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Paul Henry Konerko |
생년월일 | 1976년 3월 5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 |
포지션 | 1루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4년 드래프트 1라운드 13번 LA 다저스 지명 |
소속팀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1997~1998) 신시내티 레즈(1998) 시카고 화이트삭스(1999~2014) |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영구결번 | |||||
2 | 3 | 4 | 9 | 11 | 14 |
넬리 폭스 | 헤롤드 베인스 | 루크 애플링 | 미니 미뇨소 | 루이스 아파리시오 | 폴 코너코 |
16 | 19 | 35 | 42 | 56 | 72 |
테드 라이언스 | 빌리 피어스 | 프랭크 토머스 | 재키 로빈슨 | 마크 벌리 | 칼튼 피스크 |
2005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 | |||||
데이비드 오티즈 (보스턴 레드삭스) | → | 폴 코너코 (시카고 화이트삭스) | → | 플라시도 폴랑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前 야구 선수.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대표하는 강타자이자, 팀의 리더였다. 주장으로서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지탱해온 팀 역사에 길이 남을 선수. 화이트삭스 역사에서 그보다 더 뛰어난 펀치력을 보여준 선수는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프랭크 토마스뿐이다.
고등학교 시절 엄청난 활약을 펼치면서 일찍부터 유망주로 주목받았다. LA 다저스가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지명하면서 프로 생활이 시작되었고, 마이너리그에서 최고의 유망주로 성장했다. 원래 포지션은 포수였지만, 수비력이 별로였던데다 당시 다저스의 포수자리는 마이크 피아자라는 리그 최고의 공격형 포수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 그래서 1루수와 3루수를 겸업하는 형태로 포지션을 바꿨다가, 3루수 자리도 포기한다. 수비력도 문제지만 하필 다저스가 나이를 속여서까지 공을 들여 입단시킨 아드리안 벨트레가 3루수 자리에 떡하니 등장했기 때문.
그래서 1루수로 정착했지만 입지는 여전히 불안했다. 당시 다저스의 1루수는 에릭 캐로스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 결과적으로 캐로스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자리가 나지 않았고, 팀 내 입지는 따라서 수준급의 유망주임에도 불구하고 애매했다. 그래서 좌익수도 맡겨봤지만, 다저스에서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리고 메이저리그에 올라오면 기량 발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성적이 좋지 않았다. 거기다, 다저스는 캐로스의 98,99년 FA로이드에 혹해 덜컥 장기계약을 맺어버렸고, 코너코는 정말로 잉여자원이 되고 말았다.
결국 PO 도전을 꿈꾸던 다저스는 뒷문을 잠그기 위해 신시내티 레즈의 주전 마무리 제프 쇼 제프 심 아님를 영입하기로 결정하고, 잉여자원이었던 그를 신시내티에 내줬다. 하지만 신시내티에서도 별 활약이 없자, 신시내티는 그를 마이크 카메론과 맞트레이드하며 다시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보냈다. 이렇게 유망주 하나가 사라지는가 싶었는데(...)
결론은 화이트삭스에서 대 폭발했다. 1999년 화이트삭스로 건너온 첫 해 24홈런을 치며 공격력이 폭발한 것. 이후 좀 부진할 때는 20홈런 90타점, 잘할 때는 40홈런 110타점 정도의 성적을 꾸준히 기록한다. 2003년을 제외하고는[1] 2012년까지 20홈런 밑으로 쳐 본적이 없고, 풀타임 데뷔 이후 15년간 매시즌 120경기 이상 출장했다.
