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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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1

위서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
장료악진우금장합서황

于禁
(? ~ 221)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는 문칙(文則). 연주 태산군 거평현 사람.

1.1 정사

1.1.1 초기 생애

황건적이 봉기하자 포신이 무리들을 불러 모았고 우금이 이에 의탁해서 뒤따랐다. 조조가 연주를 다스리게 되자 우금은 그의 무리와 함께 나아가 도백(都伯)이 되었고 장군 왕랑(王朗)에 속했다. 왕랑이 그를 높이 평가해, 우금이 대장군을 맡을 재능이 있다고 추천했다. 조조가 우금을 불러 대화를 나누어 보고 군사마로 삼고, 군을 이끌고 서주로 나아가 광위를 공격하게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함진도위에 임명했다.

1.1.2 복양 전투

조조를 수행해 복양에서 여포를 토벌했는데, 별도 군으로 성 남쪽에서 여포의 2진영을 격파했다. 또한 별도로 군을 인솔해 연주 동평국 수창현에서 고아(高雅)를 격파했다. 조조를 수행해 연주 동평국 수장현, 연주 제음군 정도현, 제음군 이호현을 공격하고, 진류군 옹구현에서 장초를 포위해 모두 함락시켰다.

1.1.3 여남 전투

조조를 수행해 황건적의 유벽, 황소 등을 정벌하기 위해 판량에 주둔했는데, 황소 등이 조조의 둔영을 야습하자 우금이 휘하 군을 통수해 그들을 격파해 황소 등을 참수하고 그 무리들을 모두 항복시켰다. 평로교위로 올렸다.

1.1.4 완 전투

조조를 수행해 완에 이르러 장수를 항복시켰다. 장수가 다시 모반하자 조조는 싸움이 불리해 패하고 형주 남양군 무음현으로 돌아왔다. 이때 군중에 난이 일어나 장수들은 각각 조조를 구하러 갔는데, 단지 우금만이 휘하의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싸우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며 비록 사상자가 생겨도 진을 흩뜨리지 않았다. 그러다 적의 추격이 느슨해지자 서서히 행대(行隊)를 정돈한 채 북을 울리며 돌아왔다.

조조가 있는 곳에 당도하기 전, 도로에서 십여 명이 창에 찔려 부상을 입은 채 알몸으로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우금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길, 청주병에게 약탈당했다고 했다. 당초 황건적이 항복했을 때 그들을 청주병이라 이름하고 조조가 관용을 베풀었었는데 이 때문에 감히 노략질을 일삼은 것이다.

우금이 노하여 그 무리들에게 말했다.

청주병도 함께 조공(조조)에 속하는데 다시 도적질을 한단 말인가!

이에 그들을 토벌하고 여러 명의 죄를 물었다. 청주병이 급히 조조에게로 달아나 고해 바쳤다. 우금은 도착한 뒤 먼저 군영의 보루를 세우며 곧바로 조조를 찾아가 배알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우금에게 말했다.

청주병이 이미 그대를 고해바쳤으니 서둘러 공께로 나아가 변명해야 합니다.

우금이 말했다.

지금 적이 배후에 있어 어느 때고 들이칠 터인데, 먼저 방비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적을 감당할 수 있겠소? 게다가 공께서 총명하시니 참소가 어찌 통하겠소!

천천히 참호를 파고 영채를 안돈시킨 후에야 비로소 조조를 배알하고 그간의 정황을 진술했다.

조조가 기뻐하며 말했다,

육수에서 겪은 곤란으로 나는 참으로 급박했소. 그러나 장군은 변란에 처해서도 군사를 정돈해 적을 치고 보루를 단단히 했으니 옛 명장이라 한들 어찌 이보다 뛰어날 수 있겠소!

이에 우금의 앞뒤 공을 따져 익수정후에 봉했다.

1.1.5 수춘 전투

무제기에 따르면 가을 9월, 원술이 예주 진국을 침략하자 조조가 동쪽으로 가서 정벌했다. 원술이 조조가 친히 온다는 것을 듣고 군을 버리고 달아나며 그의 장수인 교유, 이풍, 양강, 악취를 남겼다.

조조를 수행해 예주 진국 고현에서 교유를 포위하고 교유 등 4명의 장수를 참수했다.

