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 우지마사

(호죠 우지마사에서 넘어옴)
이 문서는 한자식 발음인 북조씨정으로도 들어올 수 있다.

北条氏政 (ほうじょう うじまさ)
(1538 ~ 1590.08.10)
lif1507090010-p1.jpg

1 개요

후호조씨의 4대 당주.

호조 우지야스의 차남. 통칭 신쿠로(新九郎). 형인 호조 신쿠로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우지야스의 장남.

2 생애

1554년 3국동맹이 성립되자 다케다 신겐의 딸 오우바이인과 결혼한다.[1]

이후 1559년 아버지 우지야스로부터 가독을 계승받아 세력확대에 힘을 쓴다. 고즈케(上野)의 유라 나리시게, 사노 마사츠나, 기타조 다카히로 등 호족들을 차례로 항복시키고 무사시(武蔵)로 침공, 오타가를 멸망시켜 우에스기 겐신과 동맹관계인 사타케가와 대립상황이 된다. 그러나 1567년 사토미 요시타카, 요시히로 부자와 미후네산에서 합전을 벌이나 대패하여 가즈사(上総) 지배권을 상실하고 만다.

다케다 신겐의 스루가 침공으로 3국동맹이 무너지자 우에스기 겐신과 동맹을 맺어 다케다가와 대립한다. 1569년 오다와라 (小田原)에서 다케다군과 싸워 격퇴하나 미마세 고개의 싸움에선 동생 호조 우지테루 등과 손발이 맞지 않아 양쪽 모두 큰 피해만 입은 채 물러선다. 결국 스루가는 다케다가의 손으로 떨어지고 호조가는 슨토(駿東) 고코쿠지성 일대만 점령하는 데 그친다. 아버지 우지야스 사망후, 다시 다케다가와 동맹을 맺는다.

이후 우에스기가와 대립하게 되어 코즈케로 침공하여 세력을 확대하며 시모사의 유키 하루모토를 종속시킨다. 그후 우에스기 겐신이 죽고 후계자 문제로 오타테의 난이 일어나자 동생인 우에스기 가게토라[2]를 지원하기 위해 동생인 호조 우지테루와 우지쿠니를 에치고로 파병시키나 우군인 다케다 카츠요리가 갑작스럽게 철군하는 바람에 결국 가게토라는 패배, 자결하고 만다. 이 때문에 우지마사는 다케다가와 동맹을 파기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손을 잡는다. 그리고 다케다가의 멸망에 일조한다.

1580년 이전의 호조가 당주들이 해왔던 것처럼 아들인 우지나오에게 가독을 계승하나 여전히 실권을 쥔다. 1582년, 오다군의 전격적인 침공으로 다케다가가 불과 1달만에 멸망할 때, 호조 우지마사는 오다편을 들면서도 전투가 오래 끌리라 생각,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다 다케다군이 캐발리자 황급히 출진하지만 기여한 바도 없고 얻은 것도 없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기회주의자로 찍혀 다케다 영지 분할에서도 제외된다[3]. 다케다가 멸망 후, 계속 오다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하지만 정작 노부나가는 가신인 타키가와 카즈마스(滝川一益)를 간토 간레이(関東管領)로 임명하며 간토 지배를 노린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죽자, 확증을 얻지 못했던 호조 우지마사는 타키카와 카즈마스에게 사신을 보내 지원을 약속했다가,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확증을 얻자 바로 5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코즈케로 침공, 타키카와 카즈마스의 1만 8천과 칸나가와에서 대진한다. 전투 첫날은 다키카와군의 우세였으나 이틀 째 다키카와군이 패주하는 호조군을 쫓아 호조군진에 너무 깊숙이 추격하다 포위당하고, 때를 맞추어 코즈케의 영주들이 배신하여 다키카와 군은 궤멸, 호조씨는 코즈케를 손에 넣는다.

