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북한의 2대 권력자 김정일에 대해 다룹니다. '김정일'이란 이름을 가진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김정일/동명이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이 문서는 잦은 문서 훼손 및 수정 전쟁으로 인해 자동 인증된 사용자만 수정하도록 제한되었습니다.
역대 북한의 국가원수 | ||||
대수 | 이름 | 직책 | 임기기간 | 비고 |
1대 | 김두봉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 1948년 9월 9일 ~ 1957년 9월 20일 | |
2대 | 최용건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 1957년 9월 20일 ~ 1972년 12월 28일 | 1962년 재선 1967년 3선 |
3대 | 김일성 | 국가주석 | 1972년 12월 28일 ~ 1994년 7월 8일 | 1977년 재선 1982년 3선 1986년 4선 1990년 5선 |
권한대행 | 김정일 | 국방위원장 | 1994년 7월 8일 ~ 1998년 9월 5일 | 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 권한대행 |
4대 | 김영남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 1998년 9월 5일 ~ 2009년 4월 9일 | 상임위원회 위원장직은 현직 |
5대 | 김정일 | 국방위원장 | 2009년 4월 9일 ~ 2011년 12월 17일 | |
권한대행 | 김영남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 2011년 12월 18일 ~ 2012년 4월 12일 | 상임위원회 위원장직은 현직 |
6대 | 김정은 |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 2012년 4월 13일 ~ 2016년 6월 29일 | 직책 폐지 |
국무위원회 위원장 | 2016년 6월 29일 ~ 현직 |
조선로동당 최고책임자 | |||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 |
김정일 사후 로동신문 등을 통해 공개된 공식 영정사진 | ||
이름 | 김정일(金正日)[1] | |
생몰년 | 1941년 2월 16일[2] ~ 2011년 12월 17일(?) | |
본관 | 전주 김씨 | |
국적 | 북한 | |
출 생 | 공식적 출생지: 양강도 삼지연군 백두산 밀영 | |
실질적 출생지: 소련 하바롭스크 | ||
배우자 | (공식적으로는) 김영숙[3] | |
자녀 | 아들 : 김정남, 김정철, 김정은, 딸 : 김설송, 김춘송, 김여정[4] | |
신체 | 160cm, 75-80kg, A형 | |
학력 | 김일성종합대학 학사 | |
직책[5] | 당 | 조선노동당 총비서 |
정 | 국방위원회 위원장 | |
군 |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 |
통치 기간 | 1994년 7월 8일 - 2011년 12월 17일 (17년 5개월 9일)[6] |
1 개요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 있으라!
오늘을 위한 오늘을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자.1996년 1월 14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을 고무시키기 위해서 한 말.
김씨조선 제2대 뽀그리우스.
金正日, 1941년 2월 16일 ~ 2011년 12월 17일[8][9]
북한의 제4대[10] 국가원수이나, 사실상 제2대다. 전대 김일성에 못지않은 독재자로 유명하며 현재의 북한을 말아먹은 가장 큰 원흉. 절대 인간으로 봐서는 안 되고 그렇게 볼 수도 없으며 북한을 말아먹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 북한의 당·정·군에서 가지고 있는 공식 직함은 각각 조선노동당 총비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다.
김정일의 출생연도는 1942년으로 알려졌으나[11] 이는 사실이 아니다. 북한은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1974년부터 그의 출생연도를 1941년으로 홍보하다가 1982년 김일성의 70회 생일부터 1942년으로 선전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나이차를 꺾어진 숫자(10-20-…)로 맞추려고 출생연도를 늦춘 것이다. 기사 그리고 이 짓거리는 3대째로 이어진다. 이렇게 해야 김일성 1912년생 - 김정일 1942년생 - 김정은 1982년생[12]이 되어 각각 30년 및 40년 차이로 출생년도를 계산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젊어보이기 위한 개수작이다
조선중앙방송에서는 항상 아나운서가 아랫배에 힘주고 복식 호흡으로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수식해야 한다. 이런 건 절대권력을 지닌 자가 정치적, 이념적, 사회적 등 여러 문제로 스스로를 왕이나 황제 등 절대권력자의 칭호를 쓰기 곤란할 때 궁여지책으로 그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권위란 권위는 죄다 끌어다 호칭하는 식으로 자신의 권위를 달리 표현하는 일종의 편법이다.
즉 김정일의 저 호칭을 풀이하자면 '이 사람은 나라를 다스리고 군대를 지휘하며 나라의 정신적 지주다'라는 식으로 사실상 왕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들을 돌려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은 일단 명목상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왕이 있을 수 없기 때문. 물론 북한 주민들도 저게 다 개소리인줄은 알지만 어쩔 수 없이 별말 않고 있다.
참고로 과거 후백제의 견훤이나 고려 무신정권의 최충헌도 보고 있으면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호칭을 사용했고, 중국에서도 지금도 하는 짓이다. 신문연파의 연변 버전에서는 시진핑을 중공 총서기이고 국가주석이며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인 습근평(習近平)이라 호칭한다. 다만 존칭은 쓰지 않는다. 중국은 북한처럼 사이비 교단까지는 아니고, 중국 공산당 내에서 어느 정도 권력에 대한 견제장치가 작동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평상적으로는 "시진핑 주석", "시 주석" 등으로 부른다. 그래도 한국인이 대통령 이름을 그냥 부르는 것처럼 보통 사람들끼리 "시진핑", 또는 성 "시"로만 언급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인 인식은 당연히 1990년대 냉전 종식 후부터 2000년대까지 세계 최악의 독재자이자 인간말종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 김정일 집권기부터 북한의 충격적인 실상이 본격적으로 폭로되면서 북한 정권이 인민을 보호하고 다스릴 자격이 없는 무능하고 부도덕한 정권임이 전 세계적으로 증명되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는 천재적이지만 정작 중요한 국정 운영 능력은 굉장히 부족한 케이스.
아돌프 히틀러가 자신의 헛된 신념과 과대망상적인 목표에 치중해 독재를 하고 전쟁을 크게 벌여 그 야만성을 어필하다가 자멸하였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북한의 김일성을 동경한 나머지, 권력을 일가친척에게 나누어 주고 국민들을 물 샐 틈 없이 감시하다가 공산주의 붕괴와 함께 망하고 만 것과 달리, 김정일은 신념이나 목표 없이 오로지 철저한 개인과 일가족의 부귀영화가 목적일 뿐인 독재자라고 할 수 있다. 비대칭무기 몇 개로 철권 통치를 유지하고 기아를 양산하며 시시때때로 주변 국가들의 안보를 크게 위협한다는 점에서 다른 독재자들 못지않게 위험하다.
중국에게는 무한 원조를 향한 기대, 일본의 경우에는 민간인 납치에 조총련 지휘, 미국에게는 대부분의 책임을 전가하며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전 세계적으로도 핵무기 개발로 전 세계를 협박하여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그 외에도 정당화할 수 없는 갖은 악행을 저질러 왔다. 조지 워커 부시는 이런 김정일을 악의 축이라 표현했다. 사실 이 양반은 자기 맘에 안들면 별의 별 것을 다 악의 축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이것만은 사실이다 더욱이 인민을 극빈 상태에 빠뜨리고 본인은 성인병으로 죽었으니 직무유기까지 한 셈이다.
직책은 상기한 대로 '조선로동당 총비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국방위원장+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이며 각각 당(黨), 정(政), 군(軍)의 최고직책이다. '정' 에 한해 더 상위 직책으로 김일성의 직책인 '주석' 이 있었지만 김일성 사망 이후 신격화를 위해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 이라 하여 영구결번으로 만들었다. 또한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수령님'으로 부르나 김정일은 '장군님' 으로 불러서 격을 다소 달리하였다.[13] 군에서의 계급도 김일성은 최고위 계급 대원수였으나 김정일은 그 아래인 '공화국 원수' 계급에 머물렀다.[14] 한편 차기 지도자의 계급은 세습 당시 겨우 '대장'.
뭐 결국 예측한 대로 사후 김정은에 의해 그의 직위인 당 총비서, 국방위원회 위원장 직위는 또 신격화되어 영구결번이 되었고 김정은은 당 '제1비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직위를 신설하여 쓰고 있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 사이에선 어감상 '국방위원회 위원장' 보다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이 더 높게 느껴져 애비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한 패륜아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고. 군 계급 역시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과 같은 계급인 최고 계급 '대원수'로 추대되었고. 김정은은 기존 계급이었던 '대장'에서 그 위의 '차수', '인민군 원수' 를 뛰어넘어 곧바로 '공화국 원수'로 진급하였다.
여담으로 김정일은 세계 역사상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인이기도 했다. 물론 좋은 뜻이 아니라 악명으로 이름이 높다는 것. 전 세계에서도 Kim Jong-il하면 알아듣지만, 정작 제대로 생각해 보면 북한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제력이 좋은 아랫동네 대통령의 이름은 잘 모른다.
2 일생
2.1 출생과 아동기
1942년, 김일성의 처 김정숙은 보로실로프[15] 근처 야영에서 김정일을 낳았다. 한때는 김정일이 비야츠코에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베이징에 사는 전 유격대원 리재덕의 증언에 의해 힘입은 적이 있으나, 1942년 4월 18일에 작성된 야영 대원 명부에서 김정숙의 이름이 발견되면서 비야츠코에 출생설은 수정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장백산 근처 밀영에서 1942년 2월 1일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유라'. 러시아식 이름 유리(Юрий)의 애칭이라고 한다. 그의 러시아식 이름[16]은 '유리 이르세노비치 김'이다. 이 '유라'라는 이름은 10대 시절 내내 사용했고, 남산 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앞 둔 무렵인 1960년 여름, 졸업을 앞두고[17] '이제 내 이름은 김유라가 아니라 김정일로 고쳤으니 앞으로 김정일로 불러달라' 고 급우들에게 선언했다고 한다. 한자도 처음에는 正一이라고 했다가 80년대에 다른 이복 형제들과 함께 사용하는 一자를 버리고 유일한 후계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김일성의 한자와 맞춘 日자를 사용해 正日로 바꿨다고 한다.
width=100% 김정일이 태어났다고 북한이 선전하는 백두산 밀영. 뒷산이 정일봉이다. |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이 어느 날 빨치산 출신들을 불러 백두산 밀영 자리를 찾아보라는 지시를 내리자 어느 누구도 찾지 못했다. 그러자 김일성이 직접 나서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내 '여기가 밀영지였다' 고 지적하고 그 뒷산을 '정일봉' 이라고 이름 지어주었다. 그 뒤에 거대한 화강석 바위를 구해다가 거기에 엄청나게 큰 글자로 '정일봉' 이라고 새기고 그것을 산봉우리에 올려다 붙이는 대공사를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백두산 인근 삼지연군 듣보잡이었던 어느 산봉우리가 김정일의 '공식적인' 출생지가 되었다. 어이없게도 북한 당국은 김정일의 생일이 1942년 2월 16일인데 정일봉이 봉우리만 따졌을 때 높이가 216.42m라 하늘에서 산 높이까지 생일에 딱 맞게 점지해 주었다며 김정일이 하늘에서 내린 인물이라는 증거라고 열심히 주민들에게 선전했다.
해방 후 부모와 함께 수송선 편으로 귀국해 일본인의 자택을 압류해 만든 평양의 수상관저에서 단란한 생활을 보냈지만 몇 년 뒤 자신의 남동생 김만일[18]와 수상관저 연못에서 놀다가 김만일이 익사했다고 한다. 이때 김정일이 겁을 먹고 남동생이 빠져 죽는 것을 보고만 있었는데, 나중에 김일성이 김정일을 책망할 때마다 두고두고 이때의 일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김만일이 죽은 지 한참 후(1954년)에 김일성은 다른 부인에게 또다시 아들을 얻었는데, 이름을 김평일로 지었다.
