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 개요

1948년 강처중[1]과 정병욱[2] 등에 의해 처음 출판되어[3] 현재에 이르고 있는, 한국의 저항시인 윤동주의 시들을 모은 유고시집이다. 서문은 윤동주의 정신적 스승이자 당시 경향신문 주필이었던 정지용이 쓰고 발문은 윤동주의 친구들 중 하나이자 당시 경향신문 기자였던 강처중이 썼다. 본래는 30여 수의 시밖에 없었으나 간도에 남아있던 윤동주의 친인척이 윤동주의 시들을 가지고 내려와 현재 116여 수에 이르는 시들이 삽입되어 있다.[4]

2 서문

저자 정지용
발행 정음사
서(序)ㅡ랄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고 정성껏 몇 마디 써야만 할 의무를 가졌건만 붓을 잡기가 죽기보담 싫은 날, 나는 천의를 뒤집어쓰고 차라리 병 아닌 신음을 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써야 하나?
재조(才操)도 탕진하고 용기도 상실하고 8.15 이후에 나는 부당하게도 늙어 간다.
누가 있어서 "너는 일편(一片)의 정성까지도 잃었느냐?" 질타한다면 소허(少許) 항론(抗論)이 없이 앉음을 고쳐 무릎을 꿇으리라.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遺稿)에 분향하노라.
겨우 30여 편 되는 유시(遺詩) 이외에 윤동주의 그의 시인 됨에 관한 아무 목증(目證)한 바 재료를 나는 갖지 않았다.
'호사유피(虎死留皮)'라는 말이 있겠다.범이 죽어 가죽이 남았다면 그의 호문을 감정하여 '수남(壽男)'이라고 하랴? '복동(福童)'이라고 하랴? 범이란 범이 모조리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시인 윤동주를 몰랐기로서니 윤동주의 시(詩)가 바로 '시'고 보면 그만 아니냐?
호피는 마침내 호피에 지나지 못하고 말 것이나,그의 '시'로써 그의 '시인'됨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이 지나친 피로,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ㅡ그의 유시 <병원>의 일절

그의 다음 동생 일주(一柱) 군과 나의 문답ㅡ,
"형님이 살았으면 몇 살인고?"
"서른한 살입니다."
"죽기는 스물아홉예요ㅡ."
"간도(間島)에는 언제 가셨던고?"
"할아버지 때요."
"지내시기는 어떠했던고?"
"할아버지가 개척하여 소지주(小地主)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는 무얼 하시노?"
"장사도 하시고 회사에도 다니시고 했지요."
"아아,간도에 시와 애수와 같은 것이 발효하기 비롯한다면 윤동주와 같은 세대에서부텀이었구나!" 나는 감상하였다.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ㅡ<또 태초의 아침>의 일절

다시 일주 군과 나와의 문답ㅡ,
"연전(延專)을 마치고 동지사(同志社)[5]에 가기는 몇 살이었던고?"
"스물여섯 적입니다."
"무슨 연애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습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습니다."
"인색하진 않았나?"
"누가 달라면 책이나 셔츠나 거저 줍데다."
"공부는?"
"책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원하면 시간까지도 아까지 않습데다."
"심술(心術)은?"
"순하디 순하였습니다."
"몸은?"
"중학 때 축구 선수였습니다."
"주책(主策)은?"
"남이 하자는 대로 하다가도 함부로 속을 주지는 않습데다."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그러나
ㅡ<간(肝)>의 일절

노자(老子) 오천언(五千言)에,"허기심(虛基心) 실기복(實基腹) 약기지(弱基志) 강기골(强基骨)"이라는 구(句)가 있다.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ㅡ<십자가>의 일절

일제 헌병은 동(冬)섣달에도 꽃과 같은,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은 이제 고토(故土) 간도에 누워 있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ㅡ<또 다른 고향>

만일 윤동주가 이제 살아 있다고 하면 그의 시가 어떻게 전전하겠느냐는 문제ㅡ
그의 친우 김삼불(金三不) 씨의 추도사와 같이 틀림없이,
아무렴! 또다시 다른 길로 분연 매진할 것이다.
1947년 12월 28일 지용

3 발문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 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 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 보자구"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가이든 아무런 때 아무데를 끌어도 선뜻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시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나오는 외마디 비참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 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 전당포 나들기를 부지런이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사양하는 일이 두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하는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법이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아니하였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
쑥쓰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 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한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복강에서 죽었다. 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이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이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 간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쓸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몽규와 동주가 연전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듯 느껴지드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복강에 갔던 그 유족에게 전하여준 말이다. 그 비통한 외마디소리! 일본간수야 그 뜻을 알리만두 저도 그 소리에 느낀바 있었나 보다. 동주 감옥에서 외마디소리로서 아주 가 버리니 그 나이 스물아홉, 바로 해방되던 해다. 몽규도 그 며칠 뒤 따라 옥사하니 그도 재사였느니라. 그들의 유골은 지금 간도에서 길이 잠들었고 이제 그 친구들의 손을 빌어 동주의 시는 한 책이 되어 길이 세상에 전하여 지려한다.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강처중)

4 구성

1948년 초판본과 1955년 이후 재인쇄본 모두에 실려있는 시는 볼드체 표기

  • 서문(정지용)
  • 발문(강처중)
  • 서시
  • 자화상
  • 소년
  • 눈 오는 지도
  • 돌아와 보는 밤
  • 병원
  • 새로운 길
  • 태초의 아침
  • 또 태초의 아침
  • 새벽이 올 때까지
  • 무서운 시간
  • 십자가
  • 바람이 불어
  • 슬픈 족속
  • 눈 감고 간다
  • 또다른 고향
  • 별 헤는 밤
  • 흰 그림자
  • 흐르는 거리
  • 쉽게 씌어진 시
  • 팔복
  • 못 자는 밤
  • 달같이
  • 고추밭
  • 아우의 인상화
  • 비 오는 밤
  • 산골물
  • 참회록
  • 바다
  • 소낙비
  • 달밤
  • 아침
  • 빨래
  • 꿈은 깨어지고
  • 이런 날
  • 가슴 1
  • 가슴 2
  • 비둘기
  • 남쪽 하늘
  • 거리에서
  • 삶과 죽음
  • 초 한대
  • 산울림
  • 해바라기 얼굴
  • 귀뚜라미와 나와
  • 애기의 새벽
  • 햇빛, 바람
  • 반딧불
  • 둘 다
  • 거짓 부리
  • 참새
  • 버선본
  • 편지
이 외에도 많은 시가 있으니 추가바람
  1. http://file2.instiz.net/data/file2/2016/02/27/7/0/6/706e1f67e8ab2303438831d34e762332.png(실제 강처중의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강처중(1917~1950?)은 전 경향신문 기자이자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친구 중 하나이다.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출판을 주도하여 윤동주를 세상에 알리는 데 기여하였으나 좌익활동 혐의로 1950년대 총살당했다...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강처중의 가족들(부인, 자녀들)이 나타나 강처중이 좌익활동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된 것은 맞으나 6.25 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풀려나 소련으로 가 공부하고 오겠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월북했다고 한다. *
  2. 윤동주의 5살 후배이자 가장 친했던 친구 중 한 명
  3. 사실 윤동주는 1941년 자신이 고른 19편의 시를 이미 출판하려 하였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출판하지 못하였다.
  4. 사실 윤동주는 시집 2권 분량의 시들을 지었으나 일부가 유실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5. 일본 도시샤 대학교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