쑹칭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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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과의 마지막 사진 (19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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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시절혹부리 영감과 함께 (1958년)

쑹 가문의 세 자매(宋家姐妹, 宋氏三姐妹)
쑹아이링 - 쑹칭링 - 쑹메이링

1 개요

쑹칭링(宋慶齡, Ching-ling SOONG, 송경령)(1892년~1981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쑨원의 두번째 부인. 애칭은 인민을 사랑한 여인[1].

쑨원의 사망 이후 중국 국민당 좌파의 수장이 되어 장제스와 대립하며 국공합작을 이끌어냈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뒤에는 전국인민대표회의[2] 부의장, 주석 권한대행 등의 요직을 맡아 여성인권 신장, 문화대혁명 뒷수습 등에 공을 세웠다.

2 생애

2.1 성장기

감리교 목사 출신의 무역업자인 아버지 찰리 쑹, 쑹자수의 3남 3녀 중 차녀로 상하이에서 태어난다.

신식교육을 받았던 아버지 찰리 쑹은 "여자도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세 딸에게 공부를 독려했고, 그녀는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언니 쑹아이링, 동생 쑹메이링과 함께 미국에 건너가 웨슬리안 대학에서 영문학사 학위를 딴 뒤 귀국한다.

이 후 아버지의 동지인 쑨원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고, 1915년 위안스카이군에게 패한 뒤 일본 도쿄로 망명을 간 쑨원과 결혼한다. 당시 쑹칭링이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지만 이에 격노한 아버지는 쑹칭링을 가두어버렸으나 시녀의 도움을 받아 집을 탈출한 뒤 밀항선을 타고 도쿄로 가 그 다음날 결혼식를 맺었다.(...)[3]

사실 맨 처음 쑨원이 반했던 것은 자신의 전 비서이자 쑹칭링의 언니인 쑹아이링이었다. 관련 기록에 의하면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 쑨원은 쑹자수에게 딸을 달라고 간청했지만 유부남[4]인데다가 기독교도이면서 중혼(重婚)을 요구하는 쑨원에게 격노하여 결혼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쑨원과 다시 만나지 않겠다.라며 그를 내쫓았다.

쑹아이링도 곧 쑨원의 비서 자리를 그만 두었다.[5] 아쉬워하는 그가 만난 것이 쑹아이링의 동생인 쑹칭링이었다. 쑹자수는 당연히 둘째딸도 내주지 않으려 했지만 위에 적혀 있듯이 쑹칭링은 창문과 담을 넘어 쑨원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해버린다.(...)

2.2 중국 국민당 좌파의 리더

혼인기간은 별로 길지 않은데다가 천중밍의 반란 당시 유일한 아이를 유산하면서 불임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쑹칭링이 쑨원과 보낸 시간은 쑹칭링이 평생동안 정치적 자산으로 이용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1925년, 장쭤린과의 회담을 위해 베이징에 갔던 쑨원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장제스는 한동안 친소 좌파로 이름이 드높아 보로딘, 블류헤르를 비롯한 소련 고문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중산함 사건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한 다음에 상해 사건 등으로 국민당 내 공산주의자 숙청과 군벌 타도에 올인한다.

이에 쑹칭링은 장제스와 격렬하게 대립했고, 중일전쟁 시기 일시적으로 장제스와 같은 노선을 걷기도 했지만 국공내전 당시 공산당의 손을 들어주면서 국민당과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사적으론 장제스가 1922년 쑹메이링에게 청혼하자 격렬히 반대한 인물이었고 1927년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결혼이 결정되자 동생에게 한 번 결혼한 사람과 또 결혼하는 건 불행하게 되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그를 말렸지만 메이링은 언니가 아버지에게 그러하듯 그 말을 씹었다.(...) 언니나 잘하세요.

2.3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 후

국부 쑨원의 미망인이라는 상징성과 유창한 영어 덕분에 초창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서 각종 요직을 꿰찼다. 전국부녀연합회 주석, 관제야당인 국민당혁명위원회의 주석, 전인대 부의장, 문화대혁명 당시 주석 권한대행 등을 지냈고, 마오쩌둥 주석의 특사로 수많은 나라를 방문해 외교관으로서의 수완도 발휘했다. 이 때문에 문화대혁명 당시 옛 국민당 계열들이 대거 홍위병들의 조리돌림 대상이 되었을 때도 마오가 "이 분은 건드리지 마라"고 했을 정도.

1981년 공산당의 명예주석이 되었고, 노환으로 영면한다. 죽기 직전 쑹메이링에게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으나 쑹메이링은 그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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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작 중국 영화 <송가황조>에서 장만옥이 맡아 열연했다. 전반적으로 역사상의 모습을 충실히 반영한 편. 종반부에서 임종 직전 미국으로 이민간 막내 동생 쑹메이링에게 마지막으로 만날 것을 부탁하는 전문을 보내고 기다렸지만, 끝내 재회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병상에서 동석한 중국 공산당 간부가 "부인, 만약 부군이신 쑨원 선생께서 몇 년만 더 오래 사셨다면, 우리 중국의 역사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요?"라고 질문하자, "역사에... '만약'이란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한 후, 숨을 거둔다.
  1. 사채업자이자 탐관오리로 악명이 높았던 쿵샹시와 결혼한 언니 쑹아이링돈을 사랑한 여인, 장제스의 두번째 부인이 된 동생 쑹메이링권력을 사랑한 여인이라고 중국에서 불리운다.
  2. 다당제 국가의 국회와 비슷한 기관이다.
  3. 이전 버전에는 혼인신고를 올렸다고했는데 말했다시피 중혼인지라 그게 불가능하다. 참고로 쑨원은 죽을때까지 루씨와의 혼인관계를 법적으로 정리하지 않았다.(...)
  4. 쑨원은 고향에 부인 루(盧)씨와 1남 2녀가 있었다
  5. 이전 버전에는 돈을 아쉬워했다고 했는데 그녀의 남편은 쿵샹시는 의화단 운동때부터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