KBS의 다큐멘터리 <대기획 김정일>에선 김정일이 겁을 먹었기 때문에 동생의 익사를 보고만 있었다고 하였고, 같은 방송의 다른 다큐멘터리 <김정일, 금지된 과거>에서는 아예 김정일이 동생이 익사하는 걸 방치하는 수준이 아니라 연못에서 기어올라오는 동생을 걷어차서 자꾸만 물속에 처박았다는 주장을 소개했다. 어쨌거나 김일성은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연못을 통째로 메워버렸다고 한다.
일단 북한의 공식적인 주장으론 김정일과 김만일이 놀고 있었는데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김만일이 물에 빠졌고[19] 놀란 김정일이 허겁지겁 아버지를 불러왔으며, 놀란 김일성이 다시 자신의 주치의를 불러왔지만 이미 김만일은 숨진 후였다는 것이다.어릴때부터 숙청의 기술을 터득
이 시기를 전후해 아버지 김일성이 김성애와 일종의 불륜 관계를 맺으면서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을 멀리했고, 1949년에는 생모인 김정숙도 넷째를 출산하다가 사망했다. 이후 계모로 맞이한 김성애와 그의 이복 형제들과 갈등을 겪었고 계모 김성애를 절대로 어머니로 인정할 수 없던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당당히 허락 받아 계모 김성애를 어머니 대신 "아주미(아주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20] 이렇게 생모와 남동생의 죽음, 계모와의 갈등을 겪으며 자랐기 때문에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 김경희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품게 된다.
2.2 청소년기
파일:Attachment/김정일/10대시절김정일.jpg
돼지가 점자를 읽어?
1948년 평양의 남산학교 인민반에 입학했다. 6.25 전쟁 중에는 만경대 혁명자유자녀학원에 편입했으며 그 후 6·25 전쟁 후에 1954년 삼석인민학교[21]를 거쳐 평양 제4인민학교를 졸업했다. 평양 남산고급중학교[22]에 입학하여 1960년에 졸업했다.
초급중학교 2학년 때 김정일은 학교 소년단 위원장에 뽑혔고, 남산고중에서는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23]을 지내기도 했다. 북한의 선전물에서는 당연히 그의 학업 성적이 전 과정 전 과목에서 최우등이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 사이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고 적뻥치고 있다.
하지만 前 남산고중 교원 출신 탈북자의 증언이나 김정일과 중ㆍ고등학교 생활을 함께 한 사람들의 회고를 종합해 보면,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고 한다. 축구와 낚시, 사냥에 관심이 있었고 남산고중 시절 이미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것을 즐겼으며 학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은 책이나 긴 글을 읽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학업에 관심이 없었으나, 대부분의 아버지가 그렇듯이 아버지 김일성의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높았다. 그로 인한 황당한 일화가 있다. 김일성은 해마다 여름이 되면 평안북도 창성군 약수리에 휴가를 갔는데, 그때마다 김정일을 데리고 가서 틈나면 러시아어 회화를 가르쳐주곤 했다.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나 겨울방학이 되어 김일성이 여름에 가르쳐준 러시아어를 시켜보았더니 독해, 문법은 곧잘 해냈지만, 회화에 이르러서는 김정일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한마디도 알아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벌컥 화를 냈다.
곧바로 교육문화성 간부들에게 '남산고중 러시아어 수업에 대한 검열 과업'이 내려졌다. 내리갈굼 북한판특히 남산고중 러시아어 선생들의 회화 실력이 낮은 것 같으니 자세히 알아보고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러시아어 학습검열 그루빠(그룹)'가 조직되었다. 검열 결과, 남산고중 교사들의 러시아어 실력과 교수법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남산고중 러시아어 교사들은 대부분 러시아에서 태어났거나 모스크바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김정일이 러시아어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게으름을 부린데 있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교사 일부를 교체하는 선에서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또 김일성은 김정일의 러시아어 교습을 위해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 김현식에게 지시하여 러시아어 과외를 시켰다. 김현식의 지도로 실력을 키운 김정일은 이후 푸시킨의 시를 러시아어로 발표하는 대회를 가졌고 거기서 우레우라!! 돌격!!와 같은 환호를 받았다.[24] 이 시기를 즈음해서 어린 시절 어머니 김정숙을 잃고 매우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김정일이 외성적이고 밝아졌다고 한다.
공부는 별로 잘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러시아에 사는 그의 중ㆍ고등학교 동창들은 '김정일이 아무 친구와도 잘 사귀었고 무엇이든지 정열적으로 하는 스타일이었다' 고 회상했다. 남산고중 때 반미 시위를 주동했고 졸업 기념 앨범 제작과 졸업 파티를 주선하는 등 또래의 교우들 사이에서 통솔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영화, 무용, 음악회를 자주 관람했고 이들을 집에 불러다 가끔 연회를 열기도 했다는 증언도 있는 것으로 보아 교우 관계도 의외로 좋았던 것 같다.
2.3 젊은 시절
파일:Attachment/김정일/대학시절공사현장.jpg
대학 시절 도로 건설 현장에서 일은 제대로 했을까 다이나믹 로동
30대 초반의 김정일. 이때부터 벌써 배가 나왔다. 일 제대로 안 했네 오빤 평양 스타일
1960년 김일성의 지시로 동독 항공군관학교에 유학했지만,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개월만에 하차했다고 한다. 김정은의 경우처럼, 가명을 사용하여 학적에는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25]월간조선 2016년 4월호
남산고중을 졸업한 김정일은 당시 북한 사회 지도층에게 널리 퍼져있던 소련 유학 대신에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과 진학을 택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와 소련을 방문했을 때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를 둘러보면서 안내하던 소련 공산당 관계자가 김정일에게 당연하다는 말투로 "이제 동무도 곧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 입학하겠지요?" 라고 묻자 "평양에도 김일성종합대학이라는 훌륭한 대학이 있어요, 나는 거기에서 공부할 겁니다." 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이는 소련과 같은 강대국의 오만한 대국주의 성향에 한 방 먹이고 조국의 자존심을 지킨 사례로 북한내에서 선전되고 있다. 황장엽의 추측으로는 그가 유학을 가지 않은 것은 후계자 경쟁을 이미 미리 염두에 둔 결정일 것이라고 하지만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이 결정대로, 김정일은 1960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해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입학날 학교 뒤에 있는 용남산 언덕을 오르면서 즉석에서 삘 받아 지었다는 <조선아 너를 빛내리>라는 시는 북한에서 유명하며 시비도 건립되었고 노래로도 만들어졌다. #
이후 재학 중에 '10,000페이지 읽기 운동' 까지 전개하면서 장서 5만 권을 독파하고, 갖가지 논문을 저술하면서 학구열을 불태우며 천재성을 드러냈으며, 어은동 군사 훈련에서 학우들을 모범적으로 이끌었다는 건, 북한 당국의 뻥이다.
사실, 김정일은 초중고 시절과 마찬가지로 학업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거의 매일 수업을 빼먹으며 중앙영화보급소로 나와서 영화를 보는 등, 영화에 빠져 지냈다. 심지어 중앙영화보급소에서 김정일을 위해 특별 영사실을 따로 마련해주기까지 할 정도였다.
게다가 군사훈련에서 맹활약했다는 주장도 실제로는 날조다. 당시 김정일은 2학년 말 ~ 3학년 초의 2달 동안 평양시 룡성구역 어은동 소재 군사 훈련소에서 야영 훈련 중이었는데, 김정일은 이때도 야영지를 몰래 빠져나와 영화를 보다가 김정일이 갑자기 없어진 것을 알고 한참을 찾아다니던 삼촌에게 걸려 얻어맞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 김정일은 군대는커녕 군사 훈련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장군님' 으로 불리고 있고, 그가 훈련을 빼먹고 나가 버렸던 어은동 군사 훈련소는 현재 어은동 혁명사적지로 불리며 김정일을 활약을 기리는 사적지가 되어있다.
대학 시절 발표했다는 졸업 논문을 비롯한 무수한 논문들도, 자신이 쓴 것은 없고 지도 교수였던 경제학 박사 전용식이 대필해주었다고 한다.
대학 재학 중이었던 1961년 7월 22일에 김정일은 학생 당원 신분으로 조선로동당에 정식으로 입당해 정치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1964년 대학을 졸업한 뒤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2.4 김정일의 호칭
김정일의 호칭 해당항목 참조.
2.5 권력 장악
1980년에 아버지 김일성과 함께 찍힌 모습. 애비 꼬라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뒷쪽의 납북된 의사양반(...)처럼 보이는 안경 쓴 인물은 황장엽이다.
임무를 수행 중인 김정일.
김정일은 성인이 되기 전부터 권력에 대한 욕망이 컸다. 김정일의 개인 교사 중 한 사람이었다는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10대 시절에 아버지 김일성이 정치적으로 관심 있어하는 분야라는 이유로 황장엽을 데리고 소련의 농업 전람관을 직접 함께 방문해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아주 세세하게 질문했다고 한다. 17살부터는 김일성의 공식 행사에 동석하면서 김일성의 경호원들을 다른 정치 국원들 대신 자신이 직접 관리하며, 세부적인 사항까지 자신이 직접 검토하면서 과업 지시를 하고 또 보고를 받으며, 아버지의 공식적인 활동을 관리했다고 한다.
심지어 아버지를 수행할 때 자리에서 일으키고 신발을 신기고 부축해가는 쇼를 자신이 계획해 실행했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노친네도 아니고 40대 후반의 팔팔한 나이라 부축이나 수발 따위는 전혀 필요 없었지만, 이러한 김정일의 세세한 보살핌에 굉장히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10대 시절에 이미 김일성과의 부자 관계를 자신의 정적들에게 과시하고 또한 아버지의 신임을 얻기 위해 심기를 관리하는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은, 훗날까지 이어지는 이미지 메이킹이나 권모술수에 관한 탁월한 재능을 일찌감치 보여주고 있었다. 황장엽은 성인이 되기 전의 김정일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삼촌 김영주를 쫓아내고 후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했다고 한다.
1967년 숙청된 북한 정치권 내 최후의 김일성 반대 파벌이었던 박금철을 중심으로 한 갑산파가 박금철 부부의 항일투쟁을 찬양하는 <일편단심>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던 것을 통해 영화계에 갑산파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알게 된 김일성이 "영화예술 분야에서 반당 종파분자들의 여독을 완전 청산하라" 는 지시를 내린 뒤 김정일은 영화광인 자신의 취미를 살려 24세의 나이에 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과장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선동의 달인
이때 자신의 지휘 하에 북한 내에서 혁명적 대작으로 꼽히는 김일성 우상화 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유격대 5형제>, <한 자위 단원의 운명>, <피바다>, <꽃 파는 처녀>, <밀림아 이야기하라>와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특히 피바다는 직접 관람한 혁명원로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김일성은 예술성과 사상성이 결합된 우리식 가극을 창작하였다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이전까지 김일성의 유력한 후계자로 점쳐진 자신의 삼촌 김영주와 벌인 충성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로 김정일은 김일성의 신임을 얻었고 당 비서국 조직 및 선전담당 비서의 자리에 올라 자신의 권력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다.
또한 1972년에는 마오쩌둥의 홍위병을 모방해 국가경제기관 종사원, 대학생, 대학교원, 공장·기업소의 기술자와 과학자 등의 직업을 가진 젊은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3대혁명소조' 라는 사조직을 만들었다. 이 소조들은 전국 각지의 공장과 협동 농장, 행정기관, 문화예술기관, 각급 학교에서 간부들의 보수주의, 경험주의, 요령주의, 기관 본위주의, 관료주의 등의 악습을 개조하기 위한 사상 투쟁을 한다는 명분으로 곳곳에 배치되었고 광범위한 분야에서 통제/조정/감독권을 행사하는 막강한 권한을 주고 주요 정보를 김정일 자신에게 직접 감시, 보고하도록 했다. 김정일은 이 소조 활동으로 자신이 권력의 말단에서부터 주요 기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세밀하게 직접 감시, 지시할 수 있는 지휘 계통을 갖췄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파일:Attachment/김정일/3대혁명.jpg
사실 북한 사회에서 60년대는 꽤 리버럴한 사회였다. 갑산파를 비롯한 김일성의 견제 정치세력도 존재했고 주말만 되면 북한의 젊은이들은 소련, 헝가리, 폴란드에서 나온 영화를 보며 나들이를 했고, 동유럽과 소련의 민요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불야성의 파티를 벌였다.