수춘 전투 이후에 우금은 다시 조조를 수행해 양에서 장수를 공격하고, 하비에서 여포를 사로잡았다.

1.1.6 관도대전

우금은 별도로 사환, 조인과 함께, 사견에서 휴고를 공격해 깨뜨리고 그를 참수했다.

조조가 처음 원소를 정벌할 때 원소의 병력이 강성했으나 우금은 선봉이 되기를 자원했다. 조조가 이를 장하게 여기고 보졸 2천 명을 주어 이끌게 했다. 우금은 연진을 지키며 원소와 맞섰고 조조는 군을 이끌고 관도로 돌아갔다.

유비가 서주를 들어 모반하자 조조가 동으로 원정했다. 원소가 우금을 공격했는데 우금이 굳게 지켜 함락시킬 수 없었다. 또한 악진 등과 함께 보병과 기병 5천을 이끌고 원소의 따로 설치한 군영을 들이치고, 연진 남서쪽으로부터 황하를 따라 하내군 급현, 하내군 획가현의 2현에 이르기까지 보취(保聚) 30여 둔을 불사르고 적군을 참수하고 사로잡은 것이 각각 수 천에 이르렀고, 원소의 장수 하무, 왕마 등 20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조조는 다시 우금을 보내 별도로 군을 이끌고 하남군 원무현에 주둔시켰는데, 두씨진에 있던 원소의 따로 설치한 군영을 격파했다. 비장군으로 올렸다.

그 뒤 조조를 수행해 관도로 돌아왔다. 조조는 원소와 더불어 진영을 잇달아 세우고 토산(土山)을 만들어 서로 대치했다. 원소가 진영 안으로 활을 쏘아대자 사졸들이 다수 죽거나 부상을 입어 군중에서 이를 두려워했다. 우금이 토산을 맡아 지키며 힘을 다해 싸우고 기백을 떨쳤다. 원소를 격파하고, 편장군으로 올렸다.

1.1.7 박망파 전투

이전전에 따르면 유표는 유비를 보내 북방을 침략하도록 하고 엽에 이르렀다. 조조는 이전을 보내 하후돈을 따라가서 유비와 대항하도록 했다. 유비는 하루아침에 군영을 불태우고 떠났으며, 하후돈은 군사들을 이끌고 그를 추격하려고 하는데 이전이 말했다.

적군이 이유도 없이 물러났으므로 틀림없이 매복하고 있을 것으로 의심됩니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좁고 초목이 우거져 있으므로 추격할 수 없습니다.

하후돈은 듣지 않고 우금과 함께 그를 추격하였고, 이전은 남아 군영을 지켰다. 하후돈 등은 과연 적군이 매복해 있는 가운데로 들어가 전세가 불리해졌다. 이전이 구하러 가자, 유비는 구원병이 도착한 것을 보고 흩어져 물러났다.

1.1.8 창희 토벌

기주가 평정되고 창희가 다시 모반하자 우금을 보내 이를 정벌케 했다. 우금이 급히 진격해 창희를 들이쳤다.

하후연전에 따르면 창희가 모반하자 우금을 보내 공격하게 했는데 이기지 못하자 다시 하후연을 보내 우금과 힘을 합치게 했다. 마침내 창희를 공격하여 10여 둔영을 항복시켰고 창희는 우금에게 나아가 투항했다.

창희는 우금과 교분이 있었으므로 우금에게로 나아가 항복했다. 제장들은 모두 창희가 이미 항복했으므로 응당 조조에게로 호송해야 한다고 했다. 우금이 말했다.

포위당한 후에 항복한 자는 사면하지 않는다 했소. 비록 창희가 옛 벗이긴 하나 나 우금은 절개를 잃을 순 없소!

직접 창희의 형을 집행했는데 눈물을 흘리며 참수했다.

이때 조조는 청주 북해국 순우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말했다?

창희가 내게로 와 항복하지 않고 우금에게 항복했으니, 어찌 그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금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서주 동해군이 평정되자 우금을 호위장군에 임명했다.

