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매싱 펌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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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부터 빌리 코건(Vo,G), 지미 챔벌린(Drum), 제임스 이하(Guitar), 다아시 렛츠키(B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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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shing Pumpkins


1 개요

너바나가 담배피던잘나가던 시절에 같이 활동하였고 한때는 그런지 4대천왕과는 다른 사파 밴드로 취급받았으나 워낙 멜로디가 좋은 명곡들을 많이 내놓아 현재까지도 메이저 라인에서 살아남은 시카고 출신 얼터너티브 락 밴드. 한국 팬들의 애칭은 호박들. 참고로 한국 팬이 상당히 많다.


2 커리어

2.1 1989년~2000년

1988년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던 빌리 코건제임스 이하를 만나 의기투합하고 곧 다아시를 만나 3인조로 시카고의 나이트 클럽 아발론에서 첫 공연을 가진다. 이 후 밴드가 공연을 자주 하던 시카고에 위치한 클럽 메트로 사장의 추천으로 드러머 지미 챔벌린을 맞아들인다.

1990년 서브팝을 통해 발표한 그들의 데뷔 싱글인 과 후속 싱글 <Tristessa>가 순식간에 품절되자 이에 자신감은 얻은 스매싱 펌킨스는 메이저 진출을 시도한다. 버진레코드와 계약에 성공한 이들은 Caroline 레이블에서 1991년 5월 대망의 1집 <Gish>를 발매하게 된다. 프로듀서 Butch Vig(부치 빅)의 Smart Studios에서 녹음된 이 앨범은 몽롱한 디스토션이 걸린 단순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기타리프가 돋보이는 밴드 극초기의 곡들인 'Siva'와 'Bury Me', 프로그레시브 록을 연상시키는 역동적인 구조와 시적인 가사가 돋보이는 'Rhinoceros', 'Snail' 등 몽환적인 얼터사운드와 하드록과 어쿠스틱 사운드를 적절히 배합시킨 곡들을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1집 <Gish>가 발매된 직후 이들은 18개월이라는 긴 스케줄로 된 <Gish> 월드 투어에 나섰고 9월에는 영국 Camden Underworld를 통해 유럽에 데뷔했다. 밴드는 수준급의 라이브를 통하여 나름대로 명성을 얻었지만 빽빽한 일정으로 멤버들은 지쳐버렸고[1] 비슷한 시기, 펑크적인 얼터사운드를 선보여 록씬을 평정한 너바나Nevermind에 밀려 1집인 Gish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미진한 판매를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투어 막바지에 약혼녀인 코트니 러브커트 코베인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자[2] 빌리 코건은 우울증에 걸린채로 은둔하고 만다.

자살 시도가 실패하고 크리스 퍼비언과 결혼한 후 빌리 코건은, '자신과 밴드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후세 사람들이 기억할만한 명반 하나는 남겨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 기타를 잡고 작곡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레코드 임원들은 스매싱 펌킨스 1집의 판매량에 못마땅해하며 계약을 파기하려고 했고 결국 그는 임원들 앞에서 혼자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앨범에 수록될 주요 곡들을 연주해서 평가를 받는 상황을 겪게 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렇게 굴욕적인 행동까지 해야 한다면 차라리 밴드를 해체하고 다른 직업을 가져보자고 생각한 코건은 일부러 연주를 대충 했는데 임원들은 그것을 듣고 그런지의 과격함이 묻어나오는 것 같다며 앨범 제작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2집 앨범의 제작이 성사되자 빌리 코건은 본격적으로 앨범 녹음을 시작하나 드러머인 지미 챔발린은 투어 중 접한 헤로인에 중독되어 스튜디오에 잘 나오지 않았고 투어 중 파경을 맞이한 제임스와 다이시는 같이 스튜디오에 있는 것도 거부할 정도로 사이가 악화된 상태였다. 그러자 빌리 코건은 1집의 프로듀서 부치 빅의 도움을 받으며 지미 챔벌린에 의해 미리 녹음된 드럼파트를 제외한 모든 악기를 혼자서 다 연주하는 엄친아적인 행동을 하여 앨범을 완성시킨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1993년 7월 27일 마침내 2집 Siamese Dream이 발매되었고 앨범은 첫 싱글 Today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한 퍼즈 톤의 기타 멜로디와 아이스크림 트럭을 타고 황무지를 떠도는 뮤비로 전미에 유명세를 타며 4백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앨범이 성공하자 멤버들은 다시 밴드에 재가입했고 밴드는 본격적으로 2집 투어를 시작하게 된다.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빌리 코건은 '다음 앨범을 마지막으로 밴드가 해체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완벽한 앨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서 일생일대의 프로젝트에 몰두하게 되는데, 바로 1995년 발매한 2CD 앨범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였다.

