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잉글랜드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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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1세 (Richard I) | ← | 존 (John) | → | 헨리 3세 (Henry III) |
이름 | 존(John, King of England) |
별명 | 결지왕 존(John Lackland) |
부왕 | 잉글랜드의 헨리 2세 |
모후 |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
생몰년 | 1166년 12월 24일 ~ 1216년 10월 19일(49세) |
재위기간 | 1199년 4월 6일 ~ 1216년 10월 19일 |
대관식 | 1199년 5월 27일 |
1 소개
잉글랜드의 왕으로 그 유명한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동생이자 헨리 2세의 막내 아들. 별명인 래클랜드(Lackland)는 원래 어렸을 때 봉토를 받지 못하여 붙은 것으로 '결지왕(缺地王)'이라 해야겠지만, 프랑스 쪽의 영토를 대폭 잃은 일이 사람들의 기억에 강렬히 새겨졌기에(...) 실지왕(失地王)이라는 표현으로 많이 쓰이는 듯 하다. 안습. 결지왕이라는 별명이 좀 낯설어서 '무영토왕(無領土王)'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나마 그가 남긴 유산이라면 귀족들의 협박에 마그나 카르타를 남겼다는 것. 근데 사실 이것도 왕 입장에서는 굴욕이잖아. 그나마 명군이라고 할 수 있는 [[에드워드 1세|]]를 손자로 남긴것이 업적이다.
영국의 많은 왕들 중 사후 그의 이름을 가진 왕이 없는 왕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 1세로 불리지 않는다. 빅토리아 여왕과 비슷한데, 빅토리아 여왕은 그냥 같은 이름을 가진 여왕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것에 불과하지만, 존 왕은 영국 정부 행사에서조차 무능한 왕으로 소개되고 있어서 앞으로도 존이라는 이름의 왕은 나오지 않을 테니 아마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존 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 같다.[1]
2 왕위에 오르기까지
원래 부왕 헨리 2세가 가장 총애하는 막내아들이었다. 헨리 2세는 존에게 알짜 영지인 아키텐 지방을 물려주려고 무지 애를 썼다. 심지어 차남 제프리의 상속분을 없애서라도 아키텐을 물려주려 하자 세 아들 헨리, 리처드, 제프리[2]와 아내 엘레오노르가 결사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반란은 결국 헨리 2세에게 개발살났지만 결국 아키텐의 상속은 포기해야 했으며 글로스터 백작의 상속녀와 결혼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아버지가 총애한 존은 정작 형 리처드 1세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원래는 헨리 2세에 붙었지만 전황이 리처드 쪽으로 기울자 아버지를 배신하고 형에게 붙었다. 참고로 이 일로 헨리 2세가 엄청나게 실망해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
이후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 나가 있는 동안 자신이 리처드 1세의 후계자이자 실질적으로 왕조의 지배자임을 내세워 왕이 되려고 이리저리 꼼수를 부리고 필리프 2세에게 붙어 형을 배신하고 반역질을 시도했지만 실패한다. 1194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리처드는 당시 존이 27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신하에게 휘둘린 어린애였을 뿐"이라면서 존을 용서했다.
1199년 리처드 사후에 둘째 형인 제프리의 아들이자 브르타뉴 공작이던 아서[3]와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프랑스왕인 필리프 2세는 처음에는 아서를 지지하는 척 했지만 존에게 거액의 뇌물과 백센, 에브뢰 두 영지를 받고 존 지지로 입장을 바꿔 존이 즉위하게 된다.
3 실패로 점철된 재위기간
한편 1200년 첫번째 부인인 글로스터의 이사벨과 이혼하고 이미 루지냥의 위그 9세와 약혼한 앙굴렘의 이사벨과 재혼한다.[4] 사실 보상만 잘 해줬다면 별 문제없이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이었건만 존 왕은 그럴 깜냥이 못되었다. 이에 루지냥 가 전체가 존 왕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고 주군이던 필리프 2세에게 제소하여 필리프 2세는 존을 프랑스의 법정에 소환했다. 원칙적으로 잉글랜드의 프랑스령은 프랑스 국왕에게서 봉토를 수여받은 형태여서 프랑스령에 한정해서는 필리프가 주군이 되고 존은 봉건 가신의 입장이라 가능한 일이었다.[5] 물론 존은 프랑스의 법정에 갈 마음은 전혀 없었고 출두 기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필리프는 이를 기회로 존 왕이 가지고 있던 잉글랜드령을 몰수하고 이 영지를 아서에게 내렸다. 물론 몰수령을 내린다고 호락호락 영토를 내놓을 리는 없으니 이는 어디까지나 명분이었고, 실제로는 필리프의 존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할 수 있다.