1.1.9 진란 토벌

그 뒤 우금은 장패 등과 함께 매성을 공격하고, 장료, 장합 등은 진란을 공격했다. 우금이 도착하자 매성은 그 무리 3천여 명을 이끌고 항복했다. 그러나 항복한 후 다시 모반하여 진란에게로 달아났다. 장료 등은 진란과 서로 대치하며 군량이 부족했는데, 우금이 군량을 계속 보내주어 마침내 장료가 진란, 매성을 참수했다. 식읍을 2백 호 늘려주어 예전과 합해 모두 1,200 호가 되었다.

1.1.10 형주 정벌

조엄전에 따르면 당시 우금은 영음에 주둔하고 있었고, 악진은 양적에 주둔하였으며, 장료는 장사에 주둔하였는데, 그 장수들은 기질에 따라 행동하고 대부분 서로 협력하지 않았으므로, 조엄에게 세 군대의 사무를 동시에 담당하도록 했다. 조엄은 매번 규분이 있을 때마다 훈계하여 깨우쳤으므로 결국 서로 친하게 되었다.

조엄전에 따르면 조조가 형주를 정벌할 때, 조엄에게 장릉태수를 겸임하도록 하고, 도독호군으로 바꿔 임명하고 우금, 장료, 장합, 주령, 이전, 노초, 풍해 등의 7군을 통솔하게 했다.

이 무렵 우금, 장료, 악진, 장합, 서황이 모두 이름난 장수로, 조조가 매번 정벌할 때마다 행군할 때는 군의 선봉이 되고 군을 물릴 때는 배후를 지켰다. 우금은 군을 이끌 때 엄정하였고 적의 재물을 얻어도 사사로이 차지하는 일이 없어 이 때문에 특히 중한 상을 받았다. 그러나 법으로 아랫사람들을 다스려 병사들의 환심을 크게 얻지는 못했다.

조조가 주령을 항상 증오하여 그의 군영을 뺏고자 했는데, 우금이 위엄이 높았으므로 우금으로 하여금 수십 기를 이끌고 명령서를 갖고 가게 했다. 우금이 곧장 주령의 군영에 도착해 그 군을 빼앗았으나 주령과 그 부하의 무리들은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그리고 주령을 우금의 부하독(部下督)으로 삼게 했으나 그 무리들이 모두 두려워 떨며 복종했으니, 사람들이 우금을 두려워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좌장군으로 올리고 절월을 내렸다. 식읍 5백 호를 떼어내어 아들 한 명을 열후로 봉했다.

1.1.11 번성 공방전

219년, 조조가 장안에 있을 때 조인으로 하여금 번에서 관우를 치게 하고 또한 우금을 보내 조인을 돕게 했다.

가을, 큰 장맛비가 내렸다. 한수(漢水)가 범람해 평지에 물이 차올라 수 장(丈)에 이르렀고 우금 등의 칠군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이 제장들과 함께 고지에 올라 물을 바라보니 회피할 길이 없었고, 관우가 큰 배를 타고 와서 우금 등을 공격하자 마침내 우금은 투항하고, 오직 방덕만이 절의를 굽히지 않고 싸우다 죽었다. 조조가 이 일을 듣고 오랫동안 슬피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우금을 30년 동안 알고 지냈지만 위난에 처하자 오히려 방덕보다 못하리라는 것을 어찌 짐작했겠는가!

오주전에 따르면 관우는 수군을 이용하여 우금 등의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전부 포로로 잡아 강릉으로 압송했다. 단지 양양성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

여몽전에 따르면 위에서 우금을 시켜 번성을 구하게 했지만, 관우는 우금 등과 인마(人馬) 수만을 다 잡아 들이고, 양곡이 부족함에 기탁해 상관(湘關)의 미곡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손권이 이를 듣고 마침내 실행에 옮겼는데, 먼저 여몽을 파견해 선봉에 서도록 했다.

오주전에 따르면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곳의 노약자를 위로하였으며, 우금 등의 죄수를 풀어 주었다.

때마침 손권이 관우를 사로잡고 그 군사들을 포획하자 우금은 다시 오로 보내졌다.

1.1.12 오나라에서

우번전에 따르면 위나라 장수 우금이 관우에게 붙잡혀 구금되어 있었다. 손권은 강릉에 이르자, 그를 풀어주고 서로 만나보기를 요청했다. 그 후 어느 날 손권은 말을 타고 우금과 나란히 외출하게 되었다. 우번은 우금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투항한 포로이거늘 어찌 감히 우리 주군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느냐.

