 앨범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러버 소울은 비틀즈 앨범 중에서는 처음으로 단 한 곡도 싱글로 발매되지 않았으며, 이는 페퍼상사, 매지컬 미스테리 투어, 화이트 앨범에서도 계속 지켜진다. 매지컬 미스테리 투어는 역시 해당항목 참조.

물론 이는 영국에서의 이야기다. 미국에서는 Nowhere Man/What Goes On이 싱글로 발매되어 3위를 차지했다. 미국에서 이 두 곡이 발매된 것은 레이블인 Capitol 때문이다. 비틀즈는 영국에서는 EMI, 미국에서는 EMI의 자회사인 Capitol을 레이블로 삼았는데, Capitol은 비틀즈가 시키지도 않은 곡을 멋대로 싱글로 발매하거나(한두번이 아니다.), 영국에서 발매된 앨범을 따로 떼어내서 얼토당토 않은 유령 앨범을 끼워 파는 등(그러니까 러버 소울리볼버가 있으면 러버 소울에서 몇 곡, 리볼버에서 몇 곡, 거기다 영국에서는 싱글로만 발매된 곡을 포함시키고 하는 식으로 러버 소울과 리볼버 사이에 Yesterday & Today라는 앨범을 만든다든가 하는 식) 만행(...)을 저질렀다. 폭발한 비틀즈와 조지 마틴이 '계속 이따위로 나오면 담부턴 다른 레이블과 계약하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페퍼상사' 앨범부터는 영국반과 동일하게 나온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비틀즈의 앨범은 전부 영국반이다. 단, 매지컬 미스테리 투어는 예외로 미국반이다. 해당항목 참조. 그리고 시키지도 않은 곡을 멋대로 싱글 발매하는 것은 마지막까지 고쳐지지 않아서, 비틀즈가 해체하자마자 1970년 5월에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싱글로 발매해버린다. 비틀즈의 빌보드 차트에서의 마지막 1위 싱글.

'Help!'의 녹음과 영화의 촬영으로 떠난 바하마 여행에서 이들은 처음으로 인도 악기 시타르를 접한다. 이후 조지 해리슨이 특히 인도의 영향을 많이 받고, 나중엔 힌두교로 개종까지 하면서 담배을 끊고 채식주의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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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까지 비틀즈는 물론 음악적으로는 로큰롤 열풍의 최선두이자 중심에 선 로큰롤 밴드였지만, 또 한 편으론 여성들이 울부짖는 인기 스타의 이미지도 공존했었다. 즉 요즘 말로 하면 아이돌 스타적인 면모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영상 자료들을 보면 알겠지만 60년대는 비틀즈 뿐 아니라 다른 록 밴드들의 공연에서도 수많은 여성팬들이 울부짖고 난리인게 흔한 광경이었다.(심지어 롤링 스톤즈도 수많은 여성팬들이 따라 다녔다). 7,80년대 이후로 록계가 마초화돼서 록음악은 남자들의 음악이고 아이돌 음악은 완전히 구분되어 따로 있는 이미지가 생긴 현대 시대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즉 당시 60년대는(특히 60년대 중반경까지는) 그 어떤 인기 록 뮤지션들도 아이돌스타적인 면을 어느 정도씩은 다 가지고 있었다.
데뷔 당시 나이가 평균 20살에 이들이 인기를 얻자 갖가지 화보집, 영화 등도 촬영되었다. 그러나 러버 소울부터 이들은 이런 이미지를 거의 모두 떨쳐버린다. 이 이후부터는 히피문화를 사실상 거의 주도하다시피 하였고, 60년대 반전운동 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미지 변화를 보면 같은 사람이 맞나 의심이 들정도.

1966년도의 마지막 투어 이후부터 비틀즈의 음악은 라이브보단 스튜디오에서의 실험적인 음악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게 된다. 또한 밥 딜런의 영향으로 가사도 멤버들의 가치관이 많이 반영되어 철학적이고 사회비판적으로 변한다. 이러한 변화가 드러난 출발점이 러버 소울(Rubber Soul)이다. 이 앨범에서 조지 해리슨에 의해 인도 음악이 도입되어 퓨전되었으며, 이 러버 소울와 리볼버 시기의 곡들은 사이키델릭 음악의 탄생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리볼버(Revolver)부터는 라이브로 연주가 불가능한 음악을 하기도 했다. 사실 여기에 큰 기술적 공헌을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음향 엔지니어였던 제프 에머릭이다. 리볼버 녹음 당시 19살에 바로 입사한 그는 EMI 스튜디오의 엄격했던 규칙을 전혀 몰랐었고, 그 때문에 비틀즈의 요구를 전적으로 들어주며 일하게 된다. 제프 에머릭은 그 이 후에 나온 비틀즈의 모든 음반에 함께 일했다.
모든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제작한 컨셉 앨범인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는 정점에 다다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68~9년엔 멤버들간의 불화가 잦아졌다. 그들이 세운 음반 회사 '애플'의 재정 악화 등으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기업이 이익을 환원하듯, 못 사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이게 돈을 허공에 뿌리는 수준이라서 오래 가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결국 비틀즈 앨범 중 가장 마지막에 녹음된 Abbey Road의 끝부분에서는 아예 해체를 암시하는 가사를 적기까지 한다. 1970년 4월 멤버들마다 따로 활동하던 비틀즈는 결국 마지막까지 비틀즈를 이어나가려 했던 폴 매카트니의 탈퇴와 함께 해체한다. 당시에는 정말 제각각이었다. 링고 스타는 부모님에게 선물하기 위한 "Sentimental Journey"를 이미 발표했다. 폴 매카트니는 '가족'이란 주제로 자신의 첫 솔로 앨범 "McCartney"를 비틀즈 탈퇴 선언 후 일주일만에 발표한다.[83] 존 레논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심리 치료를 받은 후 "Plastic Ono Band"를 제작했고, 조지 해리슨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보이기 위해 LP 3장짜리 앨범 "All Things Must Pass"를 제작하고 있었다. 뭐야 이거? 뭐긴 뭐야 와해된 팀워크의 온상이지

