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향녀

還鄕女

1 개요

화냥년의 어원이 되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던 단어. 병자호란 이후 당대에 환향녀라는 단어가 사용된 증거는 전혀 없다. 화냥년이라는 단어에 맞춰서 뒤에 억지로 가져다 붙여 만든 단어인게 분명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된 단어인지는 알 수 없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아예 사용되지 않고 일제시대나 해방 이후에 만들어진 단어일 가능성도 다분하다. 조선시대에 실제로 환향녀라는 단어가 사용된 예를 보신 분은 추가 바람. 당대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는 돈을 주고 데려온다는 뜻으로 속환(贖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나, 속환이라는 개념은 그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냥년의 어원 중 하나로 추측되는 설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폐기되었다. 화냥년의 어원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해당 항목 참조. 이와 마찬가지로 호로자식이란 말이 있다. 어원에 대한 여러가지 설 중 하나가 병자호란때 끌려간 여인들이 강간당해 낳은 사생아를 말한다지만 역시 사실이 아니다. 호로(胡虜)는 오랑캐를 뜻하는 말이니 호로자식은 그냥 오랑캐에 빗대어 욕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 밑은 실제 당시 속환되어온 조선 여성들이 겪었던 불편한 진실. 가부장적 태도의 끝판왕. 그리고 스스로의 무능으로 벌어진 사태를 피해자들, 약자들에게 떠넘겨버린 후안무치의 끝판왕.[1] 일단 잘못된 어원이긴 하나 이 문서에선 '청에게 끌려갔다 속환되어 돌아온 조선 여성들'에 대한 서술을 한다.

2 역사적 배경

청은 병력이 매우 부족했기에 포로들을 청군에 편입시키는 일도 매우 흔했다.

이렇게 전쟁시의 병력 or 노동력 확보가 목적이었으므로, 명을 멸망시킨 뒤에는 이전에 비해서는 통제가 다소 완화되고 조선 측에서 몸값을 내거나 간절히 청하면 풀어주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해서 많은 조선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문제는 남성들은 환영을 받았으나 여성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 여인들은 몇 년의 수치 끝에 간신히 고국에 돌아오는 데 성공했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따뜻한 환대가 아닌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자라는 모욕 뿐이었다.

3 조선사회의 반응

잇따른 국란으로 다같이 피폐해져 가는 마당에 서로 보듬어 안을 생각은 없고 오히려 이러하니 통탄할 노릇이다. 오죽하면 인조와 상당수의 양반들조차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깠을 정도다. 일부 야사로는 청군이 여자들을 끌고 갈때는 그래도 연약하다고 말을 내주기도 하고 그걸 남자 조선포로들이 끌게 했는데 남자 포로들이 지금 오랑캐들에게 잡혀가는데 '정절을 지켜라!'라고 여자들을 말에서 끌어내려 죽이기도 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야말로 몸을 민둥산으로 만들어야 정신을 차릴 상태다.

다만 당시의 조선은 국민들을 지켜줄 생각도 않으면서 도망쳐온 사람들을 멸시하기만 하는 나쁜 집단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조선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전통사회, 유교사회를 찬양하는 시각과 비하하는 시각의 양극단의 주장이 많아서,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서는 주의를 요한다. 임진왜란 이후 인구가 급감한 상황에서 백성들이 굶건 말건 상관없다는 식의 멍청한 짓을 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던 조선 정부는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서 꽤 노력했고, 안되면 국가 재정으로 포로의 몸값을 지불해서 데려오기도 했다. 도망쳐 온 사람들도 겉으로만 송환하겠다고 했을 뿐 실제로는 숨겨주는 일이 흔했다. 또한 여인들이 홍제원의 물에 목욕을 하면 깨끗해진 것으로 간주하고, 난리에 끌려갔다는 이유만으로 이혼하거나 여성을 내치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탁상공론일 뿐, 끌려갔다는 이유 대신에 품행이 좋지 못하다는 등의 다른 핑계를 들어 내칠 수도 있었다. 다만 조선법에 삼불거라고 해서 의절이 아닌 한 이혼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다. 첫째, 시부모를 위해 삼년상을 치른 경우. 둘째, 혼인 당시 가난하고 천한 지위에 있었으나 후에 부귀를 얻은 경우. 셋째, 이혼한 뒤에 돌아갈 만한 친정이 없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구실이야 찾으면 되는 것이므로 어떻게든 집요하게 내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지경이 되면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굴욕과 멸시를 받는다해도 이혼하지 않는 것이 더 여성에게 낫다고 보는 시각은 여성을 독립력이 결여된 일종의 종속물로 보는 시각이며, 혼인관계를 물질적 욕구만 충족시켜주면 아무래도 괜찮다고 파악하는 시각이 현대에야 당연시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다. 현대에도 남아있는 판에...

