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샹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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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香凝(하향응) (1878년 6월 27일?[1] ~ 1972년 9월 1일)

1 소개

중국 국민당의 혁명가이자 정치가. 혁명가 랴오중카이의 아내로 국민당 내부의 대표적 좌파인물이었다. 장제스가 신우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자 이후로 반장파의 일원이 되었으며 중일전쟁 기간 동안 국공합작을 지지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자 본토에 잔류하여 중국 공산당에 합류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진 않고 쑹칭링과 함께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를 결성하여 중화인민공화국 내부의 국민당원으로 남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고 존중받아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생애

2.1 전족 거부와 독학

허샹닝은 1878년 영국령 홍콩의 부유한 차 상인 하재와 가난한 여공 출신의 진씨의 3남 9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허샹닝은 어릴 때부터 성격이 남자형제들을 능가할 정도로 억척스러웠다 한다. 그러다가 그녀가 전족을 할 나이인 5~6세가 되었을때 사건이 발생했다. 발단은 그녀의 외가 친척이었다. 태평천국에 가담했던 그 친척은 태평천국의 정황에 대해 잘 알았고 허샹닝과 만날 때마다 태평천국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 이야기가 그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태평천국 여군들의 무용담과 태평천국의 천족관에 매료된 허샹닝은 전족에 반항하며 밤만 되면 가위로 베를 풀어버렸다. 가난했던 관계로 어려서 전족을 하지 못했던 허샹닝의 모친 진씨는 자신들의 딸들만이라도 전족을 하려고 했으나 허샹닝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기를 10여차례 반복하자 그 시대에 자유연애를 통해 가난한 여공이었던 진씨와 결혼할 정도로 사상이 깨어 있었던 하재는 더 이상 허샹닝에게 전족을 강요하지 말 것을 명령함으로 허샹닝은 전족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전족거부 일화가 허샹닝의 성격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일화로 꼽히고 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독학 사건인데 이것은 허샹닝이 7살 때의 일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여자는 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거기에 하재는 여자와 남자가 같이 공부하면 여자가 남자의 총명함을 앗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문에 하재는 허샹닝에게 서당 가는 것을 금지하고 다만 여자들을 모아 여자가 글을 가르치는 여서관(女書館)에 가서 전통적 유학 교육만 받을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그나마도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다고 곧 그만두게 했다. 하지만 허샹닝은 부모 몰래 책을 구하여 읽었으며 남자 형제들이 글을 배울 때 밖에서 엿들으며 공부했고 정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하녀를 서당선생에게 보내가면서 독학으로 글을 배웠다. 이로 인해 허샹닝은 다른 여자들에 비해 상당한 학업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나 근대적 교육을 받지 못함으로 어릴 때부터 혁명 사상에 노출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이고 강인한 성격의 그녀는 동시대의 다른 중국 여성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2.2 랴오중카이와의 만남

하재는 여러모로 허샹닝을 모순적으로 대했는데 전족을 안하게 해주면서도 동시에 미신을 신봉하여 글은 배우지 못하게 했고 그러면서 또 허샹닝이 16세가 되자 그녀를 조수로 삼아 가계부와 가게 장부를 정리하게 하였다. 덕분에 허샹닝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었는데 그런 허샹닝 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랴오중카이(요중개)였다. 랴오중카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중국 화교로 16세에 아버지 요죽빈을 여의고 청나라 공무원으로 일하던 숙부 요유걸과 큰형 요은도를 따라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랴오중카이는 그들의 전철을 밟아 과거를 준비하기도 하였으나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서양학문으로 눈길을 돌려 구국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랴오중카이는 전족하지 않은 여자를 아내로 원했고 매파에게 전족하지 않은 여자를 찾아줄 것을 요구했다. 딸 때문에 고심하던 하재는 그 소식을 듣고 하씨 가문과 요씨 가문의 결혼을 주선했고 청나라 관료 집안인 요씨 집안과 홍콩 거상 집안인 하씨 가문이 서로와의 결합을 합의하면서 큰발 때문에 결혼 못하겠다고 부모의 걱정을 샀던 허샹닝은 큰발 덕분에 1897년 10월 광저우에서 랴오중카이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식 날에 랴오중카이를 처음 본 허샹닝은 그의 키가 160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 처음엔 실망하였으나 그의 신사적인 태도와 남녀평등적인 사고에 감동받아 그에게 빠지게 되었다. 아내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던 당시 중국의 상황과 달리 랴오중카이는 평등하고 상호존중하는 근대적 결혼생활을 함으로 허샹닝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4년간 허샹닝과 랴오중카이는 독서, 시화를 함께 하며 정서를 나누었다. 이 4년간 랴오중카이는 허샹닝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더 넓은 시야를 가지는데 도움을 주었고 허샹닝도 남편의 영향을 받아 구국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2.3 일본유학과 쑨원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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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의 허샹닝, 아들 요승지를 안고 있다.

