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합

위서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
장료악진우금장합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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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郃
(? ~ 231)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준예(俊乂). 기주 하간군 막현 사람.일본어 독음으로 하면 뭔가 미묘한 이름

2 정사

2.1 초기 생애

한나라 말, 모병에 응해 황건적을 토벌하고 군사마가 되었고 한복에 속했다. 한복이 패망하자 병사를 이끌고 원소에 귀부했다.

원소는 장합을 교위로 삼고 공손찬과 맞서게 했다. 공손찬을 격파하는데 장합의 공이 많았으므로 영국중랑장으로 올렸다.

2.2 관도대전

한진춘추에 따르면 장합이 원소를 설득하며 말했다.

공이 비록 연달아 이겼으나 조조와 맞붙지 마십시오. 은밀히 경기병을 보내 그 남쪽을 공략해 끊는다면 조조의 군은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조가 관도에서 원소와 서로 맞섰을 때 원소는 장수 순우경 등을 보내 군량 운반을 지휘하게 하여 오소에 주둔했는데, 조조가 친히 군을 이끌고 가서 급습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처음 원소가 조조가 순우경을 공격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장자인 원담에게 말했다.

저들이 순우경 등을 공격하니, 나는 저들의 본영을 공격해 함락시켜 돌아갈 곳이 없도록 만들겠다!

장합이 원소를 설득하며 말했다.

조조의 군사가 정예하니 필시 순우경 등을 격파할 것입니다. 순우경 등이 격파되면 장군의 대사가 어그러질 것이니, 마땅히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해야 됩니다.

곽도가 말했다.

장합의 계책은 옳지 않으며 조조의 본영을 들이치는 것만 못합니다. 조조는 사세상 필시 환군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풀린다는 것입니다.

장합이 말했다.

조조의 둔영이 견고하므로 공격해도 함락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순우경 등이 사로잡힌다면 우리들 또한 모두 포로가 될 것입니다.

원소는 다만 경기병으로 순우경을 구원하게 하고 중병(重兵)으로 조조의 본영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과연 조조는 순우경 등을 격파하고 원소군은 궤멸되었다.

곽도가 부끄러워하며 또 장합을 참소하며 말했다.

장합이 군이 패한 것을 기뻐하며 불손한 말을 했습니다.

장합이 이를 두려워하여 조조에 귀부했다.

순유전에 따르면 원소의 장수 장합과 고람이 망루를 공격하여 태워버리고 투항하자, 원소는 마침내 군대를 버리고 도주했다. 장합이 항복해 오자, 조홍은 의심하며 과감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순유는 조홍에게 말했다.

장합은 원소가 자신의 계책을 쓰지 않아 분노하여 온 것인데 당신은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조홍은 곧 그를 거두었다.

조조는 장합을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옛날 오자서는 일찍 깨닫지 못해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으니 어찌 미자은나라를 저버리고 한신이 한나라에 귀부한 것만 하겠소?

장합을 편장군으로 임명하고 도정후에 봉하고 군사를 주었다.

2.3 하북 평정

수신기에 따르면 조조가 원담을 치며 사람을 시켜 사당으로부터 비단 천 필을 빌리게 했으나 도삭군이 주지 않았다. 이에 조조가 장합을 보내 사당을 허물게 했다.  장합이 사당에서 백리쯤 떨어진 곳에 왔을 때 도삭군이 병사 수만 명을 보냈으나 장합의 무리는 길에 쭉 늘어서서 행진해 왔다. 장합이 사당에서 2리쯤 떨어진 곳에 왔을 때 구름과 안개가 장합의 군대를 둘러쌌기에 장합은 사당이 있는 곳을 몰랐다.

조조를 수행해 업을 공격하고 이를 함락시켰다. 또한 조조를 수행해 기주 발해군에서 원담을 공격하고, 별도로 군을 이끌고 유주 어양군 옹노현을 포위해 대파했다. 조조를 수행해 유성을 토벌할 때 장료 등과 함께 군의 선봉이 되었고 공을 세워 평적장군으로 올랐다. 별도로 청주 동래군을 정벌해 관승을 쳤다.

