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1세

Karl I. Franz Joseph Ludwig Hubert Georg Otto Marie von Habsburg-Lothringen (독일어)

IV. Károly or Habsburg-Lotaringiai Károly Ferenc József Lajos Hubert György Mária (헝가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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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카를 1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두 번째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이며, 가톨릭의 복자.

1 제위 계승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두 번째 남동생의 손자로, 본래는 제위와 별로 인연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기막히게 겹친 합스부르크 왕가의 불운으로 인해 그에게 황제의 자리가 돌아갔다.

먼저,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첫번째 남동생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이 혁명군에 의해 처형당했다. 그리고 1889년 1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외아들 루돌프 황태자(1858~1889)가 권총 자살해, 자동적으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두번째 남동생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1833~1896)이 황제의 후계자가 되었다.

1896년, 카를 루트비히 대공이 위장병으로 사망하자 대공의 장남인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가 황태자로 낙점되었다. 그러나 그가 귀천상혼을 한 탓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아이들은 계승권을 상실했고, 유사시인 카를의 아버지이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동생인 오토 대공(1865~1906)이 후계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06년, 오토 대공이 41세로 요절해, 카를 1세가 백부인 황태자의 유고 시 제위를 계승하게 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평범하고 무난한 경우라면 제위를 이를 가망성이 희박했던 카를에게 제위 계승권이 확정되었다.세상은 요지경

마지막으로 1914년 6월, 황태자이자 백부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보스니아에서 열린 육군 훈련에 참관하러 갔다가 세르비아 극우민족주의자의 테러로 암살당하면서 카를은 자동적으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후계자인 황태자로 내정되었다. 이때 카를의 나이 27세였다.

2 재위기간

2.1 평화와 개혁을 위한 노력

1916년 11월, 68년이나 오스트리아 제국을 통치한 종조부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사망했다(86세). 이에 황태자인 카를이 카를 1세로 황제에 즉위했는데,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제위에 오른 카를 1세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계대전이라는 진흙구덩이에서 건져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또 계속되는 전쟁과 배급제로 인해 고통받는 사병들과 신민들과 고통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진보적인 정책들을 시행하려고 했다.

우선 전시의 군대에서 만연해진 구타를 금지시켰고, 장교들의 결투도 금지시켰다.[1] 또 독가스 사용과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폭격을 억제하고, 동시에 당시 제국 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소수민족들의 자치 요구를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 대해 반대한 헝가리 정부와 독일 군부의 압력으로 뜻대로 시행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 보수세력도 그의 개혁에 반발하여 제지를 하는 바람에 개혁은 실패로 돌아간다.

정치적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카를 1세는 궁정 생활이라도 개선시키려고 노력했다. 배급을 받는 신민들과 고통을 공유한다는 취지에서 그는 흰 빵을 먹기를 거부하고[2], 검소한 생활을 영위하였으며, 전쟁터를 방문한 뒤에는 조기 종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결심하고 연합국을 상대로 '상호 비난이 없는 평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를 독일이 훼방을 놓고, 연합국도 믿을 수 없다며 시큰둥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2 퇴위

1918년 11월 동맹국의 전열이 붕괴하자 황제는 국민들의 열망을 받아들여 연합국과 강화협상에 들어갔고, 황제에서 퇴위했다. 같은 달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다.

카를 1세는 일반적인 "망국의 군주"들과는 달리 성실하고 머리가 좋은 인물이었지만, 당시 상황상 제국의 해체는 막기 힘들었다. 1916년 말 시점에서 제국의 해체는 이미 기정사실로, 심지어 오스트리아인들도 더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일가는 처음에는 스위스에서 거주했는데 오스트리아 제국을 구성하던 국가 중 하나인 헝가리 공화국이 루마니아 군대와 호르티 미클로시에 의해 왕정이 복고되는 일이 발생하자 카를 1세는 헛된 희망에 부풀었다. 그는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자신의 충신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자신이 헝가리에 가면 그가 자신을 왕좌로 모실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물론 헝가리의 실세 호르티는 그럴 의향이 없었다. 원래 헝가리인들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좋아하지도 않았고[3], 전범이나 마찬가지인 카를 1세를 받아들이면 국민 정서로도, 연합국을 상대로도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르티가 실권을 휘두르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었기에 호르티는 카를 1세에게 얌전히 스위스에서 거주할 것을 권고했지만 카를 1세의 측근들과 헝가리의 근왕파들은 카를 1세가 헝가리에 입국하면 진정한 왕을 위해 헝가리 국민들이 봉기할 것이라고 부추겼고 카를 1세는 신나게 헝가리에 입국했고 2차례에 걸쳐 왕위를 얻어내려 했지만 처참하게 실패하고 포로가 되었다가 추방되었다[4].

2.3 사망

그 후 헝가리 왕 복위를 2번 시도하지만, 연합국의 반발과 호르티 대공의 비협조에 의해서 실패하고, 결국 그는 포르투갈의 마데이라에서 망명하여 그 곳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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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카를 1세의 아내이자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후인 지타(1892~1989)도 폐위되어 황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으로 살다가 1989년까지 살아남아 에서 96살(97번째 생일을 한달 남겨두고 사망)로 삶을 마쳤다. 그녀는 최후까지도 황족답게 처신하였고 오스트리아의 제정 복고를 끝까지 노려 스페인 왕실의 숙식 제공 등에도 오스트리아의 황후로 살겠다며 거부하고 빈곤한 삶을 택했다.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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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1세는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지타와 결혼해 5남 3녀를 두었고, 그 중 장남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가 되었다. 카를 1세가 사망한 뒤에 오토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으로서 대공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름 뿐인 작위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지위는 현대에도 유지되고 있다. 2006년 이후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은 오토의 아들인 카를이다.

한편 카를 1세가 깊은 신앙심과 제1차 세계대전을 조기 종결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점이 영욱적 덕행으로 인정받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2004년 10월 3일에 그를 '복자'로 시복했다. 축일은 10월 21일이다.
  1. 결투 금지는 이미 프란츠 요제프 시대에 규정되어 있었는데, 잘 지켜지지 않았다.
  2. 이게 얼마나 대단하냐면 서양에서 흰 빵은 부의 상징으로 받아듣여 질 정도로 고급 식품이었기 대문.
  3. 공교롭게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산인 오스트리아보다는 헝가리에 친합스부르크파가 더 많긴 했다. 카를 1세가 무턱대로 헝가리로 간 것도 그 때문이고...
  4. 한 가지 웃기는 사실은 호르티는 헝가리를 공화국으로 선포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왕이 되지도 않은 채 소련에게 박살나기 직전인 1944년까지 헝가리 왕국 섭정으로서 왕국 체제를 계속 유지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1918년 이후 24여년간 바다 없는 나라에서 함대 없는 해군제독왕 없는 왕국을 다스리는 괴악한 체제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