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엄

1 조선의 인물

趙曮
(1719년 ~ 1777년)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이다.

1738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752년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1763년 조선 통신사일본에 다녀왔는데, 이 때 고구마를 들여 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황(救荒) 작물로 큰 역할을 했으나 목화를 들여온 분에 비해 인지도가 적다. 원주시 지정면에 그의 묘소와 기념관이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조엄 밤고구마라는 브랜드가 있다. 서원주 역세권

그의 증손녀효명세자의 세자빈이 된다.

2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조엄

2.1 개요

趙儼
(171 ~ 245)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 자는 백연(伯然). 영천군 양책현 사람이다.

순욱에게 등용된 두기와는 한중 관련 사건이나 하동 태수 관련으로 비교되는데, 물론 나쁜 쪽으로 한중 관련 사건, 하동태수로의 활약에서 수많은 병사들을 이산가족으로 만들면서 이산가족 제조기가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번성 전투 때 사마로 등장해 역사 속 행적처럼 관우가 퇴각할 때 추격하지 말라고 조인에게 진언하고 등장 끝이다(...) 그러나 정사 내용은 길다.

2.2 생애

2.2.1 초창기

난리를 피해 같은 군 사람인 두습, 번흠과 함께 재산과 회계를 공유하면서 생활했는데, 유표를 피해 장사로 도망간 두습이나, 유표에게 잘 보이려고 한 번흠과 달리 한 일이 딱히 없다(…). 그 후 조조헌제를 옹립하려고 허도로 천도하자 두습은 바로 조조로 달려가고 조엄도 번흠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조진동[1]은 시대에 순응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재간이 있으니 반드시 화하을 바로잡아 구제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귀의해야 할 것인가를 압니다.

그리고 197년 노인과 어린아이를 데리고 조조를 알현하고 같은 고향 출신인 순욱의 추천으로 낭릉현의 장이 된다. 번흠 이놈은 두습에게도 훈계 듣더니 가장 딸리는 놈인가보다

2.2.2 낭릉의 장

당시 호족들은 대부분 법을 지키지 않고 교활해서 두려워하거나 거리끼는 바가 없었는데, 조엄은 그걸 해결하기 위해 심한 자들을 뽑아 체포하여 조사하고 모두 사형으로 판결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죄인을 수감하고, 한편으로는 표를 올려 그들을 사면해 줄 것을 요청했으므로 위엄과 은혜가 모두 빛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여남의 유력 인사 이통 아내의 백부 또한 사형 판결을 받는데, 당연히 이통의 아내는 이통에게 살려달라고 빌지만 이통은 사사로운 법 때문에 법률을 어길 수는 없다면서 거부한다. 조엄은 법대로 백부를 죽인 후에 이통을 시류에 영합하지 않으려는 것이 훌륭하다면서 칭찬하고 이통과 친구를 먹는다(…). 조엄과 친구를 먹기 위해 아내의 백부를 제물로 바치겠다!

2.2.3 원소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원소의 남하가 시작되어 예주의 여러 군을 사자를 보내 회유하는데, 대부분의 군들이 그 명령을 받을 때 양안군만이 이 말을 따르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양안도위로 있던 이통이 급히 호구세를 징세하려고 하자 조엄은 이통을 말린다.

현재 천하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각 군들은 모두 모반했으며, 귀의하는 사람들에게는 또 비단과 솜을 거둬들이고 있고 소인은 혼란을 좋아하니 유한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또 멀건 가깝건 간에 우환이 많으니 신중히 기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통 또한 생각없이 한 게 아닌지라 대답하기를

원소와 대장군(조조)의 대치 상황은 매우 급박하며, 주위의 군현은 모두 모반하고 있습니다. 만일 비단과 솜을 걷어 보내지 않는다면 형세를 주목하고 있는 자들은 반드시 내가 관망하는 태도를 갖고 기다리는 바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라며 자신이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한다. 조엄이 듣고 보니 맞는 말인지라

확실히 또 당신의 생각과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응당 그것의 경중을 헤아려 잠시 징수를 늦추고 저로 하여금 당신을 위해 이 근심을 제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순욱에게 편지를 써서 이 사실을 알린다.

