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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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두산 북쪽과 서쪽의 만주 일부분 지역을 일컫는 말

間島,'사이 간'과 '섬 도' 로 직역하면 '사이섬'(사잇섬)

1.1 개요

보통 우리가 말하는 간도는 두만강 북쪽 지역의 북간도(동간도)를 의미한다. 역사적으로는 발해가 망한 후 여진족의 거주지였다. 다만 윤관이 개척한 동북 9성의 위치 비정에 따라 고려 예종 때, 그 일부를 수복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동북 9성 항목 참조.

간도에 거주하던 여진족들은 때로는 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때로는 서로 싸우기도 하는 관계에 있었다. 여진족이 부족 단위에서 국가로 통일되어 후금이 되고 청나라가 되면서 간도를 포함한 만주 일대는 만주족의 발상지라 하여 신성시되었다. 조선 숙종(청나라 강희제) 때, 청의 출입 금지 지역에 조선인의 월경이 잦아지고 국경 분쟁이 생기자 1712년 청나라 관리 목극등과 조선관리 박권이 백두산에 올라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고 국경을 정했다.

그러나 조선 말기 / 대한제국기 백두산정계비의 비문을 놓고 분쟁이 생겼다. 이 문제는 1909년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가 청과 간도 협약을 맺으면서 일단락되었다. 후에 일본 제국이 패망하고 간도 협약이 무효화되면서, 북한과 중국은 조중변계조약을 맺고 현재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옛날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가 영유하거나 말갈, 여진, 만주족 등 기타 무수히 많은 유목민들이 거쳐간 땅이었지만 지금은 중국의 영토가 되어 있다. 수능 평가원에서도 이를 의식하는지 역대 수능 기출문제 가운데 간도에 대한 부분은 거의 다루지를 않는다. [1] 대부분 독도에 관련해서 출제를 하는 편. 하지만 행정안전부가 주관하는 공무원 시험에서는 간도에 대해서도 출제를 해 왔다.[2]

2 위치

사실 간도라는 땅의 위치랑 영역은 사실상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광의의 간도는 압록강-두만강 맞은편의 한민족(조선족) 집단 거주지를 지칭하며, 압록강쪽을 서간도, 두만강쪽을 동간도(북간도)라 일컫는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간도는 두만강 북쪽 지역의 북간도(동간도)를 의미한다. 즉 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가 대충 맞아 떨어진다 할 수 있다. 협의의 간도로는 토문강 및 간도문제를 둘러싼 조선족 자치주에서 한족 집단 거주지인 통화현을 제외한 해란강변의 조선족 자치주가 비슷한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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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환빠들은 간도의 영역을 확대시켜서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 그치지 않고 남만주는 물론이고 만주 전체와 연해주 시베리아까지 간도의 일부라고 주장한다.[3] 일부 환빠는 자기들이 맨날 빠는 몽골바이칼 호, 대마도, 산둥 성, 북경까지도 영역을 확장시킨다(...). 흠많무. 아무래도 한국과 관련이 있는 지역은 통틀어 간도라고 칭하는 듯.

2.1 국경 문제

2.1.1 백두산 정계비와 토문강 논쟁

토문강 문서 참고.

2.1.2 조선말 & 대한제국

간도 지역은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발상지인 만주의 일부로, 현재와 달리 봉금령으로 한족 주민이 아직 거의 없었고, 덕분에 인구밀도가 매우 낮아 농사짓기 좋은 빈 땅이 많은 상황이었다. 청나라에서는 두만강 하류인 훈춘에 훈춘협령을 세우는 등 봉금을 지키기 위한 실효적인 노력을 했지만, 두만강 상류 지역에는 감시를 하지 않고 거의 내버려두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두만강 상류의 북안을 조선측의 봉금지대로 인식하는 시각이 있었지만, 해당 지역이 비워져 있던 동안에는 별다른 분쟁이 생기지 않았다.