1203년 아서는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를 사로잡기 위해 공격하지만, 존 왕은 신속히 역공을 가해 오히려 아서를 포로로 잡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존 왕의 강력한 동맹이던 앙주 영주를 무시하는 행동을 했고,[6] 거기다 포로로 잡은 귀족들을 가혹하게 취급해 잡혀있는 동안 22명이나 죽이고 만다. 여기에 더해 아서가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행방이 묘연해지자 잉글랜드와 프랑스에는 존이 아서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마감(Margam) 수도원에는 존 왕이 아서를 붙잡고 술에 취해 직접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는 세느 강에 무거운 돌을 달아 던져버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 그냥 음모론이 아니라 현대의 역사학자들도 직접 죽였건 명령을 내렸건 존 왕이 아서를 죽였을거라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한다.수양대군? 이 때문에 전투에서 이겼음에도 브르타뉴와 앙주의 영주들이 전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게 된다.
한편 필리프는 노르망디를 착실하게 하나씩 공략했다. 존은 이런 필리프를 상대하기 위해 노르망디의 가야르 성을 공성중인 필리프군을 공격했는데 수군까지 동원해 필리프를 양면에서 공격하는 입체적인 작전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론적으로는 좋아보이는데 실제 수행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작전이라 실패했고[7] 필리프왕의 프랑스군은 노르망디 전체를 유린하였다. 그 결과 존 왕은 노르망디마저 상실해 아키텐을 제외한 프랑스령 전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1205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 문제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대립해 1207년에는 잉글랜드 전체에 성무 정지, 1209년에는 존 왕에 대해 파문 선언까지 내려왔다. 1213년에는 교황이 아예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 침공을 지지하고 나서자 잉글랜드 전체를 교황에게 봉헌하는 형태로 간신히 용서를 받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프랑스령 상실과 파문 소동 등으로 잉글랜드의 귀족과 평민 모두는 존 왕에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한편 존 왕은 프랑스령을 빼앗긴 것이 두고두고 억울했던지 1214년 대대적으로 세금을 거두고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4세와 플랑드르 영주등을 끌여들여 프랑스령을 침공했다. 1204년에도 그렇듯이 이론적으로는 존 왕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아키텐에서 프랑스 남부를 공격해 필리프의 발을 묶어두는 사이에 오토 4세의 신성로마제국군이 프랑스를 북부에서 공격하는 완벽한 작전인듯 했다. 그러나 존 왕의 군대가 프랑스군의 저항에 못 이겨 아키텐으로 후퇴했고 신성로마제국-기타 영주 연합군이 진격이 늦어지자 필리프 2세가 북쪽 연합군을 요격에 나서 릴의 외곽 부빈에서 회전이 벌어졌다. 이 회전에서 연합군은 유리한 입장(프랑스군 15,000명 vs 연합군 25,000~30,000명 추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프랑스군 사망 1,000명, 연합군 사망 1,000명+포로 약 9,000명). 결국 존 왕은 아무 소득도 없이 전비(+동맹으로 끌어들이는데 지불한 막대한 금액)만 왕창 쓰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채 잉글랜드로 돌아와야 했다.
가뜩이나 인기가 없었는데 부빈에서의 패배는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고도 아무것도 얻지못한 존 왕에게 결정타였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존 왕에게 귀족들은 더 이상 세금을 못 내겠다고 반기를 들었고 그 결과가 바로 1215년에 맺은 마그나카르타였다.
재위 마지막에는 억지로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한 후 교황에게 호소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파문하는 등 반격을 하였다. 이에 귀족들은 당시 프랑스 왕세자였던 루이 8세를 초빙해 잉글랜드 왕위에 앉히려 하였다.[8] 그러나 1216년 존 왕이 급서하고 어린 헨리 3세가 즉위하여 반란은 흐지부지 되었다.
4 사망
사인은 다름아닌 과식이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질이었다. 속이 좋지 않았는데 그걸 치료한답시고 익힌 고기와 과실주를 많이 먹는 돌팔이 처방을 자신에게 내렸다가 급체로 사망했다. 이래저래 막장. 근데 리처드 1세도 돌팔이 처방 때문에 죽었다 게다가 죽은 뒤에는 늑대인간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무덤을 파헤치고 배를 갈라보는 시체 훼손을 벌였다고 한다.
4.1 존 왕이 상실한 영토
파란색은 필리프가 직접 지배한 직할지, 녹색은 필리프의 봉신의 영토, 노란색은 교회령, 빨간색이 잉글랜드왕의 프랑스령이다.