하지만 김정일의 3대 혁명 이후로 서방은 물론 동구권의 문물도 외국 것이니 나쁘다는 이유로 금지되었고, 상호 감시, 보고, 비판 체계는 북한 사회를 극도로 경직되게 만들었다. 물론 꽤 자유롭던 분위기를 김정일 혼자 깽판쳐서 없앤 것은 아니고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탈스탈린주의를 표방한 이후로 차차 악화되던 북한-소련 관계와 해방 이후부터 슬슬 태동되던 북한의 민족주의가 나날이 강성해진 것이 이 때에 이르러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러한 기조는 1980년대에 가면서 일부 외국 문물을 차용하면서 사그라든다.
김정일의 권력 확대 시도로 김영주는 1980년대까지 권력에서 동떨어진 채 은둔 생활을 해야 했다. 김성애가 전국의 여성동맹사무실의 김정숙 사진을 팽개쳐버리고 자신과 김일성의 생모의 사진을 걸어놓자 격분한 김정일은 계모를 치기 위해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 장성택을 시켜 김성애 일가가 부화방탕한 행동을 했는지 비밀리에 조사하라고 했다.
하지만 김일성과 사이가 돈독한 김성애를 섣불리 공격하는 일은 오히려 자신의 입지를 축소하는 일이었고, 김정일은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게다가 이시기에 그는 12살 어린 이복동생 김평일의 도전에 매우 고전하고 있었는데, 김평일은 키가 180cm에 달하는 장신에다가 아버지를 닮아 원로들의 호감을 샀고, 카리스마와 지도력이 대단하여 대학 재학 시절부터 온 대학생들을 자신의 수하로 휘어잡았던 인물이었다[26]. 이에 온 이북이 "다음 수령은 김평일이가 되겠다!"하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그런데 1972년 김일성의 회갑 잔치에서 빨치산 원로들에게 김일성이 "내 아들이 두셋 있는데 누가 다음으로 좋겠나?"하고 물었다. 근데 원로들은 김평일을 점찍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는데[27] 김일성의 바로 왼편에 앉았던 최현이 "수령님, 당연히 수령님 장손이 해야죠. 장남이 하지 누가 합니까?"라고 외치자 김일성이 "그래요? 다른 의견 없습니까?"하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빨치산 최고 원로인 최현의 강경한 발언에 아무도 김평일을 지지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이렇게 원로는 김정일을 벌써 낙인찍고 있었다.
결국 1972년 4월 김일성은 만경대 생가를 방문하여 "우리 집안, 우리 만경대 집안의 혈통은 김정숙 혈통입니다. 김정숙 혈통만이 백두산에서 시작된 우리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완수할 수 있습니다."라고 교시를 내림으로 김평일을 내치고 김정일을 후계자로 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73년 여름, 김성애의 아들들을 나락으로 몰아내는 사건이 터진다. 김일성이 해방 직후부터 아껴두고 또 아꼈던 인민대학습당을 건설하려던 부지를 김일성이 방문했는데, 호화로운 저택이 지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김일성이 놀라서 "뭐이야. 이게? 누구네 집이야?"라고 묻자 저택을 지키던 보초가 "해군사령부 정치위원 당비서, 김성갑 동지의 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곧 '인민대학습당 사저 신축 사건' 으로 번졌다. 김일성은 대노했고 "뭐이? 김성갑이가 여기 살아? 언제부터?"라고 외치고는 김성갑을 불러서 매우 혹독하게 비판하고 질책했다.
그날 밤 지친 김일성이 관저로 돌아가서 김성애에게 "밥이나 먹자."라고 하자, 한성격했던 김성애는 김일성을 구슬러도 모자랄 판에 "밥이 뭐요? 낮에 자기 처남을 그렇게 핀잔주고 비판하고 남들 앞에서 그렇게 깎아내리고, 밥이 넘어가겠소?"라고 바가지를 긁었고, "당신 가시어머니(장모님)가 그런 집에서 한번 살면 당신 뭐 잘못 되는 거 있어?"라고 소리지르며 밥상을 뒤엎었다.
난데없이 뜨거운 국과 밥을 다 뒤집어 쓴 김일성은 폭발했고, 그날 밤 둘이서 미친듯이 싸웠다고 한다. 이틈을 놓치지 않고 김정일은 김성애와 그녀의 친족들, 친지들, 그리고 김성애의 아들인 김평일의 비리를 김일성에게 낱낱이 보고했고, 다시 강도 높은 검열과 사상 검증을 실시했다. 그 결과로 이들 대부분은 숙청되어 권력의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후에도 김성애의 권세는 유지되어 1974년 1월 1일 김일성이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 신년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의자가 준비되었는데, 김일성을 위한 황금의자 옆에 김성애를 위한 황금의자가 나란히 놓여, 그것을 본 김정일이 김성애가 당간부도 아닌데 왜 황금의자를 두냐고 길길이 날뛰다가 김성애가 나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공손하게 맞이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김성애의 권력은 날이 갈수록 축소되었고, 80년대엔 북한에서 "김정일의 최고 업적이 중앙여맹비서를 제친 것"이라는 농담이 돌 정도였다.
여러 정치 공작의 결과, 김정일은 마침내 1974년 당중앙 위원회 제5기 전원회의에서 '유일한 후계자' 로 공식 선출되었다. 이후 김영주를 철직시킨 뒤 일가족을 량강도로 보내버렸고 특히 사저신축 사건으로 몰락한 김평일은 1979년에 유고슬라비아 주재 북한 대사관의 대사로 파견된 이래 아버지 김일성의 장례식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동유럽의 해외 대사로만 근무하며 북한 땅에 발 붙이지 못하는 야인 신세를 지금도 면치 못하고 있다. 그의 동생인 김영일도 운명은 비슷했고 그는 2000년에 사망했다. 김성애는 완전히 정치적 폐인이 된 채로 지내다가 지미 카터 방북 시에 잠깐 빛을 보곤 은거하다가 2014년 들어서 사망설이 돌고 있다. 그래도 뭐 90까진 살았다.
하지만 1976년 김정일에게도 위기가 닥친다. 그가 지휘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북한을 멸망의 위기로 몰고 가자 정권 내에서 김정일 반대파들이 대거 들고일어난 것이다. 김일성은 김정일을 좌천시키고 당중앙이란 호칭도 더 쓰지 못하게 했다. 이에 신이 난 김정일의 반대파들이 앞을 다투어 김정일을 성토했는데, 사실 이게 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작전이었던 것이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때문에 당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김정일을 위해 김일성이 짐짓 김정일을 내칠듯 쑈를 한 것이었다. 덕분에 커밍아웃을 한 김정일 반대파들은 모조리 숙청되고 만다. (출처 필요)
이렇게 고도의 권모술수로 자신의 정적을 모두 제거한 뒤 1983년에 열린 최고인민위원회 제7기 2차 회의에서는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비서, 군사위원을 겸직하게 되면서 마침내 군 지도부까지 장악했고 김일성 이외에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서열 2위의 권력자가 되었다.
1992년에는 군 통수권까지 가지게 되면서 김일성은 김정일을 거치지 않고서는 어떤 보고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정치적으로 장님에 귀머거리인 꼭두각시 수준으로 전락했고 황장엽의 주장에 따르면 '최고 고문'의 역할로 사실상 밀려났다. 심지어 김일성은 말년에 자신의 생일에 김정일에게 아첨하는 송시 '광명성 찬가'를 바치는 안습한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공산주의 국가 최강독재자인 스탈린과 마오쩌둥도 안 한 권력을 부자 세습하는 현대 역사상 유례없는 사례를 만들어 북한을 사회주의 국가에서 전제군주제로 바꿔버렸다.[28]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북한만의 현상은 아닌 것이 3대 세습을 먼저 달성한 니카과라의 소모사 가문의 전례가 있으며 장제스, 리콴유, 알아사드는 2대 세습에 성공했고 후세인, 카다피, 차우셰스쿠도 따라 하려고 했다.[29] 다만 북한은 명색이 사회주의 국가면서 저런 지거리를 해서 전세계에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여담이지만, 김일성과 김정일은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 내외의 처형 장면을 비디오로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비디오는, 김씨 일가와 북한의 몇몇 고위층들이 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정일의 요리사로 유명한 후지모토 겐지도 동석했는데 김정일은 차우셰스쿠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순간 하얗게 질리더니 "우리도 반동들을 때려잡지 않으면 저 꼴이 된다."고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덩샤오핑도 역시 차우셰스쿠 처형 광경을 녹화한 비디오를 입수하여 중국 지도부와 같이 보았다고 한다. 덩샤오핑은 한참 만에 중국 공산당 간부들에게 "어쩌다 저 꼴이 되었는가?"라고 물었고, 어느 한 공산당 간부가 "반동들을 때려잡지 않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덩샤오핑은 "틀렸다. 우리도 개혁하지 않고 인민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라고 대답하면서 그 간부를 데꿀멍시켰다고 한다.
결국, 덩샤오핑은 자신이 직접 주도아래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중국은 최고의 자본주의 시장으로 경제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걸 아는 양반이 천안문 사태를 일으켰나? 그래도 차우세스쿠와 김정일보다 덩샤오핑이 인민들에게 많이 베풀은 것은 사실이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이다. 김정일과 덩샤오핑은 처형 비디오를 보고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 반응의 차이는 두 나라의 미래를 완전히 정반대로 바꿔놓게 된다.
김정일과 덩샤오핑의 관련된 일화로는, 덩샤오핑이 흑묘백묘론을 주장하면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실행시키자 김정일은 공산주의 혁명을 포기한 누가 누구에게 포기한다는 거야? 중국은 곧 나락에 빠질 것이라는 논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고 논문 내용은 덩샤오핑의 개혁정책비판과 덩샤오핑을 비웃는 내용을 주로 이루었다.
그러나 20년 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은 중국이 미국과 같이 G2 국가로 미국과 대등한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에 비해, 폐쇄적인 자력갱생을 주장한 북한은 현재 최빈국 중의 하나로 몰락하였다.
2.6 고난의 행군
고난의 행군 해당항목 참조.
2.7 남북정상회담
남북정상회담 해당 항목 참조.
2.8 사망
width=100% |
부쩍 수척해 |
21세기가 되고 나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6개월 사이에 완전 해골이 될 정도로 살이 확 빠지기도 했다. 넘쳐나던 뱃살마저 사라지고 없어졌다. 췌장암에 걸려서 길어도 2013~14년에는 사망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는가 하면 1년 정도 남았다는 설도 나왔다. 2009년 12월 1일 피습 사망 루머가 퍼지면서 코스피 지수와 코스닥 지수가 춤을 추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잊을 만하면 사망 소식이 터져나왔다.
실제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장이 들어간 장기가 모두 안 좋았다고 하며 식후에 5종류의 약을 먹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약을 먹으면서 "아, 나는 죽을 때까지 약을 먹어야 하는 거냐?" 라고 뇌까렸다고 한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70세로 지옥 갔다. 더군다나 아버지 보다도 12년 일찍 죽은 셈.