비틀즈가 오늘날까지도 현대 대중음악의 대부로 평가받는 것은 가창력이나 연주 실력같은 기교적인 면 때문이 아니라, 마르지 않는 창조력과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정신으로 많은 뮤지션들에게 음악적인 영감과 자극을 줬다는 데 있다.



비틀즈가 사용했던 악기 변화를 보면 정말 한 밴드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엄청나게 다양한 시도를 했다. 초기에는 기타, 베이스, 드럼과 가끔 피아노나 하모니카가 쓰이는 정도였지만 중기로 가면 바이올린, 탐부라, 시타르, 리코더, 오르간, 후기로 가면 트럼펫, 개 짖는 소리(...)[84]까지 직접 연주했다. 더구나 원래는 폴이 베이스, 존이 리듬 기타. 조지가 리드 기타, 링고가 드럼이라는 기준이 꽤나 명확했지만 나중에 가면 조지가 베이스를 하기도 하고 존과 폴이 드럼을 치기도 하는 등 구분이 모호해졌다.

4.5.1 레논-매카트니

레논-매카트니 항목 참고.

4.6 기타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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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지 머리로 헤어스타일을 통일했을 때에는 개그의 소재가 되곤 했다. 예를 들어

존 : (대걸래를 흔들며) 폴, 너 어떻게 된거야? 뼈만 남아버렸잖아!
폴 : 그건 대걸레야. 나 여기 있다구!

실제로 바가지 머리를 영어로 하면 Mop(대걸레) Top이다.

본의 아니게 영국 재정에 보탬이 되었다. 당시 영국이 고세율 정책을 취해 수익의 96~97%를 세금으로 냈다고. 이 점을 리볼버 1번 곡인 'Taxman'에서 깠다. 이 덕분에 영국 왕실로부터 훈장을 받기까지 했는데, 당사자나 보는 사람들이나 여간 고깝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받은 이유가 외화를 많이 벌어서였다. 즉 문화 활동(음악) 때문에 준 게 아니란 얘기. 게다가 영국의 높으신 분들은 "망나니같은 대중 음악 가수에게 훈장이 웬 말이냐"라며 반발했다고. 여담이지만 존 레논은 반전 운동 등 사회 활동을 하던 중 이 때 받았던 훈장을 반납했다. 전쟁이나 지원하는 왕실이 준 거라서 싫다고.
아, 물론 비틀즈 해체 후에도 음악 활동을 계속했으니 그런 것이겠지만, 그 3~4%의 수익으로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산다.

의학계에도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MRI를 만든 사람이 비틀즈의 레코딩 회사인 EMI 소속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EMI가 돈이 넘쳐나서 MRI 만드는데에 투자를 했다고 카더라.

시그내처라기보단 대부분 릭켄베커 혹은 에피폰 기타베이스를 애용하였는데 투어 시기에는 존 레논은 릭켄베커의 325모델을, 폴 매카트니는 호프너의 바이올린 베이스를 조지 해리슨은 그래치의 듀오 모델을 링고 스타는 블루 옥토퍼스 색상의 드럼세트를 메인으로 사용했다.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은 1964년 미국 방문 시 릭켄베커사로 부터 선물받은 기타를 사용하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가 공연 때 바이올린 베이스를 애용한 것은 여타 베이스들 보다 무게가 가벼워서 휴대가 간편하고 왼손잡이인 자신에게 있어서 좌우대칭인 바디모양이 연주하기에 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러버 소울 레코딩 시점 부터 존 레논은 에피폰의 카지노 모델을 폴 매카트니는 릭켄베커의 베이스 4001S를 메인으로 사용하였다. 메탈리카의 클리프 버튼이 애용한 것도 같은 모델.