그러고 나서는 채찍을 들고 우금을 때리려 하였다. 이때 손권이 질책하여 이를 저지시켰다.[1]

그 후 손권은 누선에서 신하들을 모아 연회를 열자 우금은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우번이 또 말했다.

당신은 거짓으로 사면을 구하려 하시오?

손권은 우번이 자신의 뜻과 같지 않아 원망하고 불평했다.[2]

우번전 주석 오서에 따르면 손권이 위나라와 화친했으므로 뒤에 우금을 북쪽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우번이 다시 간언했다.

우금은 수만 군사를 패배시키고 자신은 항복한 포로가 되어 또한 죽지도 못했습니다. 죄를 지은 도적을 풀어주는 것이니, 그를 참수해 신하로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보여주느니만 못합니다.

손권이 이를 듣지 않았다. 군신들이 우금을 전송할 때 우번이 우금에게 말했다.

경은 오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 마시오. 내 계책이 때마침 쓰이지 못했을 뿐이오.

비록 우금이 우번에게 증오를 받았으나 도리어 우번을 매우 칭찬하니 조비가 늘 우번을 위해 조정에 빈 자리를 만들어두었다.

1.1.13 죽음

조비가 황제가 되고 손권이 번국을 칭하자 우금을 돌려보냈다. 조비가 우금을 불러서 만났다. 우금은 수염과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형용이 초췌했는데,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조비는 순림보와 맹명시의 고사를 들어 그를 위로하고 안원장군에 임명했다.[3]

번성에서의 패배는 수재(水災)가 사납게 닥친 것일 뿐 싸움에서 잘못한 것이 아니니 우금의 관등을 복구한다.

오에 사자로 보내고자 하여 우선 북으로 업에 가서 조조의 능묘를 참배하도록 했다. 조비는 미리 사람을 보내 능옥(陵屋)에 관우가 싸움에서 이기고 방덕이 분노하며 우금이 항복하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우금이 이를 보고 부끄럽고 분한 마음에 병을 얻어 죽었다.

아들인 우규(于圭)가 후사를 이어 익수정후에 봉해졌다. 시호를 내려 여후(厲侯)라 했다. 시법에서 갈 려(厲)는 죄없는 사람들을 살육한 경우를 의미한다. 우금은 죽고 나서도 조롱을 받은 것이다. 조조의 묘정에는 수많은 건국의 공신들이 모셔졌으나 우금만은 모셔지지 않았다.

북송사마광자치통감에서 이렇게 평했다.

우금은 수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도 패해 죽지도 않고 산 채로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다시 돌아왔으니 조비가 그를 버리는 것도 옳고, 죽이는 것도 옳다. 그러나 능묘에 그림을 그려서 능욕한 것은 임금답지 않은 행위이다.

1.2 연의

삼국지연의에선 포신의 부하였을 때의 행적은 나오지 않고, 처음부터 조조의 휘하로 들어간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전위 등용 장면이 있어서 다들 잊어버린다. 완성 전투의 간지나는 장면도 나오긴 하는데 역시 바로 전에 나왔던 전위의 폭풍간지 장면 때문에 묻힌다.

유종이 항복한 뒤 조조의 명령으로 유종과 채부인을 제거했다. 하지만 정사에서 유종은 그 후에도 승진하면서 잘 먹고 잘 살았다.

적벽대전에서는 참수된 채모와 장윤을 대신하여 우금과 모개가 수군 도독으로 세워지지만 조조가 제갈량에게 낚여서 화살만 쏘라고 해서 그대로 수행한다.

마초가 아버지 마등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장안을 공격해 함락하고 동관을 함락했다. 그때 마초와 일기토를 벌이나 패한다.

한수의 부장인 이감이 마초의 추격에서 달아날 때 마초에게 활을 쏘나 마초가 피해 이감을 맞춘다. 마초가 그에게 덤벼들자 달아난다.

방덕을 부장으로 데리고 번성의 조인을 구원하러 출전하는데 여기서 방덕이 공을 세우는 것을 질투해 방덕이 관우를 다 잡은 걸 방해하는 장면이 창작되었다. 그리고 독장인 성하가 수공을 간언하는데 무시했다가 관우에게 털려서 항복한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서 조조의 묘지기로 보내지는데 자신이 관우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그림을 보고 화병으로 죽는건 정사와 비슷하다.

