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충

곤충에 대해서는 황충(곤충)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촉서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
관우장비마초황충조운

파일:Attachment/황충/d4.jpg
黃忠
(? ~ 220)

늙은 장수라면 황충을 꼽는데(老將說黃忠)

서천 취하면서 큰 공로 세웠더라(收川立大功)
금 쇄갑옷 다시 걸치고(重披金鎖甲)
쇠 받쳐댄 활을 당겼어라(雙挽鐵胎弓)
담력은 하북을 놀라게 하고(膽氣驚河北)
위엄 있는 이름 촉 땅 울렸지(威名鎮蜀中)
죽을 때 머리는 눈과 같았지만(臨亡頭似雪)
그래도 영웅 기상 보여주었네(猶自顯英雄)

1 개요

후한 말의 유표, 한현의 수하 장수이자 삼국시대 나라의 무장.활쏘는 할아버지. 촉한오호대장군 중 한 명. 오호대장군 중 유비의 영토 확장에서는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장수. 는 한승(漢升).[1] 남양 사람으로써, 시호는 강후(剛候)이다.

2 정사

2.1 유비를 따르기 전까지

형주목 유표가 그를 중랑장으로 삼고 조카 유반을 보좌하게 했다. 유반은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인데, 그 이유는 유표가 영역 확장을 피하고 현상유지에 더 관심이 있었던데 비하여, 그는 강동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기 때문이다. 유반을 경계한 손권은 태사자로 배치해 수비하게 했다.[2]

황충은 유반 아래서 유현을 수비하다가 조조가 형주를 점령한 후 임시로 비장군직을 받고 장사태수 한현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2.2 유비를 따르다

적벽에서 패한 조조가 형주에서 철수하고 유비가 세력을 확장하자 그를 따랐다.

황충은 유비가 입촉했을 때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그는 항상 앞장서서 적진으로 달려가 용맹을 과시했는데, 그 공이 삼군의 으뜸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을 보면 많은 활약을 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선주가 대노하여 유장의 백수군독(白水軍督) 양회(楊懷)를 불러 그의 무례함을 질책하며 그를 참수했다. 이에 황충(黃忠)과 탁응(卓膺)을 시켜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도록 명했다. - 선주전
황충은 늘 앞장서서 적진에 침투하여 함락시켰고, 용맹하고 굳셈이 삼군(三軍)의 으뜸이었다. - 황충전

2.3 한중 공방전

한중 공방전 때 황충은 말 그대로 맹활약을 했고, 법정과 협력하여 조조의 친족이자 조조군을 대표하였던 명장 하후연을 전사시키는 대공을 세웠다.

하후연의 전사를 접한 조조가 친정에 나서자, 황충은 조조의 진지를 몰래 기습하여 적의 군량을 탈취하려 시도했으나, 성공여부에 대한 언급은 기록에 없다. 부장이었던 조운이 염려했을 정도로 그의 귀환이 늦어졌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성공했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듯하다.

건안 24년(219년), 한중(漢中) 정군산(定軍山)에서 하후연(夏侯淵)을 공격했다. 하후연의 군대는 매우 정예했으나, 황충은 적의 예봉을 꺾어 어김없이 전진하고 사졸들을 격려하여 이끌고, 징과 북소리는 하늘을 울리고 환성은 골짜기를 뒤흔드니, 한번 싸움으로 하후연을 참(斬)하고 하후연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올랐다. - 황충전
건안 24년(219년) 봄, 양평에서 남쪽으로 면수(沔水)를 건너 산을 따라 점차 전진하여 정군산(定軍山)에 영채를 세웠다. 하후연이 군을 이끌고 와서 그 땅을 다투었다. 선주는 황충에게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이를 공격하게 하여 하후연군을 대파했고, 하후연과 조공이 임명한 익주자사 조옹(趙顒) 등을 참수했다. - 선주전
하후연이 패하자 조공(曹公)이 와서 한중 땅을 다투었고 북산(北山) 아래에 군량(米)을 운반하여 수천만 포대에 달했다. 황충(黃忠)이 가히 이를 탈취할 수 있다 하였고 조운의 군대가 황충을 수행해 군량을 탈취하려 했다. 황충이 기한을 넘겨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이 수십 기(騎)를 거느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위[3]를 나와 황충 등을 마중하며 상황을 살펴보려 했다 - 조운별전

정군산에서의 활약에 대해 과연 황충이 하후연을 직접 죽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어왔으나, "一戰斬淵"라는 표현만으로는 두 장수가 직접 무기를 주고받았다고 생각하기 부족하다. 여기서의 "斬"은 한 사람의 물리적인 공격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군사를 동원한 전투 중 하후연을 패사시켰다고 보는 쪽이 타당하다. 자세한 사항은 일기토 문서 참조.