음모론에서는 문화를 통한 대중 통제의 일환으로 조직된 밴드라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음모론 이야기다. 또한 10대 음모론에 꼽힐 정도로 큰 규모의 음모론인 "존 레논 암살 배후설"과 "폴 매카트니 사망설"로, 전자의 경우 존 레논이 무엇 때문에 죽어야 했나가 문제가 되고 있다. 후자의 경우 비틀즈 곡들 사이사이에 흩어진 실마리를 모아 짜맞추면 "폴 매카트니는 1966년 말에 이미 죽었고, 지금 그의 자리는 폴 매카트니 닮은 꼴 찾기 콘테스트에서 우승을 거두었던 윌리엄 캠벨이 대신하고 있는 것 이다."란 개소리말인데, 당연히 뻥이다.... 그럴 듯 할만한 증거도 있긴하지만 속지 말자. 이외에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와 연관이 있다는 둥 요상한 밑밥이 많다. 엘비스도 알고보면 살아있다 카더라

비틀즈 멤버들 주연으로 반지의 제왕이 영화화될 뻔했었다. 존은 골룸, 폴은 프로도, 조지는 간달프, 링고는 역할로 나올 예정이었고 감독은 스탠리 큐브릭으로 정해졌으나, 큐브릭은 반지의 제왕을 읽은 결과 영화화하는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실현되지 못했다. 이 프로젝트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여기로.

비틀즈의 트리뷰트 밴드 중 하나가 내한 공연을 한적도 있다.

영화 아이 엠 샘과 'Across the Universe'는 비틀즈 곡으로 OST 전곡을 채운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Across the Universe'는 작중 등장하는 인물 이름까지 전부 비틀즈 음악 관련으로 해놓아서 비틀즈 들을 설레게 했다.

상당수의 곡이 저작권 관련 문제에 얽혀있기 때문에[85] 2010년 말까지 전세계적으로 합법적인 온라인 다운로드가 매우 어려웠다. 곡들의 저작권은 비틀즈 멤버 4명뿐만 아니라 곳곳의 기업, 개인이 나누어 갖고 있다. 마이클 잭슨도 비틀즈 곡 저작권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오노 요코폴 매카트니는 이 저작권을 되찾기 위해 손잡고 법정투쟁까지 벌였으나 결국 판결은 마이클 잭슨의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2016년 2월 22일 유니버설 뮤직에 따르면 29일 부터 한국 음원사이트에서 비틀즈의 음반을 스트리밍하거나 다운로드 할수 있다고한다!

칼 세이건보이저에 관련해서 밝힌 일화에서는 비틀즈 곡 'Here Comes the Sun'의 저작권을 사러 멤버 4명에게 문의했더니 4명 모두에게 저작권이 없었다고. 물론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법률적 문제를 해결하려니 골치가 아파져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이 저작권료는 현재 엄청나게 비싸진 상태로, 대한민국 최초로 광고 음악에 비틀즈 음악 'I Will'을 사서 쓴 결과 4개월에 4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건 특별히 싸게 준 거라고 한다.

비틀즈의 첫 싱글 Love Me Do는 사정상 링고 스타가 아닌 앤디 화이트라는 사람의 드럼이 들어갔는데, 이 사람이 저작권료를 받지 못하다가 2천년대에 들어서 한꺼번에 몰아서 받았는데, 그 사람이 평생동안 번 돈보다 노래 하나 참여해서 나온 저작권료가 더 많았다고 한다.

이런 무지막지한 저작권료 때문에 위에서 설명한 두 영화에서도 모두 리메이크 곡을 사용했다. 리메이크 곡이 훨씬 싸서 원곡을 넣으면 제작비가 몇 배로 늘어난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비틀즈의 트리뷰트 밴드인 'The Mentles'의 리메이크 곡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오아시스는 비틀즈를 상당히 좋아하는 밴드로 유명하다. 밴드 이름부터가 비틀즈가 공연했던 장소에서 따왔을 정도. 오아시스뿐만 아니라 세계의 어느 밴드가 비틀즈 음악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대한민국에서는 배철수, 조용필, 들국화, 이적 등 수많은 뮤지션들이 비틀즈의 팬이며 비틀즈 음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비틀즈 음악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뮤지션이 있을 수가 있나...?[86]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AL 288-1에게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에서 따온 '루시'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1993년에는 새롭게 발견된 삼엽충 종들에게 비틀즈의 멤버들의 이름을 딴 학명이 지어졌다.

현재 비틀즈 멤버 4명의 이름을 딴 소행성이 소행성대의 궤도를 돌고 있다. 2008년 2월 4일에는 NASA가 "Across the Universe"를 전파 형태로 바꾸어 우주로 쏘아올리기도 했다.

2009년 3월, 리버풀 호프 대학 석사과정에 '비틀즈 학과'가 개설됐다. 또한 리버풀 알버트 독에는 The Beatles Story라는 비틀즈 박물관이 있다. 미친 놈들

몬티 파이톤에서 The Rutles라는 이름으로 비틀즈를 패러디한 개그 소재를 사용 한 적이 있는데 이것을 계기로 실제로 러틀즈라는 밴드를 만들게 되었고 앨범도 여러장 발매했다. 특히 조지 해리슨이 좋아해서 러틀즈의 Roof Top Concert 촬영에 BBC 기자 역할로 까메오 출연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동인게임인 디아볼로의 대모험에 등장하는 스탠드 중 착용시 비틀즈의 음악이 나오는 스탠드는 화이트 앨범, 데스 13, 옐로 템퍼런스, 허밋 퍼플의 4개이다. 참고로 이 스탠드들은 메이드 인 헤븐을 합성하는 데 필요하다. 자세한 건 메이드 인 헤븐 참조.