2.4 진란 토벌

장료전에 따르면 진란, 매성저족의 육현을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는 우금, 장패 등을 보내 매성을 치도록 하고, 장료는 장합, 우개 등을 이끌고 진란을 치도록 했다. 매성이 우금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여, 우금이 돌아가자 그 군을 이끌고 진란에 합류해 첨산으로 들어갔다.

또한 장료 등과 함께 진란, 매성 등을 토벌해 깨뜨렸다.

2.5 형주 정벌

조엄전에 따르면 조조가 형주를 정벌할 때, 조엄에게 장릉태수를 겸임하도록 하고, 도독호군으로 바꿔 임명하고 우금, 장료, 장합, 주령, 이전, 노초, 풍해 등의 7군을 통솔하게 했다.

2.6 관중 평정

무제기 주석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가 장차 황하를 건너려 하여 선두 부대가 막 건널 때 마초 등이 돌연 당도했는데 조조는 호상(胡床)에 앉아 일어서지 않았다. 장합 등이 사태가 급박한 것을 보고 함께 조조를 이끌어 배에 타게 했다.

조조를 수행해 위수 남쪽에서 마초, 한수 등을 격파하고 양주 안정군을 포위해 양추의 항복을 받았다.

하후연과 함께 부현의 도적 양흥과 양주 무도군 저족을 쳤다. 또다시 마초를 격파하고 송건을 평정했다.

2.7 장로 정벌

조조가 장로를 정벌할 때, 먼저 장합을 보내 제군을 이끌고 흥화의 저족 왕 두무(竇茂)를 치게 했다. 조조는 산관을 지나 한중으로 들어가면서 또 다시 먼저 장합을 보내 보졸 5천을 이끌고 선두에서 길을 뚫도록 했다. 양평에 도착했는데 장로가 항복하자 조조는 돌아왔고, 장합과 하후연을 남겨 한중을 수비하며 유비에 맞서도록 했다.

2.8 한중 공방전

장합은 따로 제군을 이끌고 파동, 파서의 2군을 항복시키고, 그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겼다.

장비전에 따르면 장합은 별도로 제군(諸軍)을 지휘해 파서로 내려가 그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기려 하니, 탕거, 몽두, 탕석으로 진군해 장비와 50여 일간 서로 겨루었다. 장비는 정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장합군을 요격하여 교전했는데 장합군은 산길이 좁아 앞뒤가 서로 구원할 수 없었고 장비가 마침내 장합을 격파했다. 장합은 말을 버린 채 산을 타며 단지 휘하 10여 명과 함께 샛길을 따라 퇴각했고, 장합이 군을 이끌고 남정으로 돌아가니 파(巴) 땅은 안정을 찾았다.

군을 물려 익주 한중군 남정현으로 돌아왔다. 탕구장군에 임명되었다.

유비가 양평에 주둔하자 장합은 광석에 주둔했다. 유비가 정예병 1만 여명을 10부로 나누고 밤중에 장합을 급습했다. 장합은 친병(親兵)을 이끌고 치열하게 맞서 싸웠고 유비는 이길 수 없었다. 그 뒤 유비가 주마곡에서 도시 주변을 불태웠다. 하후연이 불을 끄러 다른 길로 왔다 유비와 서로 만났다. 단병(短兵)으로 서로 칼을 맞부딪치며 교전하다 마침내 하후연이 죽었고 장합은 양평으로 돌아왔다.

위략에 따르면 비록 하후연이 도독이었으나 유비는 장합을 꺼린 반면 하후연은 경시했다. 이에 하후연이 죽자 유비가 말했다.

응당 우두머리를 잡아야지, 이 자를 잡아서 무엇하겠는가!

당시 총대장을 잃었으므로 유비가 이를 틈탈까 두려워하며 삼군이 모두 놀라서 얼굴빛이 변했다. 이에 하후연의 사마인 곽회가 군중에 영을 내렸다.

장장군은 국가의 명장으로 유비가 꺼리는 분이다. 지금의 긴급한 사태는 장장군이 아니면 누구도 안정시킬 수 없다.

이에 장합을 추천해 군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두습전에 따르면 두습은 장합, 곽회와 연합하여 군대의 모든 사물을 주관하는 한편, 장합을 원수로 임명하여 군사들의 마음을 통일시켰으므로 삼군은 곧 안정되었다.