1.3 평가

1.3.1 부정적 평가

우금이 윗사람에게 너무 지나치게 보여주기식 전시행정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대표적으로 우금하면 떠오르는 청주병 일화가 있는데 이는 우금의 엄정한 처사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부대도 아닌 다른 부대의 병사를 멋대로 처벌한 것은 직권남용이었다. 충분히 명령으로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우금의 말마따나 급한 것은 먼저, 그 다음은 나중에라면 급히 진영을 독려하여 적을 막고 그 다음에 죄를 묻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창희를 죽인 것 역시 비판받을 일인데, 친분이 있는 친구를 죽여 공정하다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었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저렇게 친분까지 거론해가며 죽여야 할 이유가 있었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창희가 배신이 잦았다지만 그것을 의심한다면 조조에게 창희를 호송하여 조조가 판단할 문제지 우금이 부하 장수들의 의견도 듣지 않고 창희를 죽인 것은 분명히 의구심이 들 만한 대목이다. 배송지도 우금이 군법에 따랐다고 하지만 죄인을 호송해야하는 명을 거슬렀으니 우금이 사후에 나쁜 시호가 붙은게 당연하다고 비판했다.

관도대전까지는 우금의 전공이 돋보이는 편이다. 조조군 초반으로만 한정하면 조인, 악진과 더불어 가히 조조군을 먹여살린 3톱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209년부터 219년 번성 공방전까지, 무려 10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우금의 큰 전공은 없다. 그 사이 장료, 악진, 서황, 장합이 하북, 회수, 형주, 관서 등 각지에서 꾸준히 활약을 이어간 것에 비하면, 우금의 전적은 돋보이도 않을 뿐더러 다른 장수들에 비하면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것.

진수가 장합, 우금, 악진의 경우엔 서술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주된 기록이 없어 행적을 상세히 갖추지 못했다고 평한 바 있으나, 다른 초기 장수들도 간략한 서술이나마 관도전 이후의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면, 유독 우금만 기록이 부족했다는 추측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즉, 이는 기록 부족이 아니라 우금 본인이 조조를 계속 모셨음에도 큰 전공이 없었던 것으로 보는게 여러모로 아귀가 맞을 듯 싶다.

말년에 관우에게 패배하고 조조가 믿고 맡긴 정예 7군을 모조리 헌납한 행적은 그의 인생에서 지워지지 않을 실책이었으며 30여년의 세월 동안 조조에게 충성을 바친 그 동안의 행적을 모두 부정당할만한 사건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조조마저도 탄식 할 정도였다.

만약 우금이 부하들만은 살리고 자신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면 지금껏 지켜왔던 절의까지 보존할 수 있다. 그러나 우금은 부하들의 목숨만을 구걸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더 연장하여 온갖 안 좋은 꼴을 보았다.

1.3.2 긍정적 평가

우금의 장점은, 조조가 가장 어렵고 보잘것 없던 시기에도 숱한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그의 패업에 공헌한 일관성이었다. 황건적 황소가 조조의 둔영을 야습했을 때 우금이 그를 구했고, 장수가 조조를 위기 일발로 몰아넣고, 청주병이 이를 기회삼아 군을 어지럽혔을 때 오직 우금만이 군을 정비하며 조조를 구했다. 모두가 원소를 두려워할 때 우금은 선봉을 자처했고, 조조마저 관도에서 회군을 생각할 때 우금은 기백을 떨치며 분전했다. 이렇듯 조조 인생 초기의 모든 위협에서 우금은 일관성 있는 충성과 위엄을 보여줬고, 조조는 바로 이 점을 신뢰했던 것이다.

우금이 병졸들에게 법을 엄정히 집행해 인심을 얻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긴 하나 병졸들에게 법을 집행한 것은 그 병졸들이 백성들을 약탈해서였고 병사들이 백성들을 약탈하는 것을 법을 집행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면 그게 더 문제있다. 또 우금은 수많은 병졸들을 살리기 위해 항복한다.

209년부터 우금의 전공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우금을 폄하하기도 하는데 정사에서 장료, 악진, 장합, 서황과 동급의 장수로 평가되고 있다. 소위 큰 전공이 없다는 그 시점에도 다른 오자양장들과 같은 급의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우금을 대신할 수 있는 명장 자원이 충족된 이후, 우금의 역할은 이러한 일관성과 짬밥을 바탕으로, 대군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것으로 점차 변화된 듯 하다.

