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가족이 당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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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회자 : "당신의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어도 그 범인의 사형을 반대하겠는가?"

듀카키스(민주당 대통령 후보) : "사형제로 범죄의 발생이 감소한다는 증거는 없다. 그런 경우에도 사형제를 반대할 것이다"[1]
조지 부시(공화당 대통령 후보) : "저렇게 가족애도 없는 냉혹한 사람이 어찌 대통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TV 토론회

자기 딸이나 가족이 당했다면 판사들이 저런 형을 내리겠는가

판사 가족이나 국회의원 가족이 당했다면 법이 바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딸이었으면 이런 판결을 내렸을까요?#
제 가족이 당했다면 그렇게 했을 것#
-예시

범죄 판결 기사에 달리는 꾸준글. 주로 성범죄나 살인 등 흉악범죄 관련 기사에서 "판사 딸이 피해를 당했다면 이런 판결을 내리겠느냐?"는 식으로 달린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TV 토론회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저렇게 대답했던 듀카키스는 인기를 잃고 떨어졌으나 시간이 더 지나면서 부시는 합리적이고 냉정한 판단이 필요한 문제를 대중의 감정에 호소했다고 까였다.

이 꾸준글은 판사를 비롯한 사회 지도층은 범죄를 겪을 일이 없으므로 피해자의 문제를 타인처럼 여긴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2 문제점

그러나 이 꾸준글은 문제의 소지가 크다. 이 글은 판사가 피해자와 인척관계에 있어서 형량을 조절한다는 결론을 함축하고 있다. 적정한 처벌이 아닌 가중처벌을 가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 꾸준글을 지지하는 쪽은 보다 더 벌이 엄해져야 한다는 엄벌주의를 지지하는 쪽과 겹치는 것으로 관찰되기 때문에 가중처벌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판사의 가족이라면, 똑같은 논리에 의해서 판사는 형량을 조절할 수 있다. 판사가 자기 아들이 살해당한 끝에, 감정적인 판단의 결과로 살인범에게 정도 이상의 형을 가하는 것이 그럴 만한 일이라면, 악질 살인범이 판사의 사촌형제라서, 어릴 때 놀던 정을 생각하고 판사가 형량을 낮게 때려준다면? 그것은 문제가 없는 것인가?

좀 극단적인 비유를 들자면 그런 감정 실린 재판은 인민재판이나 마녀사냥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문제다. 애초에 판사는 자신의 가족과 관계된 사건을 맡을 수도 없다. 형사소송법 제17조에 의하면 법관은 자신 또는 자신의 친족이 가해자 또는 피해자인 사건에서 당연히 '제척(除斥. 직무 집행에서 '밀어냄')'되기 때문에, 판사가 자신의 근친에 관한 사건을 담당할 일은 현실에서는 아예 일어날 수가 없다.
이때문에 대형 개인정보유출사건이 벌어지면 사건을 담당할 판사를 못찾는 경우도 있다. 네이트.싸이월드 개인정보유출사건 당시 무려 3500만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는데 대부분의 판사들도 가입되어 있던 상태라서 판사들도 사건당사자이기 때문..[1]

제척 사유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법관이) 불공정한 재판을 할 우려가 있으면 해당 법관이 직무를 집행하지 못하게 하는 '기피(忌避)'가 있다. 피해자 가족이 가해자를 심판할 상황을 그냥 놓아둘 정도로 법이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다.[2]

법관 자신이 답이 없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직무 집행에서 빠지기도 하는데, 이를 '회피(回避)'라고 한다. 실제로 판사는 판결에 감정이 들어가게 되어 공정성이 훼손될 것을 염려하여 사적으로 약간이라도 연관이 있는 사람의 사건을 회피 신청하여 담당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며 어쩔 수 없이 담당하게 된다고 쳐도 양형이 크게 달라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양형 기준이 존재하기 때문). 또한 자신의 분노를 반영해 판결한다고 쳐도 상급 법원에서 재판 다시 하라며 파기 환송하거나 양형을 현실적인 수준으로 조절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나 대개의 여론에서는 판사가 감정이입하는 경우를 그리 비판적으로 보지 않는다. 실제로 2011년 고3 존속살해 사건에서는 판사가 '어머니로서 가해자를 동정' 운운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경우도 양형기준을 따라야 하는만큼 처벌 수위에는 큰 차이가 없다.

