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프랑스의 정치가 겸 성직자
1.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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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and Jean du Plessis, cardinal-duc de Richelieu et de Fronsac(리슐리외 프롱사크 추기경 공작, 아르망 장 뒤 플레시).
그림에서 리슐리외 추기경이 들고 있는 빨간 모자는 비레타라는 모자이다.
나의 첫째 목적은 왕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하는 것이고, 둘째 목적은 왕국을 위대하게 하는 것이다.
추기경이자 프랑스의 공작으로 재상을 역임했으며,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완성한 사람이다. '리슐리외'는 그가 다스리던 영지의 이름이다. 추기경이면서 공작이었기 때문에 추기경의 빨간 수단[1]에 따와서 '붉은 공작', 혹은 '비색(緋色)의 공작'이라고 불렸다. 이 시대를 다룬 창작물에서 루주 공작 등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다. 루주(rouge)는 프랑스어로 붉은 색을 뜻하며, 여기서는 추기경이 입는 빨간 수단을 가리킨다. 추기경의 빨간 수단은 순교자의 피를 상징한다.
가끔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절대로 리슐리外가 아니다. 몽테스키외도 마찬가지다. 80년대 이전에 나온 책에서는 영어식 발음의 영향을 받아 '리셜류', '몽테스큐'[2] 로 표기된 경우가 많았다.
1.2 출신배경 및 가족
후에 휘두른 막강한 권력을 보면 쉽게 연상되지 않겠지만, 원래 시골의 하급귀족 가문 태생이었다. 다만 그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 중에 카페 왕조의 루이 6세가 있으므로, 카페 왕조의 먼 후손에 해당하는 부르봉 왕가와는 매우 멀기는 하지만 친척뻘이 된다. 그러나 리슐리외가 태어날 무렵의 플레시 가문은 하급 귀족가문이었으며, 아버지 또한 앙리 3세 밑에서 일하다 일찍 죽어 가족은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리슐리외가 성직자가 된 것도 입을 덜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다만 어머니 슈잔느는 현명한 여인으로 살림을 잘 꾸려나갔으며, 가족간의 유대도 괜찮았던 듯하다.
가족으로는 언급한 대로 일찍 전사한 아버지 프랑소와, 저명한 법학자의 딸인 어머니 슈잔느가 있으며 그 사이에 5명의 남매가 있었고 리슐리외는 3남이었다. 본인은 성직자로 아내나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후에 자신의 작위와 재산을 조카[3]에게 물려주었다. 루이 15세 시대의 유명한 난봉꾼 리슐리외 공작이 바로 그 조카의 자손이다.
가톨릭 성직자인 만큼 당연히 결혼은 하지 않았다. 여러 명의 사생아와 애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지만, 확인된 것은 없고 대부분 야사나 가십이다. 후에 리슐리외가 재상이 되었을 때 측근으로 활약한 인물 중에 리슐리외가 젊은 시절 하숙했던 주인집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외모가 리슐리외와 매우 닮아 "여주인과 사이에서 난 사생아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당대에도 돌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조카딸인 에기용 공작부인과도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사이에 자식도 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후에 리슐리외가 사망할 때 자신의 유언 집행인으로 에기용 공작부인을 지명했다.
다만 이것은 리슐리외의 정적들이 지어낸 소문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에기용 공작부인은 삼총사의 앞부분에서도 등장하는 바로 그 여인이며 리슐리외의 누이의 딸로, 리슐리외의 정치적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략결혼으로 연인과 헤어지는 등 불행을 겪었다. 견디다 못한 그녀가 수녀가 되려고 했을 때, 리슐리외가 교황에게 직접 탄원해서 서원[4]을 금지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숙부인 리슐리외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에 리슐리외의 집에 살면서 안살림을 살피고 궁정 시녀로 리슐리외에게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가족애는 상당히 돈독했던 듯하며 자신의 조카, 조카딸들에게 좋은 혼처를 구해주고 재산과 작위를 만들어주었다. 자신처럼 성직자가 된 둘째 형도 동생의 덕을 상당히 보았다. 가문의 격을 올리는데 매우 열심이기도 했는데, 자신이 죽을 때 낮은 신분의 가문과 혼인하지 말 것을 유언하고, 그런 혼인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는 막대한 부를 남겨주었다.[5] 그 외에도 루이 13세에게 자신의 일족을 돌봐줄 것을 죽어가는 와중에 부탁하기도 했다.