정말 웃긴 것은 '장군님의 만수무강' 을 위해 '만수무강연구소' 를 건립하고 이에 많은 돈을 들인다는 건데(…), 아무리 의사가 노력해도 본인이 자기 관리를 전혀 안 한다면 건강을 지킬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전에 먼저 본인부터 술, 담배 끊고 무절제한 생활 습관을 고치도록 노력해야 했는데, 그럴 생각도 안 했으니, 70세까지 산 것도 나름대로 만수무강한 거다. 희대의 쓰레기가 죽었으니 축복일지도? 그런데 김정은이 있잖아? 안될거야 아마
2009년 들어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설이 파다해지고 3남 김정은이 후계자로 지명었다는 설이 돌았다. 그런데 2010년 1월 9일에는 '북한 인민 생활에는 걸린 것(부족한 점)이 적지 않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발언은 김일성의 1994년 제3차 7개년 계획 실패 선언, 1996년 김일성종합대학 연설의 '식량 부족으로 무정부상태가 되고 있다' 발언 등으로 유례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고난의 행군을 어찌되었건 북한 내에서 공식적으로는 마무리하고 2012년 강성대국을 목표로 주장하며 '나름대로 살 만하다' 는 주장을 하던 와중에 나온 것은 상당히 의외.
뭘 하든 늘 숨어다니던 그가 2010년 들어서 자국 내 지지 기반이 약한 아들내미의 안정적 승계를 위해서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 껀수들을 벌어와서 그 공을 아들에게 먹여주는 식으로 뛰고 있다. 저리도 열심히 뛰는 걸 보면, '저 정도 노력을 좀 더 일찍 북한 주민들을 위해 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2011년 12월 17일 오전 8시 30분 사망. 전용 열차인 태양호를 타고 가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원인은 공식적으로는 '인민들을 위해 불철주야 업무를 하다가 과로로 인한 중증급성 심근경색과 심장쇼크. 실제로는 김정은 후계 체제와 전제 왕국의 유지를 확실히 하기 위한 불철주야.' 다만 건강에 치명적일 정도로 계속 여기 저기 시찰, 방문하는 등 상당히 무리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과로' 는 아무래도 수식어구의 느낌이 강하다. 물론 김정은 후계 체제의 불안정으로 인한 본인의 불안감 탓에 나름대로 애를 쓴 것도 있겠지만 뒤의 두 병명은 성인병으로서 전형적인 질환이다. 조선 중앙 TV 보도[30] 이는 19일에 발표되었는데 정부에서 이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한 점이 질타를 받기도 했다.
다만 북한이 발표한 사망 날짜와 사망 장소는 거짓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12월 20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한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이 "김정일 전용 열차는 평양 룡성역에 지난 12월 15일부터 계속 멈춰서 있었다" 고 진술한 것. 이는 열차로 이동하는 중에 김정일이 사망했다는 북한의 공식 발표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한편 전용 열차에서 죽었든 침대에서 죽었든 죽은 건 죽은 거고, 이런 정보를 굳이 대외적으로 공개해서 북한을 자극하고, 우리의 정보수집능력을 노출시킬 필요가 있냐는 비판이 일부에서 나왔다.[31]
김정일 사망 당시 서울대학교 농생명과학대학 한 여학생이 학생회관 1층에 김정일 분향소를 설치해 학내외에서 큰 논란이 됐다. 본래 이 학생은 대학 본부에 분향소 설치 허가를 받고자 했으나, 학교 측에서 허가하지 아니하여 분향소 설치를 강행했던 것이다.
한편 삼성그룹이 김정일의 사망 정보를 미리 입수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다. 북한의 공식발표 2시간 뒤에 나온 통신사 뉴시스의 보도에 따르면 삼성의 한 고위 임원이 18일 저녁 몇몇 언론에 전화를 걸어와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설이 있다. 그쪽 분위기는 어떠냐?”라고 문의 했다는 것이다. 뉴시스의 기사가 파문을 일으키자, 삼성은 "우리가 (삼성내부 고위층을) 아무리 조사해 봐도 그런 사실이 없다"면서 부인하였다. 뉴시스의 기사는 얼마 안 가 인터넷에서 삭제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지기로는 북의 공식발표 이전에는 미국, 일본, 러시아 등 여타 국가도 몰랐으며, 북의 유일한 동맹국인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북한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조총련[32], 금강산 관광 등 대북사업을 하고 있는 현대그룹도 사전인지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국정원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외교안보 부처도 북의 공식발표를 통해서 알았다고 한다.
뉴시스의 기사를 사실이라고 가정해도, 삼성그룹이 명확한 사망정보를 입수했다는 주장은 오버로 보인다. 기사에 따르면 삼성 고위 임원의 태도는 '이런저런 카더라가 돌고 있는데...' 수준으로, 이런 것을 명확한 정보를 입수했다고 보긴 힘들다. 게다가 대외적으로 사소한 것까지도 비밀로 감추는 독재국가에선, 고위층의 신변에 관해서 언제나 이런 저런 추측과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떠돌아 다니기 마련이다. 며칠만 언론보도에서 사라져도, 사고설, 중병설, 체포설, 숙청설, 식물인간설, 암살설, 사망설, 대역설...등등 온갖 카더라가 쏟아진다.[33] 이런 모습은 과거 구소련과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북한도 마찬가지로 수십년동안 김일성, 김정일 사망설이 불거진게 한두번이 아니다.[34]
게다가 평범한 동네아저씨가 보더라도 '김정일 건강에 문제가 있다'[35]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망설이 불거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정보기관 입장에선 마치 증권가 찌라시 처럼 이렇게 수시로 나오는 카더라에 일일히 반응할 수도 없거니와, 설사 이런 첩보를 입수했다고 하더라도 고도의 정보수집능력을 갖췄다 곧바로 연결짓기는 무리이다. 정보기관의 역할에는 어떤 소문이 퍼지면 조기에 획득하고 사실 확인을 정확하게 해내는 것도 포함된다. 당시 기준으로 삼성 직원들이 들었던 것이 설사 정확도가 높았다고 하더라도 정보는 아니다. 정보기관이 어떤 식으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이상한게 아니라 당연한거다.
다만 삼성그룹이 전세계적으로 활동하는 거대기업으로서, 각 나라에 퍼져있는 직원들의 정보망의 규모가 대단히 넓은지라, 국정원의 역량 평가와는 다른 방향으로 바라봐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일부에선 이 사건을 대한민국 사회내에 팽배해 있는 삼성만능주의, 삼성전지전능론이 불러온 해프닝으로 보기도 한다.
2.8.1 사망 이후 여파
김정일의 사망이 발표될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공식 일정상으로는 한일협상 중이었으나 일정을 모두 취소하였다. 참고로 이 한일협상 도중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언급되었다. 참고로 김정일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12월 19일은 이명박 대통령의 생일이기도 했다. 청와대에서는 불과 오전까지만 해도 이명박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하는 훈훈한 분위기였으나 오후에는 완전히 난리가 났다고 한다. 생일선물로 죽어줬나 보다 사실 가카께서 뇌파로 김정일을 죽였다고 한다
인터넷은 대체적으로 "천벌을 받았다, 잘 죽었다"며 기뻐하는 분위기가 대세. 비참하게 죽지 않고 편히 죽어 아쉬워한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간간이 고인의 죽음을 슬프게 애도한다는 발언들도 나왔으나, 잔인한 독재자를 어떻게 추모하냐는 네티즌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침묵했다.
확실히 애도발언을 하기에는 그 사이에 너무 비극적인 사건이 많았고, 북한이 보여준 행보는 지나치게 적대적이었다. 그나마 김정일이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최소한의 반성을 표하기라도 했으면 또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으며 죽음 역시 동정의 여지가 있는 참혹한 죽음이 아니라[36] 일반적인 자연사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와중에 탐앤탐스의 공식 트위터에서 해당 트위터 담당자가 김정일의 명복을 빌어준다는 트윗을 올렸다가 회사 전체가 뒤집어져 사과 성명을 발표하는 해프닝이 빚어지기도 했다. 머저리들 왜 저런 악당을 위로하냐?
그래서 죽어 마땅했다, 잘 죽었다는 여론이 절대다수. 사실 이 인간이 한 전체적 악행은 둘째 치더라도, 2010년에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 도발 같은 일들을 저질렀으니 결코 좋게 봐줄 수 없던 셈이다. 보수·진보를 떠나서 흥겨운 한민족의 판을 벌이는 중. 그리고 모처럼 양심에 거리낄 것 없이 신명나는 고인드립이 난무하고 있다.[37] 특히 탈북자들 커뮤니티의 게시판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
한편으로는 '근데 이제 어떻게 됨'이라며 불안해하는 의견과 함께 혹시 강경파가 내부 결집 차원에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에 불안해하기도 했으나, 실제로 다음 해인 2012년은 크게 위협적인 도발 없이 무난히 넘어갔으며 그 다음 해인 2013년 북한의 전쟁 위협도 엄포만 신나게 쳐댔을 뿐, 이에 미국의 스텔스기가 영공을 활강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손 놓고 있었을 뿐이었다.
김정일 사망 직후 군에서도 전군 비상경계태세, 경찰의 갑호 비상 발령 등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당시 휴가중이던 군인들이 복귀한 것은 당연하다. 대북정보감시태세인 워치콘을 3단계에서 2단계로, 대북방어준비태세인 데프콘을 4단계에서 전투 준비 태세인 3단계로 격상을 검토하였으나 실제 북한이 과격 행동을 일으킬 동기가 적음, 그리고 북한군에 이상 동향이 없음으로 인해 실제 격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북한의 국지도발에 대비하여 경계대기태세를 격상시켰으며 이로 인해 5분대기조 및 초소 등의 인원들이 추가적으로 근무에 투입되었다. 또한 대북정찰기 횟수를 늘려서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있다. 경찰 역시 갑호비상이며 그와 함께 이명박 대통령은 공무원 비상근무령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남북 정세불안을 우려하는 여파인지 코스피가 개발살났다. 또한 김정일 사후 북한 내전이 한국으로 불똥을 튀긴다는 내용의 다음 웹툰 스틸 레인이 갑자기 성지가 되었다. 김정일이 죽었소!
사실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할 역량 따위는 없다는 것은 북한 수뇌부가 다 아는 일이고 권력이 커지는 추세이기는 해도 군은 어찌되었건 당의 아래에 장악된 상태이기 때문에 돌발 상황은 당의 동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전쟁보다는 차라리 쿠데타의 확률이 더 높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선군 정치는 북한에서 돌아가는 시스템이 군대뿐인 탓에 '군대를 모범으로 혁명을 달성하겠다' 는 즉 '군대 총동원해서 나라꼴 다 잡는 데나 올인하겠다'는 선언이기 때문. 괜히 둔전 굴리는 꼴이 나오는 게 아니다! 물론 전면적 전쟁은 말도 안 되는 도박수이지만 국지적인 무력 도발의 가능성은 충분하기 때문에 지금의 긴장 태세도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열차에서 급사했다는 점, 자리에 누워 편하게 못 죽고 객사했다는 점이 김일성 사망 때와 같다. 타살이 아니더라도 세계구급 독재자들의 최후는 자리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 경우가 드문 듯. 권력을 자기 앞으로 유지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중노동을 남의 손에 맡기지 못한 채 오직 자기 앞으로만 하고 죽는 그 순간까지 계속 몰두하며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 진시황만 봐도 하루 업무량이 상상을 초월해서 자기가 직접 처리 기준을 정해 놓았을 정도다.
장례식은 28일 평양에서 열렸고 29일까지는 애도기간. 김정은이 진행하였다. 묫자리는 다름 아닌 금수산태양궁전.
이때 북한 국민들이 대성통곡을 하는 모습이 해외와 국내 언론에 보도되면서 전세계 네티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김정일 사망 소식에 통곡하는 북한 주민들 이 영상을 가지고 북한 주민들이 슬퍼하는 원인을 다른 걸로 바꾸는 패러디 동영상이 유행했다.
