馮楷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
우금, 장료, 장합, 주령, 이전, 노초 등과 함께 7군을 이끌었고 조엄이 장릉태수를 겸임하면서 도독호군으로 임명될 때 조엄의 감독을 받았으며, 조일청은 이 7군을 둔 것을 아마도 양양이 중요한 진이기에 특별히 막강한 군을 둬 지키게 했다고 서술했다.
2 창작물에서
창천항로에 등장한다.
노초와 함께 여강의 환성을 공격할 때 하후연의 부장으로 참전하는 것으로 나오며, 16년 전에 일어난 서주대학살로 백성들이 여강에 도달해 원술의 폭정이나 손책이나 산적들의 침공에 유린당해 서로 잡아먹으면서 살아남는 처지로 북쪽에 유복이나 온회 등이 잘 다스리는 합비가 있었지만 이들은 여강에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조조는 이들을 중원으로 강제로 이주시켰고 이 강제 이주로 인해 민중의 소동이 일어나 여강, 구강, 기춘, 광릉 십여만 호 등이 장강을 넘어 강남으로 이주했으며, 그 때문에 장강의 서북 일대는 인가가 모두 사라져 합비 이남에는 환성 만이 남게 되었고 호족인 뇌서가 봉기했다.
뇌서를 공격할 때 하후연이 100명의 기병으로 좌익을 고립시키라는 명령을 받으면서 승상(조조)이 곧 도착한다고 보고한다.
한중 공방전 때 조운이 황충을 구원하러 가려다가 조조의 군사를 조우하게 되면서 조운이 공격하다가 퇴각하자 수상하다고 여기면서도 한 번 일부러 공격해서 의중을 떠보고 오냐고 조조에게 물었지만 퇴로를 확보하면서 노병을 앞세워 천천히 진격하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