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Pierre de Fermat
피에르 드 페르마
유명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만든 변호사이자 악질 수학 마니아, 또는 아마추어 천재 수학자.[1] 수학계의 골 D. 로저 수학자라기보단 수학을 좋아하는 취미가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그가 수학에 남긴 업적은 생각외로 대단한 것이다. 그를 수학 취미가로 보는 것은 페르마가 시대 상황 탓에 뒤늦게 수학에 발을 디뎠고 정규학계에 편입된 적이 없어서인 듯한데 그의 능력이나 업적으로 볼 때 수학자로 보는 시각도 그다지 틀린 것만은 아니라 할 수 있다.
2 그의 일생
프랑스의 지방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아버지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 즉, 유복자. 어머니는 법률가 집안 태생으로 아들을 열심히 가르쳤고 그 덕에 페르마는 법률가로 성공했다. 즉, 본업은 법률가로 수학자는 아니며 최종적으로 시장직[2]까지 올랐고, 주변 사람들의 평가는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수학은 취미로 한 것으로, 실제로 논문을 발표한 적은 없었다. 취미로 수학을 하는 사람이다 그가 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30세쯤에 고대 그리스의 수학 저술을 접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그냥 가끔가다가 지인들에게 증명에 대한 설명은 없이 '나 이거 증명했으니 풀어 봐라'는 식으로 골탕먹이는 것을 즐겼다. 자신의 증명과 정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약 350년동안 엄청난 후폭풍이 생겼다. 링크
그 외에도 여러 나라의 언어에 뛰어났고 시인이기도 했는데 그러한 시들도 평가가 높았다고 한다. 여러모로 먼치킨.
3 그의 유산과 업적
블레즈 파스칼과 함께 확률론의 기초를 만들어냈다. 또한 르네 데카르트와도 교류가 있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독창적으로 해석기하학을 생각해냈다. 이 해석기하학은 데카르트도 창안한 것이지만 페르마는 그와는 별개로 해석기하학을 만들었던 것이며 그 수준도 데카르트보다 더 높은 수준에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미분적분등, 수학의 여러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정식으로 수학을 공부했던 것은 아니며 수학계에 정식으로 참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연구는 대부분 그가 혼자 공부하고 생각해낸 것이었다. 이 점을 감안하면 그의 수학적 천재성은 실로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페르마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리스메티카'[3]라는 책의 여백에 이것저것 끄적이는 버릇이 있었는데, 페르마 사후 그의 아들이 주석을 정리하여 출판함으로써 비로소 그의 발견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4] 그가 끄적인 내용 중에는 페르마가 혼자서만 증명한 정리들이 많이 있었고 상당수가 곧 증명되었지만 아주 극악무도한 정리 하나가 증명되지 않았으니 바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이다.
3.1 페르마의 미분
페르마는 1629년에 수학사상 최초로 미분을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17세기 초에 요하네스 케플러는 함수가 최대값, 최소값의 근방에서는 함수의 변화량이 매우 작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때 페르마는 케플러의 관찰을 보고 역으로 함수의 변화량이 매우 작을 때 최대, 최소값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식으로 표현하면 f가 최대값을 갖고 h가 매우 작을 때 [math] f(x)\approx f(x+h) [/math] 이고 이때 구해지는 x값에서 f 가 최대값을 가질 것이라 예상했다.[5] 그리고나서 페르마는 [math] f(x)=x(a-x) [/math] [6]라는 함수를 택한 뒤 [math] x(a-x)=(x+h)(a-(x+h)) [/math] 로 놓고 정리하여 [math] 2xh-ah+h^2=0 [/math] 을 얻었다. 이제 양변을 h로 나누어 정리하면 [math] x=\frac{a-h}{2} [/math] 가 되고 h가 매우 작다고 했으므로 x에 [math] h=0 [/math] 을 대입하면 [math] x=\frac{a}{2} [/math] 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f는 최대값을 갖는다.
간단히 말해 페르마는 [math]{\displaystyle \lim_{h\to 0}}\frac{f(x+h)-f(x)}{h}=0 [/math] 이 되는 x값을 찾고 바로 그 지점에서 최대값이 나온다고 이야기한 셈인데, 이는 미분을 이용해서 최대, 최소값을 구하는 요즘의 방법과 꼭 같은 방법이다. 물론 페르마는 미분계수가 0이 되더라도 최대값과 최소값을 구분하려면 어떤 조건이 있어야하는지는 알지 못했고, 미분계수가 0이면 반드시 그 지점에서 함수가 최대값을 갖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수학사에서 나타난 최초의 미분이라는 점에서 페르마의 천재성을 볼 수 있다.
3.2 페르마의 소 정리
- 페르마의 소정리(Fermat's Little Theorem)는 페르마의 대정리와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페르마의 소정리: 소수 p와 p로 나눠지지 않는 자연수 a에 대해서 [math]a^{p-1}[/math]을 p로 나누었을 때 나머지가 1이 된다.
p가 소수(약수가 1과 자기 자신)일 때, [math]a^p - a[/math]는 p로 나누어 떨어진다.
이는 같은 식의 변형이다.
페르마의 소정리는 오일러의 정리의 특수한 경우로써, RSA 공개키 암호방식은 이 페르마의 소정리에 수학적 기초를 두고 개발되었다. 참고로 오일러의 정리는 오일러의 공식과는 다른 것이다. 참조 : 오일러의 정리 한국어판 위키백과
3.3 페르마 소수
[math]F_n =2^{2^n}+1 [/math] 꼴의 수가 모두 소수일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처음 5개까지만 소수인 것으로 확인 되었으며, 이보다 큰 소수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런 꼴의 소수가 더 있는지 없는지는 증명되어 있지 않다.
페르마 소수 항목 참조.