그러던 중 서양학문에 목말라 예전부터 일본 유학을 꿈꾸던 랴오중카이가 일본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청나라에 반기를 들진 않은 상황으로 관료인 요우걸과 요은도가 유학비용을 대주었고 주일 청나라 공사 마정량을 보증인으로 내세워주어 랴오중카이의 와세다대학 입학을 주선하였다. 여기에 남편을 돕고 싶었던 허샹닝은 자신의 결혼 패물을 팔면서 남편의 유학을 도왔고 자신도 남편과 같이 유학하기로 결정, 랴오중카이가 일본으로 떠난지 두달 후인 1903년에 자신도 일본으로 떠났다. 도쿄보습학교에서 몇달간 일본어를 공부한 후 허샹닝은 도쿄여자사범학교 예과에 입학했고 랴오중카이는 1904년에 예정된 대로 와세다 대학에 들어갔다. 비록 학교는 달랐지만 이들은 같이 학업에 매진하였고 1904년에 장녀 요몽성을 낳기도 했다. 이 때문에 허샹닝은 잠시 귀국하여 딸을 홍콩에 맡기고 다시 일본에 돌아가 학업에 열중했다.

한편 일본의 청나라 유학생들 사이에선 민족주의, 혁명주의를 기반으로 한 반청감정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고 랴오중카이와 허샹닝도 1902년 거아의용대를 비롯한 학생조직에 의연금을 제공하는 등 어느 정도 공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의 사상에 결정적인 분기점을 제공하는 인물을 만나니 바로 쑨원이었다. 당시 쑨원은 유학생들 사이에서 청나라를 뒤엎고 민국을 건립하자는 주장으로 추앙을 받고 있었는데 1903년 9월 간다에서 열린 중국 유학생 집회에서 허샹닝과 랴오중카이는 쑨원을 직접 보게 된다. 그의 연설에 감명받은 그들은 쑨원의 하숙집을 방문하여 그를 다시 만났고 이후 한달간 방문하며 그로부터 반청혁명 사상을 학습받았다. 쑨원은 그들에게 뜻 있는 유학생들을 모아 광범하게 교류를 맺으라고 하였고 이로써 허샹닝의 본격적인 혁명활동이 시작되었다.[2][3]이후 1905년 8월 중국혁명동맹회가 결성되자 첫 여성회원으로써 가입하였고 자신의 집을 동맹회 회원들의 집회장소로 제공하였으며 비밀 유지를 위해 고용인을 해고하고 동맹회의 뒷바라지를 했다. 이후 군주제 유지를 주장한 입헌파와 논쟁하며 해외 화교들을 혁명파로 포섭하기 위한 선전활동을 진행했고 유학생들을 모아 의용대를 조직하여 무장훈련까지 실시했다. 하지만 혁명에 투신한 다른 유학생들에 비하면 그녀의 활동이 소극적이었던 것이 사실인데 이는 밑에서 설명할 병환, 출산 등의 개인적 문제와 더불어 그녀가 일본유학을 미래에 대한 투자로 여겨 일본에서 얻은 학식을 바탕으로 나중에 혁명에 투신하겠다고 계산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있다.

1906년 허샹닝은 메지로일본여자대학 교육학부에 입학했으나 1907년 위궤양이 심해져 휴학했고 1908년 장남 요승지를 출산하게 되면서 1909년 도쿄혼고여자미술학교 고등과로 전학하여 그림공부를 하였다. 학업을 하면서도 허샹닝은 혁명활동에도 매진하며 매우 검약한 생활을 하였고 모든 고생이 중화혁명을 위한 것이라고 참아내었다. 그러던 중 중국동맹회의 톈진 지부 설치를 위해 와세다대학을 자퇴한 랴오중카이가 중앙대학 정치경제과에 편입하여 경제학을 공부하다가 1909년 졸업 후, 쑨원의 지시에 따라 지린으로 가서 북방에서의 혁명세력 확보에 가담하게 되자 허샹닝은 홀로 도쿄에 남게 되었다. 허샹닝은 1911년 도쿄혼고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아이들을 데리고 홍콩으로 돌아감으로 근 10년만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2.4 신해혁명에서 호법운동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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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중카이-허샹닝 일가