결론을 내자면 여론의 이미지와 달리 저런 감정실린 재판은 사법체계의 공정성을 무너뜨리므로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판결하는 자는 쌍방의 입장과 이야기를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3 꾸준글이 달리는 이유

국민의 법감정과 어긋난 판결이 나올 때 저런 말이 나온다. 더불어 위의 문제점에서 "재판의 공정성 따위는 내다 버린다는 의미다."라고 했는데 이런 꾸준글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반대로 판사들은 재판을 공정하게 치르지 않는다고 불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1,4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왔을 때, 국민들은 당연히 백화점 경영진들을 극형에 처하라고 요구했지만 주범 이준 회장은 7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판사로서는 최대한 늘려 판결한 것이지만 국민들은 전혀 납득하지 않았다. "1명 죽이면 사형이나 종신형인데 501명을 죽이면 7년 6개월이냐"며 판사 가족이 당했다면 저런 판결이 나오겠냐는 비난이 쏟아진 것은 물론이다. 물론 천하의 개쌍놈이라는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이 사건은 엄연히 살인이 아니라 업무상 과실치사라서 죽은 사람이 몇명이든 법정최고형이 5년이다. 거기에 1/2 가중을 해서 7년 6월이니까 법이 허용하는 최고형을 선고한 것이다.

결국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서 그렇게 솜방망이 처벌법을 만든 건 국회의원들이고 그 국회의원 가족이 당했다면 어땠겠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즉, 판사는 국회가 정해준 형량 이상으로 형을 내리는건 삼권분립에 위배되므로 국회의원에게 솜방망이 법을 만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회의원도 법을 자유롭게 만들 수는 없다. 형법의 양식도, 제정과 적용도 결국엔 최고 법인 헌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이는 민주국가들 모두가 마찬가지다. 애당초 국회의원들이 법을 마음대로 만들고 고칠 수 있었다면 오히려 자기 당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국민들이 원하는 법을 다른 정당 출신들과 경쟁해가면서 실컷 만들어댔을 것이다.

형법은 민중의 분노 배출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국민들의 분노를 해소해주려고 법을 비정상적으로 개정할 순 없는 노릇이다. 정 근본적으로 갈아치우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난다면 법철학자가 되는 방법이 있다. 지금 직업이 무엇이건 간에 남는 시간을 모조리 바치며 2, 30년 정도 꾸준히 학문을 닦으면 당신은 법철학의 권위자가 되어 형량 문제에 관해 진지하고 무게 있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법철학자가 되면 국민 법감정대로 법을 만드는게 쉬운게 아니라는 사실만 깨닫게 될 뿐이다.

이런 꾸준글이 달리는 또 다른 이유를 보자면, 형법은 문제가 아닌데 판결 자체 에 국민감정이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좋은 사례로 서진환 사건의 2013년 4월자 항소심에서, 파렴치한 천하의 개쌍놈 서진환은 피해자 남편이 사형을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판사가 무기징역을 내렸는데, 무기징역을 내린 이유 자체는 "피해자의 죽음을 가벼이 여겨서가 아니라, 역설적이지만 생명은 누구에게나 하나 뿐인 소중한 것이므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의 생명마저 엄중히 여기는 것이 우리 헌법과 사법제도의 최소한의 요구" 라는, 이성적으로 보면 지극히 맞는 말 이었으나, 당시 네티즌들의 반응은... (#1, #2 )

이렇게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인면수심의 악마 그 자체인 흉악범의 만행을 뉴스로 접하고 민중이 분개하는데, 법적으로 충분히 극형을 내릴 근거가 있음에도 재판부가 그렇지 않았을 경우, 민중의 시점에서는 판사가 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고, 니들이 그렇게 안 당해 봤으니까 그딴 속 편한 소리나 나오는 거지! 라는 분노가 폭발하고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더욱 더 깊어질 수 있는 것이다. 차라리 삼풍백화점 이준 회장의 케이스는 법이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내려진 판결이니 "하고 싶어도 못 한다" 는 변명이라도 가능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어도 안 한다" 로 인식되는 판결의 경우는 민중들에게 "판사가 자기 일 아니라고 판결을 저 따위로 내린다" 는 인식을 심어 주고 인권과 법제도에 대한 회의감까지 불러 일으킬 수 있기에 도저히 해결책이 안 보인다.

4 같이 보기

  1. 참고로 듀카키스는 그 범죄자의 사형만을 반대했을 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사형이 아니라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를 사회로 내보내지 않는 방법은 유기징역의 제한이 없고 무기징역도 가석방을 불허할 수 있는 조건이 붙은 미국에서는 말 그대로 넘쳐난다.
  2. 다만 간접적으로는 법관이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피해자 가족인 판사가 그 사건을 담당하는 사법연수원 동기나 선·후배인 동료 판사들에게 가해자를 최대한 무겁게 처벌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공정한 판단을 한다고 보장하기 힘들다. 물론 이것은 판사가 아니더라도 해당 재판을 하는 판사와 아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