더불어 당시 유럽인으로선 드물게 고양이를 무척 아꼈다고 한다. 죽을 당시 14마리나 되는 고양이들을 키웠으며, 유언 중 하나로 고양이들을 죽을 때까지 돌보는 조건으로 하녀 1명에게 연금과 고양이와 같이 살 집도 하나 남겼다. 종교재판이나 마녀사냥은 그다지 금지하지 않았지만, 고양이를 죽이거나 학대하는 짓은 금기시했다고 한다.
1.3 생애
본래 뤼송교구[6]의 주교였으나, 앙리 4세의 왕비이자 당시 섭정이었던 마리 드 메디시스의 눈에 들어 왕실 고문관으로 발탁되었다. 리슐리외가 발탁된 계기는,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의 결혼 문제를 논하는 삼부회에서 리슐리외가 대단한 웅변을 펼친 것이 마리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7] 그러나 모친 마리와 사이가 매우 나빴던 루이 13세가 친정을 개시하면서 쫓겨나게 되었고, 모자(母子)의 권력다툼 속에 다시 마리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다. 초기에는 마리도 리슐리외를 대단히 신임하였기에, 루이 13세도 모후와 화해하는 의미에서 리슐리외를 중용했고 교황청을 통해서 추기경으로 서임되게 해 주었다.
그런데 1624년 루이 13세가 리슐리외의 복귀를 승인한 뒤에는 오히려 왕의 측근으로서 리슐리외와 가까워져 마리와 대립하게 되었고, 리슐리외를 제거하려는 모후 일파의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어 처단되면서 재상에 임명되었다.[8] 이때 음모가 실패한 메디시스 태후는 국외로 탈출하였고, 이후로도 내전과 복귀를 노렸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 국내에 더 이상의 세력기반이 없어서 실패하고 각지를 전전했고, 평생동안 리슐리외를 증오하면서 보냈다. 그리고 리슐리외가 죽기 몇 개월 전에, 한때 자신이 후원했던 화가 루벤스에게 얹혀살던 중 가난하게 삶을 마감했다.
루이 14세 때 꽃을 피운 절대왕정을 사실상 확립한 인물로서, 국왕권 강화를 위해 재가를 얻지 못한 귀족 영주 소유의 모든 요새나 성 시설을 파괴하고, 사사로이 벌어지는 결투도 금지시켰으며, 여기에 반발한 개신교 신자들이 영국의 지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처부수고 화평을 맺어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대신 정치 참여를 금지시켜 프랑스의 안정을 가져왔다. 위에 나왔듯이 결투를 법적으로 금지해서 많은 불평을 들었다. 이 때문에 삼총사의 초반에는, 리슐리외의 친위대가 삼총사와 달타냥을 결투를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하려 들었다.
사실 결투를 금지한 것 자체가 왕의 사법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특권을 빼앗긴다고 느낀 귀족 세력이 리슐리외에게 반발한 것이다. 소설 속에 나오는 트레빌 총사대장은 실존인물이며 리슐리외의 반대파인 것도 같은데, 트레빌이 리슐리외를 적대한 것은 왕에 대한 충성심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반대로 왕권 강화로 귀족인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된다고 느껴서 왕권 강화론자인 추기경을 적대한 것이다.[9] 이러한 왕권강화 노력은 당시 권력을 누리던 귀족세력의 큰 반발과 불만을 불러왔고 그 때문에 온갖 중상모략과 비방에 시달렸다. 소설 삼총사에서 악역스럽게 나오는 것도 이때 만들어진 이미지가 후세까지 이어져서라는 설도 존재한다. 그러나 실상은 상술한 대로 프랑스의 발전과 왕권강화에 진력한 유능한 신하.
