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회

위서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왕릉관구검제갈탄등애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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鍾會
(225년 ~ 264년 1월 18일)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사계(士季). 예주 영천군 장사현 사람. 아버지는 종요, 어머니는 장창포, 이복형은 종육, 누나는 종태부인.

2 정사

2.1 초기 생애

종회는 어려서 민첩하고 현명하며 조숙하였다. 중호군 장제가 논문을 썼는데, 그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그 사람의 눈동자를 관찰하면 그 사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종회가 다섯 살 때, 종요는 그를 장제에게 보내 만나도록 했다. 장제는 그를 매우 기이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이 아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종육과 종회 형제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명성이나 명예가 있었다. 열세 살 때, 조비가 그들의 아버지 종요에게 물었다.

두 아이들에게 오라 할 수 있소?

이렇게 해서 그들을 불러 보게 되었다. 종육이 조비 앞에서 땀을 흘리자, 문제가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땀을 그렇게 흘리는가?

종육이 대답했다.

두렵고 황공하여, 땀이 국물처럼 납니다.

다시 종회에게 물었다.

경은 어째서 땀을 흘리지 않는가?

대답하여 말했다.

두렵고 떨려서, 감히 땀이 나오지 않습니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종육 형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낮잠이 들었기에 함께 약주를 훔쳐 마셨다. 아버지는 이때 일어나 있었지만 우선 거짓으로 잠든 체하며 그들을 봤다. 종육은 절을 한 후에 마시는데, 종회는 절을 하지 않고 마시는 것이었다. 이윽고 아버지가 일어나서 종육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절을 하였느냐?

종육이 말했다.

술은 예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기에, 감히 절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종회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절을 하지 않았느냐?

종회가 말했다.

훔치는 것이 애초에 예에 어긋난 일이기에,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종회모전에 따르면 부인(장창포)은 품성이 조심성 있고 엄숙하여 교훈에 밝았는데 종회도 어리고 어리석었지만 부지런히 가르침을 받았다. 나이 4세에 효경을 배우고 7세에 논어를 암송했으며 8세에는 시경을 10세는 상서를 11세에는 주역을 12세에는 춘추좌씨전, 국어를 13세에는 주례, 예기를 14세에는 성후역기를 암송하였다. 15세에 곧 태학에 들어가 사방의 기이한 문장과 다른 가르침에 관해 물었다. 종회에게 말했다.

공부하는 것이 번잡하면 싫증나게 되어있고 싫증이 나면 게으르게 되어있다. 나는 너의 뜻이 게으르게 될까봐 점차 나아가는 방법으로 너를 훈계한 것인데 지금은 홀로 공부해도 된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종회는 순제북(순욱)의 외삼촌이었으나, 두 사람 사이가 서로 좋지 않았다. 순제북은 보검 한 자루를 가지고 있었는데 값이 1백 만 금이나 되었다. 그는 늘 이것을 종태부인에게 맡겨 두고 있었다. 종회는 글씨를 잘 썼다. 그는 순제북의 필적을 모방하여 편지를 써서 그의 어머니께 보내어 보검을 달라고 하여 이로써 얻은 다음에 되돌려 주지 않았다. 순욱은 종회의 짓인 줄 알았지만 되돌려 받을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보복을 할까 생각을 하고 있었다. 뒤에 마침 종회 형제가 1천만 금을 들여서 집을 짓게 되었다. 집이 다 이루어지자, 그 집은 무척 훌륭하였고 아직 이사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림에 능한 순제북은 이에 몰래 들어가서 그의 문당(門堂)에 태부(종요)의 형상을 그려 놓았다. 의관이나 모습이 생전과 완전히 같았다. 종회 형제가 문에 들어서서 이 그림을 보고 크게 부친 생각이 나서 그 집을 그대로 비워두어 그만 폐가가 되고 말았다.

2.2 사마의 휘하

그는 장성한 후, 계산과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으며 박학하고 명리에 대해 매우 정통하였고, 학습을 할 때는 밤을 낮으로 이었으며, 이로부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정시 연간(240년 ~ 248년), 비서량으로 임명되었으며, 상서중서시랑으로 승진하였다.

종회모전에 따르면 247년, 종회는 상서랑이 되었는데 부인(장창포)이 종회의 손을 잡고 타이르며 말했다.

너는 약관의 나이에 국가에 서용되었으니 인정상 스스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되니 곧 손괘의 의미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 교훈을 부지런히 생각하도록 해라.

종회는 일찍이 역경에 호체와 재성의 이동이 없는 것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다.

순욱전 주석 진양추에 따르면 순의는 일찍이 종회를 꾸짖으며 역경에는 호체가 없다고 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이전에 종회가 어렸을 때, 산양의 왕필과 함께 이름이 알려졌다.

왕필전에 따르면 왕필과 종회가 친하게 지냈는데 종회는 논의를 함에 있어 정밀한 사고를 근본으로 하였는데 매번 왕필의 고상한 식견에 굴복하였다. 하안은 성인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없다고 여겼는데 그 논의가 굉장히 정밀하였고 종회 등이 논술하였다.

2.3 고평릉 사변

한진춘추에 따르면 당초 하후패가 촉에 항복하였을 때 강유가 물어 말했다.

사마의가 이미 그곳의 정권을 얻었으니 응당 다시 정벌하고자 하는 뜻이 있는가?

하후패가 말했다.

그 쪽은 가문을 경영하고 세우느라 바깥일에 신경쓸 수 없습니다. 종사계(종회)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됨이 비록 어려도 끝내 오, 촉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다만 비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를 쓸 수 없습니다.

15년 후에 종회는 마침내 촉을 멸망 시켰다.