장합이 나서서 군사들을 통솔하고 진영을 안돈하고 제장들이 모두 장합의 절도(節度)를 받게 되자 군심이 안정되었다. 조조는 장안에서 사자를 보내 장합에게 절을 내렸다. 그리고 조조가 친히 한중에 도착하자 유비는 높은 산을 지키며 감히 나와 싸우지 못했다. 이에 조조는 한중의 제군을 이끌고 나왔고 장합은 우부풍 진창현으로 물러나 주둔했다.

2.9 조비 휘하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장합을 좌장군으로 임명하고 도향후로 올려 봉했다.

곽회전에 따르면 곽회는 좌장군 장합과 관군장군 양추를 감독하여, 산적 정강과 반란을 일으킨 노수의 오랑캐를 모두 토벌하여 평정시켰다.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막후로 올려 봉했다. 조서를 내려 조진과 함께 안정의 노수호(盧水胡)와 동강(東羌)을 토벌하게 했다.

2.10 강릉 전투

장합과 조진에 명해 궁으로 와서 조알하게 하고 남쪽으로 보내 하후상과 함께 강릉을 공격하게 했다. 장합은 별도로 제군을 지휘해 장강을 건너며 섬 위의 방어 진지들을 점령했다.

문제기 주석 위서재병오조에 따르면 중군, 정남이 강릉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좌장군 장합 등이 수군을 이끌고 직접 강을 건너 남저를 공격하니 적중에 물에 빠져 익사한 사람이 수 천 명이었다.

2.11 제갈량의 1차 북벌

조예가 즉위하자 남쪽으로 보내 형주에 주둔하게 했다. 사마의와 함께 손권의 별장(別將)인 유아 등을 공격했는데, 기구에까지 추격하여 교전해 이를 격파했다.

조진전에 따르면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자 남안, 천수, 안정의 3개 군이 모반하여 제갈량에 호응했다. 조예는 조진으로 하여금 제군을 지휘해 미(郿)에 주둔케 하고, 장합을 보내 제갈량의 장수 마속을 공격케 하여 대파했다.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하자 장합에 특진의 지위를 더하고 제군을 이끌게 해 파견했고, 제갈량의 장수인 마속과 가정에서 맞붙었다. 마속은 험한 남산에 의지했고, 내려와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 장합은 그 용수로를 끊고 들이쳐 마속을 대파했다.

왕평전에 따르면 군사들은 모두 산산이 흩어졌으나 오직 왕평이 거느리고 있던 1천명은 북을 울리며 제 자리를 지키니 위나라 장수 장합은 그곳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접근하지 못하였다.

남안, 천수, 안정군이 모반해 제갈량에 호응했었는데, 장합이 이를 모두 깨뜨리고 평정했다. 조서를 내렸다.

적 제갈량이 파촉의 무리를 이끌고 나왔다 포효하는 범과 같은 군대를 만났도다. 식읍을 1,000호 늘려 예전과 합해 모두 4,300호가 되게 하라.

2.12 제갈량의 2차 북벌

사마의가 형주에서 수군을 조련해 면수(한수)를 따라 장강으로 들어가 오를 토벌하려 했다. 장합에게 조서를 내려 관중의 제군을 이끌고 사마의에게로 가서 절도(節度)를 받도록 했다. 형주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겨울이라 물이 얕았으므로 큰 배가 다닐 수 없었다. 이에 방성으로 돌아가 주둔했다.

제갈량이 다시 출병해 진창을 급습하자, 조예는 역마(驛馬)를 내어 장합을 수도로 오게 했다. 조예는 친히 하남성으로 행차해 주연을 베풀며 장합을 전송했다. 남북군사(南北軍士) 3만을 보내고, 무위(武衛), 호분(虎賁)을 나누어 보내 장합을 호위하도록 했다. 조예가 장합에게 물었다.

장군이 더디게 도착하면 제갈량이 이미 진창을 차지해 버리진 않았겠소?

장합은 제갈량이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부족해 오랫동안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렇게 대답했다.