조선 말, 일부 조선인들이 강 건너로 이주해 살면서 두 나라간에 다시 영토 문제가 발생한다. 월경하는 인원이 하도 많아지자 결국 조선은 두만강 너머 지역에 지계를 발급하고 월경을 인정해주기로 한다. 만주 일대를 봉금 지역으로 지정하고 보호하고 있던 청나라는 1881년에 이르러서야 조선인들이 두만강 이북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청은 국경선을 두만강으로 보고 이 지역에 계속 살던 조선인들을 인정하고 대신 청의 백성으로 귀화시키려했다. 주민들은 토문강이 두만강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에 보호를 요청했다. 조선과 청은 몇 번의 감계회담을 갖는데, 청은 두만강이 국경이니 그 원류를 밝혀 국경을 정하자고 했고, 조선은 200년전 세운 백두산정계비 비석에 새겨진대로 토문강을 국경으로 정하자고 주장한다. 다만 토문강과 해란강을 국경으로 하자고 주장하였음에도 결국 회담은 결렬되고 만다. 이후 국경이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은 곳을 제외하고 청은 두만강 유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행사했다.

2.2 간도 영유권 논란

2.2.1 조선 말 & 대한제국

일부 사학자 중에는 일제의 영향으로 간도의 영유권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었다고 역사왜곡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1899년 함경북도 관찰사 이종관이 간도에 대한 확대된 영유권 주장을 처음 했을 뿐 일제와는 관계가 없다.

일본과 '통감부간도파출소'는 오히려 오늘날 간도의 영역으로 인식되는 연변조선족자치주(돈화현 제외)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해란강 이남 지역을 조선이 국제법적인 영유권을 갖는 간도지역으로 파악했다. 1906년에 간행된 『만주지지』에서는 해란강 이남, 두만강 이북의 지역을 간도의 영역으로 파악하고 있다.

아무튼, 청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간도에 대한 확대된 영유권 주장이 나타났다. 대한제국의 경우 압록강 북안 지역에 대한 지배를 시도하기도 했다.

1902년 대한제국은 간도 관리사[4]를 파견해 현지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대한제국과 청은 다시 외교분쟁에 돌입했는데, 이는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잠시 중단된다. 한편으로 대한제국은 1902년 러시아와 공동통치협약안을 작성하여 간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는데, 러시아 입장에서는 의화단 사건으로 만주에 파병하는 등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어떻게든 뻗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러시아가 이런 조약을 대한제국과 맺은 것은, 이 다음 목표는 한반도를 상정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러시아의 성향을 보면 청나라를 통과하지 않고 연해주로 가는 짧은 길을 내기 위해서일 가능성도 있다. 애초에 러일전쟁 이전에 러시아의 입지가 감소했는데, 이유는 청의 산둥반도를 삼키려고 들었다가 외교적으로 왕따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러일전쟁 항목 참고.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간도 문제는 일본의 관할로 넘어가게 된다. 일본은 간도를 일단 한국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대한제국을 먹으면서 간도까지 낼름 먹으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일본은 간도가 한국령이라는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은 만주의 철도 또한 시급한 문제였다. 일본은 새로운 철도 부설권과 러시아가 남기고 간 철도의 경영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만주 철도와 간도를 저울질하던 일본은 간도보단 철도 쪽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하에 청으로부터 철도에 관한 이권을 보장받고자 했다. 일본과 대립하던 청은 일본이 간도 문제를 양보하면 철도 문제를 협조해주겠다고 전한다. 이에 청과 일본은 만주 철도 부설에 관한 협약과 그 유명한 간도 협약을 체결한다. 간도협약이 원인무효라고 해도 그 효과는 단지 동 협약 이전의 법적상태로 돌아갈 뿐이다. 다시 말해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것만으로는 대한민국이나 북한의 간도영유권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는 것.

청은 어차피 조약 이후 15년만 지나면 일본이 부설한 철도를 국유화하기로 했으므로, "드디어 영토 문제도 확실히 매듭짓고, 철도도 나중에 우리 것이 되겠다, 별 손해가 없네?"라며 개이득 아싸 조약을 체결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청나라는 얼마가지 않아 망해버렸다(...). 우왕

2.2.2 일제강점기/8.15 광복 직후

간도지역에는 한국인/조선인이 계속 거주했다. 만주국이 설립된 이후 간도성으로 편재되기도 하였다. 간도성의 주민은 대부분 한국인과 소수의 일본인이었다.