패주하는 오다군을 추격하여 시나노까지 추격해 사나다 마사유키, 기소 요시마사 등을 항복시키고 다시 가이의 지배권을 놓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격돌한다. 하지만 마사유키가 이에야스의 편에 붙어 전세가 불리해지자 결국 장남 우지나오와 이에야스의 딸 도쿠히메가 혼인하는 조건으로 화해한다. 그리고 기세가와에서 회담을 벌여 가이, 시나노는 도쿠가와령, 고즈케를 호조령으로 확정한다.[4]

그런데 마사유키가 도쿠가와가를 배신하고 다시 우에스기가에 붙어 호조, 도쿠가와가와 대립하면서 상황은 복잡하게 변한다.

1585년 사타케 요시시게와 우츠노미야 구니츠나가 나스 스케하루를 공격하자, 스케하루를 도와 시모츠케 남부를 장악한데 이어 사다케령을 제외한 히타치 일대도 정복하며 호조가 최대 판도를 구축한다.[5]

하지만 당시의 천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대립하여 히데요시의 쥬라쿠테이[6] 행사 참석에 대해 거부한다. 결국 이에야스가 중재에 나서서 우지마사의 동생인 우지노리가 대신 참석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나름 우지마사도 사태 해결을 위해 가신인 이타베오카 고젯사이를 사자로 보내 1590년 봄이나 여름 쯤에 상경하겠다고 입장을 밝혔지만 히데요시에게 거부당해 더욱 더 상황은 악화된다. 여기에 우지마사의 동생인 우지쿠니의 가신 이노마타 쿠니노리가 사나다령 나구루미성을 강탈하면서 그야말로 불난 집에 부채질한 격이되고 만다.

마침내 열받은 히데요시가 호조 토벌령을 내리고 우지마사도 화친대신 대항을 한다. 우지마사는 원거리에서 오는 히데요시 군은 보급이 길어져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배고픈 군대는 자신들이 쉽게 격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아직 히데요시에게 신종을 하지않은 동북 지방의 다이묘 중 최대의 세를 자랑하는 다테씨와의 동맹 역시 우지마사가 항전을 결의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호조가는 확실히 동국에서는 최강자였지만, 서부일본에서 수많은 실전을 겪은 히데요시의 가공할 군사력의 실체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호조군의 사무라이들이나 군사들은 구태의연한 농병일치의 아마추어들이었으나 히데요시측은 전쟁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프로들이었다. 또한 히데요시는 상인들의 해운력을 동원, 넓은 영지에서 나오는 막대한 군량을 차질없이 수송하여 보급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우지마사가 기대한 보급 곤란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원군으로 기대했던 다테 마사무네는 오히려 히데요시에게 신종을 맹세함으로써 판세는 확연히 기울어져버렸다.

22만이나 되는 대군 앞에 호조가의 성들은 차례대로 정복당한다. 선봉은 관동지역에 인접한 미카와에서 출병한 도쿠가와군이 섰고, 그 뒤로 히데요시가 직접 친정한 본진이 따르고 있었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우에스기 겐신이나 다케다 신겐도 몇차례 공략에 나섰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던 거성 오다와라성에서 농성을 벌이지만 식량이 떨어진데다 가신인 다이도지 마사시게, 마츠다 노리히데 등의 배신등이 겹치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항복한다.

마침내 히데요시에 의해 개전 책임을 지고 동생인 우지테루와 함께 1590년 7월 11일 할복자결한다. 이때 배신했던 가신인 다이도지 마사시게와 마츠다 노리히데도 자결 처분 받았다. 호조가의 영지는 대부분 도쿠가와가에 넘겨지고 도쿠가와가는 대신 원래 가지고 있던 미카와, 스루가, 도토미, 가이, 시나노를 도요토미측에 넘겼다. 도요토미는 원도쿠가와 영지에 이케다 데루마사(미카와)나 호리오 요시하루(도토미), 나카무라 가즈우지(스루가) 같은 직속가신들을 배치하여 그보다 동쪽에 있던 도쿠가와가를 감시했다.