2.4 사마사 휘하

세어에 따르면 사마사가 중서령 우송에게 표를 짓도록 명령했는데 2번이나 올렸는데 모두 마음에 안 들어 우송으로 하여금 다시 고치도록 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우송은 생각했지만 고칠 수가 없어 마음속으로 이를 걱정하여 안색에 나타났다. 종회는 그가 걱정이 있음을 살피고 우송에게 물었고 우송은 사실로 대답하였다. 종회는 표의 초안을 가져와 보고서는 다섯 글자를 고쳤다. 우송은 기쁘게 승복하고는 이로써 사마사에게 바쳤는데 왕(사마사)이 말했다.

마땅히 그대가 한 게 아닐 것이다. 누가 고쳐주었는가?

우송이 말했다.

종회입니다. 방금 전 또한 말씀 드릴려고 했는데 공의 견문에 당하여 감히 그 능력을 탐할 수 없습니다.

왕이 말했다.

이와 같으면 크게 쓸 수 있다. 오도록 하라.

종회는 우송에게 사마사가 능한 것을 물었는데 우송이 대답했다.

박학다식하여 꿰뚫고 있지 않는 게 없습니다.

종회는 마침내 빈객을 거절하고 정밀하게 10일 동안 생각하여 아침에 들어가 사마사를 보고 2경(21시 ~ 23시)가 되어서 나왔다. 종회가 나간 후에 왕은 홀로 손뼉을 치며 감탄하여 말했다.

저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왕을 보좌할 만한 인재이다.

허윤전에 따르면 허윤이 사마사에게 살해되자 문생이 허윤의 부인(완씨)에게 달려와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완씨는 바른 자세로 앉아서 조금도 당황해하지 않으며 대답했다.

예전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다.

문생이 두 아들을 숨기라고 하자 완씨는 대답했다.

아이들의 일은 그냥 내버려 둬도 된다.

나중에 허윤의 묘소를 옮긴다고 하자, 사마사는 종회를 시켜서 살펴보도록 하고, 만약 그들의 재능이 아버지와 같다면 잡아들이라고 했다. 완씨는 두 아들에게 이렇게 대책을 일러 주었다.

너희들은 멋진 사람이지만 여러 가지 재능을 갖추지는 못했다. 종회와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되 걱정을 하거나 지나치게 슬퍼하자 말아라. 종회가 말을 멈추면 너희들도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조정의 일에 대해서는 일체 꺼내지도 말아라.

두 아들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했다. 종회는 사마사에게 사실대로 보고를 했다. 두 형제가 화를 면하게 된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다. 종회도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지만, 현명한 부인보다는 못했다.

부하전에 따르면 부하는 항상 재성(才性)의 같음과 다름에 대해 논하였고, 종회는 그의 관점을 종합하여 사본론(四本論)을 지었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종회가 사본론(四本論)이란 책을 모두 마치자, 반드시 혜강에게 꼭 한 번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책을 품고 혜강의 집 앞까지 다가 갔지만, 힐난을 받을까 두려워 품속에서 꺼내지도 못하고 대문 밖 멀리에서 안으로 집어던져 놓고는, 급히 뛰어 달아나 버렸다.

하후현전 주석 세어에 따르면 하후현은 정위의 관서로 인도되었으나 결코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위 종육이 직접 나서서 하후현을 심문하자 하후현이 정색하며 말했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하란 말이오? 이제는 영사가 되어 사람을 다그치려 하시오? 그러면 당신이 내 대신 진술서를 작성하시오.

종육은 하후현이 명사로서 그 높은 절조를 꺾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옥사는 어떻게 해서든지 끝내야 했으므로, 밤에 사실과 서로 부합하도록 진술서를 작성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하후현에게 보여주었더니, 하후현이 그것을 보고 끄덕일 뿐이었다. 종육의 동생 종회는 하후현보다 어렸기 때문에 그와 교제할 기회가 없었다. 그날 종육은 종회를 만나보라고 했으나 하후현은 거절했다.

하후현전 주석 잡어에 따르면 하후현이 감옥에 있을 때 종회는 하후현과 우정을 나눌 기회를 얻으려고 했지만 하후현은 정색하며 말했다.

종군,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세설신어에 따르면 하후현이 이미 차꼬와 수갑을 차게 되었을 때, 당시 종육은 정위의 벼슬을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동생 종회는 원래 하후현과는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면서도, 하후현이 갇히게 되자 이를 기회로 마구 희롱하였다. 그러자 하후현은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비록 형장의 길로 가는 사람일지만, 그대의 말을 들어줄 수가 없다.

그리고 고문을 받을 때에도 처음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동시(東市)에서 사형에 임해서도,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고귀향공(조모)이 제위에 오른 후, 관내후의 작위를 그에게 하사했다.

조모전 주석 위씨춘추에 따르면 사마사가 사사로이 물었다.

임금(조모)은 어떤 군주였는가?

종회가 대답했다.

재능은 진사왕(조식)과 같고, 무용은 태조(조조)와 비슷합니다.

사마사가 말했다.

만약 경의 말과 같으면 사직의 복이다.

조모전 주석 진제공찬에 따르면 고귀향공(조모)은 항상 중호군 사마망, 시중 왕침, 산기상시 배수, 황문시랑 종회 등과 동어전에서 모여 토론회를 가졌고, 동시에 문학론을 썼다. 배수를 유림장인, 왕침을 문적선생이라 이름을 짓고, 사마망이나 종회에게도 각기 이름을 짓도록 했다. 황제는 성격이 급했으므로 이들을 소집할 때에는 그들이 빨리 도착하기를 바랬다. 배수 등은 궁중 안에서 관직 생활을 했으므로 즉각 올 수 있었지만, 사마망은 외부에서 근무하였으므로 특별히 빠른 거마와 근위대의 병졸 5명을 지급하여 모임이 있으면 거마를 타고 빨리 도착했다.