파일:/image/moneytoday/2011/12/20/2011122014398266854 1.jpg
12월 20일 로동신문 컬러사진으로 되어있다. 잘 보면 얼굴 구도가 최대한 김일성의 사진과 똑같이 맞추어져 있다. 흔히 사용되는 김일성의 사진도 정면에서 고개를 오른쪽 위로 올려 미소 지은 채 찍은 사진이다.[38] 김일성과 김정일의 웃는 모습을 북한에선 모두 '태양상'이라고 부른다.
파일:/image/moneytoday/2011/12/20/2011122014398266854 2.jpg
공식 사망선언문. [39]
파일:Attachment/d0133024 4f0186d1e23fd.jpg
추모만평도 나왔다.(...)
김정일 사망 이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에선 탈북자들이 난입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을 축하드리며' 라는 고인드립성 유인물과 김정일의 영정사진을 대사관 건물에 붙이고 만세를 부르는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 이들은 결국 경찰에 연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분명 '대사관 직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유인물을 떼어내면서 하필 김정일의 사진을 찢고 구겨 처리하는 장면[40]이 포착되기도 했다. 링크. 왜 막은거냐? 오히려 이런 악행은 권장해도 된단 말입니다
2.8.2 박제와 사후 우상화 작업
자기가 아버지 김일성에게 했던 짓과 똑같이 러시아에서 거금을 들여 사체보존 전문가들을 데려와서 박제로 만들었다고 한다.[41] 단, 엠버밍이지만 절대 농담이 아니라 김일성, 김정일의 사체 보존 비용을 다 합치면 북한 전 예산의 1% 정도에 달할 것으로 추측된다.
2012년 2월 3일에는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의 정령으로 김정일훈장, 김정일상, 김정일청년영예상과 김정일소년영예상을 새로 제정한다고 발표했다. 다만 이미 제정되어 있는 김일성 이름의 상과 훈장[42]보다는 한 단계 아래의 급수를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2월 9일에 첫 김정일훈장~김정일소년영예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는데 김정일훈장 수상자에는 김정일의 여동생과 매제이자 김정은의 고모와 고모부인 김경희-장성택,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김영남, 내각 총리 최영림,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리영호,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등 기존의 핵심 권력층 외에 김정일 사후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던 김옥과 오극렬이 들어가 숙청설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생일 전날인 2월 15일에는 아버지 김일성에 이어 북한에서 2번째로 공화국 대원수 칭호를 받았고 생일을 '광명성절' 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김일성 생일인 '태양절' 과 동급의 국경일로 만들었다. 김일성과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있는 김정일의 동상도 만수대창작사에서 제작/공개되었고 북한 각지에 김정일 동상이 계속 세워질 예정이라고 한다. 금수산기념궁전의 경우에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호칭을 바꾸는 등 우상화 작업에 계속 박차를 가하고 있다.
3월 29일에는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김정일에게 김일성훈장과 김일성상이 수여되었다. 이어 4월 11일에 소집된 조선로동당 제4차 대표자회의에서는 김정일을 '영원한 조선로동당 총비서' 로 추대해 당 총비서 자리를 사실상 영구 공석으로 만들었다. 김일성이 사후 '영원한 공화국의 주석' 으로 추대된 것과 비슷한 모양새인데 물론 후계자인 김정은도 총비서 대신 조선로동당 제1비서 자리로 추대되어 군권에 이어 당권도 공식적으로 승계했음을 선전했다.
한편 4월 13일 김정일이 사망 2달여 전 남긴 유언인 이른바 10.8 유훈의 일부가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에 의해 공개되었다. top 중앙일보 기사 공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내 분야 - 유언 집행은 김경희(김정은의 고모)가 한다. - 1년 내에 김정은을 최고 직책에 올려 세운다. - 김정은을 당에선 김경희·장성택·최용해·김경옥, 군에선 김정각·이영호·김격식·김명국·현철해, 경제는 최영림과 김창룡·서원철·김영호가 책임 보좌한다. - 김정남(김정일의 장남)을 많이 배려해라. 그 애는 나쁜 애가 아니다. 그의 애로를 덜어줄 것. - 김설송(김정일 장녀)을 정은의 방조자(협조자)로 밀어줄 것. - 국내 삼천리금고와 2·16호 자금을 김정은에게 이관. 해외 자금은 김정, 이철호와 합의해 정은에게 이관. |
핵, 미사일 등 대외정책 - 선군사상을 끝까지 고수할 것. 국방에 소홀하면 대국의 노예가 된다. - 핵, 장거리 미사일, 생화학무기를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충분히 보유하는 게 조선 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 - 미국과의 심리적 대결에서 반드시 이겨야. 합법적인 핵 보유국으로 당당히 올라 미국의 영향력 약화해야. - 국제 제재 풀어 경제 발전을 위한 대외적 조건을 마련해야. 6자회담을 잘 이용해야. - 중국은 현재 우리와 가장 가깝지만 앞으로 가장 경계해야 할 국가. - 김씨 가문에 의한 조국 통일이 종국적 목표. |
우째 모든 항목이 현실과 이리 동떨어졌나...
상기의 대외정책분야 중 마지막 항목인 "김씨 가문에 의한 조국 통일이 종국적 목표" 에서 이제는 아예 대놓고 북한이 본인들의 왕국, 소유임을 인증했다.
그리고 그동안 김일성 동상만 세워져 있던 곳에 김일성과 김정일이 나란히 선 모습의 동상이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 2012년 한 해 북한 언론에 보도된 것만 봐도 평양 만수대언덕(4.13), 인민무력부(8.24), 강계(10.11), 김일성군사종합대학(10.29), 함흥(12.21)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동상이 세워졌고, 10월 2일에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김정일 단독 동상의 제막식도 거행되었다. 북한 언론이 공개한 동상 사진들을 보면 사후 나온 공식 초상을 바탕으로 소위 '야전 솜옷' 차림으로 디자인한 형태이며, 그동안 중년 이미지로 만들었던 김일성 동상도 사후 발표된 노년기의 공식 초상을 참고해 새로 제작했다.
또 금수산태양궁전에서 김정일 시신의 엠버밍 작업과 관련 시설의 확보를 위한 개축 작업이 사망 1주기를 맞아 완료되자, 그동안 일부 높으신 분들의 조문 때만 공개했던 김정일의 시신도 국내외 조문객들과 관광객들에게 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3 성격
자신의 카리스마를 대중 앞에 드러내기를 즐긴 김일성과는 달리, 김정일의 통치 스타일은 철저히 비밀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한다. 어릴 적부터 러시아에서 지낼 때 심약하고 내성적인 소년이었다는 증언이 있기도 한 걸 보면 천성적인 성격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김일성의 과보호를 받으면서 자란 탓에 내성적인 성격이면서도 신경질적이고 잔인하다는 평가도 있다는 거다.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중 한 명의 증언에 따르면 '잔인한 천재'. 후지모토 겐지라는 요리사의 요리를 좋아해 고용했는데, 막판에는 반 감금까지 했다는 걸 보면 아주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싶다.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책에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의 탈북한 지인들은 우월감이 강하고 즉흥적인 면이 강하다고 여러차례 말했고 이는 남북정상회담 중에서도 드러나기도 했다.
김정일 주변 사람들이 증언하는 김정일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매우 급하고 변덕이 심하다고 한다. 김정일의 처형이자 아들 정남의 가정교사였던 성혜랑은 “김정일은 기분이 좋을 때는 아주 잘해주지만, 화가 나면 창문이 들썩거릴 정도로 광란을 한다”고 말했으며,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는 “평소에는 다정다감하게 간부를 대하다가도 화가 나면 간부들을 세워 놓고 소리를 지른다”고 했다.
북한의 경호원 출신 탈북자 이영국은 “젊은 시절에 그는 성격이 급한 데다가 가정적 고심 때문에 술을 많이 마셨다” “그래서 모든 일을 즉흥적이고 과격하게 처리하는 버릇이 있다”고 증언했다. 황장엽은 “김일성은 자기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독재를 한다는 인상을 주지만 김정일은 독재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고 증언했다. 김정일은 어느 누구도 믿지 않기 성격을 가졌다고 하며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권력이 쎈 사람일수록 더욱 철저하게 감시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황장엽은 1979년에 다시 북한 당중앙 비서로 복귀할 때 이전에 가지고 있던 북한 최고 수뇌부에서 일한다는 기쁨과 보람은 없고 '독재의 고압선' 바로 옆에서 다칠세라 걱정하면서 잠시도 긴장성을 풀지 못하고 있는 불안한 생활이었다고 증언했다.
한편 김정일의 경호관이였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은 자신이 기분이 나쁠 때면 마음대로 사람을 죽였다며, 오랫동안 자신에게 충성해 온 간부들을 자신이 쓰는 엘리베이터나 재떨이를 썼다는 등의 이유로 노동수용소로 보내는 일도 자주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김정일이 차를 타고 오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60-70대의 간부들이 도망가서 풀숲에 숨고는 했다. 그들은 옷에 흙이 묻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김정일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고 말하며, "왜냐하면 간부들은 모두 김정일이 기분이 좋을 때라도 자신들을 함부러 대하거나 사형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고 증언했다. 이 경호원은 김정일의 경호원으로 10년을 일했는데 그는 경호원이 되기 전 혹독한 신체 훈련은 물론 철저한 사상 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정일을 신이라고 믿어야 했다고 한다. 그는 김정일에 대해 한 마디로 "두 얼굴을 지닌 사람"이라고 회상했는데, 김정일은 기분이 좋으면 금덩이라 해도 내어주지만, 기분이 나쁘면 아무 이유 없이 사형 선고를 내리는 사람이라고 한다.[43] [1]
또한 김정일은 사람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주민들에게 상호간에 감시를 하고 비판을 하게 만들었으며, 상호 비판에서는 김정일의 사상과 지시에 충실하였는가, 충실하지 못하였는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상호비판이 강화되고 당원들이 격렬하게 싸울수록 김정일의 권위는 높아졌다고 하는데, 그는 당원들의 생활을 잔잔한 상태에 두는 것을 반대하고 늘 풍파를 일으키고 들볶는 것을 좋아한다고 여러 전문가들이 평가한다.
북한의 TV는 김정일의 목소리를 공개하지 않으며 이에 따라 김일성이 생전에 줄곧 했던 육성 신년사도 1995년 새해부터 '신년공동사설'로 대체하여 김정일 사후인 2012년 새해까지 진행되었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도 남한의 국민들은 김정일과 남한 대통령 사이의 대화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지만 정작 북한 주민들은 단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북한 언론이 인민에게 공개한 김정일의 유일한 육성은 1992년 4월 25일 북한군 창건 60주년 기념식에서 외친 "영웅적 조선 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이 있으라!" 라는 한 마디뿐이다. 그런데 의외로 공장 같은 데 시찰은 잘 다니는 듯하다. 걔네들이 사진기가 있겠어 녹음기가 있겠어
그 외 최은희 신상옥 납치사건때 최은희가 목숨걸고 카세트 테이프에 몰래 녹음한 육성이 있다. 조갑제 기자가 최초로 정리해서 언론에 공개한것인데 이걸 들어봐도 말이 굉장히 빠르고 정신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김정일 육성 녹음
굉장히 말이 많은데 흥분해서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는 스타일로 보인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하 김대중)과 회담했을 때 첫날의 백화원 초대소에서 김대중이 한마디를 하면 자기는 열 마디, 스무 마디를 떠들어댔다. 예컨대 김정일이 "신문을 보니 아침을 적게 드시고 왔다고 하셨던데 어째서 적게 드셨나요?"라고 묻자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에 가면 잘 얻어먹을 줄 알고 조금 먹고 왔다."고 대답했다. 이에 김정일의 대답이 참으로 길기도 하다.