조선 중기인 이때까지만 해도 사대부와 달리 평민들은 이혼이 자유롭기 때문에 이혼한 여자도 꽤 많았다. 조선시대에 특히 과부들이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이 집단거주하는 동네나 상부상조하는 모임도 많았다. 그러므로 정신적 고통이야 당연히 심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의외로 이들이 혼자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대기업, 공기업 그 까짓거! 외국계기업은 어때? 산업화 이전의 농경사회는 고질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사서를 보면 아내가 몰래 염색 같은 수공업이나 임노동,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것을 발견하고 불같이 노해 이를 나무라는 관리를 청렴하고 안분자족함을 실천한다며 칭송하고, 반대로 누구누구 안사람은 부업한다고 까는 경우가 왕왕 보이는데, 관리들의 안사람들이 쉽게 경제활동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은 바로 만성적 노동력 부족이라는 저간의 사정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4 조선시대 속환해 온 여인들에 대한 언급

신이 전에 심양에 갔을 때 출신 사족으로서 속환하기 위해 따라간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만나자 부둥켜 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듯이 하여, 길 가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모나 남편으로 돈이 부족해 속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차 차례로 가서 속환할 것입니다.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반드시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치 않겠습니까.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 보고 물정으로 참작해 보아도 끝내 이혼하는 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습니다…. 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몸을 더렵혔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서도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로잡혀 간 부녀들을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논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3월 11일 갑술 2번째기사, 신풍 부원군 장유가 포로로 잡혀 갔다 돌아 온 부녀자들의 이혼 문제에 대해 계하다 中

이렇게 강력하게 속환해온 여인들에 대한 근거없는 비난에 최명길이 들고 일어서자 현대에 들어서 여러가지 이유로 폭풍까임당하는 중인 인조긴 하지만(...), 그래도 아주 암군인 것만은 아니었는지 최명길의 주장에 매우 동감하며 부녀자들을 내치지 말라고 강력하게 명을 내리나, 이미 연이은 전쟁의 패배로 인해 정말이지 병신 인증 하나는 제대로 했던 그의 말을 신하들이 제대로 들을 턱이 없으니 결국 무시당한다.

참고로 이런 최명길의 말에 대한 사관의 평은 이렇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先朝)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3월 11일 갑술 2번째기사, 신풍 부원군 장유가 포로로 잡혀 갔다 돌아 온 부녀자들의 이혼 문제에 대해 계하다 中

역사를 기록하며 공정한 기록물을 남기는 사관도 당대 사람이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던 듯. 게다가 인조의 용통성 없는 친명외교가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되는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을 생각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나마 선조 때는 상황이 나아서 일본군에게 끌려갔던 여자들 문제로 잡음이 덜했고 이원익 등의 중신들이 이혼 문제에 대해 강하게 극딜을 하면서 문제가 없었지만 이 시기는... 노답.
그나마 여성들의 몸값을 주고 조선으로 데려오는 작업 자체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돌아와도 지옥은 계속되었다.
후대에는 최명길을 비판하는 시각이 주류를 차지했는데, 이는 성리학의 교조화가 이뤄졌다는 것이 대중적인 시각이나 좀더 연구하고 논의해볼만한 문제이다.

다만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저렇게 이혼을 하던 소박을 놓던 저 여인들은 모두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액의 돈을 주고 데려온 여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당시 기록에는 저렇게 가족을 속환해오기 위한 재물 마련을 위해 고심했던 모습들이 많이 보인다.[2]

5 관련 링크

  1. 당시 사대부들과 사회 지도층의 무능한 외교정책으로 인해 벌어진 일의 피해를 고스란히 부녀자들이 입었다. 사실 민중들과 피해여성이 따지고들어도 모자랄 판에 더럽다고 내쳐버린 꼴. 뒤에 상소를 읽어보면 정조를 잃은 여인에게 종사를 받들고 가세를 잇게 하냐.. 어쩌고 저쩌고하는 소리들이 있는데 애초에 누구들의 탁상공론때문에 정조를 잃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2. 주로 담배를 마련해 많이 속환해왔는데 당시 만주에서는 담배가 자라지 않은데 비해 흡연 인구가 폭증해서 담배가 조선보다 수십 배나 비싸게 거래되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담배를 한 짐 마련해 짊어지고 가면 몇 명은 속환해 올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조금 늦게 간 사람들은 담배값이 폭락해 이전에는 서너 명을 속환할 수 있던 분량으로 한 명밖에 속환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렇게 폭락해도 조선보다 열 배 이상 비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