명탐정 코난 극장판 '칠흑의 추적자'에서도 후반부에 중요한 밑밥의 단서가 되었다. 앨범 커버까지도 저작권료가 비쌌는지 비틀즈 앨범 커버의 등장인물들을 몽땅 소년 탐정단 멤버로 바꿔치기했다. 이 사진은 아가사 히로시 항목에서 볼 수 있다.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서 신문 기사로 짤막하게 언급되는데 이름은 모두 독일식으로 바뀌어있다. 나치가 공연을 허가해주려고 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이름을 개명했다고. 다만 수집 요소에 따르면 앨범에 이스터 에그 형식으로 저항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들어가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방일 공연을 했을 때 당시 국민애니였던 오소마츠 군의 캐릭터 이야미의 셰에에~ 포즈를 했다고 한다! 셰에에!!


비틀즈의 곡을 연주할 수 있는 락밴드(게임) 비틀즈라는 게임이 발매되었다.

영상에 나오는 BGM은 Abbey Road의 Come together라는 곡이다.

BBC 드라마 닥터 후의 11대 닥터는 이들 중 하나가 되고 싶어 했다. 비틀즈에 들어가야 되니까 죽을 수 없다나?

2013년 5월 23일, 링고 스타Ringo 2012 앨범 문서화를 끝으로 비틀즈 모든 멤버들의 솔로 정규 앨범이 문서화되었다. 그에 따라 모든 멤버의 음반 목록 문서가 분리되었다!

4.6.1 비틀즈 관계자들

※ 위에서 조금밖에 언급되지 않은 서트클리프와 베스트, 매니저 엡스타인, 그리고 기타 인물들에 대해선 요약해서 여기에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 비틀즈의 전 멤버
  • 아스트리드 키르헤 - 스튜어트의 애인이자, 비틀즈의 초기 모습을 찍었던 사진가.
  • 피트 베스트 - 비틀즈의 전 드러머.
  • 브라이언 엡스타인 - 1967년까지 비틀즈의 매니저.
  • 오노 요코 - 존 레논의 부인. 일본계 전위예술가. 비틀즈 말기 녹음까지 관연하고 존 레논과 함께 음반까지 발표. 비틀즈 해체의 원흉으로도 일컬어진다. 물론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녀가 비틀즈 해체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 패티 보이드 - 모델. 조지 해리슨의 전 부인. 에릭 클랩튼까지 포함된 3각관계가 유명.
  • 린다 매카트니 - 폴 매카트니의 아내로 비틀즈 해체 이후 매카트니와 함께 윙스의 멤버로 활동하였다.
  • 조지 마틴 - 프로듀서. Let It Be를 제외한 모든 비틀즈 음반을 프로듀스했다.
  • 필 스펙터 - 프로듀서. 'Let It Be'음반에서 오케스트라 위주의 사운드를 만들었지만 폴 매카트니와 마찰이 심했다. 2000년대 들어서 폴 매카트니는 필 스펙터가 덧입힌 사운드를 모두 제거한 'Let It Be...Naked'라는 음반을 발매하였다.
  • 빌리 프레스턴 - Get Back 세션에 키보디스트로 참여하여 '제5의 비틀즈'라고도 불리웠던 키보디스트. 싱글 Get back에서는 공동 아티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이 뮤지션의 대표곡으로 'Outa-Space', ‘Nothing from nothing’등이 있다.
  • 알란 파슨스 - 당대 가장 실험적 시도였던 페퍼 음반의 사운드 엔지니어. 앨범에 표기는 안돼있지만 'White'와 'Abbey Road' 음반에도 참여하였다.이후 핑크플로이드The Dark Side of the Moon에서 또 한번 혁신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내었고, 알란파슨스프로젝트라는 프로젝트 활동을 하였다.
  • 에릭 클랩튼 - 조지 해리슨과 친구였다.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에서 기타를 치기도 하였다.
  • 롤링 스톤즈 - 비틀즈와 함께 60년대 락음악계의 쌍두마차. 언론에 의해 라이벌 관계가 부각됐었고 실제로도 서로 라이벌 의식도 어느 정도는 있었던 걸로 알려졌으나, 사적으론 꽤 친한 사이였다. 롤링스톤즈의 첫 히트곡인 I wanna be your man은 레넌/매카트니가 써 준 곡이고, 그 후로도 서로의 레코딩에 게스트로 우정 참여하기도 했었다.
  • 밥 딜런 - 밥 딜런과 비틀즈는 서로 창조적인 영향을 주고 받은 사이였다. 원래는 어쿠스틱 포크 뮤지션이었던 밥 딜런은 비틀즈의 로큰롤 음악이 가진 활력에 매료되어 기존의 포크에 락을 접목시킨 포크락으로 음악 인생을 전환하게 된다. 비틀즈도 밥 딜런에 자극을 받아 자의식이 강하고 보다 깊이 있는 가사를 쓰기 시작한다. 마리화나도 밥 딜런이 선물로 준걸 계기로 접하게 된다.
  • 브라이언 윌슨 - 비치 보이스 역시 비틀즈와 서로 창조적인 영향을 주고 받은 관계다. 특히 폴 매카트니와 브라이언 윌슨이 그러한 관계였다. 초창기엔 서프음악 전문이었던 비치 보이스는 비틀즈의 러버소울 앨범을 듣고 그 완성도와 예술성에 감명과 자극을 받아 자신들도 단순한 서프음악을 넘어선 그러한 명작을 만들어 보겠다고 작정하고 만든게 바로 명반 Pet Sounds 앨범이다. 이 앨범은 다시 비틀즈에 영향을 줘서, 폴 매카트니가 주도한 앨범인 Sgt. Pepper앨범의 사운드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또한 비치 보이스의 불운의 명작 SMiLE에 관한 사연도 비틀즈와 얽힌 것이 많다.
  • 마하리시 - 비틀즈가 인도 여행을 하면서 만난 인물. 비틀즈는 명상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고 싶어 했지만, 마하리시는 이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The Bealtes앨범의 Sexy Sadie는 마하라시를 까는 곡이다. 여담으로 마하라시는 UV의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요기 다니엘의 스승이기도 했다.