자랑을 앞세우지 않고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외국 수반도 환영하는데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도덕을 갖고 있습니다. 김 대통령의 방북 길을 환영 안 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예절을 지킵니다. 동방예의지국을 자랑하고파서 인민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김 대통령의 용감한 방북에 인민들이 용감하게 뛰쳐나왔습니다. 신문과 라디오에는 경호 때문에 선전하지 못했습니다. 남쪽에선 광고를 하면 잘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실리만 추구하면 됩니다. 왜 이북에선 TV와 방송에 많이 안 나오고 잠잠하느냐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와서 보면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방북을 지지하고 환영하는지 똑똑히 보여 드리겠습니다. 장관들도 김 대통령과 동참해 힘든, 두려운, 무서운 길을 오셨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도 도덕이 있고 우리는 같은 조선민족입니다. |
뭔 개소리야 근혜체 가 더 나아보이는 지경
그러니까 "평양에 오면 식사 잘 할 줄 알고 그랬습니다."란 대답 한 마디에 저렇게 길게 대답한건데 그나마도 좀 내용도 엉뚱하고 횡설수설한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도 많다. 실리만 추구한다지만 제 살 깎아먹는 짓만 하는 것도 그렇고 이북이 예의하곤 거리가 멀다는 것도 그렇고
초대소의 회담에서 발언의 90% 수준을 김정일이 독점하는가 하면, 두 나라의 정상이 만나서 하는 대화치곤 상당히 무례한 어감으로 하는 표현도 많다. 게다가 애초에 두 사람 나이차가 15살을 훌쩍 넘긴다는걸 감안하면..... 사실 이건 진작부터 점쳐지던 일인데 1994년 김일성 사망 특집 뉴스데스크는 김정일이 남의 대답은 신경쓰지 않고 혼자서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떠드는 버릇이 있다고 보도한 바가 있다.
그 이후의 회담 내용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게 제한적인데, 민족 21지에서 밝힌 비화에 따르면 김정일이 김대중에게도 발언기회를 어느 정도 더 주긴 하지만 심기에 거슬리는 발언이 나오면 짜증내며 일방적으로 회담을 중지시키기도 했다고. 대표적으로 남북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김정일이 계속 연방제 운운하자 김대중은 국가 연합 방식을 고수한다고 했고, 이에 김정일은 에라 때려쳐라!는 식으로 뒤엎었다가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을 들고 나오면서 약간 후퇴한 채로 재개했으며, 김대중이 이산가족 문제를 꺼내자 "이럴 거면 돌아가시라."라고 위협적인 망언까지 나왔다고.
비록 김대중 시대에 남북관계가 좋았다는 인식이 있지만, 세간의 인식처럼 그리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일례로 미국, 일본과 공조하라는 김대중의 권유에는 "미국, 일본과 연합해 우리(북한)을 압살하려 하는 거 아니냐?"라고 노골적으로 의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결국 회담 말미에는 김대중이 서울로 답방할 것을 권유하자 주저 없이 "국가원수인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가는 거지, 저는 못갑니다."라고 딱 잘라 거절해버렸다.
이에 김대중이 "칠순인 내가 노구를 이끌고 평양까지 왔는데 못 온다니, 그건 웃어른에 대한 도리가 아니죠."라고 말했는데 결국 말문이 막힌 김정일은 자신의 답방이 명시된 공동선언문에 서명하면서 "대통령께서는 전라도 사람이라 고집이 세신 모양입니다."라고 지역드립을 쳤고정일아 일베하니? , 이에 김대중은 "그렇게 따지면 김 위원장이야말로 전주 김씨니까 전라도 사람이잖소?"라고 맞받아쳤다고.(...) 뭐 결국엔 끝내 오지 않았다.
그외에 같이 방북한 대한민국의 장관들더런 "장관 나리"라는 표현을 쓰며 상당히 명령조로 "오늘 저녁까지 이 그림의 해가 뜨는 해인지 지는 해인지 맞춰봐라."라고 하기도 했고[44] 마약범죄 얘기를 하다가 "만일 (남한에서) 조선인 마약 사용자가 적발되면 내가 허락할테니 총살하세요!"라고 하는 등 자신이 윗사람인 양 굴었다. 그러다 실수를 깨달은 듯이 "내가 경거망동한 것이냐?"라고 되물으며 겸연쩍어 했다고.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는 자신보다 4살 아래인 노무현 대통령과 대면했는데, 이 때도 별의별 돌출 발언을 하면서 분위기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말을 길게 하지 않으며 주로 우회적인 화법을 쓰는 김대중과는 달리, 노무현은 김정일과 마찬가지로 매우 직설적이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대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던지라, 오히려 김정일이 회담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방북 이틀째였던 10월 3일에는 뜬금없이 하루만 더 머물러 달라는 요청까지 했을 정도. 다만 이는 노무현이 거부했고 김정일 본인도 나중에 연장 안해도 되겠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긴 했다. 그 외에도 NLL 대화록을 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나 노무현의 발언 중에는 김정일의 심기를 상당히 불편하게 할 만한 내용도 여럿 담겨 있었고...
한편 왕재산경음악단에서 발표한 김정일을 우상화하는 선전가요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가 있는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나 북한 주민과 접촉을 꺼리면서도 교묘한 정치 술책으로 자신에게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인물과 세력을 철저히 분쇄하고 절대적인 권력으로 북한을 지배하고 있다. 공갈, 협박, 폭력을 정치, 외교 기술로 변환한 거의 유일한 정치가가 아닐까?
참고로 혈액형은 A형. 혈액형과 성격은 무관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몸소 증명하고 있다. 2002년 방북해 평양 공연을 마친 대한민국의 가수 김연자가 김정일의 초대로 백화원초대소 만찬 자리에 갔는데, 이 자리에서 김정일에게 "혈액형이 뭔가요?" 라고 묻자 주변의 간부들이 매우 당황해하면서 그건 기밀 사항이라고 넘기려고 했으나, 의외로 김정일은 "그런 질문은 처음이다."면서 흔쾌히 A형이라고 알려줬다고. #
'미국이 자신을 살해하려 한다'는 망상을 갖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길 꺼린다는 소문도 있다. 중국, 러시아 등을 방문할 때는 전용 기차인 1호 열차를 주로 이용하는데 이것도 스탈린이나 김일성이 그러했던 것처럼 암살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얘기가 있었다. 혹은 미국 시사주간지 <포린폴리시>의 보도에 따르면 젊은 시절 헬리콥터 추락 사고를 겪어서 스탈린처럼 고소공포증 때문에 기차를 이용한다고.
룡천역 폭파사건 당시 자신을 암살하기 위한 음모로 규정하여 기폭장치로 의심된 핸드폰 사용을 몇 년간 막은 걸로도 유명하다.
강명도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이 아돌프 히틀러를 존경하여 <나의 투쟁>을 배고 잔다고 말했는데 진짜 베고 잤는지는 모르지만 히틀러에 대해 우호적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김정일의 후계자인 김정은이가 히틀러를 존경하여, 고위 간부들에게 히틀러의 자서전을 선물하였다고 하였다.
이처럼 김정일은 겉으로는 싫어한 척 했지만, 내적으론 정말 히틀러를 존경했을지도 모른다. 브라이언 마이어스의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에 따르면 북한은 극렬 스탈린주의 국가라기보다는 순혈주의·인종주의적 국가이고 소련보다는 일본 제국에 가까운 나라다. 한 장성급 예비 소회담에선 북한 장군이 인종주의적 견해를 피력한 바 있고 그 이외의 사례도 굉장히 많다.ㅡ
3.1 취미
영화광으로 이미 학창시절에 국립 영화제작소에서 김정일 전용 상영관을 마련해줄 정도였으며 남한에서 신상옥과 최은희를 납치하여 영화를 만들게 할 정도였다. 윤정희도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함께 납치하려다가 실패했다. 특히 특촬물 중에서도 괴수물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신상옥 감독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안겨줘서[45] 불가사리를 찍게 한 것을 보면 신빙성이 높은 듯. 하지만 신 감독의 탈북으로 현재 불가사리에서는 신 감독의 이름이 지워진 상태다.
김정일은 수집된 세계 각국의 영화를 보존하는 영화총국 산하의 '중앙영화필름관리소'을 평양에 만들었다. 북한 영화계에서 종사했던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중앙영화필림관리소'는 평양 시내에 영화필름을 보관하는 '영화문헌고'를 두고 있는데 이곳에는 15,000편이 넘는 세계각국의 영화가 보관돼 있다. 이곳의 구성인원은 성우, 번역사, 자막사, 영사기사, 녹음기사 등 약 250여명이며 규모는 길이가 약 100m인 3층 건물이고 유사시를 대비해서 지하보관소를 따로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에서 보관 중인 15,000편의 영화 가운데 한국 영화는 약 300편 정도인데, 재밌는 점은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50~60년대의 영화 빨간 마후라, 꿈, 내시 등의 네거티브 필름도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이 한국 영화들은 대부분 과거 홍콩과 인도네시아 등에 수출된 것을 다시 구입해 들여 간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세계 각국의 영화필름을 1974년에 가입한 국제필름아카이브연맹(FIAF)을 통해 상호교환 형식으로 수집하는 방법과 함께 몰래 복사해서 불법으로 들여가는 방법으로 수집하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에 남측의 방문단이 4편의 영화를 선물하자 즉각 반색하며 이것저것 물어본 다음에 "1주일 내로 소감을 보내주겠다."라고 하기도 했다. 이에 시네21에서 김정일의 소감을 실어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남측의 반발이 심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남한 연예인들의 속사정과 출연영화를 줄줄이 다 꿰고 있어서 납치된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이 놀랄 정도였다. 그는 멀리서는 50년대부터 가까이는 이영애[46]로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의 남한 배우들을 좋아했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고 침이 마르게 극찬한 일화도 있다.
영화 자체뿐만 아니라 영화 이론도 공부했는지, 고위 탈북자에 의하면 "김정일의 저작의 절대 다수는 대필이지만, 영화와 관련된 것들만큼은 김정일이 직접 저작한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피겨 스케이팅을 좋아한다는 소문도 있는데, 백두산배 국제피겨스케이팅 대회를 생일에 맞춰 매년 2월[47]에 열고 있으며 자국 선수들 외에 러시아와 프랑스, 체코, 헝가리, 영국, 스위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의 선수들도 대회에 참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0년 대회에 참가한 2002년 남자싱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알렉세이 야구딘에 의하면 러시아보다 더 좋은 시설을 갖춘 빙상장이 있다고 한다.정작 남한은 모 병맛연맹의 연습시설부족 및 시궁창스러운 태도로 김연아와 그 후배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3.2 사치
512px
지금 이놈이 마시고 있는 건 인민들의 고혈이다.
金樽美酒千人血(금준미주천인혈: 금동이 속의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玉搬佳酵萬成膏(옥반가효만성고: 옥쟁반 위의 아름다운 안주는 만 사람의 기름이라) 燭淚落時民淚落(촉루낙시민루낙: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도 떨어지니)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노래소리가 높은 곳에 원망하는 소리도 높도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변학도의 폭정을 비판하며 지은 시. 이놈의 폭정을 비판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다. |
고난의 행군 시절 때 북한의 언론들이 "김정일은 인민들에게 항일혁명 시절을 상기하며 쪽잠을 자면서 언두부에 줴기밥(주먹밥)을 먹으면서 현지 지도를 하고 있다!"라고 선전했다.
북한군 짬밥을 리뷰한 탈북자 이철호 중위가 신랄하게 김정일의 주먹밥 에피소드를 신랄하게 까댄다. 현대판 변학도라고 하는데 변학도가 억울하다고 할 지경이다.
김정일은 1970년대부터 측근들을 모아놓고 연회를 즐겼는데 이게 김정일이 완전히 취해서 곯아떨어질 때까지 이어졌다. 길게는 4일 이상 지속되기도 했다. 이 연회가 어찌나 난잡하고 사치스러웠는지, 보다 못한 1979년 이명재 노동당 부부장의 부인은 김일성과 김경희에게 이러한 난잡한 파티를 막아달라고 왼손으로 탄원서를 써서 바쳤다.
