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哥而.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헤가이(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Хегай)[2]
1890년? 1904년? 1908년 3월 18일?[3] ~ 1953년 7월 2일
1 개요
고려인 출신의 북한의 정치인. 해방 후 여러갈래로 나뉘어있던 북한내 파벌 중 소련파의 거두로 한국전쟁 당시 내각 부총리에 올라왔으나, 김일성과 권력투쟁에서 밀리자 휴전을 20여일 남기고 평양 지하 방공호 자신의 집무실에서 권총으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허가이는 본명인 헤가이를 음차한 통명으로 김두봉이 지어줬다고 한다.[4]
2 생애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태어나[5] 모스크바의 로모노소프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타슈켄트주의 주당(州黨) 비서로 근무하다 1945년 8.15 광복 후 소군정요원으로 귀국하였다. 군정청 관리로 활동하였으며, 그해 10월 소련에서 북한을 감시하기 위해 수백 명의 소련통역관 겸 감시요원을 정권에 배치했을때 그도 통역관 겸 감시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에 참가,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북한의 정권 수립 이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및 신설된 검열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1949년 6월 당의 제2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조선로동당 부위원장, 당 비서에 선출되면다. 이렇듯 그는 북한의 공산주의 기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1950년 조선로동당 제1서기를 거쳐 한국전쟁 중 1951년 11월 내각 제2대 부총리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당 중앙위 제4차 전원회의에서 당 조직부장에서 제명, 좌천당한다. 평소 김일성의 독재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쟁 이후 박헌영, 이강국 등을 비롯한 남로당 일파에 대해 누명을 씌워 숙청이 벌어질때 허가이는 이들이 미국과 교신하지 않았다고 변호하였다. 그러나 남로당원들을 옹호한 것을 김일성에게 질책당한 후 1953년 7월 2일에 자신의 사무실인 평양의 지하 방공호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허가이 사후 결혼한 큰딸을 제외한 아내와 자녀들은 소련으로 이주하였다. 아들인 허 이고르는 모스크바에 거주중이다.
3 토사구팽 암살 의혹
공식 사인은 자살로 알려졌으나 사인이 자살이 아니라 암살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가 죽었을때 당시 권총을 두 개나 갖고 있으면서도 가슴에 장총을 맞은 자세로 죽었다든가, 죽기 몇 시간 전 장인이자 인민군 탱크부대장이던 최표덕과의 대화에서 조금도 자살 의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을 수 있다. 허가이의 딸 허리라는 김일성의 숙청 대상이 되자 아버지는 자살한 게 아니라 암살당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친구였던 장학봉은 허가이가 암살당했다고 주장하였으며, 당시 허가이가 등뒤에서 총을 맞아 암살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스크바에 거주중인 아들 역시 한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암살을 주장하였다.#
그는 소련파의 수장이기에 소련대사관을 들락날락하는 인물이였고 그 때문에 부수상이자 외무상이였던 박헌영과 공무가 겹쳐서 계속 만나는 돈독한 관계를 가질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로당을 숙청하려고 할때 박헌영을 변호하려고 나선 허가이가 참으로 방해대상 1호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는다면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김일성이였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 실패의 원인을 남로당에게 뒤집어 씌우는 작업을 문제없이 해결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파의 수장인 허가이가 반대하면 일이 다 틀어진다. 마지막으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 소련시민권자였다. 그가 자살하지 않고 다른 이유로 죽었다면 큰 국제적 분쟁거리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