4.6.2 대한민국에서의 비틀즈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팝송' 등의 주제로 설문 조사를 하면 1, 2위에 거의 'Yesterday', 'Let it be'가 위치한다. 기실 많은 사람들이 팝송하면 이 두 곡보다 먼저 떠오르는 곡이 없는지도 모른다...단 유튜브 조회수를 보면 비틀즈 노래들중에서 저 둘이 각각 최다 조회수 2, 3위를 차지한다. 1위는 'Hey Jude'.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있다는 증거이다.
보통 사람들이 아는 비틀즈의 곡은 위의 두 곡 + 'Hey Jude', 'Ob-La-Di Ob-La-Da', 'I Will', 'All You Need Is Love', 'I Want to Hold Your Hand' 정도라서 예전에 KBS '신발장'에 비틀즈 신동(하영웅군)이 나왔을 때 비틀즈 곡이 200곡이 된다고 하자 "그렇게 많아?"라고 하는 여자 가수가 있었다.

한국 케이블 방송사에서 '밴드 오브 브라더스'라는 제목으로 이들을 재현한다는 주제의 방송을 한 적이 있는데, 'Hey Jude'를 부르면서 'Hey Jude ~ 나나나나 ~ 나나나나 나나나나나 ~' 등의 가사만 읊는다든지, 멤버 이름으로 존 매카트니를 댄다든지, 초기 프로필만을 참고해 '폴 매카트니는 구운 돼지고기를 좋아했다고 한다'는 내용을 방송했다든지(폴 매카트니는 현재 채식주의자이다.), 전혀 사전 조사를 하지 않은 듯한 내용만을 내보내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신성모독

한마디로, 비틀즈라는 이름과 대표적인 히트곡 몇 곡 정도는 유명하지만 정작 비틀즈 음악의 핵심인 정규앨범들을 알고 찾아 들을 정도의 진짜 팬은 별로 없는 실정이다.

디시인사이드에서는 왜인지 남자 연예인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래도 남자 연예인은 거시적 관점에서는 맞으니까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음악으로 분류된 건 잘못된 것 같다.비틀즈는 영국 밴드이다. 비틀즈 갤러리에서도 가끔씩 나오는 불평이다.

비틀즈 멤버 중에서 공식적인 내한공연을 한 멤버는 아무도 없었으나, 2014년 5월 28일 폴 매카트니의 내한이 결정되면서 처음(이자 사실상 마지막)으로 비틀즈 멤버가 내한을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건강문제로 2014년 내한공연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2015년, 다시 내한 소식이 들려왔고 내한공연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자세한건 폴 매카트니/내한 항목 참조.

비틀즈 곡의 무지막지한 저작권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아이튠즈를 빼고는 음원 스트리밍&다운로드 서비스가 불가능했다. 2015년 크리스마스부터 iTunes, Spotify를 비롯한 여러 음원 사이트에서 비틀즈의 음반을 스트리밍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어떤 서비스도 지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먼나라 이야기인줄만 알았다....였는데 하지만 2016년 2월 29일부터 한국의 주요 음원 사이트에서 비틀즈의 17개의 앨범을 서비스 시작한다고 한다. 포함되는 음반은 정규 음반 13개를 포함하고 1, 1962-1966, 1967-1970, Past Masters 이렇게 17개의 음반이라 한다. 비틀즈 커뮤니티는 당연히 흥분모드에 들어갔고, 이로 인해 많은 젊은층에게 비틀즈를 홍보할 수 있을것으로 예상된다. 단, 음원 서비스가 풀리면서 유튜브에 있던 비틀즈 노래들과 라이브 영상들 대부분이 유니버설 뮤직의 요청으로 삭제되는 큰 단점도 생겼다.

2016년 5월 4일에는 A Hard Day's Night가 정식으로 개봉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상영관이 8개 밖에 없다는 슬픈 사실....

2016년 11월 5일에 링고 스타가 내한공연을 할 예정이다.