다른 오자양장들처럼 눈에 띄는 특별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해 기록이 없긴 해도 이 시기에도 조조 밑에서 군을 다스리면서 충분히 중용 받았다. 관우를 상대할 때 우금이 보내진 것은 가장 잘나서가 아니고 제일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허울 뿐인 장수였다면 조조가 그런 장수에게 정예 7군을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우금의 항복은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합리적인 결정이다. 적에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자연재해로 병사들이 죽는 것은 진짜 개죽음이다.[4] 만약 우금이 자신의 자존심 지킨답시고 자신의 병사 3만 명을 익사시킨 일이 현대에 일어났으면 해당 사령관은 인간 취급 못 받는다. 문제는 우금이 살았던 시기는 현대가 아니라 고대 사회였기에 인명보다는 대의명분이 더 중요했으므로 대의를 저버리고 항복한 우금이 이전의 행적과 관련없이 당대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항복이라는 선택을 함으로써 약 30년 간 쌓아온 자신의 정체성을 한순간에 박살냈다. 충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무엇보다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선택을 했지만, 그 선택 하나로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의 스트레스와 모욕을 받으며 삶을 마감했다.

1.4 기타

2009년 12월, 조조의 묘로 추정되는 고분이 발굴되었지만 우금이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이 그려진 벽화는 보이지 않았다. 발견된 화상석이 그 벽화가 아니냐는 떡밥도 돌았으나, 탁본 결과 전혀 다른 그림으로 밝혀졌다. 물론 그 무덤이 조조의 무덤이 맞는지도 확실치 않다.

1.5 미디어 믹스

2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2

牛金
(? ~ ?)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2.1 정사

남군 공방전에서 조인의 부장으로 나온다. 오나라주유감녕을 시켜 이릉성을 탈취하자 조인의 명령으로 요격하려 갔다가 주유에게 직접 공격당하면서 포위당해 죽을 뻔 했지만 조인의 용맹 덕분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관직은 후장군에 이르렀다.

230년에 사마의를 따라 싸울 때 한양에 주둔해 제갈량과 서로 조우하자 사마의의 명으로 경기병으로 유인했지만 접전을 치루던 도중에 제갈량이 퇴각하면서 기산으로 추격했다.

235년에 마대가 공격하자 사마의의 명으로 이를 격파했다.

238년에는 공손연을 토벌할 때 호준과 사마의와 보병, 기병을 합친 4만을 이끌고 종군했다.

2.2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인의 부장으로만 딱 한번 등장한다.

남군 공방전에서 도망치는 척하던 정봉을 쫓다 포위되지만 조인의 구원으로 생환한다. 그 후에도 주유군을 상대로 분전하지만 결국 강릉은 함락되어 조인과 함께 양양으로 피했다.

2.3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1탄부터 13탄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은 개근 장수. 능력치는 잡무관이지만, 1번 항목의 우금에 비해 무력만 이상하게 높다. 이후로 조금 깎여나가 70대 후반의 무력을 유지 중이며 1번 항목의 우금보단 무력이 근소하게 높게 나오고 있다.

삼국지 3에서는 무려 무력을 82까지 찍었다. 장군이 될 수가 있는 능력치이다. 1번은 장군이 못되는 능력치를 가지고 있으니 코에이는 더욱 까인다. 육지 73/수지 70/무력 82/지력 35/정치 21/매력 57/야망 7/운 7/냉정 5/용맹 8이니 1번보다 못한 활약의 장수가 1번보다 능력치는 좋다.

삼국지 5에서는 분기, 무쌍을 가지고 있고, 허저와 같이 후반기의 맹장이 된다. 무력은 81로 1번 우금보다 2가 높다.

삼국지 9에서는 통솔력 73/무력 80/지력 42/정치력 46의 능력치로 1의 우금보다 무력이 높고 돌진을 보유하고 있다. 노병이나 궁기병계 병법이 없어 공성전에서 활약하지 못 하는 등 무력 빼고는 전부 1의 우금보다 안 좋다는 게 1의 우금으로선 천만다행.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1/무력 79/지력 40/정치력 38/매력 42로 전형적인 멧돼지형. 특기까지 5개(돌격, 저지, 회복, 역공, 나선) 모두 무력 의존이다. 여기서도 1번 우금(무력77)보다 무력 2가 높다.