이것은 1200년의 지도로 1199년 리처드 1세가 죽은 다음 존왕에게 물려준 영토를 보여준다. 리처드가 십자군 원정에 가 있던 동안 필리프가 잉글랜드령을 일부 빼앗았지만, 리처드가 돌아오고 나서 필리프를 몰아내어 프랑스 남동부를 제외하면 1180년의 영토와 거의 변함이 없다.
존 왕은 저 넓고 생산력 많은 알짜배기 땅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당연히 후세의 평가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다.
4.2 평가
존 왕은 최악의 왕을 대표하지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최고의 군주를 대표한다."ㅡ 필립 해먼드 영국 외무장관. 2015년 마그나 카르타 선포 800주년 기념 정부 주관 행사 中. ##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발언은 현재 국왕이니 어느정도 립서비스성 발언이라고 치더라도 정부의 고위 공직자가 공적인 자리에서 저렇게 말할 정도니, 영국 사람들이 존 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준다.
영국에서의 평가는 두 말이 필요없는 최악의 막장왕이지만, 전투능력은 '무딘칼 존' 이라는 조롱어린 후세의 평가와는 달리 아주 무능하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 일선에서의 지휘능력은 상당히 뛰어난 수준이었다는 말도 존재한다. 왕자시절 어머니가 미라쥬 성(프랑스 아키텐 소재)에서 프랑스군에 의하여 포위되었을 때 수백 기사들만을 이끌고 이틀 만에 130km를 주파, 기습하여 역으로 포위군의 지휘부를 제압한 일이나,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몽토방(프랑스 미디피레네 소재) 성채를 공성하여 함락시킨 전과가 있다. 따라서 야전지휘능력은 최소 평범 이상은 되었으며, 의회에 의해 마그나 카르타가 성립되자 영국 남부로 피난하여 교황의 지지와 용병의 고용이 완료된 후 런던으로 진격하자 의기양양하던 귀족들 중 아무도 그의 군사를 막기 위해 선뜻 나서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찌어찌 중요한 길목의 요새 로체스터 성채에서 막기는 했지만...
그러나 최일선 군사 지휘관으로서는 그럭저럭 평균이상일지도 모르나 노르망디에서의 공격 실패나 1214년의 실패 등으로 미루어 보면 최고 군사 지휘자로서의 전략적 판단에는 분명 적지 않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뭔가 작전을 세울 때는 양면 공격 등 화려하고 멋져보이는데 작전이란건 단순할수록 실행하기 쉽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듯 하다. 야전지휘관이건 최고지휘관으로건 당대 최강의 먼치킨이던 형 리처드 1세와는 전혀 다르다.[9]
또한 정치, 외교적으로는 그야말로 최악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필리프와 전쟁 초기만 해도 잉글랜드의 프랑스령의 영주들은 존 왕을 따랐지만, 자신을 도와주던 영주를 무시한다든지 포로를 죽게 내버려 둔다든지 해서 얼마든지 제 편으로 삼을수 있는 봉신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려버렸다.
리처드 1세가 벌여놓은 일들의 여파로 잉글랜드의 막장스런 내정사태를 감당할 수 없었다며 옹호하는 의견도 있는데 분명한건 존 왕이 지휘한 군대가 필리프 왕이 지휘한 군대보다 규모가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애초에 필리프가 지배한 영토는 존 왕이 지배한 영토의 반도 안되었고 세금 수입도 그만큼 적었다. 게다가 존 왕이 세금을 적게 거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존 왕이 영지를 잃어버린 건 재정이 궁핍해 군대를 유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프랑스령의 봉신들이 전부 필리프 2세에게 붙었기 때문인데 이것은 존 왕 개인의 인격적인 결함이 문제이지 잉글랜드의 내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다.
다만, 존은 직위 초기 내치나 행정부분에서는 꽤 능력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것도 약간 애매한게 학설에 따라서는 단지 존 시기의 행정 관련 문서가 어쩌다보니 이전 시대에 비해 잘 보존되었을 뿐 과연 존이 이전 왕들에 비해 더 내정을 잘 가꾼 것이 많은지는 불확실하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해군의 육성, 리버풀의 건설, 스코틀랜드, 웨일즈에서의 지배 확립 등에는 일정부분 업적이 있다고도 여겨진다.