2.5 관구검의 난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군 사마사가 동쪽 정벌에 나섰는데, 종회는 종군하여 기밀 사무를 담당하였고, 위장군 사마소는 대군의 뒤쪽을 담당했다. 사마사가 허창에서 죽자, 사마소가 육군을 통솔하였고, 종회는 군마 안에서 작전을 짰다. 당시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상서 부하에게 명하여 동남쪽은 금방 평정되었으므로 위군장을 허창에 머물게 하여 중앙과 지방의 구원병이 되도록 하고, 부하는 군사들을 인솔하여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종회는 부하와 상의하여 부하로 하여금 표를 올리도록 하는 동시에 즉시 위장군과 함께 출발하여 낙수 남쪽으로 돌아가 주둔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사마소를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정치를 보좌하도록 했으며, 종회는 황문시랑으로 승진시켜 무정후로 봉하고 식읍 3백호를 주었다.

부하전에 따르면 종회는 이로부터 스스로 오만한 기색이 있었으므로, 부하는 그에게 충고했다.

그대의 뜻은 원대하지만, 공업을 세우는 것은 어렵습니다.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2.6 제갈탄의 난

종회가 당시 낳아준 어머니(장창포)의 상을 당했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종회가 그의 어머니를 위해 전(종회모전)을 지었다.

257년, 제갈탄을 불러 사공으로 삼았다. 그 당시 종회는 관직을 물러나 집에서 상을 치르고 있었는데 제갈탄이 반드시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재빨리 사마소에게 아뢰었다. 사마소는 일이 이미 시행되었으므로 다시 돌이켜 바꿀 수 없었다.

제갈탄이 반역을 하자, 황제는 항에 체류하였고, 사마소는 수춘에 도착하였고, 종회는 또 그를 따라갔다.

당초, 오나라 대장 전종손권의 인척이며 손권 수하의 중요한 대신이었다. 전종의 아들 전역, 손자 전정, 조카 전단, 전편, 전집 등은 모두 병사를 이끌고 와서 제갈탄을 구원했다. 전역의 형의 아들 전휘전의는 건업에 남아 있었는데, 그 가족들 사이에 싸움이 나서 소송을 하게 되어 모친을 모시고 수십 명의 부하를 인솔하여 장강을 건너 사사로이 사마소에게 귀순했다. 종회는 계획을 세우고 비밀리에 전휘와 전의를 위해 편지를 써서, 전휘와 전의로 하여금 가까이 신임하는 자에게 편지를 갖고 성으로 들어가 전역 등에게 말하도록 하였다. 그 편지에는 오나라 내부에서는 전역 등이 수춘을 공격하여 이길 수 없음에 대해 노하여 장수들의 가족을 모두 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도망쳐 귀순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역 등은 두려웠으므로 수하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동쪽 성문을 열고 나와 투항했다. 그들은 모두 작위에 봉해지고 총애를 받았으며,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로부터 괴리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수춘이 격파된 것은 종회의 계책이 큰 몫을 하였으므로, 사마소는 날이 갈수록 종회를 더욱 후하게 대접하고 중요시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자방이라고 불렀다. 군대가 돌아오자, 태복으로 승진되었으나,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중랑의 신분으로 대장군의 부서에서 기실의 일을 담당하며 대장군의 심복이 되어 긴요한 직책을 맡았다. 종회는 제갈탄을 토벌한 공으로 나아가 진후의 작위를 받게 되었는데, 누차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사예교위로 승진시켰다.

2.7 사마소 휘하

비록 지방 관리로 있었지만, 당시 정치상의 감소와 증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익 혹은 불이익을 주었으므로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혜강 등이 처형되었던 것도 모두 종회의 계책이였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종사계(종회)는 재능과 사리에 뛰어 났다. 처음에 혜강과 면식이 없었다. 종사계는 당시의 어질고 준걸한 명사들과 함께하여 혜강을 찾아 갔다. 그때 혜강은 큰 나무 아래에서 철을 단련하고 있었고 상자기(상수)가 조수로 풀무질을 하고 있었다. 혜강은 철을 두드리는 망치질을 끊이지 않고 열중하여 마치 옆에 사람이 없는 듯 하였다. 그리고 한참이 되도록 말 한 마디 건네 볼 수가 없었다. 종사계가 일어나서 가려고 하자, 혜강은 이렇게 물었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혜강이 종회에게 물었다.

무엇을 듣고 왔으며 무엇을 보고 가시는가?

종회가 말했다.

들은 바가 있어 왔고 본 바가 있어 갑니다.

종회는 그를 깊이 원망하였다.

혜강열전에 따르면 이때에 이르러 사마소에게 말했다.

혜강은 와룡이라서 기용할 수 없습니다. 공께서 천하를 걱정하실 건 없겠지만 혜강은 염두에 두시고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어림에 따르면 종사계(종회)가 늘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젊었을 때 글을 한 장 썼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완보병(완적)의 글이라고 하면서 글자마다 모두 뜻이 살아 있다고 하더니, 그것이 내가 쓴 것임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더군.

세설신어에 따르면 종사계(종회)가 왕안풍(왕융)을 이렇게 평하였다.

아융(왕융)은 남의 속마음을 분명하게 알아낸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덧붙여 말하였다.

배령공(배해)은 종일토록 현담을 해도 다함이 없다.

그때 마침 이부랑의 자리가 결원이 생기자 사마소가 종회에게 어떤 인물이 적임이냐고 묻자, 종회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배해는 맑고 사리에 정통하고, 왕융은 대범하면서도 요령이 있다하여 둘 다 적임자입니다.

이에 사마소는 배해와 왕융을 등용하였다.

문명왕황후열전에 따르면 당시 종회가 재능이 있어 대임을 맡았는데, 황후(왕원희)는 늘 황제(사마소)에게 말했다.

종회는 이득을 보면 의를 저버리고, 사단이 남을 좋아하여, 총애가 지나치면 반드시 난을 일으킬 터이므로, 대임을 맡겨서는 안됩니다.