빌리 코건은 사실상 자신의 솔로 앨범이었던 전작들과 달리, 밴드 구성원들이 다함께 협력하는 온전한 밴드 앨범을 만들고 싶어했다. 우선 밴드의 라이브 사운드를 앨범에 담고 싶어한 빌리 코건은 그전까지 스매싱 펌킨스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은 부치 빅 대신에 나인 인치 네일스와의 작업으로 유명한 플러드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명반 Loveless 앨범의 앤지니어를 맡은 알란 모울더(Alan Moulder) 라는 2명의 프로듀서를 고용하였다. 기타 솔로는 코건과 이하가 반반 나누어서 연주했으며 베이시스트 다이시가 앨범 대부분의 곡에 코러스를 맡았다. 각 CD의 마지막 두 곡은 제임스 이하가 작곡 했으며 그 중 Farewell and Goodnight은 밴드 멤버 전체가 파트를 나눠 불렀다. 하지만 빌리 코건의 워커홀릭 기질로 인해 밴드 멤버들은 하루에 15시간 레코딩이라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고 결국 앨범 작업 중 멤버들간의 불화가 다시 심화되었다.

이러한 힘겨운 여정을 끝내고 1995년 10월 24일,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가 더블 앨범의 구성으로 발매되었다. 해당 앨범은 다채로운 스타일, 아름다운 멜로디, 사춘기적 지성미라 말할 수 있을 잔혹하고도 서정적인 가사 등으로 2집 Siamese Dream와 더불어 펌킨스가 발표한 앨범중 가장 뛰어난 앨범으로 손꼽힌다. 다만 어떤 이들은 '지나치게 장황하다'라며 싫어하기도 한다. 더블 앨범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에서 900만장을 팔아치우며[3] 빌보드 그해의 얼터너티브 락 부문을 수상하였다. 이렇게 스매싱 펌킨스는 너바나가 사라지고 춘추전국 시대로 접어들었던 당시의 락계에서 본좌로 등극하나 싶었지만 이 시기 밴드의 상황은 엉망진창이었다. 3집 투어 도중 헤로인 과용으로 키보디스트 멜보인이 죽고, 곁에 있던 드러머 지미 챔버린이 마약소지혐의로 체포되면서 투어가 중간에 종료되었고 투어가 중단되자 3집 앨범에서 자신의 곡이 대거 빠진 것에 대한 서운함을 갖고 있었던 제임스 이하는 스매싱 펌킨스의 새 앨범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자신의 솔로 1집 앨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다이시는 3집의 지나친 투어일정에 지친 나머지 우울증에 걸린 채로 코카인에 중독된 상태였고[4] 코건 역시 결혼 생활의 파탄과 친어머니 마시의 죽음으로 인해 우울증이 재발한 상태였다.