그러나 일부 업적을 인정한다해도 저 넓은 땅을 잃어버린 것은 도저히 변명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배신에 배신을 거듭했으며, 포악하고, 파렴치한 짓까지 마다하지 않았으니 이미지가 시궁창이라도 어쩔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존 왕은 게으르고 나태한 국왕은 아니었다. 오히려 최악으로 꼽히는 멍청하지만 부지런한 상관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5 인기없는 왕
그의 인기는 형 리처드 1세에 반비례하여 형편없이 낮으며 이미지도 상당히 좋지 않다. 대표적으로 아이반호나 로빈 후드 이야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10]
이미지가 하도 개판이라 이후 영국의 왕은 존(John)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게 되었다. 거기다 스코틀랜드도 존 밸리올(John Balliol)이라는 왕이 잠시나마 잉글랜드의 괴뢰로 옹립된 일이 있어서 왕의 이름으로 존이라는 이름을 싫어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스튜어트 왕조의 로버트 3세는 왕자 시절에는 이름이 존이었지만 이걸 꺼려서 로버트로 이름을 갈았다. 다만 이후의 플랜태저넷 왕조에 존이라는 이름의 왕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만일 즉위했으면 개명크리
리처드 1세는 십자군 활동을 위해 잉글랜드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했는데 그로 인한 민중의 궁핍까지 전부 존의 책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11] 그렇다고 존의 책임이 없다는 건 당연히 아니고 이 사람도 막대한 세금을 거둔건 마찬가지다. 다만 형이 거둔 세금까지 악평이 더했다는 것 정도. 게다가 형 리처드 1세는 살라흐 앗 딘에게 맞서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운 영웅의 이미지라도 있지만, 존은 그런 용맹함도 없고 의심도 많은데다가 귀족들과 싸우면서 찌질하고 비겁한 이미지만 남게 돼버렸다. 게다가 전쟁하면 맨날 져서 영토는 계속 줄어들고(...).
어쨌든 그의 성격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쿨가이 성향의 친형 리처드와는 다르게 매우 오만하였으며 무엇보다 패자나 약자를 관용하는 정신은 전무했다. 이는 차라리 한번 굽히고 들어오는 패자에게서 정복감 정도나 느끼고 그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대우를 하던 형에 비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6 현대 매체에서
파일:Attachment/존 왕/존.png |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 코에이의 원조비사에선 그저 그런 잡무장 A, 그나마 고증 반영인지 전투, 지휘는 C라 부하로는 쓸만 하지만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 매력이 D 이하라.. 조금 쓰레기 같은 면이 있다. 시나리오4 세계 제국으로의 길에선 형인 리처드 1세의 친족 부하로 등장. 친족이라 배신도 잘 안 해서 지방영주나 전투 지휘관으로 적당히 쓸 만하다.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1에서 영국 소속 장수. 하지만 능력치는 전투종족인 형에 비해 캐안습. 정치 41, 전투 52, 지모 37에 특기는 어쩐지 외교 특기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외교 특기는 지모가 높아야 효과가 상승하는데 여기서는 존의 지모에서 보다시피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또한 실제 역사대로라면 형 리처드는 시나리오 개시 시점에서 10년 남짓해서 사망해야 하지만 이 게임에서는 실제로는 사고로 죽었다는 점 때문에 리처드의 수명이 비교적 길게 설정되어 있어서 후계자가 될 기회도 없다.
- 그나마 병과적성이 수군 제외하고는 전부 C라서 굳이 사용하고 싶다면 친척 장군이라서 병력을 많이 인솔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전쟁에서 형이나 로빈 후드를
몸빵서포트하는 역할로 삼는 게 낫다.하지만 영국은 리처드와 로빈 후드로 전투를 다 해먹을 수 있잖아? 존은 안될거야 아마
- 프랑스와 영국을 컴퓨터에 맡겨 놓으면 필리프 2세가 존을 충동질하여 영국 왕위를 일시적으로 찬탈하는 이벤트가 발생하며 PK의 경우 신세력을 작성할 때의 튜토리얼 이벤트에서 형 리처드를 뒷담화하다가 리처드에게 욕먹는 이벤트도 있다. 이 게임에서는 이래저래 찌질한 악역으로 설정된 듯.
그래도 지나가던 월리엄 텔에게 그냥 끔살당한 개스커에 비하면 휠씬 더 낫다. 근데 윌리엄 텔, 개스커는 가상인물이잖아
-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5권에서 북두의 권 세계관이 펼쳐진 잉글랜드 왕가의 일원으로 등장한다. 권왕으로 나오는 리처드의 동생이란 점과 찌질하게 아버지 뒤통수를 쳤다는 점에서 쟈기로 캐릭터가 설정된 게 전혀 위화감이 없다.