문제는, 김일성에게 가는 모든 문서는 김정일을 거치고 있었다는 것. 김정일은 격노하여 범인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보위부는 파티 참석자들과 그 가족들을 혹독하게 추궁했고 결국 2달 만에 이명재 부부장 부부는 체포되어 총살형이 선고되었다. 이명재 부부장은 "저런 건 마누라가 아니라 원쑤다! 내가 직접 처단하겠다!"라고 권총을 빼들어서 아내를 쏘아죽였고 김정일에게 권총을 바치면서 "죽여주십시오!"라고 외쳤다. 그러자 김정일은 "너는 한번만 용서한다."라고 그를 살려주고 총애했으며 김정일이 하사한 젊은 간호사와 재혼했다고 한다. 뭐 이런 막장스러운 일이 다 있어?
3.2.1 미식가
이 영상에서 보면 고난의 행군 당시에도 선전적으로만 고생을 한다고 하고 실상적으로는 상상도 못할 산해진미를 맛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정일의 미식 관련 문서는 이 다큐멘터리와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을 많이 참고해서 작성했다.
상당한 미식가인데 당연히 어린 시절부터 좋은 것만 쳐먹어와서 그런지 입이 고급이다. 선천적인 미각도 굉장히 예민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줄담배 피운 인간인데.. 대단하다 20년 넘게 그의 전속 요리사로 일한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의하면, 연회에서 만든 초밥에 실수로 설탕을 평소보다 10g 정도 적게 사용했는데 김정일만이 이것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후지모토는 이 외에도 김정일이 최상품의 과일, 생선, 육류 등의 식재료 구입을 위해 전속 요리사들을 세계 각지에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돼지고기, 동남아시아 각국에서는 열대과일, 이란과 러시아,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캐비아, 일본에서는 생선과 간장 등의 조미료, 고급 떡을 구입했다고 한다. 한번은 1,200kg나 되는 인도산 다랑어를 구입한 뒤 신선도 유지를 위해 항공사에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평양으로 급송해 해체하기도 했다고 한다.
메기요리를 먹고 싶다면서 후지모토 겐지에게 일본에 단 하나 있다는 메기요리 전문점에 찾아가 요리법을 알아오라고 시킨 적도 있었다. 또 한번은 후지모토에게 일본 백화점에 가서 개당 1,500엔짜리[48] 쑥찹쌀떡을 사오도록 해서 먹어보고는, 맛있다고 감탄하면서 "왜 우리나라 요리사들은 이런 걸 못 만들까?"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반일을 외치는 놈이 정작 일본 현지에서 떡 공수해오게 해놓고는 한다는 소리가 그거냐? 친일파?[49] 후지모토 겐지도 요리사 시절의 경험을 살려서 갖가지 음식들을 김정일에게 권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성게알이다. 김정일은 처음에는 영 뜨악한 표정으로 성게알을 먹더니 이윽고 엄지를 치켜올리며 "후지모토, 맛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김정일은 또 초밥을 매우 즐겨서 중풍으로 앓아누워도 초밥을 못 먹는다고 불안해했다.
아래는 김정일의 식단 중 일부다.
소천엽랭채, 꽃간나우지무우초침, 메추리알랭묵, 꿩편구이, 염소고기샤슬리크, 자라함찜, 게장즙서란화볶음, 백미밥[50], 도비꼬새우 뎀뿌라, 이나리, 나메꼬버섯[51]된장국, 포즙버섯구이, 통배추건밥조개살찜, 무우국, 하루말린고등어구이, 들버섯생채, 죽생상어날개탕, 쏘가리룡청자찜, 참깨닭구이, 라클레트치즈구이, 야자상어날개탕, 뱀장어 캐비어, 코야, 비둘기 간장찜 |
다소 빠진 것도 있지만, 추가된 것도 있으며, 이미지로 확인해보고 싶으신 분은 이 곳으로 하루 식사 가격이 북한 중산층 월급 수준
여기 나와 있는 요리들 가운데 일반인들이 한 번이라도 먹어봤을 법한 요리는 아마 간장게장, 브로콜리, 쌀밥, 새우튀김, 유부초밥, 버섯된장국, 버섯구이, 무국, 고등어구이, 버섯생채, 참깨닭구이 등을 제외하면 먹어 보기는커녕 듣도 보도 못한 진수성찬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요리는 요리법만 알고 재료만 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해 먹을 수는 있겠지만 김정일이 쳐먹는 밥상에 올라가는 식재료는 상식을 초월한 제조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특급품이므로 그게 무엇이든 간에 일반인 들이 김정일 수준의 식단을 먹어봤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예를 들면 김정일이 먹은 과일은 당도를 높이겠다고 설탕을 비료로 주거나, 개고기를 비료로 줘서 수확한 것이다. 설탕이나 개고기로 키운 과일을 드셔보신 분? 만약 당신이 이런식으로 먹었다면 당신의 부모는 적어도 재계서열 15위 안에 드는 재벌일 것이다. 부모님이 과일농사를 하신다면 어떨까? 심지어, 물도 전용 식수구에서 따로 받아낸 물로 쳐마시는 것이 김정일이다. 제 딴에는 암살당하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이겠지만...
이렇게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등 세계 각국의 고급 요리를 즐겼지만 주로 깊고 진한 맛을 좋아해서 중국 요리를 가장 많이 먹었다고 한다. 특히 샥스핀을 좋아해서 사흘 내내 샥스핀 요리만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굉장한 애주가이며 위스키는 조니워커 스윙을, 코냑은 헤네시 XO를 맥주는 발티카 No.5 졸로토예(Золотое)를 좋아한다고 한다. 특히 코냑을 광적으로 좋아해 한때 헤네시 사의 단일 고객 중 최대 구매자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자신의 관저에 대규모의 개인 술 창고를 마련해놓고 전 세계 각국의 명주 수만 병을 모아놓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자신의 술 창고에 후지모토 겐지를 데려가 "이중에 없는 일본 술이 있나 살펴보라"고 시켰는데, '산토리 임페리얼'이 없다고 하자 다음 일본 출장 때 꼭 사오라고 시키기도 했다. 다만 좀 의아한 게 주당들은 알겠지만 산토리 임페리얼은 OEM 방식으로 일본에서 생산되는 스카치 위스키라서 흔한 양주였는데 왜 이게 없었는지는 의아한 점이 있다. 오히려 너무 평범한 술이라 들여놓지 않았는 지도.
그리고 여기에도 김정일의 잔인한 성격은 어딜 가지 않아서 전술한 식재료를 운반하다 실수하면 가차없이 숙청했다. 김정일의 혀가 무지하게 까다로웠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식재료를 공급하는 사람들은 레알 헬게이트였을 것이다. 실제로 김정일이 먹는 생선초밥을 만들 생선은 전속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가 직접 외국에 가서 고르고 급속 냉동처리해서 북한으로 보내는 과정을 거쳤는데, 하루는 후지모토가 없어서 북한에서 난 생선으로 초밥을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김정일은 단번에 맛없다고 화내며 이딴 건 두 번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했다(...) 주체사상 강요하는 놈이 국산 생선을 안먹는다.[52] 그리고 이런 인지부조화는 아들놈에게도 똑같이 전수되었다. 에멘탈 치즈 참조. 거기다가 이 놈은 한술 더 떠서 자라 생식이 잘 안된다고 자라공장 지배인을 총살시켰다(...)
3.2.2 결과
국민들 굶어죽지 않는 선에서 자기 돈으로 사치하면 사우디 등 중동 왕족 정도의 악평을 들고 끝나겠지만, 김정일은 국가 경제의 기반을 붕괴시키면서 사치를 했다.
1970년대 당 권력을 장악한 이후부터, 김정일은 비밀 혁명 운동이 필요하다는 명분 하에 금광이라든가 북한의 특산품인 송이버섯과 같이 가장 수익성이 좋은 공장, 기업소를 엄선해 국가 경제에서 완전히 분리했다. 이들 공장과 기업소들은 내각 기관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 독자적인 경제 체제가 되었고 당 경제라는 미명 하에 개인적인 사치에 이용되었다. 이후 선군 정치라는 명목으로 군 경제도 인민 생활 경제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버렸다.
이것까지 합하면 GDP의 70% 정도인데 얼마 되지 않는 GDP에서 김정일의 개인 비자금과 국방비를 제외한 30% 정도만이 인민들을 위한 국고. 그것도 특권층들을 위해서만 쓰인 것이다. 거기에 마약 밀매, 위조지폐 제조 같은 범죄 행위로 외화를 조달했다고 한다. 불과 100~120억 달러 안팎의 GDP로 110만 대군을 유지하고 경제 규모가 100배에 가까운 한국을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
그리고 이렇게 모은 돈을 북조선 '왕조' 관련된 일과 군비 증강에는 말 그대로 퍼다 썼다.[53] 매년 꼬냑 구매에 50만 달러를 쓰는가 하면 연회 중에 즉석으로 1만 달러 다발 4~5개를 쌓아놓고 술 마시기 대회를 열어 상금으로 주기도 했으며, 승마를 위해 말 30여필[54]을 수입하고, 수백억원 상당의 이탈리아제 호화 요트 2척을 구입하려다가 발각됐다던가 김정은 집을 1,734억 원을 들어 호화 주택으로 개조했다던가 평양 불꽃놀이에서 60억원 탕진, 김정일의 별장과 여가시설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해외 비자금이 40억 달러로 이는 태국산 쌀 1,000만톤, 즉 매년 100만톤이 더 필요하다고 볼 때 10년, 강냉이로는 2~30년 정도를 버틸 정도.[55] 금수산기념궁전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렇게 쓰고도 모자라서 운산 금광이라고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금광을 중국에게 넘기느니 마느니 하고 있다. 이러한 작태는 현 김정은 정권 하에서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열거했듯 자신은 온갖 산해진미를 즐기면서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중국과 베트남처럼 개혁, 개방 정책이나 국방비 축소를 전혀 안 하고 인민들은 굶게 만든 것을 본다면 한국 최악의 폭군으로 꼽히는 연산군이나 충혜왕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아니 이들보다 더 악독한 게, 연산군이나 충혜왕은 그나마 능력이라도 없어서 빨리 무너진 반면, 김정일은 권력 유지만큼은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유능하기 때문.
그런데 그나마도 100% 김정일의 능력이라고 보기도 힘들고 그저 김일성이 구축해놓은 정치장교 제도를 통해 북한 전체를 자기 손바닥 안에 놓고 감시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일 뿐이다. 정치장교 만으로도 모자라 보위부원까지 만들고 2중, 3중으로 감시 체계를 구축해 놓은 덕이다. 물론 1970년대 이래 실무를 맡은 만큼 김정일의 능력으로 볼 소지도 있다.
물론 국민들 다 굶어죽어 가는데도 정권 유지하는 게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연합군의 폭격을 맞고 소련의 기갑 웨이브가 몰려오는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절멸 수용소를 돌려 유대인들을 학살한 나치 독일의 관료제와 체계적인 일처리 솜씨를 뛰어나다고 칭찬해야 할까?
무엇보다 충공깽인 사실은, 이렇게 세간에 알려진 김정일의 사치가 딱히 과장이 없는 진실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사실 북한의 정보는 워낙에 카더라 통신이 많아 걸러 들어야 할 부분이 많은데[56] 김정일의 사치에 대한 증언은 출처가 김정일 처조카 리한영[57], 김정일 전속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 김정일 전속 요리사 에르만노 푸를라니스, 김정일을 직접 수행한 러시아 외교관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 최은희, 신상옥 등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김정일을 직접 마주하며 그의 사치를 보고 들은 사람들이며, 당연히 신뢰도는 어느 탈북자의 카더라 통신에 비해 넘사벽급으로 높다.
만약 김정일이 자신의 사치를 중단하고 식량 구입에 사용하였으면 고난의 행군 시 사망자를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 탈북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4 주변 관계
4.1 가족 관계
파일:/image/028/2011/09/07/00403954301 20110908.jpg
1966년의 김민교같은김정일, 김일성, 김경희.