종회는 후에 과연 모반했다.

양호열전에 따르면 종회가 총애를 받으면서 양호를 시기했는데 양호가 그를 아주 두려워하였다.

종육은 일찍이 사마소에게 말했다.

종회는 책략에 의지하여 뜻밖의 것을 지키기는 어려우므로 중요한 직책에 위임될 수 없습니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사마소는 그 충량을 가상하게 여겨 웃으며 종육에게 답했다.

만약 경의 말과 같다면 반드시 종족에게 미치지 않을 것이다.

2.8 위멸촉 전투

사마소는 촉나라의 대장 강유가 변방 지역을 자주 소란하게 하자, 촉나라의 국토는 작고 백성들은 피곤에 지쳐 있으며, 자원과 재력은 매우 적어 다 썼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병사를 대거 출동시켜 촉나라를 취하려고 했다. 오직 종회만이 역시 촉나라를 취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으므로 함께 촉의 지형을 조사하고 당시의 형세를 연구하고 논하였다.

262년 겨울, 종회를 진서장군, 가절도독관중제군사로 임명하였다. 사마소가 청주, 서주, 연주, 예주, 형주, 양주 모든 주에 명령을 내려서 함께 배를 만들도록 했으며, 또 당자에게 바다를 건널 수 있는 큰 배를 만들도록 명령했는데 외무에서는 오나라를 토벌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헌영전에 따르면 종회가 진서장군이 되었을 때, 신헌영은 일족의 아들인 조카 양호에게 왜 종사계(종회)는 서쪽으로 출진하는지 물으니 양호는 촉을 멸망시킬 생각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신헌영은 말했다.

종회는 독단으로 사물을 실시합니다. 언제까지나 신하로 머물러 있을 인간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가 다른 야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걱정입니다.

양호는 말했다.

숙모님, 입을 조심해 주세요.

263년 가을, 조서를 내려 등애제갈서에게 각기 3만여 명의 병사를 통솔하도록 명령을 했으며, 등애는 감송과 답중 일대로 곧장 가서 강유와 교전하며 견제하였고, 제갈서는 무가와 교두로 가서 강유의 돌아갈 길을 끊어 놓았다.

문제본기에 따르면 당초에 종회가 촉국을 공격하던 때 서조속 소제가 사마소에게 말했다.

종회는 믿기 어려운 사람이니 그로 하여금 출병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사마소가 웃으면서 말했다.

촉나라를 공격하여 취하는 것은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쉬운데도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말하길 안된다고 했지만 유독 종회만이 나와 의견을 같이 하였네. 촉을 멸망시키고 난 후에 중원의 장사들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촉국의 남겨진 백성들은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품을테니 비록 반란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 있다한들 그렇게 할 능력이 없네.

결과적으로 사마소의 예견처럼 되었다.

신헌영전에 따르면 종회는 출정 때 신헌영의 아들의 양수를 참군으로서 요구했다. 신헌영은 말했다.

종회가 밖으로 나갈 때 나는 국가가 걱정되었는데, 오늘 그 걱정이 우리 집안까지 미치는구나. 이번에 종회가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 같구나.

양수는 사마소에게 사퇴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어지지 않았다. 신헌영은 아들에게 말했다.

조심해 가는 거예요. 군대 안에 있어 필요한 것은 오로지 어질고 너그러움 뿐입니다. 그것을 명심하십시오.

종회는 10만여 병사를 인솔하여 사곡과 낙곡으로 나누어 들어갔다. 우선 아문장 허의에게 앞쪽에서 길을 닦아 열도록 하고 종회에게는 뒤쪽에서 따라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랑이 파괴되어 말의 발이 빠졌으므로 허의가 죽게 되었다. 허의는 허저의 아들로, 왕실에 공훈이 있었지만 용서받지는 못했다. 군사들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은 자가 없었다.

촉나라는 각 보루에 주둔해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모두 싸우지 말고 물러나 한과 낙, 두성으로 돌아와 지키라고 했다. 위흥태수 유흠은 자오곡으로 달려갔고, 기타 각 군은 몇 갈래길로 나란히 진군하여 한중에 도착했다. 촉나라의 감군 왕함은 악성을 지켰고 호군 장무는 한성을 지켰는데 각각 병사가 5천명씩 있었다. 종회는 호군 순개와 전장군 이보로 하여금 각기 1만 명을 통솔하도록 했다. 순개는 한성을 포위하고 이보는 악성을 포위했다. 종회는 길을 지나 서쪽으로 양안구로 와서 사람을 보내 제갈량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호군 호열 등으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 관성을 공격하여 격파하게 하고 창고 속에 쌓아놓은 곡식을 얻었다.

장완전에 따르면 위의 대장군 종회가 한성에 도착하여 장무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서쪽에 도착하면, 그대 부친(장완)의 산소를 찾아가 받들어 인사하고, 묘지를 깨끗이 청소하여 경의를 표하려고 합니다. 선친의 산소 위치를 알려주기 원합니다!

장무는 답장하는 편지를 써서 말했다.

죽은 아버지는 과거 중병으로 부현에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점치는 사람이 묘지의 길함을 점쳐서 부현에 안장시켰습니다. 그대가 서쪽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으니, 수레를 굽혀 선친의 묘지를 가지런히 하고 경의를 표해 주십시오.

종회는 장무의 답장을 받고, 그의 마음을 찬탄하였다. 부현에 도착한 후, 편지에서 말한 것과 같이 했다.

강유는 답중에서 돌아와 음평에 도착하여서 병사들을 모아 합쳐서 관성으로 가려고 했다. 미처 도착하기 전에 관성이 이미 격파되었다는 것을 듣고 물러나 백수로 가서 촉나라 장수 장익, 요화 등과 공동으로 검각을 지키며 종회에게 대항했다.