- 디즈니의 로빈 후드에서는 악역으로 등장하는데 숫사자임에도 갈기도 없고 암사자처럼 빈약하게 생겼으며 불쌍해보일 정도로 심히 못나고 찌질하게 나온다. 늘 형에게 열폭하며 특히 걸핏하면 엄마~(mommy~)를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쪽쪽 빠는 모습이 압권.
그래도 보다 보면 귀엽다결국 결말에서 리처드가 돌아와 죄수 신세가 된다. 한국판 성우는 설영범.
- 랜달 개릿의 대체역사소설 다아시 경 시리즈에서는 과거 리처드 1세가 샬뤼 포위전에서 전사하지 않고 살아남아 조카 아서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바람에 존 왕이 등극하지 못하고 계보까지 끊겼는데, 작중 서술자가 존 왕의 핏줄은 불량한 핏줄이라서 후손이 끊겨서 다행이라고 대놓고 까고 있다. 게다가 존 왕이 즉위를 하지 않아서인지 왕 이름으로 존을 사용하고 있다. 참고로 작중에서 등장하는 왕의 이름은 존 4세이다.
- 대항해시대 3에서는 존 왕의 술잔이 발견물로 등장한다.
- ↑ 왕자나 공주의 경우에는 존과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쓴 사람들이 여럿 있다. '빅토리아' 라는 이름을 가진 공주는 2명이 있었으나,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공주는 프로이센으로 시집갔고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 빅토리아 공주는 이미 왕위 계승자인 오빠가 두 명이나 있는 데다가 자신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 1935년 죽어서 이제는 없다.
- ↑ 각각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의 차남, 3남, 4남이다. 장남이었던 푸에티에 백작 윌리엄(기욤 9세)는 3살의 나이로 요졀했다.
- ↑ 형이었던 제프리(브르타뉴의 공작 제프리 2세)가 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와 결혼해서 낳은 외아들이다. 제프리 사후 유복자인 아서가 뒤를 이었으나, 리처드 1세 사후 잉글랜드 왕위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숙부인 존과 전쟁을 벌였고 심지어 할머니 엘레오노르를 공격하는 패륜도 저질렀다. 결국 존에게 사로잡힌 후 행방불명됐는데 존이 죽인 것으로 보인다. 아서의 큰누나 엘레오노르는 존이 잉글랜드와 브르타뉴의 상속권을 박탈하기 위해 평생 결혼시키지 않고 연금했으며 1241년 60살의 나이로 사망했고 작은누나 마틸다는 4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결국 영국이 잠시나마 먹었던 브르타뉴 공작위는 콩스탕스가 27살의 나이로 요절한 제프리 사망 후 재혼한 남편 기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알릭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 ↑ 이때 앙굴렘의 이사벨은 12세였다.
페도필리아?12세임에도 너무 이뻐 미모가 전 유럽에 소문이 났으며 역사가들은 중세의 헬레네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한다. 존 왕의 이미지가 하도 개판이라 후대에는 존 왕에게 강제로 납치당해 결혼했다는 소문까지 퍼졌으나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부정한다. 존 왕 사후에 이사벨은 위그 9세의 아들인 루지냥의 위그 10세와 재혼한다. - ↑ 물론 그렇다고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봉신이라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잉글랜드 왕의 프랑스령에 한해서만 중세법적으로 그렇다는 것 뿐.
- ↑ 이 사람은 존 왕이 아서를 공격하는데 큰 공을 세웠지만 10년 뒤인 1214년 부빈 전투 때는 오히려 필리프에게 붙어 존 왕측을 공격한다.
- ↑ 육지와 강에서 동시에 적을 공격하면 큰 혼란을 줄 수도 있겠지만 무전기도 없던 중세에 그렇게 마음먹은대로 잘 될리가 없다.
- ↑ 이를 1차 바론 전쟁이라 부른다. 자세한 사항은 헨리 3세 항목에서 확인.
- ↑ 참고로 리처드 1세는 아르수프 전투에서 임기응변으로 살라딘군을 박살냈다.
- ↑ 멜 브룩스의 못말리는 로빈 후드라는 코미디 영화에는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리처드 1세가 "이제부터는 영국의 화장실을 존(john)이라고 불러라"는 포고령을 내린다. 실제로 소문자로 시작하는 존(john)은 화장실이라는 속어다.
- ↑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리처드 1세가 예루살렘으로 가다가 회군해야 했던 이유가 존의 반란 때문이었으니. 그 무거운 세금 내고 성과가 없는 게 이 사람 탓이 크니 인기가 있을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