1996년 8월 27일 중지되었던 투어는 드럼에 맷 워커(ex-Filter), 키보드에 데니스 플레밍(the Frogs)을 보강하여 라스베가스에서 다시 시작되었고 지미 챔벌린이 재활치료를 받고 밴드에 복귀할 때 까지 드러머를 공석으로 남겨놓고 싶다는 빌리 코건의 주장에 의해 결국 밴드는 투어가 종료된지 18개월 후, 지미 챔버린이 빠진 라인업으로 새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추억돋는 펌킨스의 가장 성공한 싱글 '1979'.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의 두번째 싱글로 나왔다.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의 또다른 명곡 'Jellybelly' X세대 특유의 절망감이 잘 녹아있는 까칠한 곡이다.

1997년에는 잠시 배트맨과 로빈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하여 The End is The Beginning is The End라는 또다른 걸출한 곡[5]을 내놓고 1998년에 드럼을 전자 드럼으로 대체하고 사운드를 갈아엎은 4집 Adore를 발매했다. 물론 드러머가 빠진 언밸런스한 라인업에다가 앨범 발표 전 참여한 사운드트랙의 일렉트로니카 성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곡들에서 어느정도 예견되긴 했지만 <Adore>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앨범에는 디스토션으로 무장한 기타리프는 간데없이 어쿠스틱한 피아노 반주에 시니컬하고 조용조용해진 빌리의 목소리가 담겨있었고 전반적으로 테크노 느낌이 강했다. 덕분에 기존 사운드를 바란 팬들의 외면속에 차트에서도 고전을 면치못했고 평론가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6] 그러나 이 앨범은 현재 훗날 빌리 코건이라는 한 사람의 개인적인 모습이 가장 많이 담긴 앨범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이후 지미 챔벌린을 다시 끌여들여서 2000년 2월, 그들의 통상 5번째 앨범 Machina: the machines of god을 발표하였다. 앨범은 전작 <Adore>의 연장선상인 변형된 테크노 사운드와 두터워진 퍼즈톤의 사이키한 분위기, 중세풍의 컨셉으로 엮인 가사, 독일의 표현주의에 입각한 뮤직비디오로 중무장하였지만 팬들의 관심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2000년 7월 4일 열린 서울 공연을 마지막으로 밴드는 해체를 선언한다. 다아시는 1999년까지 공연에 나오다 이유를 밝히지 않고 도중에 팀을 떠나[7] 활동을 완전히 접었고[8], 제임스 이하는 자신의 솔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해체 직전에 음반사 엿먹으라는 파격 행보로 머시나 파트 2 앨범을 인터넷으로 전곡 발표하였다. 라디오헤드의 센세이션보다 7년을 앞서는 모험을 한 셈. 하지만 묻힌걸 보면 인생은 타이밍 몇몇 곡은 그해의 머시나 투어 도중에 연주한 적이 있는데 아마 이 앨범과 머시나 파트 1 앨범에서 쓸만한 곡들만 모아서 정식 발매했어도 유종의 미를 장식했다는 평가를 충분히 받을 수 있었을지도... 록음악의 죽음을 예견한건지 빌리 코건은 밴드가 해체되기 직전, '앞으로는 그룹사운드 없이 음악을 해볼 생각을 갖고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들의 음악은 3집까지 초기 사이키델릭에서 드림팝, 그런지, 로우 파이 등등이 뭉뚱그려진 얼터너티브 락 노선을 유지하다 4집은 삽시간에 미디움 템포의 일렉트로니카로 바뀌었다.[9] 5집은 뭔가 복합적인 인더스트리얼 사운드와 머시나라는 뭔가 크툴루 신화스러운 컨셉을 시도하였는데 건조한 사운드가 기존의 감성을 기대하던 팬들에게 잘 먹히지 않았고 150만장이라는 상대적으로 부진한 판매고를 보였다.