싸움 후 황충은 한중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사정장군인 정서장군이 되었다.

2.4 사방장군

유비가 한중왕에 즉위한 후에는 사방장군 중 하나인 후장군에 봉해졌다.[4] 이는 전장군 관우, 우장군 장비, 그리고 좌장군 마초와 동급의 위상을 얻는다는 뜻으로써, 황충이 전국구급 무장으로 대우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안에서도 차이가 있어서 관우, 마초 ,장비는 가절(관리를 죽일수 있는 권리)을 받지만 황충은 받지 못한다.

이때 제갈량은 관우는 형주에 있었기에 그가 공을 세우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으므로 자존심이 드센 그의 성격상 황충과 나란히 같은 대열의 관직 봉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 제지했지만, 유비가 그를 직접 설득할 것이라면서 그대로 임명하였다. 역시 관우는 강하게 반발하여 불편함을 드러내었으나, 비시가 고사를 인용하여 그를 설득하였고 관우는 마음을 고쳐먹고 관직을 받아들였다. 유비군 내에서 그 두 인물의 짬밥 차이가 굉장히 크게 나긴했다. 게다가 관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중원에 명성이 자자하던 장수이기도 했고. 마초야 진작부터 이름높은 군웅이었지만(그리고 그런 마초에 대해서도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누가 더 낫냐며 물었던 관우이기도하고) 황충은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장수였지만, 군웅 마초와 너무나도 널리 알려졌던 관우의 명성과 비교될 수 없었으니...

선주가 한중왕이 되자, 그는 비시를 형주로 보내 관우를 전장군으로 임명했는데, 관우는 황충이 후장군으로 임명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격분해서 말했다.

"대장부는 평생 노병(老兵)과 같은 대열에 있지 않는다!"

그는 그에게 제수되었던 관직을 거부하였다.

비시가 말했다.

"왕업을 세우는 자가 임용하는 인물에게 하나의 기준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은 전한고조와 어릴 적부터 친한 교분이 있었고, 진평(陳平)과 한신(韓信)은 초나라에서 도망쳐 뒤에 한나라에 도착했지만, 관직의 순서를 정하는 논의에서는 한신을 가장 높은 지위에 있게 하였고, 이 때문에 소하와 조참이 원한의 마음을 가졌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한왕(漢王)은 일시적인 공로에 근거하여 한승(漢升:황충)을 높은 신분이 되게 했지만, 마음속의 평가가 어찌 군후(君候)와 동등하겠습니까! 게다가 한중왕과 당신을 비유컨대 그는 주군과 한 몸처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화와 복도 같이 합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생각해 보면, 관호(官號)의 높고 낮음이나 작위와 봉록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여 그를 마음으로써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일개의 관리로써 명령을 받아 이를 시행하는 사람이지만, 만일 당신이 임명을 받지 않아 곧 돌아가게 된다면 당신 때문에 이와 같은 거동을 애석해 할 것이며, 아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관우는 크게 깨닫고 즉시 임명을 받았다. - 비시전

2.5 죽음

황충은 220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는 유비가 동오 정벌을 시작하기 일년 전이었다. 따라서 연의에서처럼 황충은 동오 정벌에 참여한 바가 없다. 그의 아들 황서가 일찍 죽어 후사는 없었다.[5]

그의 사후 그에게 내려진 시호는 강후(剛侯)로써, 이는 일생을 용맹함으로 살아온 무장에게만 내려졌던 삼국시대에서 상당히 드문 시호이다.(이통, 장료 등)

3 평가

정사를 쓴 진수는 조운과 황충을 유비의 발톱과 어금니(爪牙)라 평하며 그들을 전한의 명장 하후영관영에 견주었다.

양희[6]의 계한보신찬[7]에선 황충에 대하여

장군(將軍 : 황충)은 돈후하고 웅장하여, 적군의 선봉을 부수고 난국을 극복하였으며, 공업을 세운 당시의 재간꾼이었다. - 계한보신찬

이렇듯이 황충의 용맹과 무예에 관해서는 당대인물들이나 후세 역사가들에서나 이견이 없다. 또한 야전사령관으로써는 그다지 검증된 바가 없는 조운과 달리 황충은 한 전선을 맡아 하후연을 참살한 명장이었다.