강유전에 따르면 종회가 강유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공후(강유)는 문무의 덕을 갖추고 세속을 초월함의 지략을 품고 공을 세워 파, 한을 구제하여 중국에까지 명성을 드날렸으니 멀고 가까운 이들 중 그대의 명성에 귀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소.

강유는 서신에 답하지 않고 군영을 벌려세우고 험요지를 수비하였다. 종회는 이길 수 없고 군량을 운반하는 길이 매우 멀었으므로 장차 군대를 물려 귀환할 것을 의논하였다.

등애는 강유를 좇아 음평으로 가서 정예 병사를 선발하여 한덕양으로부터 강유와 좌담도로 들어가 면죽으로 가서 직접 성도로 향하여 제갈서와 함께 전진하려고 했다. 제갈서는 본래 강유와 교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므로 서쪽으로 진군하는 것은 본래의 명령이 아니었는데, 그대로 백수로 진군하여 나아가 종회와 합쳤다. 종회는 장군 전장 등을 파견하여 검각 서쪽으로부터 강유에게 나가도록 했다. 백 리를 이르지 못한 지점에서 전장은 우선 촉나라의 보병 세부대를 격파했다. 등애는 전장에게 앞에 서서 가도록 했다. 그래서 말을 타고 오랫동안 멀리 달려 앞으로 향했다. 종회와 제갈서의 군대는 검각으로 향했다.

종회는 독자적으로 군대를 장악하려고 제갈서가 두려워하며 전진하지 않는다는 상소를 몰래 올렸다. 조정에서는 죄인용 수레로 제갈서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군대는 전부 종회에게 귀속되었다. 종회는 나아가 검각을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으므로 병사들을 안솔하여 물러났다.

촉나라 군사는 요충지를 보존하며 저항하였다. 등애는 곧 면죽으로 갔다. 쌍방이 대전을 벌여서 제갈첨을 죽였다. 강유 등은 제갈첨이 이미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들을 인솔하여 동쪽, 파로 들어갔다. 종회는 곧 부까지 진군하여 호열, 전속, 방회들을 파견하여 강유를 추격하도록 했다. 등애는 군사를 성도로 진군시켰다. 유선은 등애에게로 가서 투항하였으며, 강유 등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종회에게 투항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강유는 광한군 처현까지 와서 병사들에게 모두 병기를 버리라고 명령하고, 부절과 전거를 호열에게 보내고, 동쪽 길로부터 종회에게로 가서 투항했다.

강유전 주석 진기에 따르면 종회가 강유에게 말했다.

항복하러 오는 것이 어찌 이토록 늦었소?

강유가 정색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 사람을 오늘 보는 것만도 빠른 것입니다!

종회가 그를 매우 높게 여겼다.

종회는 그래서 군사들을 엄격히 살펴 침략하여 약탈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스스로 겸허하게 하여서 적을 불러들임으로써 촉나라의 관료들과 교분을 맺었고 강유와의 감정도 매우 좋았다.

강유전에 따르면 종회가 강유 등을 후대하여 모두에게 원래 촉한으로부터 사여받았던 그들의 관인, 관호, 부절과 거개를 임시로 돌려주었다. 종회는 강유와 함께 밖으로 나갈 때는 같은 수레를 타고 좌정할 때는 같은 자리에 앉았다. 장사 두예에게 말했다.

백약(강유)을 중원의 명사에 비교하자면 공휴(제갈탄)나 태초(하후현)가 그보다 더 낫지는 못할 것이오.

장완전에 따르면 유선이 등애에게 투항한 후 장무는 부현에 있는 종회에게 갔는데, 교우의 예절로써 대해주었다.

방덕전 주석 촉기에 따르면 종회는 촉을 평정한 때에 전후에 북과 피리를 울리고 방덕의 유체를 맞이하여 조문하고 업에 보내 장례케 하였는데, 묘 안의 머리와 몸이 마치 산 사람 같았다.

12월, 조서를 내렸다.

종회를 사도로 임명하고, 작위를 승진시켜 현후로 봉하며, 식읍 1만 호를 더하겠다. 아들 두 명을 정후로 봉하고 각기 식읍을 천 호씩 주어라.

2.9 종회의 난

강유전 주석 한진춘추에 따르면 종회가 은밀히 다른 뜻을 품고 있었는데 강유가 만나보고 그 마음을 알아채고는 혼란을 일으킴으로써 회복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에 종회를 속이며 설득하였다.

듣기로 그대는 회남에서 활약한 이래로 계책에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하니 진의 도가 창대한 것은 모두 그대의 역량 덕분입니다. 이제 또한 촉을 평정하여 위덕을 세상에 떨치니 백성들은 그 공을 높게 여기고 군주는 그 지모를 두려워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찌 조위로 돌아가려 하십니까!

종회가 말했다.

그대의 말이 심오하여 내가 능히 행할 수 없소. 또한 지금을 위한 방도로 혹 아직 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것 같소.

강유가 말했다,

그 나머지 방도야 그대의 지력으로 능히 헤아릴 수 있으니 이 늙은이가 번거로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정과 교분과 환대하는 마음이 깊어졌다.

종회는 내심 모반할 마음이 있었는데, 등애가 황제의 명령을 이어받아 정권을 휘둘러 군사적인 일을 처리하였으므로 은밀히 상소를 올려 등애가 모반할 조짐이 있다고 말했다.

세어에 따르면 종회는 다른 사람의 서체를 잘 모방하여 검각에서 등애의 장표, 백사를 가로채 모두 그 말을 바꿔놔 언사가 불손하고 교만하여 스스로의 공을 많이 자랑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사마소의 답서를 훼손하고 자신의 수작으로 대신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래서 조서를 내려 죄인용 수레로 등애를 돌아오도록 불렀다.

종회전에 따르면 최근 가호군(가충)이 나(사마소)에게 질문을 하여 말했소.