4.6.3 기타 관련 항목

  1. 2004년 롤링스톤지와 2010년 VH1 방송에 나온 리스트에서도 예외 없이 1위를 차지했다.
  2. 버디 홀리의 "That'll Be the Day"의 커버 버전과 함께, 그들이 최초로 녹음한 곡으로 알려져 있다. 작곡은 (비틀즈 유일의) McCartney-Harrison.
  3. 쿼리'맨'이 아니라 '멘'인 이유는 영문 표기가 Quarry'man'이 아니라 Quarry'men'이기 때문이다.
  4. 나중에 쿼리멘 멤버였지만 비틀즈에는 들어가지 못했던 사람들이 쿼리멘이란 이름으로 재결성해서 투어를 다니고 있다.
  5. 정확히는 존 레논이 쿼리멘의 리더를 맡고 있었는데 폴 매카트니가 합류했고, 공동 리더 체제가 되었다가 폴의 추천으로 조지 해리슨이 합류하게 되었다.
  6. 당시에는 그룹 이름 앞에 꼭 리더 이름이 나와 존의 이름을 단 것이다.
  7. 귀뚜라미와 스포츠 크리켓의 중의적인 의미가 있어서 그도 이렇게 중의적인 의미가 있는 밴드이름을 짓고자 했던것. 그런데 훗날 존 레논이 The crickets 멤버들을 만났을때 정작 이들은 크리켓이라는 스포츠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8. 소설 '보물섬'에 나오는 악당 "키다리 존 실버(Long John Silver)"에 착안한 듯 하다.
  9. 일설에 의하면 노예계약 수준이었다는 말도 있다. 아래에서 보듯이 당시 계약 상대가 카이저 켈러 클럽이었고, 그 대우가...
  10. 그 이유에 대해서는 신현준의 저서 Imagine에서 잘 나와 있다.
  11. 1997년 1월 16일에 만들어졌다. 캐번 클럽은 캐번 퍼브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고 그나마도 과거의 위치가 아닌 원래있던 자리의 옆에 재현되어 있다. 캐번 클럽에서는 매주 목요일 현지가수의 비틀즈 커버 공연이 진행된다. 팬이라면 필견. 가끔 무료로 커버밴드들의 CD를 얻을수도 있다. 공연시 입장료는 1파운드.
  12. 현존하는 유일한 캐번 클럽에서의 공연 영상.
  13. 비틀즈가 처음 함부르크에 갔을 당시 앨런 윌리엄스가 만든 데모 음반이 있긴 했지만, 그 음반은 5장만 제작되었고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사라졌다.
  14. 비틀즈는 독일에서 성기를 뜻하는 피들스와 비슷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15. 일설에 의하면 레코드 가게 주인인데다가 각종 음악 잡지들을 다꿰고 있던 그가 비틀즈를 몰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오히려 비틀즈를 만나기도 전에 아주 잘 알고있었다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16. 컬럼비아, 파이, 필립스, 오리올 등등.
  17. 엡스타인은 비틀즈가 수 차례 클럽들을 다니며 공연을 했다는 걸 숨겼고, 이 15곡들 사이에 레논과 매카트니가 공동 작업한 3곡(Like Dreamers Do, Hello Little Girl, Love of the Loved. 이 중 Love of the Loved는 미발표곡이다)을 몰래 끼워넣었다.
  18. 이 판정에 대해선 비틀즈가 당시는 아직 미숙했거나, 미한이 '기타 그룹'이라고 칭하며 무례했다는 등 논란이 많다. 누가 비틀즈를 탈락시켰나에 대해선 데카의 A&R 담당자였던 딕 로(Dick Rowe), 프로듀서 마이크 스미스(Mike Smith), 토니 미한 셋 중 한 명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19.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10000장을 사재기 해서 17위에 오른것이라는 루머가 있었다.
  20. "Please Please Me"의 녹음을 마쳤을 때 마틴은 "방금 자네들의 첫 1위 곡이 만들어졌다"고 하며 축하했다.
  21. 레코드 리테일러에서만 2위를 했을 뿐, 나머지 차트에서 전부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그 후 레코드 리테일러가 영국의 공식 싱글 차트가 되면서 이 곡의 기록은 2위로 남게 되었다.
  22. 이 영상의 일부는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사용되었다.
  23. 물론 이 기록은 시간이 흐르며 계속 경신되었다. 참고로 미국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로 기네스 기록을 갖고 있는, 1983년 2월 28일에 방영된 M*A*S*H의 마지막회는 대략 1억 2500만 명의 시청자를 불러모았다.
  24. 덴버 공연 때 비틀즈가 묵었던 호텔 객실의 침대 시트를 한 업체가 3인치 크기로 잘라 한 조각에 10달러로 판매하여 돈을 벌었다.(...) 영상도 있다.
  25. 이 또한 전무후무한 기록. 그 뒤를 이어 자신의 곡 둘이 연달아 1위를 차지한 것조차 엘비스 프레슬리가 유일하다.("Don't Be Cruel"과 "Love Me Tender".)
  26. 밥 딜런은 'I Want to Hold Your Hands'의 가사 중 'I can't hide' 부분을 'I get high(속어로 마약해서 기분이 들뜨다)'로 잘못들어 비틀즈가 마리화나를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고 하더니
  27. 조지 해리슨이 폐암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사진은 그의 죽음을 예언하는 것일지 모른다.
  28. 참고로 저 시대에는 아무데서나 담배 필수 있었던 시대였다. 이런 공식적인 사진을 찍을때도 가능했었음.