2.2 2007년~현재

이후 몇 년간 빌리와 제임스는 각각 솔로 활동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제임스가 성실하게 소소한 결과물을 쌓아나갔다면 빌리는 자신의 컨셉에만 신경을쓰며 부진하였다. 상대적인 만족도 차이인지 2005년 중순부터 빌리 코건은 솔로 앨범 프로모션에서, 일간지 광고에서 재결성 의지를 계속 밝혀오다 2007년 재결성을 선언하고 새로운 멤버들로 나머지 자리를 채운다. 이 재결성에 팬들은 환호하였고 새로 내놓은 앨범 Zeitgeist는 트랜스포머에 수록곡 'Doomsday Clock' 한곡을 수록하였지만 [10] 사람들의 관심을 얻지 못하고 공연장에서 옛날 곡들은 관객들이 신나게 따라불러도 신곡은 다들 멀뚱멀뚱 그게 뭐임 먹는거임?

2009년 지미 챔벌린마저도 '스매싱 펌킨즈는 내 음악 미래가 아닌게벼'라는 코멘트를 남기고 밴드를 떠났다. 이제 초기 멤버 중 남은 건 빌리 코건 밖에 없다. 빌리 코건 너님 좀 짱인듯.

2010년 8월 14일 10년만에 다시 한번 내한 공연을 하였다. 하지만...오리지널멤버가 아닌 2기멤버로 방한해 아쉬운 면이 없지않아 있다.

2011년 9월 1일에 새 앨범 'Oceania'를 공개한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웹상에서 공개되고 있는 'Teargardens by Kaleidescope'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발매되는 앨범이며, 빌리 코건은 'Oceania'를 "앨범 속 앨범" 이라고 밝혔다. 즉, 총 44곡이 순차적으로 공개된 후에야 완성되는 'Teargardens by Kaleidescope' 라는 프로젝트의 한 부분으로써의 앨범이라는 말.
타로 카드를 모티브로 기획되었다는 이 프로젝트라는데, 새 앨범도 앨범이지만 정말 44곡을 하나로 묶어 거대한 컨셉트 앨범을 만들어낼지 궁금해진다. 더 궁금한 사람들은 밴드의 오피셜 사이트을 한번 체크해보자. 공개된 곡들의 무료 다운로드도 가능하다!
덧붙여 카림 압둘 자바가 나오는 Oceania 앨범 광고 영상이 꽤 위트있다. 혈액암으로 투병중인 몸이라 그런지 꽤 수척해 보인다. 나이도 있고... [#] 진짜로 호박 파괴

2012년에 나온 Oceania는 예전의 스매싱 펌킨스와는 이질적이만 그래도 망작 소리까지 듣던 전작보다는 상당히 후한 평가를 받으면서 2기가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주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2014년 중반기에 들어 2기 멤버 중 2명이 탈퇴하면서 밴드의 미래가 불투명해져 버렸다. 2014년 12월에 발매된 앨범 Monuments to an Elegy는 빌리 코건과 제프 슈뢰더 둘이서 작업하여 완성되다시피 했고, 이후 2015년 초 발매가 예정되어 있었던 Teargarden by Kaleidyscope Project 시리즈의 마지막이 될 Day for Night의 발매도 계속 미뤄지고 있는 상황. 2015년 여름, 스매싱 펌킨스와 마릴린 맨슨의 합동 투어에서 지미 챔벌린이 등장하여 스매싱 펌킨스로의 복귀 사실을 알렸다.

My Love Is Winter가 시카고를 배경으로 하는 비디오 게임 와치독스의 오디오 목록에 수록되었다.

2016년 빌리 코건이 원년 멤버+제프 슈뢰더로 재결성을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오고 있다. 실제로 [2016년 원년 멤버+제프 슈뢰더 구성으로 깜짝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전에 비해 원년 멤버들 사이가 많이 좋아진건 사실이지만 재결성 확정은 아니라고.

3 음악적 평가

이런 약력을 보듯 빌리 코건은 독재자 기질이 있다. 또한 다른 멤버들하고 싸워 떠나면 인터뷰에서 그 멤버 까는 등 뒤끝이 별로 좋지 못하다. (즈완 때 대판 싸우고 헤어진 것은 꽤 유명하다.) 어느 정도였나면 재결성 당시 코건에게 엄청 쌓인게 많았던 이하는 합류를 권유하는 코건에게 저쪽가서 혼자놀아 새키야 스킬을 발동시켜 코건을 버로우시켜버렸다. 지금도 일부러 관객 자격으로 펌킨스 공연장 가서 쌀쌀맞게 군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안 좋은듯.