다케다 카츠요리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선조의 위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가문을 끝장낸 것으로 악명이 높다. 다만 카츠요리가 다케다가를 물려받았을 때는 이미 다케다가의 재정상태가 악화되어 망조가 들었을 무렵이었던 점과 마찬 가지로 우지마사가 가업을 이엇을 때도 주변상황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더구나 호조가가 전국다이묘로서 멸망하게 된 오다와라 원정도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히데요시측의 압승이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원정을 위하여 각다이묘들의 병력을 모아서 연합군을 편성했고 따라서 원래 히데요시의 산하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은 다이묘들은 히데요시를 위하여 있는 힘껏 싸울 생각은 없었다. 즉, 우지마사측은 시간을 끌면서 지성의 병력을 별동대로 삼아 히데요시측의 보급선을 끊고 병량부족에 빠진 히데요시측을 협격하면 원래부터 충성심이 거의 없던 다이묘들은 다시 독자세력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우지마사측의 생각이었다. 다만 이런 계략은 실제로는 히데요시가 그것을 간파하여 지성을 각개격파하는 것으로 무산되었지만 그것이 우지마사가 무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더구나 병력측으로는 압도적인 우위였던 히데요시측이 강공에 나서지 않고 5개월에 걸쳐 포위전을 벌인 것으로 힘으로 오다와라성을 공격하면 많은 희생이 발생하기 때문으로 오다와라성은 딱히 최신축성기술을 도입한 성이었던 것은 아니나 호조가가 대대로 쌓아올려 굳건한 것으로 명성이 높았고 따라서 다테 마사무네가 히데요시측에 붙지 않았더라면 높지는 않더라도 승산은 있었던 상황이었다. 실제로 제대로 싸우지 않자 히데요시측도 군기가 흐트러지고 사기가 낮아져 탈영병이 속출하던 상황이었다.

몇 가지 일화가 있는 데 밭의 보리를 보고 오늘 저녘은 저 보리로 만든 보리밥이라고 했다가 다케다 신겐에게 비웃음을 당했다거나 [7], 아버지 우지야스와 밥을 먹는 데 밥에 부을 국의 양을 조절하지 못해 두 번 붓자 우지야스가 호조가가 여기서 끝나겠구나고 탄식했다거나 하는 등 어째 밥과 인연이 깊다. 다만 이런 이야기들은 후세에 호조가를 말아먹은 암군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창작된 것이다. 밥에 국을 두 번 부은 이야기는 모리가에도 있다.

3 대중문화 속 호조 우지마사

3.1 오다 노부나가전

직전신장전에서는 가상모드(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지 않는 루트)에서의 최종보스로 등장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최종보스일때보다 더 힘들다는 평가.

3.2 전국 바사라

호조 우지마사(전국 바사라) 참조.

3.3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까지는 정치만 높고 다른 능력치(특히 지력)들은 낮았다. 천도에 와선 능력치가 대폭 상향되었고 무엇보다 더 튜토리얼 주인공이 된다.[8]
사족으로 천도에서 튜토리얼 판 일러스트와 실제 게임판 일러스트의 표정이 다르다. 튜토리얼에서는 노는 것과 먹는 것이나 밝히는 얼간이 캐릭터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얼빠진 표정이다. 튜토리얼을 끝까지 진행하면 호조 겐안의 목숨을 바친 튜토리얼로 각성하면서 게임 내의 근엄한 일러스트가 된다. 그리고 얼간이 캐릭터를 아들 호조 우지나오가 물려받고, 이번에는 우지마사 자신이 호조 겐안처럼 골머리를 앓는 것으로 마무리.

3.4 전국무쌍

당연히 클론 무장으로 나온다. 그런 주제에 아버지가 등장하기전까지는 형제들인 우지나오, 우지테루와 같이(?) 약간의 존재감이 있다.

2편에서는 클론 무장이지만. 후마 코타로 스토리 3장에서 후마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죽이는 오사카 성 공략전에서 원군으로 출현하는데.

