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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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鄭芝溶, 음력 1902년 5월 15일/양력 1902년 6월 20일 ~ 1950년 9월 25일)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유리창 1」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호수 1」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고향」

언어미술이 존속하는 이상 그 민족은 열렬하리라. -1936년, 「시와 소설」[1]
조국의 화평무혈통일을 위하여 끝까지 붓을 칼 삼아 싸우고 오라. -1950년, 「소설가 이태준군 조국의 <서울>로 돌아오라」

참신한 이미지와 절제된 시어로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한 시인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이자 수많은 시인들을 발굴해낸 문인.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출신으로 휘문고등학교도시샤(同志社)대학을 졸업했다. 1926년 『학조』 창간호에 「카페·프란스」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우던 오장환의 스승이기도 하다. 구인회의 창립멤버이기도 하였고 일제의 탄압이 이어지자 모더니즘, 그 중에서도 이미지즘에 눈을 돌리기도 하였다.[2]

청록파(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와 윤동주, 그리고 이상은 그가 추천하였다.[3] 그리고 일제와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1942년 이후 붓을 꺾고 글을 쓰지 않았다.

1945년 8.15 광복 후 좌파 문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문학분과의 위원장이 되었으나 문학 활동은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대신 문학 외의 글을 투고한 흔적이 남아있는데, 그의 일반적인 문학작품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과격한 어조의 글도 종종 보인다. 이 시절 투고한 글중에서 일본의 침략자 근성을 비난할때 모모타로를 언급하면서 섬나라 도둑근성 동화라면서 디스하기도 하며 대만 원주민에 대한 기고를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좌우의 대립이 극렬해지자 월북을 선택한 동료들과는 달리 전향을 선택, 보도연맹에 가입했다.[4] 그리고 6.25 전쟁이 터지고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채 서울특별시에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인천 상륙작전이 끝나고 수복한 서울에서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한 때 납북된 것인지 월북한 것인지를 확인하지 못해 1988년 7.19 해금조치를 통해 그의 시가 해금되기 전까지 정X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었다. 현재 그의 사인은 납북되던 중 폭격에 휘말려 사망하였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기사

그러나 이와 별개로 월북한 후 북에서 활동하다 숙청 혹은 탄광행이 되었다는 말도 있어서 확실한 건 아무도 모른다.

근데 숙청이나 탄광행 가능성이 낮은 게 2000년에 북한에 있던 둘째 아들이 아버지 정지용을 찾겠다고 이산가족 신청해서 찾아온 적이 있다. 숙청이나 탄광행이라면 유가족이 이렇게 활동할리는 없을 듯... 숙청이나 탄광행이 가능성이 낮은 이유다.

군사정권 시절때, 그에 대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금기'의 대상 자체였다.(코렁탕)[5] 모 월간지에선 정지용의 자진월북설을 제기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 기사에 의하면 정지용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었는데 모윤숙('렌의 애가'로 유명해서 사전에도 실려있다. 친일인명사전)이 정지용의 행방을 거제도에서 필사적으로 찾았지만 정지용이 자신의 신분을 끝까지 감추고 북한행을 선택했다는 것. 그러나 이 기사는 정지용의 유족들이나 지인들에 의해서 터무니없다는 소리만 들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향수>, <유리창1>이 있다. <향수>의 경우 가곡으로도 나왔기때문에 이쪽으로 알 사람도 꽤 될듯. 가곡 <향수>의 인트로는 90년대 모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보릿고개시대를 소재로 한 코너의 삽입음으로도 쓰였다.

여담이지만 노태우 정부 시절 전까지는 친북인사로 규정되는 바람에 시가 교과서에 실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30대 이상 되는 어른 중에는 정지용의 시가 수능 시험 등에 출제되는 것을 매우 신기하게 여기는 경우도 많다.

정지용 시에 가락을 붙여 만들었던 노래들이 금지곡 지정을 면하고자 가사를 바꾸게 되는 일도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노래가 채동선의 고향. 박화목이 개사한 망향, 이은상이 개사한 그리워로도 알려져 있다.
정지용의 새 작품이 발굴됐다. 관련기사1, 관련기사2 베스트 댓글의 포스가... 평가원이 글을 좋아합니다 수험생들은 그저 흠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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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 소사본동에 은거지 터가 있다.로드뷰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영화)에 등장하는데 문성근이 분했다.

작품

  1. [1]
  2. 그 결과는 1941년에 출판된 그의 시집 《백록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집은 청록파에 영향을 주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더니즘의 하위항목에 이미지즘이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별개이지만 한국에서는 어째 모더니즘의 하위항목에 이미지즘이 속해있다. 김광균 때문일지도... 어쨌든 한국에서의 모더니즘은 서구의 모더니즘과는 그 양상과 전개가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3. 1933년에는 《가톨릭 청년》의 편집 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의 시를 실어 등단 시켰고 1939(38세)에는 문장지의 시부문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켰다. 마지막으로 윤동주는 강처중과 정병욱의 요청에 따라 추천사를 써주며 등단시킨 셈.
  4. 그런데, 그 전향한 것도 보도연맹 입안추진자였던 오제도가 정지용에게 가서 강요로 가입해달라고 재촉한 것이었다고 한다.
  5. 전두환 정권시절때인 1982년, 정보당국에 고용된 익명의 필자가 '추적 정지용'이라는 단행본을 펴냈는데, 이 책은 저자가 실존인물인지 자체가 불명이다. 책의 구성을 보면 정지용에 대해 어떤 정치적 이미지를 고정하려는 목적으로 다른 잡다한 언설로 시종일관하고 있어, 사실에 관한 논의를 '마녀사냥'식 사상논쟁으로 몰고가려는 의도가 아주 강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