광복 이후 일부는 귀국하고 남은 사람은 북한 편입을 희망하였다. 이후 국공내전 때 공산측의 기지가 되기도 한다.

아래에서 보듯 연길, 요동 등의 북한 편입이 소련에 의해 진행되기도 했으나, 국공내전 이후 스탈린이 마오쩌둥을 인정하였고 6.25 전쟁 이후 북한이 중국군의 원조로 겨우 살아난 이후 주민들의 독립론(북한 편입론)은 쏙 들어갔다.(...)

심지어 조선족들도 피해를 봤다. 북한군의 주력으로, 그리고 중공군에 참전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위해 숱한 피를 흘렸는데 1952년 설립된 연변조선족자치구(延边朝鲜族自治區)가 전후 1954년 연변조선족자치주(延边朝鲜族自治州)로 바뀐것(...) 중국은 소수민족 자치구역으로 자치구가 1급이고 자치주가 2급이다. 비록 조선족자치구가 위구르나 티베트, 내몽골와 같은 동급의 자치구역은 아니었다고는 하나 명칭뿐이더라도 내려앉은 것. 그야말로 토사구팽

2.2.3 간도와 북한

사실 해방 이후 소련의 정치적인 안배로 인해서 간도가 북한에 귀속될 뻔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간도 주고 녹둔도 빼먹기

일본의 패망 이후 간도는 국공내전으로 중국 국민당중공군과 그를 후원하는 소련군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간도는 중공군이 점령하였다. 하지만 간도를 자국이 관리하려는 중국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소련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간도를 북한에게 편입시키는 것으로서, 소련은 비록 일면으로는 공산주의 맹방인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후 자국의 패권을 위협할 수도 있는 중국의 영향력을 주의하고 있었으며, 음양으로 중국을 약화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중국과는 별개의 민족이며 북한과는 동일한 민족이 다수 분포되어 있었던 간도를 중국에서 분할하여 북한에 편입시켜 중국을 약화시키고 북한을 강화하여 중국을 견제하게 함으로써 다소나마 중국과 북한의 균형을 맞추고 자국의 유일 패권 확립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국공내전으로 인하여 만주에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시국을 이용하여 소련은 중국을 배제시킬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북한과 소련이 참여한 이 제1차 평양협정(1947.5)에서 북한에게 랴오닝성(遼寧省), 안둥성{安東省, 현 단둥(丹東) 부근} 등 요동반도와 남만주 전체를 편입시키기로 협정하였다.

그리고 제2차 평양협정(1948.2)에서는 요동반도를 제외한 안둥성, 지린(구 만주국 행정구역), 간도(구 만주국 행정구역, 현 옌지 부근)의 3개의 자치구를 북한에 귀속시키기로 협의하였다. 사실상 전 간도를 북한의 영토로 귀속시키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에 따라 북한의 정규군이 옌지(延吉), 무단장(牧丹江), 무링(穆陵) 지역에 주둔(1948.7)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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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중화민국 국방부 2청이 외교부에 보낸 문서의 부록 지도. 지금까지 언급된 자료는 1948년 7월 10일 중화민국 국방부제2청이 중화민국 외교부에 제출한 문서이다. 당사국인 소련, 북한, 중국의 자료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이 사실을 중화민국에서 입수할 수 있었는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특히 획정하고자 하는 구역이 강과 산을 경계로 하지 않고 상당히 임의적으로 정해진 점과 기존에 안동, 길림, 간도라는 행정구역이 사용된 적이 없는데 뜬금없이 등장하는 점 역시 밝혀내야만 실제로 할양이 논의된 일인지, 중화민국의 엄살 혹은 과장인지 밝힐 수 있을 것이다. - 박선령 (2006) - '소련이 "간도 지역을 북한의 영토로 획정"한 중화민국 외교부 사료와 간도문제에 대한 연구 과제'를 참고함.