  29. 이 기록은 1973년에 레드 제플린이 경신
  30.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과 동명의 노르웨이 락 페스티벌은 이름을 여기서 따온 것이다.
  31. Capitol이 발매한 미국 정규 앨범. 수록곡이 완전히 엉망이다. Help!의 남은 두 곡인 "Yesterday"와 "Act Naturally", Rubber Soul의 나머지 트랙, 그리고 영국에선 아직 발매도 안하고 8월 발매되는 Revolver에나 실리는 "I'm Only Sleeping", "Doctor Robert", "And Your Bird Can Sing"이 뒤섞여 있다. Capitol 발매 앨범이 얼마나 막장인지 보여주는 앨범.
  32. 기괴하기 이를 데 없는 일명 '도살자 커버(butcher cover) 혐짤주의'
  33. Capitol이 영국 버전의 앨범을 갈기갈기 찢어서 거의 두 배나 많은 미국 버전을 발매하여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34. 레논은 "필리핀에 다시 가게 된다면 수소 폭탄을 갖고 갈 것"이라고 했다.
  35. 상업적인 공연으로서는 마지막. 몇 년 후에 루프탑 콘서트를 한 회 하였다.
  36. 반 년 가까이 음반이 발표되지 않자 엡스타인이 신곡을 요청했고 마틴이 이 두 곡을 추천한 것. 훗날 마틴은 "비틀즈의 최고의 싱글"로 평가하면서도 이를 두고 "끔찍한 실수"라고 했는데, 싱글로 발표한 곡은 앨범에 수록하지 않는 비틀즈의 원칙에 따라 이 명곡들이 Sgt. Pepper에서 제외되었기 때문.
  37. 레논은 "우리는 음악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두려웠다"고 했다.
  38. 사실상 그들의 유일한 실패작. 음악으로는 실패한 적이 없다는 것이 함정
  39. school of whales라고 했다가 "너무 큰거 아니야?"라고 해서 "university then." 한다든지, Saturday와 Sitar의 발음의 유사성을 이용한 개그를 친다든지..
  40.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장면과 같은 부분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41. 전자는 매카트니, 레논, 해리슨이 모두 드럼을 쳤다.
  42. 이러한 점들 때문에 이 LP를 그들의 정규 앨범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43.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비틀즈와 달리 매니저인 자신은 알려지지도 않았고 비틀즈가 자신을 팽개칠까봐 걱정했다고 한다. 결국 술과 약물로 찌들어간 끝에 겨우 33살로 급사했다.
  44. How I Won the War라는 반전영화 후반에 단역으로 출연하였다. 이 영화에서 금태안경을 낀 후기 존 레논의 전형적 모습이 처음 나타났다.
  45. Let It Be의 원형
  46. 싱글 앨범 "Get Back"의 아티스트가 'The Beatles with Billy Preston'으로 기록됨.
  47. 3월 12일에 결혼함.
  48. 시나트라의 1971년 라이브 영상. 이전에 "레논-매카트니(...)가 만든, 지난 50년 간 최고의 러브 송"이라고 잘못 소개했던 것이 유명한(?)데 그 후로는 영상에서처럼 "조지 해리슨"으로 고쳐 말했다.
  49. 역대 최다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기록.
  50. Come Together와 Something을 별개의 곡으로 보는 관점에 따른다면 21곡 단, 이는 비틀즈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51. "친구들, 음악적으로 자네들은 오디션을 통과했네. 허나 스스로 오버프로듀싱을 피하거나 가장 악명 높은 오버프로듀서에게 "get-back"의 운명을 던지지 않을 수 있는 판단력이 있는가에 대해서라면 아니야."
  52. 이 곡을 시작으로 영국 그룹들의 빌보드 '정복'이 시작되었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대표곡이다.
  53. 물론 이 곡의 원래 발매년도는 1962년이며, 미국에서 1위를 한 버전은 1962년 싱글 버전이 아닌 1963년 발표된 Please Please Me 앨범 버전이다.
  54. Something이 빌보드 넘버 1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원래는 위의 Come Together과 같이 AB 싱글로 발매되었었고 빌보드가 원래는 A싱글곡과 B싱글곡을 따로 차트를 매겼었다. 그런데 어느날 AB 통합 차트로 바뀌면서 문제가 생긴 것. 현재는 둘 다 1위로 보는게 일반적이다만 반론의 여지가 남아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55. For You Blue와 같이 더블 A 싱글로 발매되었으나 보통은 이 곡만 1위로 친다.
  56. 싱글 발매일이 1976년이라는 것이지 곡 자체는 1966년 Revolver를 통해 발매된, 당시로서는 10년이 된 노래다.
  57. 토니 셰리든과 함께 한 싱글로 19위에 올랐다.
  58. 영국에서는 1위까지 오른 노래다!
  59. 이 싱글을 발매하고 며칠 뒤에 존 레논이 암살당했다(...) 사실 1위에 오른 것도 존 레논 사후의 일이라 존 레논은 생전에 이 곡이 1위하는 것을 못 보고 죽었다.
  60. 70년대 3위는 9개의 싱글을 27주동안 1위에 랭크시킨 비지스이다.
  61. 스티비 원더와의 듀엣곡. 인종차별 관련 노래이다.
  62. 마이클 잭슨과의 듀엣곡.
  63. 더블 A 싱글