자신들을 그런지 밴드라 불리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실제로 음악적인 성격도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등 70년대 슈퍼 밴드들에게 영향을 받은 프로그레시브 록에 가깝다. 평자들이 한때 이들을 추켜세운 것도 그런지 운동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

흔히 너버나는 펑크의 얼터너티브였으며, 스매상 펌킨스는 사이키델릭의 얼터너티브였다고 사람들은 얘기한다. 일렉트릭 기타의 노이즈와 트래몰로 주법을 사용하여 몽환적인 사운드를 형성한 것은 지미 헨드릭스와 초기 지미 페이지의 영향을 엄청나게 받은 사이키델릭 블루스의 모습이며, 얼터너티브 밴드 답지않게 키보드의 사용도 제법 많았고 그 역시 사이키하게 사용하였다. 이런 사이키델릭함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라는 슈게이징 밴드의 영향도 크다. (단적으로 2집 <Siamese Dream>의 믹싱을 맡은 엔지니어 Alan Moulder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Loveless 엔지니어였음.) 또한 멜랑콜리 앨범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연극적인 곡 구성은 프로그레시브 밴드 제네시스의 영향이 느껴진다.

단 60년대의 사이키델릭 밴드들이 약물의 영향력을 음악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에 비해 스매싱 펌킨스는 마약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는 빌리 코건의 완벽주의 성향 때문으로 그는 원년 멤버 시절에도 연주에만 집중해야 한다며 밴드 멤버들에게 공연 중 금주를 요구하였고 앨범의 정식 레코딩 전날에는 담배 조차 피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빌리 코건과 제임스 이하는 음악에 집중하기 위해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

이들의 음악을 이야기하는데 라이브를 빼놓을 수 없다. 공연 하나하나마다 분위기가 살아 숨쉬는 빌리 코건의 괴성스꾸임?과 탄탄한 연주는 누구나 인정하는 그들의 특징이다. 부틀렉을 잘 찾아보면 매 해마다 기타 톤이 달라지고 편곡이 달라지는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빌리 코건도 자신들의 부틀렉에 대해 긍정적이어서 공식 사이트에서 그들의 공연 음원을 직접 관리한적도 있었다. 어떤 팬 사이트는 1988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공연 스케줄과 누군가 녹음한 음원과 관객 녹음인지 방송분인지 이력을 전부 기록중..흠좀무
[Spfc.org]

2000년 멤버 간 불화가 절정에 이르러 해체 선언에도 불구하고 내한 공연(7월 4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은 상당히 성실한 모습을 보이며 성공적으로 임했다.[11] 특히 마지막곡으로 1979를 부르기 전 빌리 코건의 말이 인상적. "...미국인으로서, 한국에 평화가 올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매우 고무됐습니다. 여러분의 아이들이 전쟁 없는 나라에서 살길 바라며, 이 곡을 여러분과 북한의 주민들에게 바칩니다. 여러분의 밝은 미래를 기원합니다."[[1]]

흔히들 빌리 코건의 독재가 음악 핵심이라고 하지만 잘 살펴보면 대중의 인기를 얻은 시절은 4인조 오리지널 멤버가 일정한 역할을 배분받은-비록 빌리 코건이 주도적이었다지만- 96년까지였다. 거기에 미국인들의 귀에 익숙한 여러 장르를 재구성한 곡들이 인상적인 멜로디와 함께 많은 부분에서 점수를 땄다고 볼 수 있다. 빌리 코건도 자기 밴드를 '반은 인디락에 발을 걸친 유랑민'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참조]

