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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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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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모습)

이름피터 레슬리 실턴
(Peter Leslie Shilton)
생년월일1949년 9월 18일
국적잉글랜드
출신지레스터
포지션골키퍼
185cm
소속팀레스터 시티 FC (1966~1974)
스토크 시티 FC (1974~1977)
노팅엄 포레스트 (1977~1982)
사우스햄튼 FC (1982~1987)
더비 카운티 (1987~1992)
플리머스 아가일 (1992~1995)
윔블던 FC (1995)
볼턴 원더러스 FC (1995)
코벤트리 시티 FC (1995~1996)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1996)
레이튼 오리엔트 FC(1996~1997)
지도자플리머스 아가일(1992~1995)
국가대표125경기 0골

1 소개

고든 뱅크스의 뒤를 잇는 잉글랜드 역대 최고의 수문장 중 하나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공식전에 출전한 선수. 프로 경력만 30년이며 50세가 거의 다 될때까지 현역 생활을 지속했다. 소속팀에서 1249경기, 국가대표팀에서 125경기에 출장해 1374경기를 소화했다. 거기에 잉글랜드 1부리그 올해의 팀에만 10번이나 뽑힌 먼치킨 중의 먼치킨. 86년 월드컵 당시 디에고 마라도나에게 신의 손과, 월드컵 역대 최고의 골을 허용한 골키퍼가 바로 이 사람이다.

2 클럽

레스터 출생으로 레스터 시티 FC의 서포터였다. 레스터 시티의 유스팀에 입단했을 때 팀에는 고든 뱅크스라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골키퍼가 있었고 쉴튼은 그를 동경하며 골키퍼로 성장했다. 1965-66 시즌 막바지, 에버튼 FC와의 경기에서 쉴튼은 프로로 데뷔했고 1966-67 시즌에는 고든 뱅크스의 서브로 4경기에 출장했다.잉글랜드 역대 최고의 골리 원투탑이 있는 레스터ㄷㄷ

시즌이 끝나고 고든 뱅크스가 스토크 시티 FC로 이적하자 쉴튼은 약관의 나이가 되기 전에 레스터 시티의 주전 골키퍼가 되었고 그 시즌 사우스햄튼 원정에서 장거리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1968-69 시즌에는 FA컵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맨체스터 시티의 닐 영에게 골을 얻어맞고 석패했다. 리그에서는 22개팀중 21위로 강등당했다.

쉴튼은 팀에 잔류했고 2시즌만인 1970-71 시즌 2부리그에서 우승을 거두며 다시 1부리그로 승격했다. 1974년 쉴튼은 뱅크스가 그랬던 것 처럼 스토크 시티로 이적한다. 이적 첫 시즌 쉴튼은 리그 25경기에 나섰으며 팀은 리그 5위를 기록했다. 1975-76 시즌에는 리그 전경기에 출장했으나 스토크시티의 경기장이었던 빅토리아 그라운드가 태풍에 피해를 입어[1] 이를 보수하기 위해 여러 선수를 내보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쉴튼의 이적료를 합의했으나 주급에서 이견이 있어 결렬되었고, 쉴튼은 1시즌을 더 뛴다. 스토크 시티는 2부리그로 강등당했고, 쉴튼은 승격팀인 노팅엄 포레스트로 이적했다.

노팅엄 포레스트는 브라이언 클러프의 지도하에 막 승격한 클럽이었는데, 쉴튼의 영입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첫 시즌부터 37경기에 나서 18골만을 허용한 쉴튼의 맹활약에 힘입어 노팅엄은 충격적인 우승을 달성했고, 리그 컵에서도 우승했다. 노팅엄에서의 2번째 시즌인 1978-79에는 리그 준우승과 리그 컵 우승, 그리고 말도 안되는 유러피언컵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1979-80 시즌에는 함부르크 SV를 꺾고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했고 유러피언 슈퍼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쉴튼은 도박 중독에 빠졌고 노팅엄은 타이틀 수집에 실패한다. 게다가 쉴튼은 음주 운전으로 벌금을 무는 등 분위기를 타개할 필요가 있었고 아스널 FC 등의 관심이 있었으나 1982년 사우스햄튼 FC로 이적한다. 1983-84 시즌 리그 준우승에 기여하는 등 분위시 쇄신에 성공했다. 쉴튼은 1987년 더비 카운티로 이적했고 1992년 플리머스 아가일의 감독 겸 선수가 되면서 사실상 은퇴 상태가 되었다. 1994년 이후 윔블던, 볼튼, 코벤트리 시티 등의 클럽의 플레잉 코치로 활동했고 1996-97 시즌 레이튼 오리엔트에서 몇경기 출장한 뒤 현역에서 진짜로 은퇴했다
.

3 국가대표

1970년부터 1990년까지 국가대표팀에서 뛰었으며 125경기 출장으로 역대 최다 출장 선수이다. 동독을 상대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가졌으며 이른 나이에 고든 뱅크스의 서브 키퍼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72년 뱅크스가 교통사고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자 레이 클레멘스와 경쟁 체제를 형성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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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월드컵 예선 최종전에서 저지른 실수는 굉장히 유명한데,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도마르스키의 선취골을 허용하는 과정에서 공을 흘린것. 쉴튼은 자서전에서 이 실책을 20년 동안 대표팀에서 저지른 유일한 실책이라고 말했다. 70년대 잉글랜드 대표팀은 암흑기였고 쉴튼의 메이저 대회 데뷔는 유로 1980이었다. 그러나 레이 클레멘스에게 밀려 이탈리아전을 제외하곤 출전하기 못했다.

노팅엄에서의 성공으로 쉴튼은 클레멘스를 완전히 밀어내고 1982년 월드컵에 주전 골키퍼로 출전했다. 유로 1984에는 잉글랜드 자체가 예선에서 탈락했고 쉴튼은 1986년 월드컵에 출전했다. 그리고 8강전 아르헨티나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에게 월드컵 역사에 남을 두 골을 허용하며 패배했다. 유로 1988에도 출전해 A매치 100번째 출전을 달성했다. 그러나 대회에서 아일랜드의 레이 휴튼에게 헤더 결승골을 허용하고 마르코 반 바스텐에게 해트트릭을 얻어맞는 등 3전 3패로 탈락했다.

1990년 월드컵에 참가해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으며 잉글랜드의 4강에 기여했다. 4강 서독전에서는 PK까지 가는 접전 끝에 탈락했고 3/4위 전 이탈리아전에서는 어이없는 실책으로 로베르토 바조에게 선취골을 내주는 굴욕을 당했다. 이탈리아와의 경기는 쉴튼의 125경째 A매치였고 이 경기를 끝으로 쉴튼은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이후 골키퍼 계보를 이은 선수가 데이비드 시먼이다.
  1. 여담으로 EPL을 자주 봤다면 알겠지만, 스토크 시티의 경기장은 강풍으로 유명하다.
  2. 레이 클레멘스도 엄청난 골키퍼였는데, 역사상 최고의 팀 중 하나로 꼽히는 70년대 리버풀의 수문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