이러한 소련의 옹호와 지지에 힘입어 북한은 고구려 이래의 고토이자 한민족 구성원의 다수까지 포함한 간도 영유는 물론이고, 남북 간의 관계에서 강력한 우세를 점할 수 있는 위치까지 가지게 되었다. 아마도 이같은 낙관적인 상황은 북한의 김일성으로 하여금 강렬한 공산통일의 야심을 품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한 이유들을 원인으로 하여 결국 2년 만에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대 고구려 태태왕 김일성

잘 아시다시피 전쟁 초반은 북한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연합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으며 북한은 중국의 구원에 의존하여 간신히 북진통일을 면하고 휴전을 체결하고 마는 패전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종전을 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북한의 국력과 국가적 위신은 크게 추락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중국의 참전으로 인해 북한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이 매우 커져서 중국에게 상당 부분의 지분을 양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간도의 북한편입은 말 그대로 종결되었다. 결국 간도는 명실공히 중국의 영토가 되어 옌볜조선민족자치구가 설치(1952)되었다가 옌볜조선족자치주로 변경(1955)되었으며 그 땅의 한민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인 재중교포(조선족)로써 현존하게 된다. 한민족 최대의 원수, 김일성

조중변계조약(1962)으로 북한과 중국은 간도의 중국 소유를 인정하였으며 백두산천지를 경계로 하여 북한이 2/3, 중국은 1/3로 분할하기로 협약하였다. 이 조약은 비밀조약으로써 양국 경계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많았으나 최근 조약이 공개됨으로서 확인되었다. 이리하여 대한제국 이래로 간도를 한반도 국가쪽에서 먹으려고 했던 시도는 다시 한번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출처

하지만 역설적인 것은, 백두산천지를 제외하면 이 조약에서 합의한 나머지 경계선은 1887년에 있었던 조선청나라의 감계회담에서 조선 대표 이중하가 주장했던 바로 그 선이라는 것. 75년 전에 합의했으면 그 뒤로 할 필요가 없었던 싸움을 한 셈이다. 조중변계조약을 두고 일부에서는 '북한중국에 간도를 팔아넘겼다'라고 곡해하기도 하는데, 상기 내용을 읽어보면 사실무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중변계조약천지의 영역만 아니라 압록강두만강하중도도 대부분 북한에게 넘기는 등 워낙 북한에 유리하게 되어 있어서 중국 내에서도 다시 조약을 맺어야한다고 불만이 많다.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통일이 되면 조중변계조약 대신 새로운 국경 조약을 맺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중국이 바라는 일이다. 사실 새로 조약을 맺으면 오히려 영토가 좁아질 가능성도 크다.

2.3 간도의 한민족

불법 월경이었든 합법 이주였든 어지러운 국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조선 말기 간도로 이주하는 주민이 늘었고, 이 현상은 오히려 지주 전호제가 심화된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19세기 중엽부터는 청과 러시아가 간도와 연해주에 개간 장려 사업을 펼쳤기 때문에 이주는 가속화되었다.

이후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존속했던 신민회 등의 활동으로 만주에 독립군 기지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서간도삼원보북간도용정, 연길, 명동 등은 이후 독립 운동사에서 아주 중요한 지역으로 발돋움한다.