대중에게 유명한 빌리 코건의 빡빡이 마왕 이미지는 96년부터 그가 머리를 밀고 방송에 나오면서부터 시작되었고 그의 언플로 완성된 것이지 그 이후로는 머리를 밀기 전의 히트곡은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좋게 말하면 다양한 장르 수용, 나쁘게 말하면 잡탕식의 음악이 한우물만 파는 음악인들에게는 안좋게 비춰진 모양이다. 미국 인디 락의 대부 페이브먼트는 이들의 활약에 관해 '니들 음악은 도대체 뭐하자는 건데' 라는 가사가 들어간 Range-Life라는 곡으로 디스했고, 빌리 코건은 열받아서 94년 롤러팔루자 페스티벌에서 이들이 무대에 나오면 자신들은 안나오겠다고 폭탄선언을 해버린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투닥거린다.(...) Siamese Dream의 1번 트랙인 Cherub Rock은 페이브먼트 및 일부 인디씬에 대한 디스를 담고 있는 곡이다. (정확히는 인디씬을 배신하고 돈에 팔려 갔다며 자신들을 비난하는 인디씬과 상업적인 곡을 만들라는 음반사 양쪽을 디스하는 곡) 사실 페이브먼트의 디스는 당시 스매싱 펌킨스가 지금의 대형 록 뮤지션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인디씬의 기대주 취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 크다. 게다가 페이브먼트는 인디씬의 절개를 지킨다며 일부러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을 안 했을 정도로 골수 인디 뮤지션으로 유명하니...
단 페이브먼트 리더였던 스테판 말크머스는 스매싱 펌킨스를 싫어하지 않고 그런 언급도 농담이였다고 내한 당시 밝힌 바 있다. 심지어 '1979' 같은 곡은 좋아한다고.

[링크1]
[링크2(영문)]

그렇다고 해서 빌리 코건의 음악적 재능을 폄하할 수는 없다. 어찌되었건 2집 제작 당시에는 멤버들 간의 불화로 녹음 작업시에 모든 악기를 혼자 다 연주하였고 신작 발매때마다 예전의 곡들을 현재의 컨셉에 맞추어 편곡하는 창작력은 정평이 나 있는 부분이다.괴팍한 천재 뮤지션 빌리 코건과 쩌리 셋 요약하자면 그가 향수를 자아내는 작곡과 동화적인 컨셉 제작 능력 등 다재다능한건 사실이지만 다른 세 멤버의 유,무형의 뒷받침과 화학작용이 스매싱 펌킨스의 성공에 기여를 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



원곡 버전 Tonight, Tonight



98년 투어 당시 편곡 버전 Tonight, Tonight

이상하게도 다른 멤버는 다 내쫓는데, 빌리 코건은 지미 챔벌린을 어쩔수 없이한번 내쫓고 다시 영입한 뒤, 그 뒤로 즈완, 솔로 프로젝트, 제 2기 펌킨스...계속 데리고 다니고 있다.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는 사람도 있는데, 지미 챔벌린이 스매싱 펌킨스에 딱맞는, 여러가지 다채로운 성격의 리듬을 모두 소화해낼수 있는 그리 흔치않은 드러머이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사실 헤비하고 투베이스 졸라 밟아내는 드러머는 많을지 몰라도, 헤비한 속주 드러밍도 소화해 내면서 끊어치는 펑키한 그루브나 엘빈 존스를 연상케하는 재즈적인 필링이나 사이키델릭 블루스에서의 몽환적이고 느릿느릿한 박자까지 다 소화해내는 드러머는 많지 않다. 특히 Tonight, Tonight 같은 심포닉 구성의 곡에서도 적절하게 빛을 발하는 그의 센스는 최고로 평가 받는다.

이런식으로 자기 좋아하는 드러머를 꼭 데리고다니는 밴드 리더의 경우로, 코지 파웰을 애지중지한 리치 블랙모어라든지, 데이브 나바로를 버려도 스테판 퍼킨스는 꼭 데리고 다니는 제인스 어딕션의 패리 패럴 등이 있다. 특히 후자는 스매싱 펌킨스의 경우와 거의 똑같은 것 같다.