그 외에도 관료제도를 확립하고, 상업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우정(郵政) 제도에도 공적을 남겼다. 게다가 가톨릭에서 최고위급 성직자이면서도 합리적으로 대처해서 종교만을 따지지 않고 국가적 이득을 더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 이득을 위해서라면 다른 종파와 기꺼이 손잡았고, 만일을 위하여 오스만 제국과 우호관계를 맺어서 이슬람과도 손잡을 준비도 했다. 이러다보니 프랑스 내 가톨릭 골수강경파들에게 배신자 및 이단자 소리도 들었으나, 이런 소리는 그냥 무시했다. 이와 관련한 일화도 있는데, 개신교신자들의 반란을 진압했을 때 측근들이 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자, "개종은 칼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보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며 거절했다.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정체성과, 본인이 추기경이고 상대가 반란을 일으킨 개신교라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대인배.
프랑스어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문화 발전을 위해서 프랑스 아카데미를 창설하기도 했다. 이 기관은 오늘날까지 존속하며, 프랑스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지명되는 것은 문화예술인에게 매우 큰 영광이라고 한다.
한편 반대파가 많아서 늘 암살과 실각의 위험 속에서 살았다. 그 때문인지 정보를 얻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프랑스의 각계 각층에 심복과 첩자를 심어두었다. 이 덕에 암살이나 실각을 피할 수 있었던 적도 여럿 있었다. 물론 반대파들은 이걸 비난하면서 경찰국가를 만들었다고 하기도 한다. 이 암살 시도는 정말 많아서 죽기 직전까지 이어졌고, 심지어 생애 마지막으로 겪은 암살음모는 루이 13세가 가담했다는 설까지 존재한다. 이 때문에 리슐리외는 왕과 대면할 때도 경호원들을 대동하는 경우가 있었다. 주요정적은 루이 13세의 모후인 마리 드 메디시스와 동생인 가스통 왕자, 왕비인 안 도트리슈 등이었다. 이들은 평생 동안 끈질기게 이적행위와 내란 및 암살음모를 꾸미면서 리슐리외를 괴롭혔다.
독일이 통일된 정치체제를 이룬다면 엄청난 강적이 될 것임을 미리 직감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을 줄이는데 힘을 기울여, 30년 전쟁에서는 가톨릭 추기경 주제에 개신교 국가들과 손을 잡고 물밑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종국에는 직접 참전하여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과 사투를 벌였다. 또한, 리슐리외의 對 독일 인식은 이후 프랑스가 알자스 전부와 로렌 일부를 집어삼키는 등 프랑스 외교정책에서 항상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그 덕에 독일 분열에 기여해서 나치나 아돌프 히틀러가 매우 증오하던 인물이라, 1940년 프랑스를 점령할 당시 리슐리외 무덤을 폭파시키려고 했다가 프랑스 여론 반발이 커질 것이라고 하여 그만둔 적도 있다.
마찬가지 이유로 합스부르크 왕가가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을 지배하게 되자, 프랑스가 그들에게 포위당하는 것을 우려해서 합스부르크의 유럽 패권을 무너트리는데 평생을 바치면서 노력했다. 결국 생전에는 그 성공을 보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약화시키는데 성공했다. 한마디로 프랑스가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유럽의 판도를 뒤바꾼 엄청난 인물. 덕분에 유럽 각국 궁정에서 '강철발톱을 가진 이리'라는 소리도 들었다.
1642년 스페인과 전쟁 도중에 병사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스페인을 매우 경계했기 때문인지, 죽어가는데도 들 것에 실려가면서 전쟁을 지휘했다. 사망하기 전, 리슐리외는 자신이 신임했던 쥘 마자랭을 자신의 후임자로 루이 13세에게 추천했으며, 많은 유산을 루이 13세에게 남겼다. 리슐리외가 살던 대저택이 이때 왕가의 재산이 되었으며, 루이 14세가 성장한 곳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남아있는데 팔레 루아얄이 바로 이곳이다.
오늘날 리슐리외에 대한 평가는 "절대 왕권의 기초를 확립하고 근대 국가로서의 프랑스를 세운 인물"이며 화폐개혁 이전에는 프랑 화폐에 등장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그 업적과 존재감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주군인 루이 13세가 평가절하당하는 일도 많다. 심지어는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대의 비교 연구서 제목이 '리슐리외 추기경과 루이 14세 시대'일 지경이다. 근세에 비교하면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1세 정도?