지금 양안군은 비단과 솜을 응당 보내야 되지만 길이 험해 틀림없이 적에게 약탈당하게 될 것입니다. 백성들은 곤궁하고 인근 성은 모두 모반해 붕괴되기 쉬운 상황에서 이것은 한쪽의 안위만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양안군 사람들은 충절을 지키며 위험한 상황에서도 두 마음을 먹지 않고 있습니다. 작은 선으로도 반드시 상을 준다면 도의를 행하는 자를 면려하게 됩니다. 국가를 잘 다스리는 자는 국가 때문에 징수하지 않고 백성에게 소장하도록 합니다. 저는 국가가 백성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징수한 비단과 솜을 모두 그들에게 돌려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순욱이 그것을 보고

나는 그대의 의견을 조공에게 말했고, 공문을 각 군에 배포했으니 비단과 솜을 백성들에게 전부 돌려주시오

그 답장을 받고 그대로 행하니 위아래가 기뻐하고 군내가 안정되었다고 한다.

2.2.3.1 이 사건에 대한 위략의 부가 설명

위략에 따르면 유일하게 배반하지 않았던 양안군의 이통도 사실은 배반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조엄에게서 원소가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만뒀다고 한다. 그 후에 원소의 문서 보관실을 뒤졌는데, 이통의 편지가 없자 조조가 "이것은 분명 조백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배송지가 주를 달아 이미 본전에 조조가 편지의 유무로 사람을 평가할 것을 두려워해 편지를 다 불태워 없앤 사실이 있기에 그게 뭔 소리냐고 신빙성이 없다며 위략을 비판하기 위한 훌륭한 소재를 제공했다.

2.2.4 인간 윤활유

그 후 조엄은 중앙으로 돌아와 사공연속주부에 임명되었으며, 그 때 영음의 우금, 양책의 악진, 장사의 장료는 서로 사이가 안 좋았기에 조조는 조엄에게 이 세 군의 사무를 동시에 담당하게 한다. 매번 규분이 있을 때마다 조엄은 이들을 훈계해서 이 셋은 서로 친해졌다고 한다.

조조가 형주를 정벌할 때는 장릉태수를 겸하고 도독호군으로 바꿔 봉해진 뒤에 우금(于禁), 장료, 장합, 주령, 이전, 노초, 풍해의 7군을 통솔했으며, 승상주부로 임명되고 부풍태수로 옮겨 봉해진다. 조조가 마초, 한수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관중호군으로 임명되어 장군 은서 등 여러 군대를 전부 지휘하게 되었으며, 약탈을 행하던 강족을 은서와 함께 신평까지 추격해 물리치고 둔전민 여병이 장군을 칭하고 진창을 점령하자 다시 은서를 이끌고 이들을 격파한다.

2.2.5 한중 원군 사건

조조가 한중의 수비를 위해 1,200명의 병력 차출을 명령받자 조엄은 은서에게 감독을 맡겨 보냈는데, 가족과 갑자기 떨어지게 된 병사들은 출발할 때 모두 우울한 안색을 하고 있으니 조엄은 하루가 지나자 직접 사곡구까지 쫓아가 병사들을 위로하고 은서에게 특별히 경계를 하도록 했다. 조엄은 돌아오는 길에 옹주자사 장기의 집에 묵었는데, 40리를 진군하지 않아 반란이 일어나 은서의 생사여부마저 알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두기가 보낸 애들은 탈주도 한 명도 없는데 참 비교된다

그리고 조엄 자신의 호위병으로 끌고 온 보병과 기병 150명도 은서의 부대와 같은 부대 출신인데다가 서로 인척관계까지 있을 정도였기에 완전 무장한 상태로 불안에 떨기 시작한다. 조엄은 여기서 본영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장기가 말한다.

현재 본영의 무리들은 이미 소란스럽게 되었을 것이니 당신 한 몸이 가더라도 어떠한 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 분명한 소식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조엄은

"비록 본영의 사병과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이 함께 도모했다고 의심될지라도 반드시 출발한 사람의 반란 소식을 들은 후에야 일어날 것입니다. 또 몇몇 선(善)을 따르려고 하는 자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니 응당 그들이 주저하고 있는 때를 타서 빨리 가서 어루만져 주어야만 합니다. 또한 그들의 총지휘관인 자로 진무시킬 수 없어서 내 몸에 재앙이 닥치는 것은 운명입니다.

