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나(순양전함)

1 제원

하루나(榛名)
건조고베 가와사키조선소
시공1912년 3월 16일
진수1913년 12월 14일
준공1915년 4월 19일
침몰1945년 7월 28일
제적1945년 11월 20일
해체완료1946년 7월 6일
승무원1,221명
1,315명(2차 개장 이후)
전장214.6m
222.05m(2차 개장 이후)
전폭28.04m
31.02m(1차 개장 이후)
흘수선9.7m
배수량26,330톤
29,330 톤(1차 개장 이후)
32,156톤(2차 개장 이후)
장갑측면장갑 203mm
갑판장갑 19mm
주포탑천장 75mm, 152mm(1차 개장 이후)
주포탑전면 254mm
부포곽 150mm
기관증기터빈 2기 4축
증기터빈 4기 4축(2차 개장 이후)
출력64,000마력
75,600마력(1차 개장 이후)
136,000마력(2차 개장 이후)
속도27.5노트
25노트(1차 개장 이후)
30.5노트(2차 개장 이후)
1915년도 무장Vickers식 35.6cm(14인치) 45구경 2연장 주포탑 4기
15.2cm(6인치) 단장포 16문
76mm(3인치) 단장포 8문
53cm 어뢰 발사관 8문
1945년도 무장35.6cm(14인치) 45구경 2연장 주포탑 4기
15.2cm(6인치) 단장포 16문
12.7cm(5인치) 2연장 고각포 6문
96식 25mm 고각기총 108정

2 개요

군마현 타카사키시의 '죠모 3산(上毛三山)'이라 불리는 세 산 중 하나인 하루나산(榛名山)에서 이름을 딴 구 일본 해군공고급 순양전함 3번함. 함급에 대해서는 공고급 순양전함 문서 참고.

3 상세

하루나 자체의 특징은 다른 자매함보다 미묘하게 빠른 속도가 있다. 자매함 중 마지막으로 살아남았다가 마리아나 해전 이후 대공포를 증설하고 대공무장을 강화해서 대공사격 관제장치 등이 추가되었고, 108정의 25mm 대공포를 장착했다.

1944년 12월 20일 수리를 위해 구레로 이동해 정박한 뒤 연료 부족 등의 문제로 출격하지 못한 채로 구레항에 정박해 있으며 1945년 3월 19일과 6월 20일에 미군 항공기의 공격을 받았다.

이후 미-영 연합군이 구레항에 정박해 있는 일본 해군의 잔존 함선을 말살하기 위해 시행한 구레 군항 공습에 의해 1945년 7월 28일에 격침되었는데, 구레 군항 공습 당시에서는 1, 2번 주포에 대즐(Dazzle) 미채 도색이 되어있었고 그물망을 이용한 위장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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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레 군항 공습에서 격침된 이후 촬영된 하루나.

그렇게 격침된 상태로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게되고, 1945년 11월 20일 제적, 다음해인 1946년 5월 2일에 부양시켜 해체 작업을 시작하여 동년 7월 6일에 해체가 완료되었다.

4 특징

5 보존된 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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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와하치만 신사에 보관된 하루나의 마스트.

1934년 8월부터 그 다음 해 9월까지 진행된 하루나의 2차 개장 과정에서 분리된 소나무로 이루어진 높이 약 13m의 마스트 부분이 현재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에 위치한 나니와하치만 신사(難波八幡神社)에 보관되어있다.[1]

지금은 폐업한 현립 수카구치 병원(県立塚口病院)부지에서 1936년부터 국기 계양대로 사용되다 종전 후 해당 부지에 병원을 건립하면서 나니와하치만 신사에 옮겨다 놓은 것인데, 2013년 함대 컬렉션이 인기몰이를 하자 아마가사키 관광 진흥 사업회가 직접 하루나의 마스트가 보관되어 있음을 알리기도 하였다.

6 기타

일본군 조종사로 복무했고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던 윤응렬 전 공군 소장은 교육을 끝내고 남방전선의 자바로 배치될때 이 하루나를 타고 갔다고 한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항진중 미 잠수함의 공격을 받기도 했고 조선인을 업신여기던 동기생과 배위에서 주먹다짐도 벌였던 모양.

이름의 어원이 된 하루나 산에 위치한 하루나 신사(榛名神社)에서 분리되어 원 신사에서 모시던 신인 불의 신 호무수비카미(火産霊神)와 땅의 신 와니야마히메카미(埴山姫神)를 그대로 모시던 신사가 함내에 있었다고 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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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