3.1 운동 이후 독립 운동이 활성화되고 국내 진입 작전 또한 자주 이루어졌으나, 1920년 일본이 훈춘 사건을 빌미로 군대를 대거 파견해 독립군 소탕 작전을 펴면서 독립군은 시련을 맞았다(청산리 전투 또한 전과는 둘째 치고 후퇴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여기에 연해주에서 자유시 참변을 겪으면서 독립군의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그래도 일본이 지배하는 지역이 아니면서 한민족이 가장 많이 살았던 지역이기에 3부 설립 등 독립 운동은 지속되었으나 1925년 장쭤린 - 미쓰야 협정이 맺어지면서 독립 운동은 다시 암흑기를 맞았다. 그나마 1920년대 후반 장쭤린이 일본의 테러로 폭사당하고 장쉐량중국 국민당에 가담하면서 협정이 파기되었고, 마침 신간회 등으로 좌우 합작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었기에 이에 힘입어 독립군 또한 통합 운동을 벌일 수 있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1932년 만주국이 설립되면서 이 지역의 독립군들은 대개 중국군 혹은 공산주의 부대와 연합해 활동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게 된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에 가면 대개는 중국 내륙으로 거처를 옮겼고, 일부는 간도와 만주 지방에 남아 유격전을 전개하기도 했으나 당연히 세력은 이전보다 확연히 약화되었다(이렇게 암울한 상황이었기에 보천보 전투김일성이 그렇게 뜰 수 있었던 것이다). 1940년에는 사실상 간도에서는 독립군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전쟁 이후에는 국내로 귀국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남은 사람 또한 많았다. 현재는 중국 내에서 '중국조선족'으로 소수민족 대우를 받으며, 만주 지역의 일부는 '조선족 자치구'로 묶여 있다. 참고로 중국어에서 조선족은 조선민족 즉 Korean 전체를 가리키므로 '중국'조선족이 중국에서 공식명칭이다.

2.4 현대의 간도문제

많은 한국인들은 백두산 정계비에 새겨진 '동위토문'의 토문강이 현재의 송화강이라고 주장하며 간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고등 교과목인 국사한국근현대사에서는 대한제국의 간도 관리사 파견과 간도협약에 관한 사실만 교과서에 실어놓고, 마치 간도가 조선 고유의 영토인 것처럼 묘사해놓았다. 다만 최근의 교과서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적어졌다. 물론 증산도나 자칭 재야사학자들에게는 그런거 없다

사교육 강사들 사이에서는 인식이 미묘하게 다른 편이다. 설민석의 경우 우리나라의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지만,[5][6] 고종훈의 경우에는 "당시 조선에서 생각하던 간도는 두만강 이북의 조그만 유역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쑹화강 지류의 지역이라고 하니 서로 당황한 것으로 본다. 현재 우리가 아는 그 간도는 중국 지역이라고 본다."라고 하며 두만강 이북의 조그만 유역 정도의 영유권은 긍정하면서 확대된 간도는 우리땅 운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본다.

역사학자들 가운데에도 의견이 엇갈리는데, 간도 전체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긍정하는 경우, 조선이 주장한 원안 수준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경우, 간도 영유권을 부정하는 경우로 나뉜다.

마이너하긴 하지만 압록강 넘어 서간도까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청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주도로 만들어진 중국 전도 + 조선 지도(이 지도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가 프랑스에 전해지면서 만들어진 당빌 지도에 압록강 이북 지역에 점선으로 선(프랑스 선교사의 이름을 따 레지 선이라고 함)이 그어져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조선과 청의 국경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당빌 지도는 원래 당빌이 중국 풍속 관련 책의 삽화로 그린 것을 따로 묶어 책으로 낸 것으로 여기에 이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는데, 청이 조선과의 분쟁을 막기 위해 조선 국경 밖에 공백지를 두었다고 한다.

즉 청은 병자호란 이후 조선 국경 밖 백여리의 땅을 비우고 그 경계에 책을 쌓았는데 그 책을 그린 것이 바로 레지 선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건 조선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통적 시각에서 보면 청의 국경은 봉황성이고, 조선의 국경은 의주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양국 간의 공지를 두어서 충돌을 막는다. 그런데 의주는 국경도시인 반면 봉황성은 압록강에서 상당히 떨어진 지점인 만큼, 즉 청나라 땅만 비워서 공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맞다. 비무장지대

청이 자국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봉금 정책을 펴 간도를 비운 것을 빌미로 청은 간도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했고 그 자리에 조선인들이 들어갔기 때문에 조선 영토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건 어떤 일본인들은 조선조의 공도 정책을 펴 섬을 비운 것을 빌미로 조선이 독도를 포기했고 그 섬에 일본인이 들어갔기 때문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논리와 같다.