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제갈량은 이미 달아났을 것입니다. 손가락을 꼽아 계산해볼 때 제갈량의 군량은 10일 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장합이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진격해 남정에 도착하자 제갈량이 퇴각했다. 조서를 내려 장합을 수도로 돌아오게 하고 정서거기장군에 임명했다.

2.13 조예 휘하

장합은 변수를 식별해 영진(營陳)을 적절한 곳에 잘 설치하고, 전세와 지형을 잘 가늠해 그의 계책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으므로 제갈량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그를 꺼렸다.

장합이 비록 무장이었으나 유생들을 경애하고 좋아해, 일찍이 같은 고향 출신의 비담(卑湛)이 경학에 밝고 행실이 훌륭하다 하여 추천한 적이 있다. 이에 조서를 내렸다.

지금 장군은 밖으로 군대를 통솔하면서도 안으로는 조정을 존중하는구나. 짐이 장군의 뜻을 가상히 여겨 비담을 발탁해 박사로 임명한다.

2.14 제갈량의 3.5차 북벌

후주전에 따르면 230년 가을, 위나라가 사마의는 서성, 장합은 자오, 조진에게는 야곡을 지나게 해 한중을 공격하려 했다. 승상 제갈량이 성고, 적판에서 이들을 기다렸는데, 큰 비가 내려 길이 끊기자 조진 등이 모두 돌아갔다.

2.15 제갈량의 4차 북벌

제갈량전 주석 한진춘추에 따르면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고 선비 가비능을 부르자, 가비능 등이 옛 북지 석성에 이르러 제갈량에 호응했다. 이때 위 대사마 조진이 병이 들어, 사마의가 형주에서 와서 입조했다. 조예가 말했다,

서방의 일이 중대하니 그대가 아니면 가히 맡길 만 한 자가 없소.

이에 서쪽으로 장안에 주둔하게 하고 장합, 비요, 대릉, 곽회 등을 이끌게 했다.

사마의은 비요, 대릉에게 정병 4천을 남겨 천수군 상규현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기산을 구원했다. 장합이 군사를 나눠 옹, 미에 주둔시키려 하자 사마의가 말했다.

전방의 군대가 홀로 적을 감당할 수 있다면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만약 능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전군과 후군으로 나누는 것은, 바로 의 3군이 경포(영포)에게 사로잡힌 까닭이었소.

그리고는 진격했다. 제갈량은 군을 나눠 남겨두어 기산을 공격케 하고, 자신은 상규에서 사마의를 역격하려 했다. 곽회, 비요 등이 요격하자 제갈량이 이를 격파했다. 이에 그곳의 보리를 대거 수확하다 사마의와 상규 동쪽에서 조우했다. 군사를 단속해 험조한 곳에 의지하며 교전하지 않자 제갈량이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사마의가 제갈량을 뒤이어 노성에 도착했다. 장합이 말했다.

저들이 교전을 청하는데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니, 저들은 우리가 싸우지 않는 것이 장기적인 계책으로 제압하려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곳에 머물러 주둔하되, 군을 나누어 기습군으로 삼아 그들의 배후로 출병할 것처럼 과시할 만합니다. 지금 제갈량은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적으니 또한 곧 달아날 것입니다.

사마의가 이에 따르지 않고 제갈량을 뒤쫓았다. 도착한 후 또 산에 올라 영채를 세우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가허, 위평이 여러 차례 청하며 말했다.

공께서 촉을 범처럼 두려워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찌하시렵니까?

사마의가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제장들이 모두 싸울 것을 청하니, 이에 5월 신사일, 장합에 명해 남쪽을 포위한 무당감 하평(왕평)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중도를 따라 제갈량에게로 향했다.

제갈량은 위연, 고상, 오반을 보내 이를 막게 해 대파하고, 갑옷 입은 군사 3천 급, 철갑옷 5천 벌, 각노 3,100 장을 노획했다. 사마의는 돌아가 영채를 지켰다.

왕평전에 따르면 231년, 제갈량은 기산을 포위하고 왕평은 따로 남쪽을 포위하고 지켰다. 위나라의 대장군 사마의가 제갈량을 공격하고 장합은 왕평을 공격하였는데 왕평이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장합은 이기지 못하였다.