루이 13세와는 신하와 주군의 관계지만 여러모로 미묘한 데가 있다. 루이 13세는 리슐리외를 크게 신임하여 중임을 맡겼지만 한편으로는 리슐리외의 권력과 정책에 불만도 가지고 있어서, 면전에서 비꼬거나 주변 신하들에게 험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실제로 리슐리외를 내쫓으려는 생각도 몇 번인가 한 듯하다. 일설에는 리슐리외 암살 음모를 묵인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죽을 때까지 리슐리외를 지지했고, 생전에도 여러가지 시시콜콜한 문제도 상담하기도 했다. 정말로 사사로운 것 가지고 리슐리외의 애를 많이 먹였는데, 심지어는 애인과 싸우고 징징거리는 단골대상이 리슐리외(…). 애인과 불화가 생기면 그 중재도 리슐리외가 다 도맡아 해야 했다. 루이 13세와 남자 총신 사이의 중재도 많이 했는데, 그 빈도가 하도 잦아서 나중에는 리슐리외가 아예 각서를 작성해서 둘이 서명하게 하기까지 했다. 나랏일도 힘든데 왕의 사생활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했던 셈.
리슐리외 본인도 루이 13세에게 충성을 다했고 죽을 때 자신의 재산 일부를 왕 앞으로 남겼을 정도지만, 그렇다고 왕을 완전히 믿지는 않아서 항상 루이 13세가 자신을 암살하지 않을까 의심했다. 왕이 자신을 부를 때면 혹시 암살하려는 게 아닐까 의심해서, 미리 염탐해 상황을 확인한 후에야 호출에 응한 일도 몇 번 있다. 이쯤 되면 둘 다 능구렁이급이다(…). 진짜로 애증이 있었던 듯하다. 한편, 둘 다 성격이 음침(…)하고 잔병치레를 많이 해서 서로 통하는 데도 있었던 모양이다. 루이 13세는 리슐리외의 임종까지 지켜보았는데,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두 사람 다 몸이 너무 아파서 침대에 누워서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였다.
왕비 안 도트리슈와는 적대관계였다. 초기에는 안과 루이 13세의 결혼을 리슐리외가 찬성했으며 프랑스로 온 안의 고해신부였던 것도 있어서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안이 점점 에스파냐의 첩자 노릇을 하고 리슐리외도 합스부르크를 무너뜨리려 하면서부터 적대관계가 되었다. 리슐리외는 안을 철저하게 감시했으며, 실제로 수모도 여러차례 주었다. 안이 했던 여러 행위는 중대한 반역행위였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리슐리외의 중재와 보호가 없었다면 루이 13세가 안을 폐하고 추방하거나 감금했을 것이란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루이 14세를 낳은 뒤에는 안도 프랑스에 대한 적대행위를 그만두었고, 자신과 아들의 안전을 위해 리슐리외에게 고개를 숙이면서부터는 관계가 약간 호전되었다. 후에 안 왕비가 아들의 섭정이 되었을 때 실권을 휘두른 것이, 리슐리외가 안에게 소개해 준 쥘 마자랭이었다.
1.4 기타 창작물에서의 이미지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서는 초반에는 그리 좋지 않은 이미지로 묘사되며, 그 영향으로 이후 삼총사를 각색한 창작물에서는 거의 악역처럼 등장한다.
하지만 뒤마의 삼총사가 실제 리슐리외를 크게 왜곡한 것은 직접 등장하지 않았을 때 이야기일 뿐, 후반부에는 카리스마와 비범함을 보여주는 인물로 나타난다. 영국과의 전쟁 중에도 밤에 부하 1명만 데리고 다니다[10] 삼총사를 만나자 "오, 자네들인가? 이런 밤중에 마침 잘 됐네. 경호할 사람이 필요했거든. 밤길 좀 부탁하지. 아, 물론 자네들이 날 싫어하는 건 잘 알고 있네만, 지금의 나는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이라는 걸 잊지는 말게나."라며 태연하게 호위를 명령하며, 전쟁에서 영국군을 몰아내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등, 달타냥을 비롯한 주인공들과의 관계에서는 대립하지만 국가 전반으로 볼 때 사심없는 비범한 인물로 묘사된다. 이 때문에 삼총사들도 그가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인물임을 인정하고 그에게 존경심을 느끼기까지 했다고 나온다. 안 왕비의 목걸이 때문에 망신을 당하기는 하지만(…).