호조 우지마사: 후마 덕분에 호조일족도 세력이 넓어졌구만
호조 우지나오: 후마가 히데요시를 죽이면, 호조가 천하인이 되는검다, 아버지!
호조 우지테루: 해냈구나 형!
위 이벤트 후 일정시간 경과
호조 우지마사: 후마여, 가라! 호조일족의 야망을 등에 지고서!
호조 우지나오: 오늘, 호조의 야망은 현실이 되는거다!
호조 우지테루: 해냈구나 형!

그러나 4장에서 후마가 반란을 일으켜서 호조일족의 야망도 뭐고 우지마사와 포함한 호조 무장들과 다테 마사무네는 사이좋게 후마에게 척살당한다. 안습.

4편에서는 동생인 호조 사부로와 누나인 하야카와도노가 추가됨으로서 가족과의 인연이 돋보이게 되었다. 정작 본인은 다른 동생들과 동일하게 클론 무장.

무쌍 오로치에서는 촉 외전 3장에서 방덕을 얻기위해 보호해야할 NPC로 나온다.
마왕재림에서 오로치 1장 오다와라 성에서 나오는데, 정작 본인의 집(?)인 오다와라 성은 히데요시가 갖고있고(...) 본인은 밖에 나온 상태이다. 히데요시와 같이 총대장으로 나와서 격파할 시에 유명무장 격파씬이 나온다.클론 주제에 이정도면 출세했다.
드라마틱 모드인 아먀타이 전투에서 유비를 포위하는 복병으로 등장했지만. 여포, 혼다 타다카츠, 마에다 케이지에게 깨지고 오히려 이들 편이 되었다.

3.5 사나다마루

NHK사나다마루에선 많은 매체와는 달리 음흉하고 교활한 인물로 등장한다. 멍청하다고 까이는 밥에 국 두번 부은 일화조차 오히려 우지마사 특유의 방식을 표현하는 것으로 재해석될 정도.

사나다 가문이 시나노를 중심으로 독립하려 할때의 주적이라 할수 있는데, 마사유키의 책략을 이미 꿰뚫고 있는등 책략가로서의 수준이 대단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인물의 외모가 노부나가의 야망의 일러스트와 매우 비슷하다.

최후가 상당히 간지 넘친다.

항복 직전까지 반 광기에 물든 연기에서 항복 후 화장을 벗고 초췌한 모습으로 모든걸 달관한듯한 연기가 그야말로 압권.

나레이션과 함께 밥에 국을 부워 먹는 모습을 보이며 퇴장한다.
  1. 그러나 신겐이 이마가와가를 침공하면서 이혼하고 만다. 이후 아버지 우지야스가 죽은 후 다케다가와 다시 동맹을 맺는 데 이때 우지마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죽은 아내의 시신을 돌려 받아 성대히 매장하기였다. 차가운 간토의 남자. 하지만 내 아내의 시신에겐 따뜻하겠지.
  2. 우에스기 가게토라는 호조 우지야스의 일곱째 아들로, 겐신이 양자로 들였다.
  3. 다케다가의 영지 중 스루가(駿河)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나머지 시나노(信濃), 고즈케(上野)는 오다령.
  4. 이때 우지마사는 이에야스를 거의 부하 취급하였다. 먼저 아들 우지나오와 함께 상석에 앉았고 이에야스는 하석에 앉았다. 우지나오가 이에야스의 사위임에도 말이다. 거기다 이에야스가 연회의 흥을 돋우기 위해 춤을 췄는 데 이때 호조가 가신들은 이에야스가 호조가의 신하가 되었다고 개드립을 날린다. 거기다 술에 취한 우지마사는 이에야스가 차고 있던 칼을 뽑은 후 도카이도 제일의 무사의 검을 뺏었으니 이 우지마사가 대공을 세웠다고 개드립 시전.
  5. 이때 호조가의 영지는 240여만석으로 당시 일본에서 그보다 영지가 넓은 다이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 사람뿐이다.
  6. 聚樂第. 히데요시가 교토에 지은 자신의 저택.
  7. 보리로 밥을 하기 위해선 탈곡하고 말리고 하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때문에 밭의 보리로 바로 밥을 만들 순 없다.
  8. 단 호조 겐안과 공동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