위략에 따르면 제갈량군이 퇴각하자 사마의가 장합에게 이를 추격토록 했다. 장합이 말했다.

병법에서 성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출로를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사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

사마의가 이를 들어주지 않아 장합은 부득이하게 진군했다. 촉군이 고지에 올라 숨어 엎드려 궁노를 난사하자 화살이 장합의 넓적다리에 적중했다.

한표전에 따르면 여름 6월, 제갈량은 군량이 다하니 군대를 물려 청봉 목문에 이르렀는데 장합이 추격하여 왔다. 제갈량은 군대를 주둔시키고, 나무껍질을 깎아내고는 크게 글을 써서 말했다.

장합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는다.

미리 병사들에게 군령을 내려 좁은 길에 수천의 강노를 준비케 하였다. 장합이 과연 모습을 드러내자 천개의 노를 동시에 발사하여 장합을 쏘니 죽었다.

2.16 사후

신비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장합은 그들을 추격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황제는 장합을 애석해하고 조정 회의에서 탄식하며 말했다. 조예가 말했다.

촉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장합은 죽었소. 장차 이와 같음을 어떻게 하오!

사공 진군이 말했다.

장합은 진실로 훌륭한 장수였으며, 국가가 의지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신비는 마음속으로 장합은 비록 애석한 인물이지만, 이미 죽었으므로 안으로 군주의 마음을 약하게 한다거나, 밖으로 큰 일로 여기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는 진군에게 말했다.

진공(진군), 이것이 무슨 말이오! 천하에 하루라도 무황제(조조)가 없으면 할 수 없다고 했소. 또 문황제(조비)가 없었으면 할 수 없었다고 했소. 지금 국내에 부족한 것이 어찌 장합이겠소?

진군이 말했다.

또한 실제로 신비의 말이 맞소.

황제는 웃으면서 말했다.

진공은 왜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오?

시호를 내려 장후(壯侯)라 했다. 아들 장웅(張雄)이 후사를 이었다. 장합이 앞뒤로 정벌전에 공을 세웠으므로 조예는 장합의 봉호를 떼어내어 장합의 아들 4명을 열후에 봉했다. 어린 아들에게는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의 장합은 정사의 행적과 비슷하다. 그런데 정사에서 장합은 뛰어난 전략가형 장수인데도 이상하게 연의에서는 멧돼지처럼 한자루 꼬나쥐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장면이 많다.

관도에서는 괜찮은 모습으로 나온다. 장합전의 해석을 받아들였고 여기서 한술 더 떠서 고람이 배신을 부추기고 있다.

장합과 함께 투항했던 고람은 여남 전투에서 유비를 추격하던 도중 갑툭튀한 조운의 창에 맞아 죽었다. 배신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 나관중의 성향으로 미루어 장합의 죄를 대신 씻어 주고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정사에서 고람은 관도 이후 아무런 기록도 없고 연의에서 그나마 화려하게라도 죽었으니 다행인가? 이후 유비는 세력을 잃고 형주의 유표에게 의탁한다.

장판파에서 장합은 유선을 품고 가던 조운의 앞길을 막아서는 임팩트 있는 악역을 맡았으나 페널티가 있는 조운을 잡지 못하고 놓쳐 버렸다.

한수에서는 뜬금없이 마초에게 1:1로 싸움을 걸었다가 캐발리고 도망쳤다.

한중에서 조홍이 "파서를 지키는 장수는 장비니 괜히 먼저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자 장합은 호기롭게 "장비 그까이꺼 뭐가 무섭답니까?"라며 "내가 지면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고 코웃음치고 군령장 쓰고 나갔다. 연의에서는 장비와 앞서 심리전을 펼치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힘싸움에 밀린 장합이 산채에 틀어박히자 장비가 지속적으로 싸움을 걸며 밖으로 끌어내려고 하나 장합은 말려들지 않았다. 장비가 대놓고 술취한 모습을 보이자 결국 말려들어 성문을 박차고 나와 장비를 찔러 죽이지만 그것은 장비로 위장한 허수아비였다. 나루토? 영채에 숨어있던 촉군이 튀어나오자 망했어요. 열받은 조홍에게 두 번이나 목이 베일 뻔 하지만 곽회가 편들어줘서 넘어간다(…).