소설에서 안 왕비를 곤란에 밀어넣으려 하는 것도, 결국은 스페인이나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하기 위한 일이다. 원래 안 왕비는 소설에서나 실제 역사에서도 프랑스의 적국 스페인의 공주로, 프랑스의 왕비이면서도 친정인 스페인과 밀통하여 프랑스의 내정에 간섭하거나 프랑스를 협공하라고 부추긴 인물이다. 프랑스 궁정 내 첩자 행위를 하다가 발각된 적도 있다. 작중에서 적국 영국의 재상 버킹엄 공작과 불륜을 저지른 것 또한 큰 죄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런 왕비를 공격적으로 대하는 리슐리외의 태도가 정상인데도, 뒤마의 소설에서는 낭만적인 연애인 척 포장하여 많은 이들을 호도한다. 이것은 이 당시 유럽에 만연했던 진실한 사랑은 불륜뿐이다라는 유행에서 비롯된 스타일로 생각된다. 이 당시 결혼은 귀족이든 서민이든 집안간의 결합과 후사를 잇기 위해 팔려가는 처지나 다름없었기에 이러한 관점이 만들어진 것. 작중에서 묘사되는 왕비에 대한 추기경의 태도는 증오로 변한 짝사랑이었다는 것이다. 왕비를 사모했지만, 왕비가 버킹엄 공작과 눈이 맞자 사랑이 빡으로 변한 것(…).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오히려 루이 13세가 안 왕비를 내쫓으려는 걸 리슐리외가 보호해주었다. 물론 친스페인 성향인 왕비를 매우 경계하기는 했지만서도.
사실 리슐리외는 의외로 달타냥을 마음에 들어했다. 라 로셸로 출병하기 전에는 달타냥을 자신의 저택으로 소환해서 자신의 경호사대 소위직을 제안하다 거절당하기도 했고, 밀라디와 버킹엄 공 암살과 관련해 밀담을 하면서 밀라디가 임무를 수행하는 보수의 조건으로 달타냥을 죽여달라는 요청을 하자 "내 적도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다면 좋겠군. 그러한 적이야말로 용서하는 것도 쉬운 일인데!"라고 하기도 했다. 모든 사건이 끝나고 자신의 부하인 로슈포르 백작을 보내 달타냥을 체포해 자신의 집으로 소환한 후 밀라디가 받았던 백지 위임장[11]을 달타냥이 내밀었고, 리슐리외는 이 백지 위임장은 깔끔히 불태워버리지만 대신 달타냥이 예상한 사형 명령서가 아닌, 총사대 부사령관의 사령장을 이름 부분만 공백으로 남겨 내주며 서로 인정하게 된다.
초반에 악역스럽게 나오는 것은, 귀족들에게 압박을 많이 가했기 때문에 귀족층에게 인기가 없었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사실 달타냥의 아버지는 초반에 달타냥을 파리로 보내면서 "네가 고개를 숙여도 되는 분들은 국왕 폐하, 총사대 대장, 그리고 리슐리외 추기경 전하 뿐이다."라고 얘기한다. 그래서 리슐리외가 삼총사의 '진 주인공'이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비평도 있다. 덤으로 에코의 평가에 따르면 달타냥은 그냥 떨거지(...).
사소한 것이기는 한데, 뒤마의 삼총사에서는 "리슐리외가 병약하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고 실제로는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라고 써놨는데 이게 틀린 것이다. 역사상 리슐리외는 실제로 허약 체질이었고 죽기 몇년 전부터는 중환이었다.