귀국한 허샹닝은 광저우 봉기에 참여했고 1911년 10월 10일 무창 봉기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하지만 신해혁명은 위안스카이의 독재가 시작되면서 결국 실패했고 2차 혁명 실패 후 일본으로 잠시 망명하기도 했다. 허샹닝은 1914년 중화혁명당 창당에 가담하며 혁명활동을 지속하였고 이때 쑨원과의 관계가 진전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쑹칭링을 만나기도 했다. 1915년 10월 20일 쑨원과 쑹칭링이 결혼할 때 랴오중카이와 허샹닝 부부가 증인으로 참석했다. 1916년에는 위안스카이가 중화제국 선포 후 황제놀이를 하다가 반발에 못 이겨 취소하고 그 직후에 죽자 광둥으로 귀국하여 호법운동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군벌 루룽팅이 쑨원을 배신함으로 1918년 6월 상하이로 이주해야 했고 2년간 쑨원을 도와 집필, 잡지 창간 등을 도왔다. 1920년 천중밍이 광저우를 탈환하고 쑨원을 초빙하자 허샹닝은 쑨원을 따라 군정부 사업회복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활동의 주역은 랴오중카이가 맡고 있었고 이때까지 허샹닝은 남편을 보좌하면서 호국전쟁 당시의 군인 부인들에 대한 공작, 모금 활동 등의 부수적인 임무에 치중하였으며 여러 번역물들과 혁명저작들을 읽으면서 사상을 발전시켜나가고 있었다. 이 시기 그녀의 대표적 활동으로 1921년 쑨원의 북벌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군인위로회를 조직하여 전선으로 나가 위문활동을 한 것 등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과감한 여인이었고 1922년 천중밍이 쿠데타를 일으켜 광저우군정부를 전복하고 쑨원을 축출하자 그녀는 엄청난 용기를 보여주게 된다. 6월 16일 천중밍의 총통부 공격이 시작되고 쑨원의 행방이 묘연해졌으며 랴오중카이는 감금되었다. 허샹닝은 이틀만에 쑨원과 쑹칭링 부부를 만나 그들의 무사함을 확인한 후 10일이 지난 후에야 감금된 랴오중카이를 면회할 수 있었다. 랴오중카이는 자신이 곧 죽는다며 그녀에게 작별시를 내주었지만 허샹닝은 그를 살리기 위한 구명운동에 나섰다. 이때 천중밍 휘하의 홍조린이란 자가 쑨원의 영풍함이 계속 광저우로 포격하는데 쑨원이 하루만 포격을 하지 않으면 랴오중카이를 풀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허샹닝은 그렇게 한다면 쑨원과 중국 인민들을 볼 낯이 없다며 거부했다. 8월 천중밍이 백운산에서 총사령부 회의를 소집하자 허샹닝은 비를 맞아가며 직접 백운산으로 찾아갔다. 허샹닝은 회의장으로 난입하여 여러 군관들 앞에서 천중밍의 배신행위를 크게 질책했다. 천중밍은 그녀에게 비를 맞았으니 옷부터 갈아입으라면서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허샹닝은 거절했다.

"비에 젖은 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오늘 나는 죽을 준비를 하고 왔다. 랴오중카이가 도대체 당신들에게 무슨 잘못한 점이 있어서 그를 가두는 것인가? (...) 오늘 여기 올때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왔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죽여도 두렵지 않다. 다만 똑똑히 물어보고 싶은 것은 랴오중카이를 죽이겠는가, 아니면 놓아주겠는가?"

허샹닝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오자 천중밍은 랴오중카이의 석방을 지시하였고 그날 밤 늦게 랴오중카이는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허샹닝은 천중밍이 마음을 돌릴 것을 우려하여 랴오중카이를 설득하여 다음날 새벽 바로 상하이로 떠나 쑨원 부처와 합류했다. 이후 그녀는 랴오중카이과 쑨원-요페 선언을 위해 활동할 때 허샹닝은 실무를 맡기 어려운 상황이라서 1922년 9월 27일 랴오중카이가 요페와의 밀담을 위해 일본으로 가자 자신도 1923년 1월 딸과 함께 일본으로 가서 남편을 도왔다.