역사적인 정통성을 떠나서 실질적으로 간도를 가져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한국에 있는가에 대해선 의문점이 많다. 간도전체에 살고 있는 중국인, 한족은 227만명이 넘어가 간도의 조선족들보다 한족들이 더 많은데 이 중국인들이 과연 한국의 지배를 받아들일리도 없고, 설령 간도에 사는 중국인들이 대한민국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상황이 오더라도, 하나의 중국의 기치를 내거는 중국의 간도회복 때문에 사태는 더 심각해질 수 있다. 물론 조선이 주장한 원안수준의 영역으로 간도를 반환받으면 간도의 조선족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한국의 지배를 받아들일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 한국 편입 지역으로의 조선족의 유입과 한족의 이탈을 고려하면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인구 대부분이 한족이 되고 조선족은 20%대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해 조선족이 지역의 소수민족으로서의 권리도 누리기 힘들어지는 문제점이 있다. 게다가 한국 내 탈북자, 조선족 같은 소수자 문제만도 힘에 겨운 한국이 북한과 함께 간도를 넘겨받을 역량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간도 관련이든 독도 관련이든 언급되는 것이 '100년 실효 지배시 다른 나라는 그 땅에 대해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이론인데, 2009년 9월 4일자로 중국의 실소유 100년이 되는지라 많은 사람들이 2009년 이 떡밥이 부풀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판결례로는 그런 거 없다. 지금까지 국제적으로 실소유 100년이니 뭐니 언급한 판결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아르헨티나영국포클랜드 제도 점거 100년이 한참 지난 뒤에 반환을 요구한 사례가 있다. 2009년 9월 4일에서 5일 사이에 연합뉴스를 비롯한 몇몇 언론에서 간도찾기 운동을 벌이는 시민단체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긴 했으나 당 기사에서도 학자들이 '근거가 부족한' 일이라며 부정하고, 사회는 전혀 눈길도 주지 않는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었다.

2011년 9월 21일, 대한민국 정부가 지난 1909년 일본과 청이 맺은 간도협약은 무효라고 밝힌바가 있다. 한편 헌법재판소어떤 정신나간 양반이 청구한 헌법소원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가 현재 중국의 영토인 간도 지역을 회복하여야 할 작위의무가 특별히 규정되어 있다거나 헌법 해석상 그러한 작위의무가 도출되기 어렵다'[7]고 판결했다.

현재 중국은 '간도'라는 명칭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은 경술국치 전 통감부 시절에 간도 지방의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간도파출소를 두어 무장병력을 이 지역에 주둔시키고 있었고, 경술국치 후에는 간도 총영사관을 두었었으며,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세워진 이후에는 이 지역을 '간도성'이라는 행정구역명으로 부르고 있었다. 즉 중국에게는 '간도'라는 명칭 자체가 과거 일본의 침략을 상기시키는 말이다.

2012년 시점으로 고등학교 한국지리 교과서에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대목이 있는데 간도 중 북방고토지역이 북만주 끝까지 펼쳐져 있다. 수업자료 중 간도를 중국이 불법점거하고 있으며 되찾아야 한다는 내용까지 있었다. 그리고 역사 왜곡으로 악명 높은 이덕일을 간도에 대한 레벤스라움과 유사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간도는 을사늑약이전까지는 조선땅이였는데 조선총독부세력이 그걸 부정하고 있으며, 간도가 조선땅였다는 것을 부정하면 비국민이라 했다. 한민족이 아니며 중국의 흑인(호적이 되어 있지 않은 중국인이다.)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으로 잡아가야하며, 간도 영유권을 부정하는 정권은 뒤엎어야한다는 주장을 했다.역시 사학계의 하인리히 힘러 자세한 건 이덕일/비판항목 참고. 국가보안법은 그런 데 쓰라고 있는 법이 아닐텐데?[8]

김대령은 만주국은 괴뢰가 아니며 주권이 만주족조선족에게 있으니 간도는 한국땅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런데 좌파들이 만주국을 일본이라고 우겨서 간도를 중국공산당에게 넘기려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자세한건 김대령 항목 참고