이후 가맹관을 치러 가서 굳게 지키자고 말하는 곽준의 말을 씹고 장합에게 싸움을 건 맹달을 턴다. 이에 유비가 성도에서 구원군을 자처한 황충과 황충의 추천을 받은 부장 엄안을 보내 장합과 대면시킨다. 장합은 "늙은이가 눈치없이 이런 곳에 나왔냐."고 비웃자 황충이 그대로 장합과 싸워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이후 계략으로 황충이 공격하자 하후연에게 달아난다.

그리고 하후연이 황충을 얕보자 황충을 경계해야한다고 경고하지만 하후연이 듣지 않으며 결국 황충에게 참살당한다. 뒤늦게 한중을 구하러 온 조조에게 상황 악화에 책임이 있는 장합을 문책하라는 주변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조조는 오히려 장합을 변호해준다.

한중에서 조홍이 뇌동오란을 패퇴시킨 일이 연의로 넘어오면서 장합의 전공으로 바뀌었다.

제갈량의 1차 북벌을 막아낸 공은 사마의가 가져간다. 가정 전투 자체는 그대로 묘사했지만 이것이 사마의의 통솔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마의의 입장은 장안에서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하고 있던 정도였다.

장합은 가장 오랫동안 전장에 몸담아온 장수들 중 한 명으로 노익장이다. 그런데 연의에선 179년생인 사마의가 연상인 장합에게 반말을 쓴다(...).

연의에서 북벌에 나선 공명은 장합을 보고 "촉에 장비, 위에 장합이 있다더니 정말이구나."라며 감탄했다. 공명이 "매우 용맹이 뛰어난 장수라 앞으로 촉에 커다란 근심을 끼칠 것이니 지금 미리 죽여야 한다."라며 높은 평가를 했다.

제갈량이 4차 북벌에서 사마의를 꾀어내어 죽이기 위해 목문도(木門道)에 함정을 파 놓았다. 사마의가 한사코 추격을 말렸지만 장합은 지금이 아니면 앞으론 제갈량을 잡을 기회가 없다며 우격다짐으로 출병했다가 끔살. 이를 본 공명은 사마의의 성씨 안에 말 마(馬)가 있고 장합의 성씨가 노루 장(獐)과 음이 일치하는 것에 빗대서 "오늘은 말을 잡으려고 했는데 노루를 잡았구나."라고 말하며 장합을 깐다.

정사에서는 사마의가 추격을 명령하였지만 장합이 불길하다며 추격하지 말 것을 주장하다 어쩔 수 없이 출격한 것이다. 연의에서 공명을 띄워주다보니 숙적인 사마의를 띄워주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억울하게 피해를 봤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4 기타

관도에서 원소를 배신하고 조조 측에 가담함으로써 전세를 단번에 결정짓게 되었는데 장합의 투항이 원소군의 궤멸 전인가 후인가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궤멸 전이면 배신, 궤멸 후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잇는 항복이 된다. 장합전을 제외한 관련 기록들의 서술은 명확하게 장합의 배신은 원소의 패배를 결정지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때 장합이 내부에서 아군을 공격하고 불을 지르며 대혼란을 일으켜 원소의 패배를 확실하게 결정지었던 것이 문제가 되는 상황인데, 여기에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댄다면 지극히 악질적인 배신 행위에 가깝지만 투항의 확실한 의사 표시와 투항 후의 입지를 생각한다면 분명 옳은 결정이었다. 난세에 나타난 막장스러운 군신 관계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장합이 허벅지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고 하는데, 허벅지의 대동맥이 손상되었다면 고대 의료 기술로는 치명상이다. 현장에서 절명했을 가능성도 크다. 허벅지에 왠 급소냐고 싶은 사람이 많겠지만 허벅지 안 쪽으로 혈관이 많이 뭉쳐있는 동맥총이 존재하기에 재수없이 그 부분이 끊기면 거의 확실히 사망한다. 현대에도 그쪽 동맥은 주변이 근육과 살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수술로 다시 붙이기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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