종회를 약간 의심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사마소)는 대답했소.

지금 그대를 파견하여 일을 하도록 하고, 어찌 또 그대를 의심할 수 있겠소?

가호군 역시 나에게 아무 말도 못했소.

종회가 등애의 불법적인 일을 고발했을 때, 사마소는 서쪽으로 오려고 했는데, 소제가 또 말했다.

종회가 인솔하는 병사는 등애보다 대여섯 배는 되므로, 단지 종회에게 등애를 체포하도록 명령만 내리시면 되지 직접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마소가 말했다.

그대는 지난번에 했던 말을 잊었소? 어떻게 또 출병하지 않을 수 있겠소? 비록 이와 같다 하더라도 이 말은 선언할 수가 없소. 나는 스스로 응당 신의로써 사람을 대해야 한다고 약속했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배반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오.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나에게 불충하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을 의심할 수 있겠소! 내가 장안에 도착하면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오.

사마소는 등애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고 걱정하고 종회에게 명령을 내려서 함께 성도로 진군하도록 하고, 감군 위관에게 종회 앞에서 진군하도록 했으며, 사마소의 친필로 쓴 명령서를 갖고 등애의 군대를 설득하도록 했다. 등애가 인솔하는 모든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곧 등애를 체포하여 죄인용 수레 안에 들어가게 했다. 종회가 꺼렸던 것은 오직 등애 뿐이었는데, 등애가 이미 붙잡혔으므로 종회는 즉시 성도에 도착하여 독자적으로 대군을 통솔하여 그 위세는 서쪽 변방 지역을 진동시켰다.

그는 스스로 공명이 세상을 덮는 것은 다름 사람 밑에서는 다시는 있을 수 없고, 게다가 용맹한 장수와 정예 병사들이 모두 자기 수하에 있다고 말하고 곧 모반을 계획했다. 그는 강유 등으로 하여금 모두 촉나라 명사를 인솔하여 사곡을 나가도록 하고, 종회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뒤를 따르려고 했다. 장안에 도착한 후 종회는 기병은 육지로 행군하도록 하고, 보병은 수로로 흘러내려와 위수로부터 황하로 들어가도록 하여, 닷새만에 맹진에 도착하게 하여 기병과 낙양에서 합쳐 하루아침에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회가 받은 사마소의 편지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등애가 혹시 부름을 받고 나가지 않을까 걱정이오. 지금 중호군 가충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만 명을 이끌고 사곡으로 들어가서 악성에 주둔하도록 하시오. 나는 10만 명을 인솔하여 장안에 주둔하겠소. 가까운 시일에 만납시다.

종회는 편지를 받고 놀라 가까이 하는 사람을 불러서 말했다.

단지 등애만을 잡는다면, 상국은 내가 혼자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오. 현재 나의 세력이 무거워지자, 그는 틀림없이 내가 다른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오. 속히 행동을 해야겠소. 만일 일이 성공한다면 천하를 얻을 수 있지만, 일이 성공하지 못하여 물러나서 촉한을 보존한다면, 유비가 되는 조건을 잃지 않을 것이오.

종회는 263년 정월 15일에 성도에 도착했다. 그 다음날, 호눅, 군수, 아문가독 이상 및 촉나라의 옛날 관리들을 모두 초청하여 촉나라 조정에서 태후(명원황후)의 상을 당했음을 발표하였다. 태후가 남긴 조서를 거짓으로 만들어 종회에게 병사를 일으켜 사마소를 폐하도록 했다고 하고, 위조된 조서를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전부 보여주고 아랫사람에게 의논을 끝내게 한 뒤 목판에 쓴 증서로 관직을 임명하였으며, 또 신임하는 사람들을 파견하여 각 군대를 대신 관리하도록 하였다.

강유전 주석 화양국지에 따르면 강유는 북쪽에서 온 위나라의 제장들을 주살하도록 종회에게 가르치고 제장들이 죽은 뒤에 천천히 종회를 죽이고 위나라의 병사들을 모두 파묻어 촉의 제위를 원래대로 복구하고자 하니 은밀히 유선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원컨대 폐하께서 며칠 동안만 모욕을 참으시면 신이 사직이 위태로우나 다시 안전하게 하고 해와 달이 빛을 읽었으나 다시 밝게 빛나도록 하겠습니다.

위관열전에 따르면 갑자기 종회가 이르러 이에 호열 등 여러 장수들에게 모두 청하고, 그들을 사로잡아 익주의 해사(解舍)에 가두어 마침내는 병사를 들고 반란했다. 이에 사졸들은 돌아가기를 생각하고 내외는 소요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모두 근심하며 두려워했다. 종회는 위관을 머무르게 하고자 널빤지에 글을 써 위관에게 일렀다.

호열 등을 죽이고자 하오.

이를 들어 위관에게 보였지만 위관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위관과 등애는 서로가 두 마음을 가졌는지 의심했다. 위관은 측간으로 가 호열의 옛 급사를 만나고, 그로 하여금 삼군에게 널리 말하게 하여 말로 종회를 배반했다.

초대된 관리들은 익주 관서에 모두 가두고 성문과 궁문을 모두 닫고 병사들에게 엄하게 포위하여 지키도록 했다. 종회의 장하독 구건은 본래 호열의 부하였는데, 호열이 그를 사마소에게 추천하였고, 종회는 사마소에게 구건이 자기를 따르게 해달라고 정하여 그를 매우 신임하고 아꼈다. 구건은 호열이 혼자 구금된 것을 뿔쌍히 여기고 종회를 만나서 친병을 안으로 들여보내 음식을 나르게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각 아문의 병사 또한 그 예에 따라 한 명씩 드나들었다. 호열은 그의 친병에게 말하여 아들(호연)에게 편지를 보냈다.