그러나 삼총사 초반부에서 일단은 대립하는 위치에 있는 영향으로, 삼총사의 각색물에서는 원작의 복잡한 위치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고, 오로지 음모가나 사악한 인물로만 묘사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 특히 1993년도에 나온 할리우드 영화 삼총사에서는 그냥 왕좌를 노리는 찌질이 악당(…)으로 묘사되어 욕을 많이 먹었다. 그 외에도 영화나 만화에서는 그냥 악당(…)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각색물의 악역 스타일은 삼국지연의의 조조처럼 왕을 꼭두각시처럼 다루고 왕좌를 노리는 간신배 스타일이다. 실제 역사에서 리슐리외가 왕권을 강화하고 루이 13세를 귀족세력에게서 지켜내던 걸 생각하면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다. 이모텝과 같은 취급...?
BBC의 영국 드라마 삼총사 시즌 1에서도 등장. 원작이 원작인 만큼 총사대와 대립하는 포지션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프랑스를 염려하는 냉철한 정치적 인물로 묘사된다. 물론 서로 까긴 하지만, 어쨌든 총사대와 협력을 하는 에피소드도 있는 등 100퍼센트 악역이라고 보기에는 약간 애매한 캐릭터. 그리고 은근 귀여운 모습도 많이 보인다 배우는 후일 닥터후에서 12대 닥터 역을 맡는 피터 카팔디이며 한국어 더빙판 성우는 설영범. 그러나 카팔디가 닥터후에 캐스팅 되면서 시즌 2에서는 하차 크리(...) 그리고 더빙판 성우도 12대 닥터 성우로 낙점된건 덤 작중에서는 시즌 1의 결말에서 약 1년 가량의 시간이 지났다는 설정으로, 그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죽기 전 아라미스와 왕비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식의 떡밥이 시즌 2 초반에 던져지는데...
움베르토 에코의 3번째 소설 전날의 섬에서 중요한 장면에 등장한다. 몬페라토 전쟁을 겪고 영지인 라 그리바로 돌아온지 몇년 후, 프랑스의 파리로 올라온 주인공 로베르토 델라 그리바가 궁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반국가음모에 가담한 국사범이 되는 바람에 조용하게 어딘가로 끌려가게 되는데 거기에서 만나게 되는게 침상에서 죽어가는 이 사람, 주위에는 경호원과 함께 추기경이 된 마자랭이 있었다. 로베르토를 본 리슐리외는 로베르토를 잘 구슬리는 중에 콜베르가 들어오고 고정점과 경도, 공명약에 대한 비밀을 찾아올 것을 명한다.
일본 애니 달타냥의 모험에서는 초중반까지 악역으로 나오지만 그 뒤로 밀라디 패거리가 저지르는 왕위 찬탈에 반대로 왕에게 충성하며 달타냥 일행을 도우며 같은 편이 된다. 한국어판 성우는 이윤선.그밖에 삼총사 항목에 나오는 천하무적 멍멍기사에서는 그냥 그런 악역으로 나온다.
1.5 일화
유럽에서 끝이 둥근 나이프를 제작하게 하여 식탁에 도입한 것도 바로 리슐리외인데, 어느날 손님이 예리한 나이프의 끝으로 이를 쑤시는 꼴을 보았기 때문이다. 원래는 리슐리외의 집에서만 사용되었던 이러한 끝이 둥근 나이프가 퍼진 원인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대개 2가지 설로 좁혀지는데, 첫 번째는 리슐리외 이외에도 나이프로 더러운 짓을 하는 꼴을 견디기 힘들었던 귀족들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것이고, 2번째는 술에 취한 귀족들이 나이프로 난투극을 벌였을 때 사망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안전상의 이유라는 것이다.
유럽의 식사자리 안전은 지역과 시대별로 차이는 있지만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유럽에는 "7명 이상이 있는 자리에서 식사하는 도중에 발생한 살인에 대해서는 무죄"라는 법률도 존재했는데, 식사자리에서 술에 취한 채로 난투를 벌이는 일이 매우 많은 상황에서 증거와 증언을 찾아 정확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다수가 식사할 경우 아예 날붙이 자체를 식사자리에 들여놓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리슐리외가 개발한 이러한 나이프는 생각외로 널리 퍼졌고, 마침내 1669년 루이 14세가 전 프랑스의 식사용 나이프를 그렇게 만들라는 명을 내림으로써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되었다.