  64. 사실 신해철이 처음했던 말은 아니라 신해철의 지인이 말했던걸 본인의 라디오에서 대신 언급한것. 세월이 얼마나 흐르던 처음듣는 대중들을 팬으로 만드는, 그만큼 그들의 히트곡들이 첨단적이었다는걸 알수있다.
  65. Ob-la-di Ob-la-da에서 레게비트를 영,미 대중음악 최초로 사용했다
  66. 당시의 비평가들은 화이트앨범의 정신없을 정도로 워낙 다채로운 사운드 때문에 비틀즈의 전작들에 비해 앨범의 전체적인 통일성이 없다며 까기도 했지만, 현대로 올수록 페퍼상사 등과는 정반대 의미에서의 명반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즉 페퍼상사가 앨범 통일성의 미학을 본격적으로 제시한 명반이라면, 화이트앨범은 비틀즈 자신이 이루어냈던 '통일성'을 스스로 부숴버리며 정반대의 카오틱하고 다채로운 앨범의 매력을 보여준 명반이라는 것.
  67. 오죽했으면 비틀즈가 데카 레코드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퇴짜를 주며 한 말이 '(일렉)기타는 이제 한물 간 악기이다'이었을 정도. 지금 들으면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68. bass overdrive나 bass distortion이라고도 부름
  69. 정확히 말하면 제일 처음은 마티 로빈스의 Don't Worry란 곡의 세션에서 앰프 고장으로 우연히 디스토션된 베이스음이 그대로 녹음된게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그 뒤에 비틀즈의 러버소울 앨범에 수록된 "Think for Yourself"에서 폴 매카트니가 최초로 의도적인 퍼즈 베이스를 일관되게 연주함으로써 퍼즈 베이스 연주 기법이 확립되고 이를 계기로 다른 뮤지션들에게도 이 연주기법이 널리 알려지게 되어 이후 롤링 스톤즈, 더 후, 제퍼슨 에어플레인, 슬라이 앤 더 패밀리스톤, 바닐라 퍼지 등의 밴드들도 여러 곡에서 퍼즈 베이스를 도입하게 된다.
  70. 물론 비틀즈는 애벌리 브라더스, 척 베리, 리틀 리차드, 엘비스 프레슬리, 버디 홀리 등 선배 로큰롤 아티스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비틀즈 자신들도 인터뷰 등을 통해 이들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과 고마움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청출어람의 표본.
  71. 정규앨범 판매량은 부진했던 편이다
  72. 6년 동안 20곡을 1위에 올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괴물같은 기록. 영국에서는 17곡으로 21곡의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2위.
  73.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시절을 포함하여 그가 작곡하거나 공동 작곡한 32곡을 빌보드 정상에 올려 역사상 가장 많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한 사람이 되었다.
  74. 디스코그라피 항목에서도 언급했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다. Something이나 For You Blue 같은 곡
  75. 나라마다 기준이 다른데, 미국에서는 1천만 장 이상 판매 앨범을 말한다.
  76. From Me To You ~ Yellow Submarine
  77. 11곡 사이에 다른 가수들의 곡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싱글로 낸 곡들이 전부 1위를 했다는 뜻이다
  78. I Want To Hold Your Hand, She Loves You, Can't Buy Me Love
  79. 64년 4월에 있던 일로, 자기들끼리 1위를 갈아치웠었다.
  80. 본문의 다른 부분에도 이미 나오는 내용들과 중복되는 부분도 많아서 전체적인 내용 정리 필요. 역사 항목에서 이미 다 언급된 내용들을 다시 반복할 뿐인 이 항목이 굳이 필요한지도 의문.
  81. 기사 원문을 보면 이 말을 한 사람은 무명 기타리스트인 래리 마틴 (Larry Martin)이라고 한다.
  82. 뒤에 일본에 가서 사과 광고에 나오기도 했다. 일본어로 사과가 링고인지라 그의 이름은 제대로 맞는 이미지였다.
  83. 때문에 자신의 솔로음반의 홍보에 비틀즈 탈퇴를 이용했다는 비판을 들었지만 첫 솔로 앨범은 들어보면 알 수 있듯이 상업적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가족으로의 회귀를 통해 정신적 안정을 얻으려는 폴의 시도였다. 이는 존의 Plastic Ono Band와 유사한 케이스.
  84. Yellow Submarine 앨범의 Hey Bulldog에서 폴의 개소리를 들을 수 있다.
  85. 한 예로, 비틀즈의 흩어진 저작권 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 소니뮤직은 비틀즈와 메탈리카를 카피/패러디 한 밴드인 비탈리카가 데뷔앨범을 발매할 즈음에 거액의 저작권 소송을 걸기도 했다. 다행이도 메탈리카가 나서 이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하긴 했지만 비탈리카 같은 사례가 반복될 것이라는 건 뻔한 사실이다.
  86. 굳이 비틀즈의 영향을 받지 않은 유명 뮤지션을 꼽자면 밴드 섹스 피스톨즈가 있겠다. 밴드의 멤버였던 글랜 매틀록이 비틀즈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잘렸다는 말까지 있을정도.. 그들은 비틀즈뿐만 아니라 주류 음악 자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