구건이 소식을 몰래 전해 주었다. 종회는 이미 큰 굴을 뜷었고, 수천 개나 되는 흰 몽둥이를 준비하여 외부에 있는 병사들을 모두 벌러 들어오게 하여 사람들마다 깁으로 만든 흰 두건을 주어 산장으로 삼아 순서대로 몽둥이로 때려 죽여 굴 속에 던지려 한다.

각 아문의 친병 또한 모두 이와 같은 말을 하였고, 하룻밤 사이에 서로 말을 전하여 전원에게 알려졌다. 어떤 사람이 종회에게 말했다.

아문기독 이상을 전부 죽여야 합니다.

종회는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위관열전에 따르면 종회는 위관을 만나 뜻을 정하고 각각 칼을 가로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바깥의 여러 군사가 몰래 종회를 치고자 했지만, 위관은 나갈 수 없어 감히 일을 일으키지 못했다. 종회는 위관으로 하여금 노역하는 군사를 위로하게 했다. 위관은 일을 거행하고자 하고 뜻을 단단히 굳혀 말했다.

경은 삼군의 주인이니 마땅히 스스로 가야 합니다.

종회가 말했다.

경은 삼군의 일을 감찰하니 경이 먼저 간다면 내가 경을 뒤따라 나오겠소.

위관은 다시 전 아래로 내려갔다. 종회는 이를 분히 여기고 위관으로 하여금 병사들에게 말하도록 했지만, 위관은 종회에게 어지럼증이 있다 말하고 친히 의원에게 이를 보였다. 모두가 위관이 일어날 수 없다 말하자 종회는 거리낌이 없어졌다. 날이 저물어 문이 닫히자 위관은 격문을 지어 여러 군사에게 널리 알렸다.

18일 정오, 호열의 병사와 호열의 아들이 북을 올리며 문을 나서자, 각 진영의 군사들은 약속을 갖지 않았는데도 모두 북을 울리며 함성을 지르고 나왔으며, 일찍이 지휘하는 자가 없는데도 다투어 성으로 먼저 달려갔다. 그 당시 마침 강유에게 무기를 주고 있었는데 밖에 혼란스러운 소리가 큰 불길처럼 일고 있다고 보고하는 자가 있었다. 오래지 않아 병사들이 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종회는 놀라서 강유에게 말했다.

이 병사들이 와서 나쁜 행동을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오?

강유가 말했다.

그들을 공격하는 것 뿐입니다.

종회는 병사를 파견하여 붙잡혀 있는 아문과 군수를 죽이도록 했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기물을 들어 문을 부수고, 사병들은 대문을 부수었으므로 격파할 수 없었다. 곧 성문 밖에서는 사다리에 의지하여 성이 어지럽게 진입하였고, 쏘아대는 화살은 비오듯 했으며, 아문과 군수들은 각기 흩어져 지붕으로 기어 올라가서 그들의 부하 병사들과 합류했다. 강유는 종회의 의병을 이끌고 싸워 대여섯 명을 직접 죽였다. 병사들은 강유와 결투하여 죽이고 다투어 달려가서 종회를 죽였다. 종회는 당시 마흔 살이었고, 수백 명의 장수들이 살해되었다.

대군이 장안에 도착했을 때 종회는 과연 이미 죽었고, 모든 것이 예상했던 것과 같았다.

2.10 사후

당초, 등애는 태위로 임명되고 종회는 사도로 임명되었으며, 지절, 도독제군은 옛날과 같았는데, 모두 정식으로 임명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종회의 형 종육은 4년 겨울에 죽었는데, 종회는 그것을 알지 못해 조문을 못했다. 종회의 형의 아들인 종옹은 종회를 수행하다가 함께 죽었다. 종회가 기른 형의 아들 종의종준, 종천 등은 하옥되었으며, 당연히 참수되어야만 했다. 사마소는 천자에게 상주했다. 천자가 조서를 내렸다.

종준 등의 조부 종요, 부친 종육은 공적이 있었다. 종회와 종옹의 죄로써 종요와 종육의 후대를 끊어야 하다니, 나는 착잡한 심정이다. 종준과 종산 형제를 특별히 용서하여 관직과 작위를 옛날과 같게 하라. 단지 종의와 종웅의 자손들만은 법에 따라 처형하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종육은 일찍이 사마소에게 종회는 책략에 의지하여 뜻밖의 것을 지키기는 어려우므로 중요한 직책에 위임될 수 없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종산 등을 용서한 것이라고 했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사마소가 종회의 공조 상웅이 종회를 거두어 장사 지내줬다는 것을 듣고는 불러 책망하여 말했다.

전날 왕경이 죽었을 때에 경이 동시에서 곡을 해도 나는 묻지 않았는데 지금 종회는 친히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다시 거두어 장사를 지내줬다니 만약 다시 서로 용납한다면 왕법이 있어 무엇 하겠는가!

상웅이 말했다.

지금 왕의 주벌이 이미 가해졌고 법도에 있어 이미 완비되어 상웅은 의로움이라 여겨 거두어 매장한 것이지 정교에 있어 또한 흠결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썩은 뼈와 대적하여 원수로 여겨 들판 한 가운데다 버리면 백년후에 비천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실 것이니 어찌 인자하고 현명한 사람이 가리는 것이겠습니까?

사마소가 기뻐하며 연회에서 더불어 이야기하고 보내 주었다.

종회가 죽은 이후, 종회의 집에서 서적 20편을 얻었는데 제목을 도론(道論)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형명가의 저작이었으며, 그 글이 종회가 쓴 것과 비슷하였다.

장화열전에 따르면 풍담은 일찍이 황제(사마염)를 모시면서 조용히 위진의 일을 논하다가 이로 인해 말했다.

신은 종회의 반란이 자못 태조(사마소) 때문에 생긴 것 같습니다.

황제가 얼굴색이 변하면서 말했다.