그리고는 30리를 진군한 뒤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 성공했을 때와 실패했을 때의 결과를 말하면서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니 남은 병사들은 강개해 충성을 맹세한다.

그렇게 적의 본진에 도착한 조엄은 주모자만 잡아서 처형하고 나머지는 용서해줘 군현에서 붙잡은 병사들까지 풀어주니 결국 반란군의 무리들도 모두 조엄에게 들어와서 항복한다.

조엄은 조조에게 장군을 보내 장군을 파견해 대본영에 가서 옛 병사로 관중을 지킬 것을 권하는데, 부풍군은 관중에 속해있는 땅이니 처자식과 떨어져 한중으로 가는 것이 싫던 사람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고 옛날부터 조조를 따르던 병사들로 하여금 관중을 지키게 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은 동쪽으로 이주시키겠다는 것이다.

조조는 이 계획에 찬성해 유주를 보내 2천 명을 인솔하게 하는데, 이 일이 누설되어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 모두들 불만을 품고 난리를 피워 진정시키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자 조엄은

"옛 병사들은 적고 동쪽의 병사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 진영에서 모반을 기도한 것입니다. 만일 반란이 발생하면 재난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들이 머뭇거리고 있는 때를 타서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는 각 진영에 병사들을 분류해 그중 온화한 자 천 명은 관중에 남겨 지키겠다고 하고 나머지 군사들은 동쪽으로 보내니 가족과 남게 된 남은 천 명의 군사들은 바로 조엄을 따르게 된다. 하지만 동쪽에서 조조의 옛 병사가 오자 조엄은 남아있던 천 명의 병사도 협박과 회유로 동쪽으로 가도록 해 2만 명을 무사히 가게 하는 것에 성공했다.이산 가족 제조기

이에 대해 배송지는 손성이 이 일을 비판한 것에 따라 조엄을 비판한다.

"저는 예로서 나라를 다스려야 하며, 백성들은 신의가 아니면 올바로 세우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주성왕은 오동나무 잎사귀로 했던 말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진문공은 원나라를 정벌할 때 약속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여 형조의 공을 융성하게 함으로써 위대한 업적을 쌓았습니다. 조엄은 남아 있는 1천여 명을 속여서 그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만 그것은 권도의 시작일 뿐이며 신뢰는 바닥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병사들을 위협하여 모았다가 또 그들을 강제로 옮겼으니 신의를 잃고서야 어떻게 백성들을 대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2.2.6 형주 공방전

조인관우의 공격으로 위급에 처했을 때 조엄은 의랑 자격으로 조인의 군사에 참여해 서황의 원군이 되어 번성에 도착한다. 관우의 포위망이 더욱 견고해지자 주위 사람들은 서황이 이끄는 병사가 충분하지 않음에도 조인을 구조하지 않는다고 서황을 질책하자 조엄은

지금 적의 포위는 이전부터 견고하고 수공속에서 내리는 비는 거셉니다. 우리 쪽 병사는 단독이며 너무 적고, 조인은 따로 떨어져 있어 힘을 합칠 수 없습니다. 그런 행동은 실제로 안(번성의 조인)과 밖(서황과 조엄의 여러 군사)을 피로하게 할 뿐입니다. 지금은 군사를 전진시켜 포위망에 접근해 첩자를 보내 조인에게 통지해서 그들로 하여금 밖에 구원병이 왔음을 알게해 장수와 병사들을 면려하는 것만 못합니다. 북쪽의 지원군은 열흘을 넘기지 않고 도착할 것이며, 성 또한 굳게 지킬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연후에 안과 밖이 함께 움직이면 적을 격파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 구원병이 늦어져 처형되는 일이 있게 된다면 나는 여러 병사들을 위해 이 일을 맡을 것입니다.

그러자 주위 장수들은 모두 좋아하며(…) 땅속으로 길을 파고 조인에게 편지를 보내 소식을 알린다. 그 때 북쪽의 지원군이 도착해서 관우와 싸워서 물리친다. 비록 그 때 촉나라 군대가 면수를 점령해 양양과 연락이 끊겼지만 관우가 손권의 공격에 퇴각하니 주위 사람들은 모두 관우를 지금 쫓으면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조엄은 또 말한다.