4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촉장들이 늘 그렇듯 수많은 가공무장들의 인생을 끝장내는 인간백정 역을 맡고 있으며 정사에서 보여준 강인한 모습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손견과는 왜 만나지 못했는지 의문이다. [8]

유비와의 만남도 드라마틱하다. 형남정벌전때 관우가 한현이 있는 장사성으로 침공하자 관우를 막기 위해 상대하다가 말에서 떨어졌는데 그 때 관우가 말을 바꿔타라고 하였다. 황충은 무장으로서의 은혜와 도리를 갚기 위해 또다시 관우와 승부를 낼 때 일부러 그의 모자를 활로 맞추었는데, 이를 본 한현이 황충이 관우와 내통한다고 의심하여 그를 가두었다. 그러나 위연과 평소 황충을 흠모하던 백성들이 봉기하여 한현은 위연에게 죽임을 당하고, 장사성은 그대로 함락된다. 그 이후 한현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슬퍼하며 집에 틀어박혀 있었으나, 유비의 계속되는 간청으로 유비군에 귀순했다. 물론 장사에서 관우와 싸운 것도, 한현의 의심을 받았다가 유비에게 감화되었다는 것도 모두 허구.

관우와 황충의 의기를 강조하는 일화지만 이것 때문에 훗날 관우가 황충을 대하는 태도에 모순이 생기기도 한다. 연의에서도 촉의 사방장군 임명 에피소드는 그대로 나오는데[9] 이때 관우가 황충과 같은 취급을 안받겠다며 화내는 장면도 정사와 똑같기 때문이다. 분명히 장사에서는 서로를 동등한 적수로 인정하다가 나중에 오호장군에서 같은 대열에 서게 되자 정사와 똑같이 "황충 따위와 나를 세트로 묶다니!"라는 발언을 하기 때문에 독자가 어리둥절해지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황충을 부각시키기 위해 에피소드를 만들어 주면서 정사의 일화까지 집어넣어 생긴 일종의 설정충돌.[10]

서촉정벌에서도 활약했고 가 한중 부근 국경을 집적거리자 70대의 고령에도 불구, 법정, 엄안과 함께 출진하여 위의 군단장 하후연을 참살하는 큰 공을 세운다. 정사에선 엄안과의 노익장 듀오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황충의 병법을 여러 가지로 써먹어 위군 장수들을 농락하며 지장으로서의 포스도 풍겨준다. 교병계나 반객위주책 이런 게 진짜 병법에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덤으로 코에이 삼국지 황충의 지력이 60대 초반인데?

최후는 멋지게 전장에서 피날레를 했다. 이릉전투에서까지 용맹을 과시하며 활약한다. 자세한 정황을 말하자면, 관흥장포가 공을 세우고 오자 유비가 "나를 보호하던 충성스러운 장수들이 모두 늙어 쓸모 없어졌는데 두 조카가 큰 공을 세우니 기쁘구나"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 발언이 황충의 자존심을 건드려 군사 약간만 데리고 동오의 군대에 진격하다가 복병에게 포위되어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고 사망한다. 그래도 관우의 원수인 반장을 공격하여 달아나게 만드는 등 용맹함은 여전했다. 실제로는 이릉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죽었고 사인에 대한 별다른 언급은 없다. 아마 노환이었을 가능성이 제일 높을 듯 하다.

연의 덕분에 황충에게는 두 가지 이미지가 생겼는데, 첫째는 명궁, 둘째는 노장이다.

하지만 정사에서는 활을 잘 쏘았다는 기록이 없다. 관우의 청룡언월도와 장비의 장팔사모, 조운의 청강검처럼 이름난 무장에게 고유 무장을 달아주는 과정에서 선정된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위나라의 라이벌격인 하후연이 궁을 잘 쏘는 이미지에 대립시키기 위해 그랬든가. 덕분에 활을 잘 쏜다는 기록이 전혀 없으면서도 게임 삼국지11에서는 이미지 빨로 여포, 조운, 태사자, 하후연같은 명궁도 받지 못한 궁신 특기를 받는 위업을 달성했다! (하지만 조운과 하후연도 사서에는 딱히 명궁이었단 소리는 없다. 여포태사자는 확실히 있지만...)[11]

두 번째 노장 이미지. 이로 인해 중국에서는 건강한 노인을 가리켜 황충이라고 하며, 노인의 상징이 되면서 늙은 장군 이미지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었다.(…)[12] 그러나 황충의 정확한 탄생 연도를 알 수 없으며, 정말 노장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노인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으면 오히려 호쾌한 맹장(!) 느낌이 강한데, 이는 짧고 굵은 활약과도 맞물린다. 게다가 대를 잇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시대였는데도 황충은 후사가 없다. 늙은 장수였다면 가족 구성원이 많았을 가능성이 충분한데, 황충의 가족은 요절한 아들 황서말고는 없다. 아들 황서는 일찍 죽었고, 그 이외 아들이나 손자, 심지어 양자조차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런 점으로 보면 황충이 매우 젊은(...) 모습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나의 황충은 이렇지 않아! 감녕은 나이가 의외로 많다니까 서로 이미지 체인지가 시급하다.