경은 지금 무슨말을 하고 있는건가?

풍담이 관을 벗고 사죄하면서 말했다.

신이 어리석어 쓸데없이 헛소리를 하였으니 죄가 응당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의 감추어진 뜻은 오히려 펼칠만 합니다.

황제가 말했다.

어떻게 말하겠는다는 것이오?

풍담이 말했다.

종회는 재주에 한계가 보였는데도 태조는 지나치게 칭찬하고 지모를 가상하게 여겨 권세있는 자리에 앉게 하고 많은 병사를 위임하였기 때문에 종회로 하여금 스스로 계책에 있어 빠드린 것이 없고 공은 상을 줄 수 없을 정도라고 생각하게 하여 기어코 흉역한 일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만약 태조가 큰 예의로 절제하게 하고 권세로 억눌렀다면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마음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황제가 그렇다고 말했다.

3 평가

3.1 인격

인격 면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 원래는 하안 살롱의 일원이었지만 하안이 처형당하자 사마씨에 접근하여 재능을 발휘했다. 이렇게 유연하지만 신의없던 태도는 그의 신망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 죽림칠현 중 한 명이었던 혜강이 자신을 무시하자 그를 와룡이라고 모함해서 죽였다. 사마소의 아버지 사마의가 대적한 제갈량도 와룡이라고 불리었으니 생각해보면 이보다 탁월한 모함도 없었을 것이다.
  • 양호를 시기했다.
  • 허저의 아들 허의조차도 길을 닦던 도중 실수했다는 이유로 죽이려고 했다. 종회의 부하들 모두가 그래도 명색이 허저쯤 되는 공신의 혈육인데 함부로 죽이면 안된다고 반대했었으나 그럼에도 종회는 다 씹고 기어이 허의를 베고야 말았다.
  • 승장이면서 패장 강유에게 이용당해 반란을 일으켜 전우인 등애를 모함했다.

3.2 반란

종회가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도 아닌 게 그 전에 관구검제갈탄의 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로부터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햇다. 관구검은 최소한 해당 지역에서 어느 정도 인망이 있었고 최소한 명분이 확실했으며 사마의 사후인 시점이고 아직까지 사마사의 능력이 검증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 타이밍도 나쁘지 않았다. 제갈탄은 관구검의 반란을 반면교사 삼아서 인심 확보에 더욱 주력했으며 명분도 갖췄고 사마사가 죽고 난 이후 타이밍이라 타이밍마저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제갈탄에게는 동맹인 동오가 있어서 승부를 걸어볼 만했다. 근데 종회는 반란 씩이나 꿈꾸면서 명분이 아예 없는 수준이었는데다 자기가 활용할 장수라고는 성도 입성 후 친하게 지낸 촉한 출신의 강유 등 밖에 없는데도 사마소의 중앙군이 건재하고 각 군의 장수들마저 병권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데도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종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명분이나 일처리도 허접하기 그지 없다. 지금까지 사마소에게 잘 붙어먹으면서 권력을 휘둘렸던 양반이 하루 아침에 사마소의 전횡을 비판하며 반역을 하는데 대체 누가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겠는가. 반란씩이나 되는 큰일을 도모하는데 정작 명분이 없는 게 문제였다.

거기에 등애를 견제하는 거 까지는 좋았지만 지나치게 견제하는 바람에 사마소의 의심을 샀고 위관의 경우 알면서도 막지 못했으며 자신에게 찬동하지 않는 위장들을 가두는 병크까지 저지른다. 이게 왜 병크냐면 자기에게 찬동하는 장수가 한두명도 아니고 거의 대부분의 장수가 찬동하지 않았는데 그걸 싹다 가둬버린데다 임시방편으로 가두기만 했을 뿐 병권을 빼앗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위장들을 가두었으니 어서 죽이라고 한 것이 아마 종회에겐 거의 유일무이한 찬스였을텐데 종회가 우물거릴 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고 그 사이 위의 제장들이 다 갇혔다는 소식은 위군 전체에게 퍼진 뒤였다(...). 결국 이런 허술한 일처리 때문에 반란이 성공하기는 커녕 강유의 일족은 몰살당하고 수백명의 장수가 살해당하는 성도 대학살이 벌어지는 참사가 일어난다.

3.3 게이?

일부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게이 의혹이 제기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 종회는 어머니 장창포에게 극성스런 교육을 받았으며 성인이 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가르쳤으며 종회도 그런 어머니를 많이 따랐다. 어머니의 그늘이 종회의 생 전반을 뒤덮고 있었고 마더 콤플렉스 증상이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한데, 이 때문에 여성과 만나는데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다.
  • 종회는 꽃미남이면서 여장 취향을 가진 하안과 어울렸다.
  • 종회는 옥에 갇힌 하후현에게 狎하려 했다. 狎은 친압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희롱한다는 뜻으로 더 많이 사용된다. 원래 하후현과 아무 교분도 없고 16세나 연하였던 종회가, 이제 사형을 눈 앞에 둔 그를 상대로 갑자기 집적거렸다는 이야기.
  • 강유에게 푹 빠져서 군권이고 뭐고 다 돌려주고 강유의 제안대로 위장들을 죄다 죽이려는 모습은 강유에 대한 신뢰가 커서라고 퉁치기엔 지나친 부분이다. 반란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어처구니 없는 행보도 강유한테 반해서 그랬다고 하면 말이 되긴하다(...).
  • 종회는 결혼이나 처자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없다. 종회는 역모죄로 죽었으니 삼족을 멸했다는 일반인에게도 상당히 친숙한 서술이 뒤에 붙는게 정상인데 종회는 맡아 기르던 조카들에 대한 처분만이 거론될 뿐이다. 서술이 아예 없으면 그냥 일족을 멸했는데 안적었구나 할 법한데 조카들에 대한 처분은 적어두었으면서도 처자에 대한 기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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