손권은 관우의 연이은 싸움의 어려움을 틈타서 그 배후를 습격하려고 했지만 관우가 구원병을 이끌고 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 군대가 양쪽 군대가 피로해진 틈을 타서 공격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순종하는 말로 봉공을 원하고 나와서는 틈을 타고 변화를 이용하여 우리 군사력을 관찰하려고 할 뿐입니다. 지금 관우는 이미 고립되어 달아났지만 또 그가 손권의 심복이 될 걱정거리는 여전히 있습니다. 만일 패해 달아난 자를 깊숙이 추격한다면 손권은 관우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우리에게 재앙을 일으킬 것입니다. 왕께서는 반드시 이 점을 깊이 헤아리셔야만 됩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는 조인에게 편지를 보내 절대로 관우를 쫓지 말라고 하니 조엄의 계책과 같았다고 한다.

그 후 220년에 조비가 즉위하자 시중으로 임명되고 얼마 안 되어 부마도위로 임명되고 하동태수, 전농중랑장을 겸임하게 된다.

2.2.7 하동태수

이렇게만 보면 적절한 열전을 가질만한 적절한 문관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그가 두기의 뒤를 이어 하동태수가 된 것인데, 이 때 조비의 명으로 각지에서는 과부를 올려 조엄이 하동태수가 된 뒤에는 올라온 과부의 수가 많아졌다. 보급에는 여러가지 전설적 업적을 쌓은 두기였기에 조비는 두기에게 왜 조엄이 올리는 과부 수가 많아졌냐고 물어보자 두기가 대답한다.

신이 이전에 올려 보낸 과부들은 모두 남편이 죽은 여인들이었으나 지금 조엄이 보내는 자들은 남편이 살아 있는 여인들입니다.

이 말에 온갖 이상한 짓을 한 조비조차도 주위의 신하를 돌아보면서 안색이 창백해졌다고 한다. 여기서도 두기와 비교되는구나! 이산 가족 제조기2! 비유가 아니라 진짜 과부 제조기

이 역시 위략에서 나왔으나 위 사례와는 달리 배송지가 이 사건에 대해선 신빙성에 대해 비판한 적이 없다.

2.2.8 그 후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222년에는 관내후로 임명되었으며, 손권이 공격하자 조휴가 다섯 주의 군대를 이끌고 대항할 때 조엄은 군사로 참가한다. 손권이 물러난 후 수도로 돌아와 상서가 되었고 후에 조비를 따라 광릉에 도착하고 남아서 정동군사로 임명된다.

226년에 조예가 즉위하자 도향후로 봉해지고 식읍이 6백호 증가했으며, 감형주제군사, 가절이 되었으나 마침 이 때 질병이 있어서 부임하지 못한다. 또 상서로 임명되고 지방으로 나가 감예주제군사가 되었으며, 대사마군사로 전임되었다가 중앙으로 들어와 대사농이 되었다.

239년에 조방이 즉위하자 감옹량제군사, 가절로 임명되고 정촉장군으로 전임되었으며, 또 정서장군, 도독옹양제군사로 옮겼다. 뭔가 일을 한 기록은 없으면서 너무 관직만 팍팍 바뀐다

243년에 노령과 질병을 이유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지만 오히려 불러서 표기장군으로 삼았으며, 그 후 정시 연(240 ~ 249년)에 황휴, 곽이, 순의, 종육, 유애, 하정 등과 함께 호소를 천거했다. 245년 2월 26일에 사공으로 승진하지만 245년 6월에 세상을 떠나 시호를 목후라고 하고 아들 조정이 뒤를 이었다.

2.3 평가

처음에 조엄은 같은 군 사람 신비, 진군, 두습과 함께 이름이 알려져 신(辛), 진(陳), 두(杜), 조(趙))라고 불렸다.

진수는 강인하며 절도가 있으니 한 시대의 우수한 선비라고 평했다.
  1. 조조가 이때 진동장군으로 있었기에 조진동은 조조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