최근 2기 멤버 중에 베이스 니콜 피오렌티노가 2집 Siamnese Dream의 커버 모델이었음을 인증하였다. 추억팔이 돋네 [링크] 현재 서른 한살인데 16년전 커버는 아무리봐도 초딩이라 의구심을 품는 미국인들이 몇몇 보인다. 역시 마의 16세를 극복못했군 하지만 사진을 훨씬 오래전에 찍은 것이라고 하면 검증할 수는 없는 일. 이후 밴드 관계자가 앨범의 두 소녀들은 니콜 피오렌티도가 아닌 리산드라 알과 알리 랭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링크]


4 멤버

1988년~2000년


2007년~2014년

재미있게도 오리지널 라인업이나 2기 멤버 모두 동아시아계 기타리스트와 여성 베이시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5 앨범

  1. 드러머인 지미 챔발린은 투어 중 접한 헤로인에 중독되어 헤롱거리고 있었고 연인 사이였던 제임스 이하와 다아시는 투어 중 파경을 맞이하였다. 마침내 1992년 Reading Festival에서는 빌리가 흥분하여 기타를 부수어 버렸다.(...)
  2. 1집 녹음 직전, 빌리 코건은 코트니 러브를 만나서 사귀게 되고 둘은 스매싱 펌킨스의 월드 투어와 홀의 전미 투어가 끝나면 결혼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하지만 빌리 코건이 Gish 투어를 돌며 외국으로 떠나있는 사이에 코트니 러브는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과 양다리를 걸치기 시작했고 곧, 자신이 커트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자 빌리 코건과의 결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직후 1992년 커트 코베인과 결혼해버린다.
  3. 이건 더블 앨범이라 앨범 판매량을 두배로 계산해서 집계된 결과이기도. 그러니까 앨범 450만개*2=900만장인 셈.
  4. 다이시의 정신건강을 염려해서 제임스 이하는 다이시를 밴드에서 탈퇴시키자는 제안을 했고 결국 4집 앨범의 베이스는 빌리 코건과 제임스 이하가 반반 맡아서 연주하였다.
  5. 참고로 2번 트랙의 제목은 The Beginning is The End is The Beginning. 루프물? 사실 1,2번 트랙의 멜로디 라인은 동일하고 편곡만 다르다.
  6. 약 200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7. 빌리 코건은 훗날 인터뷰에서 다이시는 당시 영화 배우 데뷔를 준비하며 밴드 활동에 소홀했고 코카인 중독문제도 있어서 밴드에서 방출된 것에 가깝다고 밝혔다.
  8. 저작권 소송 건 제외하면 거의 은둔 생활을 하다가 2009년 방송에 출연해 미시건 주에 정착했다고 밝혔다. 몸이 안 좋다고 밝혀서 한동안 은둔 생활을 했다가 2016년 건강이 회복되었는지 활동 재개를 선언했다. 빌리 코건하고도 사이가 괜찮아졌다고..
  9. 지미 챔벌린의 부재와 빌리 코건의 친어머니가 사망한 것이 노선변경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10. 트랜스포머 1에서 미카엘라가 범블비를 뒤에 매달고 후진하는 장면에 나온다
  11. 생활의 참견으로 유명한 웹툰작가 김양수가 페이퍼 기자 시절 당시 내한공연 분위기를 소개한 웹툰이 남아있다. [보러가기]
  12. 한국계 미국인으로 2013년 8월부터 홍대에 거주중이라고 한다. [출처]
  13. 곡이 나올 때마다 차례대로 인터넷으로 업로드 되는 프로젝트 빌리 코건의 말에 의하면 "새로운 형태의 앨범"이라고 한다. 라디오헤드가 인터넷으로 자신들의 앨범을 판매한 것과 비슷한 마케팅으로 생각하면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