1990년대 초반 프랭크 토마스가 외로이 팀을 지키던 화이트삭스는 코너코의 영입과 매글리오 오도녜즈의 활약이 더해져 일명 TKO타선을 구축하고 중부지구의 새로운 강자로 도약하기에 이른다. 아쉽게도 TKO타선은 오도녜즈의 이적과 토마스의 몰락으로 인해 해체되지만 코너코는 팀에 계속 남아 마침내 2005년 화이트삭스의 88년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에서 대활약하면서 시리즈 MVP에 오른 것. 그 뒤로도 다소 부침은 있어도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화이트삭스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이자 주장으로 팀에 대한 애정이 깊다. 2010년 자유계약선수가 되었을 때, 만일 팀이 재계약을 포기한다면 은퇴를 선언하겠다고 했을 정도. 팀은 코너코와의 재계약을 선택했고, 2011년에 그에 걸맞는 활약을 펼쳤다. 야심차게 영입한 애덤 던이 대삽질하면서 카를로스 쿠엔틴과 함께 둘이 외롭게 타선을 이끌었다. 비록 먹튀들의 대삽질로 PO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0.300 31홈런 105타점을 기록하며 팀 타선을 이끌었다. 팀의 리더로서 그의 면모를 볼 수 있는 것이, 오죽하면 구단주가 코너코를 선수겸 감독으로 임명하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그는 매일 야구생각만 하다 머리가 터질 것이다 라고 한걸로 봐선 농담이겠지만).
2012년에도 팀의 리더로서 시즌을 맞이했다. 4월 25일 통산 400호 홈런 고지에 도달했다. 2012 시즌 최종 성적은 26홈런 75타점. 그리고 2012년 초에 MBC 스포츠 플러스에서 같이 팀생활을 했던 이만수의 감독 취임 기념(?)으로 인터뷰를 했다. 주요 내용은 이만수랑 화이트삭스에서 즐거웠고 앞으로 한국에서 감독 잘하라는 얘기.
그러나 2013년에는 126경기에서 .244 .313 .355 12홈런 54타점이라는 커리어 로우 성적을 찍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코너코가 로스터에 남아있을 때도 애덤 던이 1루수로 뛰는 경기가 많아질 정도로 체력적으로 후달리는 모양. 때문에 시즌 종료 후 은퇴설이 돌았다. 화이트삭스는 코너코의 은퇴를 대비하여 쿠바 출신 거포 호세 아브레우와의 6년 계약을 발표했다.
2013년 12월 4일 화이트삭스와 250만 달러에 1년 계약을 체결했다. 상위에 언급된 대로 체력적인 문제, 그리고 호세 아브레우가 이미 다음 시즌 1루수로 낙점된 상태이기 때문에 1루수와 지명타자를 가끔씩 오가는 벤치 멤버가 뛰게 되었다. 본인 역시 2014년이 커리어 마지막 시즌이 될 것이라고 오래 전 공언한 상태. 후보로 남더라도 화이트삭스에서 은퇴하겠다는 그의 팀의 대한 사랑과 애정이 엿보이는 대목.
그리고 마지막 시즌인 2014년에는 대타와 백업 1루수로 뛰게 된다. 비록 메이저리그 전체의 관심은 같은 해 은퇴하는 데릭 지터에게 집중되었고 이 때문에 코너코의 은퇴는 다소 묻혀진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래도 대인배스럽게 지터의 마지막 시카고 원정경기에서 화이트삭스의 대표로서 지터를 환영해줬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양키 스타디움에서도 지터가 양키스타디움의 1루 베이스를 선물하며 코너코의 은퇴 기념 행사를 열어줬다. 그리고 그의 은퇴 경기인 9월 28일 캔자스시티 로열스전에서 화이트삭스 팬들은 마지막 경기를 마친 팀의 레전드에게 아낌없는 기립박수와 응원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지미 롤린스와 함께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공동 수상하며 명예롭게 은퇴하게 되었다.
통산 성적은 2187경기 .279 .354 .486 2340안타 439홈런 1412타점이다. 거포이면서도 통산 .279의 타율이 보여주듯이 컨택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고, 볼넷:삼진 비율도 1:1.5 정도를 유지하여 출루능력과 선구안도 좋은, 타격에 있어서 흠잡을 데 없는 선수였다.[2] 다만 누적이 조금 못미치고, 주요 수상 실적도 MVP 타이틀은 하나도 없이 올스타 6회가 전부라 아쉽게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TKO 트리오의 일원으로 출발하여 커리어 중후반기에는 타선을 이끄는 선수로 팀의 우승까지 이끌어낸 팬들의 가슴 속에 깊이 남은 프랜차이즈 스타였기에 그의 등번호 14번은 화이트삭스의 영구결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