하지만 제갈량이 늦은 나이에 첨을 얻은 것처럼 황충 역시 뒤늦게 자식을 얻게된 걸 수도 있다. "아들이 있었지만 요절하여 후사가 없다."가 기록의 전부이고 정확한 생년 기록이 없으니 황충이 활약한 시점이 중년이었는지 노년이었는지는 확답할 수 없는 부분.

황충이 정말로 요절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제기되기도 한다. 태사자가 건창도위에 부임한 게 202년인데 황충은 그 시기 이전에 중랑장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중랑장 정도의 벼슬을 약관의 나이에 꿰찼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20대에 중랑장이나 태수직을 한 인물들을 찾아보면 의외로 있다. 장료, 요립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노장 이미지는 유비가 한중왕 즉위 이후 관우가 직위를 받을 때 황충과 동률에 있자 '이런 노병(老兵)과 같이 받을 수 없다!'며 분노한 데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이 부분에 사용된 노병이라는 단어는 정황상 '늙은 병사'라는 의미보다는 '쓸모 없는 병사'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즉 관우의 말은 황충의 나이와는 전혀 상관 없이 '내가 이런 놈과 비슷한 대우를 받다니… 이게 말이 돼?!'라는 의미인 것. 다만 황충을 비하하는 표현들 중에서 '노병'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실제로 나이가 많은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다소 애매한 부분이다.

노장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마찬가지로 노장인 엄안과 세트로 활약하기도 한다. 연의에선 이를 코믹하게 묘사하는데 이를 본 맹달이 유봉에게 '제갈량도 잠깐 머리가 돌았나 보오. 두 늙은이를 보내는 것을 보니 촉의 운명도 이제 다한 것 같소'라고 말한 것으로 서술한다. 이때 황충은 이 두 장수가 비웃은 것을 보고는 엄안에게 '늙었다고 업신여기는 듯 한데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시다'라고 하니 엄안은 '장군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라는 대화를 나눈 것으로 서술한다.

5 미디어 믹스

  1. 태평어람에 인용된 송본에 따르면 한승은 오자로 한숙(漢叔).
  2. 태사자는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붙박혀 있었다. 나관중은 이게 아쉬웠는지 그가 장료와 싸우다 죽는 이벤트를 만들어 주었다.
  3. 圍, 군사 시설의 일종
  4. 연의에선 조운이 추가되어 오호대장군이 된다.
  5. 대를 잇는 것이 중요했던 시대인데도 손자도 없었고, 양자도 없었던 걸 보면, 황충도 젊은 나이로 요절했을 가능성도 있다. 유반과 태사자의 대립에 관여했을 때 이미 중랑장 자리에 있어서 이 당시를 성인으로 생각해도 적어도 황충은 노장일 가능성이 별로 높지 않다.황서가 제갈첨종회처럼 늦둥이일 수도.
  6. 양희는 제갈량 밑에서 관리 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7. 계한은 촉한을 부르는 다른 이름으로 계한보신찬은 촉한의 인물들을 짤막하게 찬한 내용이다.
  8. 손견이 죽는 시기인 192년쯤 이미 그는 나이 45를 먹은 중후한 무장이었다.
  9. 차이점이 있다면 여기에 은근슬쩍 조운을 밀어넣어 오호대장군으로 만들었다는 정도.
  10. 그래서인지 몰라도 드라마 삼국에서는 관우가 오호대장군에 임명될 때 반발하는 부분이 황충이 아닌 마초 때문으로 각색되어 나온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마초는 떠돌이 객장, 황충은 늙다리"라면서 둘 다 싸잡아 까 버린다.
  11. 하후연같은 경우에는 지나가는 이벤트 수준인 조조군 장수들의 활쏘기 대회에서 다른 장수들이 과녁 가운대에 맞춘 것을 다시 맞췄다고 되어 있는데... 정사에 이런 얘기가 있을 리가 있나? 참고로 연의에선 그 다음 순서인 서황이 대회의 상품인 비단옷이 달려있는 버들나무 가지를 맞취서 하후연을 버로우시켰다. 그리고 허저는 활도 안 쏘고 바로 서황과 그래플링.
  12. 황충 이전에는 조나라의 염파노익장이란 고사를 탄생시킨 후한의 복파장군 마원 등이 노장 이미지로 유명하였는데, 황충의 유명도 때문에 다 묻혔다. 이게 다 삼국지연의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