4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가
페르마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리스메티카'의 여백에 훗날 페르마의 대정리(페르마의 마지막 정리)[7]로 알려진 정리를 쓰며 끝줄에 "이 문제의 증명 과정은 전부 알고 있는데 페이지가 너무 짧아서 더이상 안알랴줌안 쓴다" 라고 써놓았다. 역사상 가장 황당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트롤링 사건. 구체적으로는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놀라운 증명을 알고 있으나 여백이 부족하여 여기에 적지 않는다." 라고 했다(…) 백괴사전에도 여백부족이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의 내용은 이렇다. (원문은 해당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3이상의 정수 n에 대해 [math] x^n+y^n=z^n [/math] 이 성립하는 x,y,z가 모두 0이 아닌 정수쌍 (x,y,z)는 존재하지 않는다. |
그 후 그가 남긴 정리가 착착 증명되었지만, 마지막까지 페르마의 대정리는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얼마나 이 문제로 골머리를 썩혔는지, 이 문제를 푸는 사람에게 준다는 상금도 걸렸고, 이 문제를 풀다가 자살하거나 돌아버리는 사람도 속출했으며, 이 문제에 도전한 수학자 전원이 고배를 들었고, 이 문제에 겁을 먹고 손도 대지 않는 수학자들도 속출했으며, 악독하기 짝이 없는 페르마를 비난하는 수학자들도 나왔고, 어떤 미국 소설에서는 수학자인 주인공이 악마와 영혼을 걸고 페르마의 대정리를 풀어달라는 계약을 맺어 악마가 버로우타는 결말이 나오기까지 했다. 그리고 제2의 수학덕후로 만들었다.[8]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350년 동안 죽어라 노력한 끝에 1994년에야, 수학자 앤드루 와일스가 해법을 증명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페르마 사후에 이루어진, 수학적 발전이 누적된 성과들 덕에 겨우겨우 풀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페르마가 시간을 달리는 터무니 없는 천재가 아닌 이상 본래 생각한 정리는 한정된 상황에서만 가능한 정리였을 거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잠깐 터무니 없는 천재 맞잖아. 허나 현대 기술로만 가능하다고 여긴 많은 유물이 실은 간단한 도구로도 만들 수 있다고 입증된 경우도 있고, 우리가 생각 못하는 의외의 방법을 페르마가 발견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9] 그러니까 경탄할 만한 증명이라 한거겠지 게다가 페르마가 '입증했다.'라고 스스로 명기한 증명의 경우, 전부 다 후세의 수학자들에게도 실제로 증명 가능함이 확인되었다. 물론 그가 낸 문제 중에 틀린 것도 있기는 했지만 그러한 것들은 페르마 본인도 입증했다고 단언하지 않고 '증명할 수 있다고 예상된다'고 적은 종류의 문제 뿐이었다고 한다.[10]
- ↑ 페르마가 살았을 당시에는 '프로'수학자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아이작 뉴턴이 나타나서 미적분학으로 물리에 실적용하기 전이라서 어느 나라나 대학도 수학을 잘하는 사람들을 고용하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수학은 완전히 취미놀이였던셈. 하지만 그의 수학적 업적이 당시 기준이나 수학사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업적을 남긴 페르마 자신은 수학을 그저 취미로 치부해 독학으로 익힌것은 감안하면 정말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만약 그가 제대로 마음 먹고 수학에 투신하였으면 수학의 역사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 ↑ 그러나 페르마가 잘했다기보다는 건강했던 탓이다. 왜냐하면 흑사병으로 고위직이 다 죽었기 때문에, 말단 법률가였던 페르마는 빠르게 고위직까지 오른 것이다.
- ↑ 페르마가 수학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된 바로 그 책이다.
- ↑ 후에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던 오일러는 너무나도 문제가 안풀려서 페르마의 후손이 가지고있던 이 책의 원본을 살펴본 다음 n=4일 경우의 증명을 발견했고 오일러는 그 증명의 핵심을 n=3일때에 적용했다. 그리고 이때 복소수가 사용됐기 때문에 복소수가 받아들여진 이유 중 하나.
- ↑ 사실 h가 매우 작으면 f가 연속이라는 가정하에 모든 x값에서 이 식이 성립한다. 도중에 h로 나누는 바람에 특정한 x값이 정해지는 것. 페르마가 이것을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잡은 격으로 알아낸 건지는 불분명하다. 왜냐면 페르마 시절엔 요즘에 정의하는 '함수의 연속'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 ↑ a는 상수. 당시에는 이런 기호를 쓰지 않았다. 페르마 시절에는 변수는 모음(vowel)으로, 상수는 자음(consonant)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 ↑ Fermat's Last Theorem로 불려지며 줄여서 FLT라고도 불린다. 참고로 특정한 수에 대한 경우에는 지수가 n일때 FLT(n) 이라고도 쓰인다.
- ↑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읽으면 알겠지만 그 악마는 하루 정확히는 23시간 20분동안 주인공의 대학 수학과정을 우등생으로서 수료할 정도이지만 포기했고, 수학이 훨씬 발달한 토성에 사는 버섯머리 외계인(다름아닌 미분방정식을 암산으로 풀어낸다!)조차 포기했다.
- ↑ 와일스 이전에도 이 정리를 증명했다고 주장한 사람은 많았다. 그 중에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엉터리 말고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한 수학자들도 많았고, 그럴싸한 증명들도 많았다. 하지만 아직도 페르마의 진정한 증명이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증명하려는 사람들도 많다.
- ↑ 사실 장난을 좋아해서 일부러 빅엿을 먹이기 위한 문제들도 냈기 때문에 사후 비난을 엄청나게 많이 먹었다.
- ↑ 사이먼 싱이 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라는 책을 보면 100쪽이 넘는다고 나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