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강

嵇康
(223 ~ 262)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숙야(叔夜). 혜소의 아버지, 혜희의 동생. 죽림칠현의 한 사람.

초의 질현 사람으로 혜강의 집안은 본래 해(奚)씨로 회계 사람이었다가 선조가 원한을 피해서 회계 상우에서 초의 질현으로 옮긴 이래로 성을 바꿨으며, 계(稽) 자를 취하고 그 위에 산(山) 자를 더해서 성으로 삼았고 이는 대체로 그 근본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질현에 혜산이 있어 그 옆에 집이 있었기에 마침내 씨로 삼았다고 한다.

이후 초군 질현의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있었으나 키가 크고 용모가 수려하며 재주가 뛰어나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덕에 위의 종실 여인인 장락정주의 남편이 되어 낭중에 천거되어 중산대부에 제수되었지만 이후 사마씨가 집권하면서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고 초야에서 대장간에서 쇠를 두들기는 일을 하면서 살았다.

혜강은 상수와 함께 하내 인근 죽림에 머물면서 단야, 불로장생 탐구, 현학 연구에 매진하였는데 하안과 하후현 사후 현학계의 태두로서 존경을 받았다. 친구였던 향수 역시 장자집주로 유명했던 현학자였다. 거문고의 연주로도 유명하여 광릉산을 특히 잘 탔다고 하며 이는 현재까지 전해진다. 그밖에도 성무애악론 같은 악학 관련 논문도 저술하였다.

혜강의 성품은 나쁜 일은 속에 감추고서 드러내지 않았으며, 애증이 마음 속에 갈등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기쁨이나 노함은 얼굴에 나타나지 않았고 혜강은 하내 산양현에 기거했고 더불어 교유하는 사람들이 일찍이 그의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기색을 보지 못했다. 왕융이 혜강과 더불어 양성에서 수백번 그를 만났다거나 20년간 기거했지만 그런 기색을 보지 못했고 이것 또한 세간의 훌륭한 모법이고 인륜의 뛰어난 덕업이었으며, 완적, 산도, 상수, 완함, 왕융, 유령과 더불어 친하게 지내 죽림을 노닌지라 7현이라 호칭하고 산도는 혜강에 대해 외로운 소나무가 홀로 서 있는 것처럼 우뚝하다고 했다.

255년에 관구검이 거병하자 이에 가담하려고 해서 산도에게 물었다고 불가하다는 대답을 받고 그만뒀으며, 종회가 혜강의 명성을 듣고 방문했고 이 때 혜강은 두 다리를 벌리고 단공에 몰두하고 있었다. 종회가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예를 갖추지 않았는데, 혜강은 종회에게 무엇을 듣고 오면서 무엇을 보고 가시냐고 묻자 종회가 들은 바가 있어 왔고 본 바가 있어 간다고 하면서 종회가 혜강에게 원한을 품었다. 혜강은 사마씨와 대립했었기에 위의 공신 종요의 자식이자 하안의 측근이었던 종회가 사마씨에 붙은 것을 역겹게 생각하였고, 이전에 종회가 자신의 저서를 던져놓은 채 도망치듯 떠난 것이나, 다시 방문할 때 호화로운 행차를 통해 위세를 드러낼 뿐인 것도 경멸하였다고 한다.

사마소가 혜강을 부르고자 했지만 혜강은 이미 세속을 끊겠다는 말을 하면서 조카가 선하지 않아 하동으로 피난갔다거나 세상을 피한다고 했는데, 산도가 선조랑이 되면서 혜강을 추천해 대체하고자 했지만 혜강은 답하는 편지를 보내 거절하면서 스스로 유속을 따르지 않고 탕무를 부정하고 주공을 가벼이 본다고 했는데 사마소가 이를 듣고 분노했다. 이는 주나라 주공이 삼감의 난을 평정한 것을 낮춘 것인데, 여기서 주공은 사마씨를 말하는 것이었고 반란을 일으켰던 지방의 세력 삼감은 사마씨에게 평정된 관구검과 제갈탄을 가리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혜강은 관구검의 반란에 참여하려고 했으나, 산도의 설득으로 참여하지 않은 일까지 있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사마소가 분노하여 죽일 마음을 먹은 것도 당연하였다.

혜강은 여손, 여안 등과 친했고 여손이 여안의 아내와 간통한 후에 불효하다면서 여안에게 그 죄를 무고해 가두게 했는데, 혜강은 증인이 되어 의리상 그 마음을 저버리지 않고 사실을 밝힐 것을 보증했다. 이 일로 인해 혜강은 여손에게 절교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종회가 사마소에게 이 기회로 혜강을 제거하라고 권하면서 혜강은 여안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혜강은 죽기 직전에 태연자약하게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노래가 끝나자 아정한 음악이 여기서 끊어진다고 탄식했으며, 당시의 사람들 중에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애초에 혜강은 약을 찾으러 급군의 공북산에 들어가 손등을 만났고 혜강은 그와 함께 대화했지만 대답이 없었고 시간이 흘러 혜강이 장차 떠나려 할 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냐고 했다.

손등으로부터 재주가 많지만 식견이 적어 지금의 세상에서 횡액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혜강은 여안의 사건을 당하면서 혜강은 시를 지어 자책했고 그 구절 중에서 지금은 손등에게 부끄럽네라는 부분이 있다. 혜강이 지은 여러 문론 6, 7만 자는 모두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손등과의 대화, 혜강이 죽기 전에 말한 것이 위씨춘추 외에 강별전, 진양추의 기록은 약간씩 다른데, 강별전에서는 손등이 천성이 강직하고 재주가 훌륭해 재난을 면할 수 있냐고 물었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원효니(원준)가 일찍이 나를 쫓아 광릉산을 배웠지만 나는 매번 인식하게 굴어주지 않았다면서 광릉산이 지금에 이으러 끊어진다고 탄식했다. 진양추에서는 혜강이 손등을 만날 때 손등은 휘파람만 불고 말하지 않다가 혜강이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냐고 하자 손등은 안타깝다고만 했으며, 배송지는 강별전, 진양추 모두 손성의 기록이지만 내용이 다르다고 했다.

또한 배송지는 혜강이 죽은 시기에 대해 본전에서 혜강은 경원 연간[1]에 사건에 연루되어 주살되었다고 하지만 간보, 손성, 습착지 등의 기록에서는 255년에 사마소가 악가로부터 돌아와 혜강과 여안을 죽였다고 했으며, 대체로 세어에서 혜강이 거병해 관구검과 호응하고자 했다는 말과 연결해 관구검을 격파하고 혜강을 죽였을 것이라 한 것이라 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산도가 선관이 되어 혜강을 추천해 자신을 대체하고자 한 것은 명확한 사실로 산도행장을 볼 때 산도는 261년에 이부랑에 제수되고 경원 연간 과 정원 연간[2]은 7, 8년 정도 차이가 나 산도행장을 알아보면 본전이 올바르다고 했으며, 종회전에서도 종회가 사례교위가 되었을 때 혜강을 주살했다고 나오니 종회가 사례교위가 된 것은 경원 연간이라 지적했다.

간보는 여손이 종회와 친하고 여손이 상국연이 되고 사마소에게 총애를 받아 여안을 범죄로 처벌한 것이라 하면서 사마소는 263년에 촉을 정벌한 후에 상국에 올랐으니 여손이 상국연이 되었을 때 여안을 무고했다면 어찌 관구검을 격파한 해에 혜강, 여안을 죽일 수 있었겠냐면서 간보의 거친 착오로 스스로 모순을 보인 것이라 했다.
  1. 260 ~ 264년이다.
  2. 254 ~ 256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