2.5 국공합작과 여성해방운동

국민당 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연소,용공,노농부조의 신삼민주의 정책이 발표됨으로 국공합작이 성립되자 쑨원을 지지하던 허샹닝은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4년 8월 국민당중앙 3대 부녀부 부장[4] 겸 국민당 광동성 당부 부녀부장에 취임하여 드디어 본격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그녀가 페미니즘에 입각한 여성해방운동을 우선시했는가 아니면 혁명활동을 중시하면서 여성해방운동도 한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허샹닝 본인의 저작, 회고나 국민혁명 이전까지 가정주부 활동을 더 많이 했던 것을 보아 전반적으로 국민혁명을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허샹닝은 부녀부 부장에 취임한 후 매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우선 3.8 국제 부녀절 행사를 크게 개최함으로 많은 여성들의 호응을 얻었고 부녀지성이란 잡지를 창간하였다. 훗날 저우언라이의 아내가 되는 덩잉차오가 주필을 맡아 1925년 12월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극회, 강연단을 조직하여 부녀운동과 국민혁명을 여성들에게 선전하였고 국민당원의 가족들을 집회에 참석시켜 강연을 하게 함으로 삼민주의와 5권 헌법의 의의를 알렸다. 이러한 선전활동 외의 활동으로 해외의 화교들의 지원으로 빈민산부인과의원을 설립함으로 가난한 산모들을 지원했고 부녀학교, 합작사 등을 건설하여 복리사업에도 나섰다. 또한 부녀노동학교를 만들어 여공들을 교육시켜 그들의 학업과 인권 향상을 지원했고 광저우여자미술연구소, 광저우여자제작품판매합작사, 국민당구호소, 여공보습학교 설립에 나섰다.

그녀는 국민당 내부에서도 여권 신장을 위해 활동하였는데 신해혁명 이후 참정권을 요구하는 의회 난입 사건이 일어나는 등 여성해방운동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혁명정당인 국민당에서조차 남성우선적인 구시대적 사고는 완전히 사라지고 있지 않았다. 여성집행위원들이 발기한 남녀평등원칙은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고 국민당은 그 시기까지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허샹닝은 2.8 부녀절 기념대회를 통해 남녀평등, 각 기관의 여성 고용, 혼인의 자유, 재혼을 백안시하지 말 것 등의 구호를 제창했고 법률상, 경제상, 교육상, 사회상 남녀평등의 원칙을 확인하여 여권의 발전을 돕자는 것을 강조했다. 그녀의 이러한 활동 덕분에 남녀평등원칙이 국민당 내부에서 통과될 수 있었다. 또한 광동성에서 조직된 여러 여성단체들의 단결과 여성운동 통일성을 위해 여러 결합체를 조직하였다. 또한 1925년 10월 혁명전쟁의 수요를 담당하기 위해 국인가속부녀구호보습소, 1926년 9월 광저우에서 국민당 중앙부녀운동강습소를 창립하여 부녀운동요원을 교육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국민당에 합류한 공산당원들과 적극 교류, 협력했다.

2.6 국민혁명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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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중카이가 암살된 후 자식들과 함께 남편의 시신을 지키는 허샹닝

3 이야깃거리

4 참고문헌

  • 하향응의 정치활동과 사회인식, 김문희, 부산대학교.
  • 하향응의 사회인식과 중국여성운동에 관한 연구, 이상숙, 부산외국어대학교.
  • 일본유학시기 하향응(何香凝)의 반청사상과 활동, 윤미영, 동아시아일본학회.
  • 하향응(何香凝)의 사회인식 형성과 그 활동 -신해혁명기(辛亥革命期)까지를 중심으로, 김문희, 신라대학교.
  • 송경령과 하향응 : 손문유지(孫文遺志)의 계승과 여성운동을 중심으로, 이양자, 중국사학회.
  • 사료를 이용한 인물학습 : 하향응을 중심으로, 김문희, 한국기록관리학회.

5 관련문서

  1. 사실 1878년 외에도 1879년, 1880년, 1882년 설 등이 중국과 일본에서 제기된 바가 있으나 허샹닝이 호랑이 띠였다는 기록을 미루어 볼때 1878년 출생론이 정설로 보인다.
  2. 쑨원은 허샹닝을 일본말로 오바상이라고 불렀다. 근데 쑨원이 허샹닝보다 12살 많다.(...)
  3. 하지만 쑨원에게는 랴오중카이나 허샹닝이나 그저 수많은 당원 중 하나로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후일 후한민도 신해혁명 이전까지 랴오중카이는 그저 단순한 당원이었으며 그의 정치적 재능이 발현되지 못했다고 평가했고 쑨원이 그에게 맡긴 임무도 3건에 불과했다. 일본 유학 시절 쑨원과 그다지 밀접한 관계를 맺지 못하다가 국민혁명 시기에야 가까워진 것은 장제스도 마찬가지. 장제스의 경우에는 아예 일본 유학 시절에 쑨원을 만난 적이 있기는 한가 라는 의문이 제기될 정도다.
  4. 3대란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처음부터 허샹닝이 고려되었던 것은 아니고 1대와 2대 부장이 개인적 사유로 사임하면서 허샹닝이 선택된 것이다. 허샹닝 또한 부녀부의 자리에 지원한 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