이덕일, 김대령 둘의 공통점은 간도를 부정하면 비국민이고 중국인이라는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써놨지만 사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간도에 별로 관심이 없다. 일단은 우리나라와 간도 사이에 북한이 가로막고 있고 중국이 실효지배중인데다가,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지 않기 때문. 다만 추후 통일이 되면 간도와 관련된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크게 공론화될 공산이 그닥 크진 않을 뿐더러, 중국이 통일의 조건중 하나로 중국의 실효지배 와 조중변계조약의 인정을 내세울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통일 한국은 현실적으로 간도 및 백두산의 절반 가량은 중국땅임을 인정해야 할 공산이 크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영토분쟁이 단순한 외교적 협상 따위를 통해 해결된 적은 인류 역사에서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으며, 결국 흐지부지 현상유지로 결론이 나거나 아니면 전쟁을 통해 최종적인 소유권이 결정된 경우가 대부분이다.[9][10] 아직 한국 통일이 되지 않았기에 뭐라 확정 할수없는 부분 이지만, 중국과 베트남 소련의 영토분쟁 처럼 어느정도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2.5 관련 문서

3 강원도 (북한) 앞바다의 섬

間島

강원도(북한) 고성군 장전읍(북한 행정구역상 고성읍) 앞바다에 있는 섬이다. 면적은 0.12㎢ 정도로 개첨도, 남송도와 함께 삼도(三島)를 이룬다. 북한 지도에는 사이섬이라고 되어있다.# 연안 일대는 수산업의 중심지라고 한다.

참고로 네이버 백과사전(두산백과)에는 화양군 고성읍에 있다고 되어 있지만# 명백한 오류. 강원도에는 화양군이 없으며, 비슷한 이름인 회양군은 바다와 접하지 않은 내륙군이다.

1번 항목과 한자 이름까지 똑같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낚시도 있다(...).#
  1. 그런데 이 지역이 1900년대들어서 국외독립운동의 핵심지역이 되었기 때문에 1900년대~1930년대에 걸친 이 지역의 독립운동은 꽤 양도 많았고 출제된적도 적지 않다.
  2. 고종치세 1883년 서북경략사 김윤식과 어윤중, 1885년 토문 감계사 이중하, 1902년 이범윤을 파견 후 1903년 간도관리사라 임명하였다. 1907년 통감부는 간도출장소를 설치하였으며, 1909년 간도협약으로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청에게 넘겼다. 시대순과 관련인물에 대해 출제된다.
  3. 그러나 간도의 범위를 집대성해보면 연해주 지역, 혹은 연해주의 일부 역시 간도의 범위로 인정하는 학자(정확히는 4명 이인걸, 이성근, 노계현, 노형돈 등)들도 있어 엄밀히 따지면 이곳 역시 간도로 볼 수도 있다.
  4. 엄밀히 따지면 1902년에 이범윤을 파견하고, 1903년에 간도 관리사로 직책을 올려 대응케 했다.
  5. 잃어버린 땅, 간도를 아십니까?
  6. 다만 수업 중에 언급하기를, 간도는 우리나라의 영토였으나 나라가 힘이 없어 뺏기었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라는 뉘앙스로 간도에 대한 직접적인 영유권 주장보다는 우리가 가지고 있었다.에 가깝다.
  7. 2009헌마516
  8. 국가보안법의 취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국가보안법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이적행위를 처벌하라고 있는 것이지 단순히 간도가 조선땅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으로 잡아가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국가보안법의 적용 대상도 아니다.
  9. 예를 들어, 서희가 외교적 담판으로 얻어냈다는 강동 6주는 사실상 거란의 땅도 아니었지만 후일 거란은 이곳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재차 공격해왔고 고려가 최종적으로 전쟁에 승리하면서 강동 6주 소유권의 고려 귀속을 확정지었다.
  10. 이 외에도 알래스카같은 케이스처럼 영토를 구매하는 케이스도 있지만, 만주지방의 자원이나 군사적인 요소 때문에 절대 적은 금액이 들것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중국이 팔 가능성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