야사에는 삼총사에서 대립하던 루이 13세의 왕비 안 도트리슈와 불륜을 저질렀고, 사실은 루이 14세의 친부라는 이야기도 있다.서양의 여불위컨셉??? 실제로 프랑스로 시집온 안 도트리슈의 고해 사제이기도 했다. 혹은 그의 후계자 쥘 마자랭 추기경이 루이 14세의 친부라는 말도 있다. 실제로 쥘 마자랭은 안 왕비와 거의 비슷한 나이로 친분 관계가 깊었다고 한다. 리슐리외가 루이 13세의 재상으로 일했듯, 안 왕비의 섭정기에는 마자랭이 프랑스의 재상으로 거의 전권을 쥐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자신의 영지이자 낙후된 시골인 리슐리외 지역에 애착을 가져, 이곳을 발전시키려고 여러모로 많이 노력하고 건물도 많이 세웠다고 한다. 당시 귀족들은 추기경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리슐리외 영지에 건물을 세우거나 매입했다고 하나, 추기경 사후에 결국 흐지부지된 걸 보면 영지의 지리적 조건이 영 안 좋았던 듯. 실제로 1793년에 3,205명이였던 리슐리외 지역의 인구가 2009년이 되면 1,956명으로 감소했다.
2 프랑스 해군의 전함
리슐리외급 전함 항목 참조.
3 창세기전 3의 등장인물
리슐리외(창세기전 3) 항목 참고.- ↑ 가톨릭 성직자의 옷. 교황은 흰색, 추기경은 빨간색, 주교는 자주색, 신부ㆍ부제ㆍ신학생들은 검은색이다(여름에는 흰색 비슷한 미색 수단을 입기도). 신학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에서는 4학년 때,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는 3학년 때 착의식을 하고 수단을 입기 시작한다.
- ↑ 몽테스큐라는 표기는 사실 황당한데, 몽테스큐의 '몽' 부분은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 발음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는 영어, 일부는 프랑스어 - ↑ 맏형의 아들. 둘째 형인 알퐁스 루이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도 성직자(주교)였기 때문에, 가까운 남자 친척은 맏형의 자손밖에 없었다. 사실 당시 유럽 귀족들은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을 장남을 제외한 아들들은 성직자가 되는 일이 흔했다.
- ↑ 수도자들이 하는 3가지 약속으로 청빈, 정결, 순명. 수도자로 살겠다는 약속이다. 수도회마다 기간은 조금씩 다르지만, 수도회에 입회하면 지원기(6개월~1년)와 청원기(6개월~1년)를 거쳐 수련기(2년)에 들어간다. 수련기에 들어갈 때 수도명을 받고, 수도복을 입고(착복식), 여성 수도자(수녀)의 경우 하얀 베일을 쓰게 된다. 수련기가 끝나면 첫 서원을 하는데, 이때 하얀 베일에서 검은 베일로 바뀌고, 본격적으로 수도회의 여러 사도직을 하고, 여러 교육도 받는다. 서원은 몇 년 단위로 갱신하며, 이렇게 기한이 정해진 유기서원기(4~5년)가 끝나면 죽을 때까지 수도자로 살겠다는 종신서원을 한다.
- ↑ 주군인 루이 13세에게도 상당부분을 증여했다. 대표적인 것이 후술되는 팔레 루아얄이다.
- ↑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인 성(聖) 도리 김 헨리코(1839-1866) 신부가 이 교구 출신이다.
- ↑ 이 때의 삼부회가 프랑스 혁명 직전에 열린 삼부회를 제외하면 마지막이었다.
- ↑ 프랑스 역사에서 유명한 <기만당한 자들의 날> 사건이다.
- ↑ 후에 리슐리외 암살음모에 왕을 가담시키려고 부추기기도 했다.
- ↑ 비밀리에 부리는 부하는 작중 유명한 밀라디라는 여성이 있으며, 아들까지 있는 실존인물이라고는 설이 있다.
- ↑ "이 종이쪽지를 소유한 자가 한 짓은 내 명령에 의해, 국가의 이익을 위해 한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으며, 리슐리외의 이름과 서명이 있었다. 리슐리외가 떠난 후 아토스가 밀라디를 협박해 빼앗았고 호신용으로 잘 보관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