삼국지 11에서의 특기는 연전. 1번 항목은 지못미.

삼국지 12에서는 잉여 전법인 방어강화이다. 드디어 1의 우금이 울분을 풀었다.

삼국지 13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72/79/38/40 이며 중신특성은 없다. 병과적성은 창병 B/기병 A/궁병 C 이며 전법은 공격강화. 특기는 훈련 2, 순찰 1, 신속 1, 분전 3, 견수 3, 일기 2이다.

영걸전 시리즈삼국지 영걸전 여남 전투에서 등장한다. 1의 우금은 장병이고 이쪽은 중기병으로 등장. 이후에도 장판파나 강릉 전투, 오와의 화친 후의 양양 전투 등 생각보단 자주 얼굴을 내민다. 조조군 특유의 템빨을 아쉽게도 갖추지 못한 장수인지라 능력에 비해서는 조조군의 타 장수들보다 공격력과 방어력이 낮은 편. 그래도 어째서인지 기본 무력이나 통솔이 오자양장 우금을 비롯한 다른 조조의 네임드들보다 훨씬 좋긴 하다.

삼국전기 시리즈삼국전기2에서 적보스로 등장. 일정 점수 이상이면 등용 가능하다. 공식 설정에 따르면 젊고 용맹하나 머리가 나빠 적의 계략에 쉽게 걸려 공보다 과가 많은 필부에 거칠고 덤벙대는 등 온갖 안 좋은 평은 다 적어놨다. 하지만 성능은 최강급. 미칠듯한 성능의 사사메유키로 최강의 스코어링 머신이다. 우금을 꺼내서 에어리얼로 공중 띄우기→세우광세→에어리얼→세우광세, 이렇게 무한 반복해도 100단위급 콤보에 기절초풍할 점수가 나오게 된다. 에어리얼 못하는 사람은 제갈량을 골라서 팔진도 쓴 다음에 세우광세 사용해도 50콤보는 줄기차게 뽑아낼 수 있다. 참고로 보스 러쉬에서 이 짓 했다가는 7번째 이후 진 여포 등장하니까 진 여포 잡을 실력 안되면은 8번째 보스를 피통 갑 손권으로 해놓고 손권으로 스코어링하는걸 추천한다.

드라마 삼국에서는 남군 전투 편에서 첫 등장. 처음 500여 병사를 이끌고 오군 선봉대와 결사 항전을 벌이는데 병사들은 거의 죽어가는 마당에 본인은 말타고 혼자서 무쌍을 벌인다. 그 후 주유 습격 시에도 깨알같은 무쌍을 시전한다.

창천항로에서는 형주 공방전에서 참전해 번성에서 조인의 부장으로 나섰다가 관우에게 죽는다.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도 가끔 나온다. 처음엔 3편 호위병 디폴트 네임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이후 클론으로 승격(...). 초기 정발판의 경우 상위 항목인 오자양장 우금과 같이 얄짤없이 같은 클론이라 헷갈리게 나온다. 가장 심했던 시절이 5편인데 골때리게도 저 두명의 우금이 같은 전장에 나오는 사태가 있다. 기껏 극클론 우금 잡았더니 어디선가 창우금이 튀어나온다. 그래서 한국 유저들은 번성 전투에서 "어? 왜 우금이 2명이지?"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다행히도 오자양장 우금은 최근 무쌍 무장으로 클론에서 탈출하였고 이 우금은 최근 시리즈에선 얼굴을 잘 안 비춘다.
  1. 우번은 우금, 미방 등 투항자들에게 가혹했다. 웃기게도 남의 투항에는 엄격한 우번도 왕랑을 떠나 손책에게 투항한 인물이었다.
  2. 우번의 이러한 성격은 손권을 자주 분노하게 만들었기에 손권은 우번을 좌천의 형식으로 내다버리게 된다.
  3. 본래의 관직이었던 좌장군은 장합이 차지하고 있어서 더 낮은 직위인 안원장군에 임명된 것이다.
  4. 병사들을 개죽음으로 이끈 막장 장군들이 있다. 삼대오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