- 친형제
- 친여동생
- 이복여동생
- 김경진
- 김백연 - 1987년생이다!
- 이복남동생
4.2 여자관계와 자녀들
홍일천, 성혜림, 김영숙, 고용희, 김옥 이렇게 3~5명과 결혼했다고 추정되며 그 사이에서 3남 4녀를 보았다.
사실 김정일의 정식적인 아내가 누구인지는 정보가 없다. 아래의 사람들도 대부분이 동거관계였던 여자들로 탈북자의 증언이나 북한 공식석상에서 인정받는, 정확히는 자녀들이 김정일의 자녀로 인정받는 어머니들만 서술하고 있고 실제로 김정일이 누구와 정식결혼을 올렸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다.
때문에 위의 3남 4녀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사람들로 김정일은 여자관계가 상당히 복잡하고 난잡한 인간이라 김정일이 누구를 만났는지, 그들 사이에서 누가 태어났는지 알 방법이 없다. 당장 국가 공식기관으로 김정일과 고위간부를 위한 기쁨조에 수십명의 여자들이 배치(?)[59]되어 있어서 몇명이 김정일과 관계를 맺어서 자녀를 보았는지 파악이 불가능하다.
'김정일 로열패밀리' 를 쓴 리한영의 증언으로는, 이외에도 정도나 깊이만 다를 뿐 여기저기에서 여러 여자들과 무슨 댁 무슨 댁 하면서 살림을 차렸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다고 한다. 결국 비공식적 관계와 자녀들이 상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4.2.1 첫번째 부인 성혜림
파일:Attachment/김정일/성혜림.jpg
첫번째 부인 성혜림.
김정일은 남산고급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면서 김일성과 돈독한 사이였고 또 자신의 학창 시절 친구의 아버지이기도 한 원로 작가 리기영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이때 친구의 형인 리평과 결혼한 형수였고 자신보다 5살 연상이었던 배우 성혜림을 처음 만났다.
김정일은 이후 당 선전선동부에서 영화계 현지 지도를 하면서 성혜림과 다시 만났고, 점차 관계가 깊어지면서 성혜림은 아이까지 있는 상태로 전 남편과 이혼했다. 리기영은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고 작가동맹위원장까지 지냈지만 며느리를 돈독한 사이였던 수령님의 아들에게 빼앗긴 충격 때문에 이후 작품 활동을 일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혜림은 리평과 이혼한 뒤 김정일이 28세 되던 해인 1969년에 배우 활동을 그만 두고 김정일이 세운 200평 규모의 15호 관저에서 비밀 동거를 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성혜림은 김정일의 첫째 아들인 김정남을 낳게 된다. 김정일은 이 첫 아들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1990년대에 탈북한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60]이 찍은 개인 비디오에는, 김정일이 직접 김정남의 젖병을 든 채로 오줌을 받거나 김정남을 업은 채 자장가를 불러주는 모습도 담겨 있다고 한다. 리한영의 증언으로는 김정남의 생일 선물을 사주기 위해 선물 구매단을 외국에 파견하기도 했는데, 선물의 액수가 10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삼촌이자 정적인 김영주와 후계자 경쟁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절대로 흠 잡힐 일을 만들지 말아야할 김정일에게, 유명 원로 작가 집안 출신의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고 사생아까지 낳은 상황은 절대로 알려지지 말아야 할 비밀이었다. 이 때문에 동거녀 성혜림과 김정남의 존재는 여동생과 최측근 부하들 이외에는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다. 그리고 비밀 유지를 위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입막음을 구실로 전부 죄 없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기도 했다. 이런 황당한 일들은 단지 성혜림의 친구로 김정일과의 동거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전 가족이 요덕 수용소로 끌려간 뒤 탈북한 김영순이 쓴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라는 책에 나와 있다.
공식적인 결혼 후에도 김정일은 첫 번째 동거녀인 성혜림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했지만 성혜림은 김정일의 결혼으로 빚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 신경쇠약, 불안 발작을 일으켰다. 결국 성혜림의 어머니의 권유로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로 떠난 뒤 계속 그 곳에 머물다가 2002년에 사망했다. 다만 그 전에 탈북한 이한영[61]이 대한민국으로 망명시키려 시도했지만 이한영 본인이 피살되면서 무산됐다.
- 자녀
4.2.2 2번째 부인 김영숙
1947년생. 1973년에 김일성이 직접 며느리감으로 선택한 여자로 김일성 집무실의 전화교환수였다. 김영숙의 아버지는 청진공산대학 부학장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김정일은 억지로[62] 결혼하게 된다.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는지 성혜랑의 수기에 따르면 여동생 김경희가 결혼식에 데려가려고 사택에 찾아왔을 때도 자는 척하며 가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영숙이 김정일의 유일한 정실 부인인 셈인데, 김영숙에 관한 정보는 고향과 아버지 직업 정도다.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시. 김정일은 김영숙과의 사이에서 두 딸 김설송과 김춘송을 낳게 된다.
- 자녀
- 김설송
- 김춘송
4.2.3 3번째 부인 고용희
1952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서 1962년에 재일교포 북송 사업으로 북한에 귀화하여 1970년대 초반부터 만수대예술단에서 무용수로 활동하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김정일과 사귀기 시작 1976년에 고용희와 동거하기 시작했다 고용희는 김정일의 두 아들인 김정철과 김정은, 김여정을 낳았다. 이후 유방암으로 2004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 오랫동안 '고영희'로 알려져 있었으나 '고용희'가 맞는 것으로 밝혀졌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4.2.4 4번째 부인 김옥
파일:Attachment/김정일/지워진김옥.jpg
오른쪽 아래 사진을 제외한 나머지 사진은 김옥이 아니라 김선옥이라는 전혀 다른 여성이라는 의견이 있다. (링크수정)
92년 <우리의 지도자>라는 화보집에 뒷편에 보이는 김옥이 어쩐 이유에서인지 몇년 뒤 사진에서는 지워져 있다.
고용희 이후 5번째로 김정일의 부인이 된 여성은 김옥이었다. 김옥은 1964년생으로 평양음악무용대학(현 평양음악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왕재산경음악단에서 활동하다 김정일의 눈에 들어 1980년대 초반부터 서기실(비서실) 과장으로 근무하며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보좌해왔다.
고용희와 마찬가지로 김정일의 비밀 파티 등에도 참석했고 수행 비서에서 간호사 역할까지 맡아 최측근으로 보좌하다가 1990년대 말부터는 고용희가 낳은 아이들을 대신 맡아주는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고용희의 두 아들 김정은과 김정철은 김옥을 존칭없이 옥이라고 불렀지만, 김정일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위간부들은 그를 동지로 존칭했다.
평소에도 김옥과 친자매처럼 사이가 좋았던 고용희는 이 시기 중병으로 몸이 온전하지 않았던 상태였고 자신이 직접 김옥에게 '내 뒤를 이어 김정일과 자식들을 보필해달라' 고 부탁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정일의 전속요리사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는 김정일이 먼저 질문하면 대답할 뿐 언제나 유령처럼 조용히 김정일 곁에서 있었다고 하며, 야심이나 권력욕 같은 것은 전혀 없는 소박하고 헌신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껄끄러울 수 있는 고용희와도 친자매 같은 좋은 사이를 유지하며 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김옥이 김정일 사이에 자식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김정은이 집권 직후 김옥을 숙청했다는 설도 나도는 등, 엇갈리는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하지만 숙청설의 경우 일단 표면상으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김정일 사후 제정된 김정일 훈장의 수상자 중에 김옥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적어도 막후의 영향력은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김정은 집권 3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것을 봐서 그다지 대접받는 처지는 아닌듯하다.
4.2.5 홍일천
김정일 주변인의 증언 외에도 주로 중국의 소식통을 통해서 김영숙 이전에 홍일천이라는 여성이 김일성이 직접 간택한 첫번째 정실 부인이었다는 설도 나오고 있다. 이 설에 따르면 홍일천은 1966년에 김정일과 결혼해 딸 김혜경을 낳고 3년 뒤 이혼했다고 하지만 앞서 서술된 네 명의 여성들과 달리 명확한 수기나 증언, 물증이 없어서 진위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이다.
그리고 전직 정무원 총리였던 강성산의 사위였던 탈북자 강명도는 김정일이 김영숙과 결혼하기 이전에 김일성이 직접 간택해 준 어떤 여성과 약혼했지만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채 헤어졌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이 여성이 바로 홍일천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홍일천은 혁명 유자녀 출신으로 제7~8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낸 바 있으며 이후 정무원 보통교육부 부부장 등을 거쳐 현재 김형직사범대학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김정일과 관계한 많은 여성들이 주로 김정일의 사적인 영역에서 머물렀던 것과 달리 공적인 활동이 활발하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5 악당
일본에서 유행했던 짤방. 일명 로켓몬스터 핵지우와 피카동.(...)
(아주 나쁜 의미로) 진정한 한국인 월드스타.
북한 내에서부터 정치범수용소 같이 그의 통치 하에 벌어지는 각종 개막장 정책들로 인하여 북한 주민 2천만명의 삶을 완전히 개판으로 몰고 간 것 때문에 원래도 아는 사람들에겐 유명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심심하면 질낮은 국제적 깽판을 쳐댄 통에 점차 해외 대중들에게도 그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몇 가지만 추려서 나열해봐도 민간인 납북, 선동, 조작, 지원금 떼먹기, 억류, 협박, 사치, 무력시위 등등 일일히 나열하기엔 공간이 부족할 지경. 특히 2009년부터 핵폭탄과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여 세계 평화도 위협하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능력은 아직 미약하다는 평가가 있고 그냥 기득권 지키려고 그런 뻘짓을 하는 것이라는 평가도 있어서 이걸로 진짜 사고 칠지는 미지수지만, 이 쯤 되면 그야말로 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악당 최종보스들이 흔히 밟는 왕도를 제대로 밟아가면서 독재자 계의 클리셰로 등극했다.
특히나 외모 관리(?)는 어느 정도 했던 다른 독재자들과는 달리, 땅딸막한 키에 뽀글거리는 파마, X색의 볼품없는 인민복에 통통뚱뚱한 몸매가 묘한 시너지를 일으켜서 강렬한 개성을 자랑하는고로 나름대로 특이한 캐릭터성도 제대로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무튼 이로서 그는 세계적인 뉴스에도 자주 등장하였으며 덕분에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되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나마 오사마 빈 라덴, 무아마르 알 카다피, 사담 후세인 정도가 이에 비견될 만한 악당이었으나, 빈 라덴과 후세인은 미국에게 '사냥감'으로 낙인 찍혀서 죽었고, 카다피도 결국 자국민에게 비참한 꼴로 사살당하고 시체까지 부관참시를 당하는 등 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단 김정일은 제대로 천수를 누리다 갔기에...
그 때문인지 일본 애니메이션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한국인이며 일례로 비밀결사 매의발톱단 THE MOVIE- 총통은 두번 죽는다에도 등장했다. 북미권에서도 김정일을 풍자한 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올 정도. 심지어 예전엔 김정일 코스프레까지 하는 일본인이 있었을 정도였다.
특히 미국 영화 트레이 파커와 맷 스톤[63]의 팀 아메리카: 월드 폴리스에서는 대놓고 악당으로 출연하여 엄청나게 까이다가 마지막에 그가 바퀴벌레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 악당 이미지는 이후 아들 김정은이 이어받았으며, 아버지는 이루지 못했던 꿈의 헐리우드 영화 출연과 폭사(…)까지 성공했다. 김정은 역시 말문을 막히게 만드는 헤어스타일과 푸짐한 거구라는, 아버지에 비교해 꿀리지 않는 독특한 캐릭터성을 자랑하며, 고모부를 공개망신 후 고문하고 처형하는 잔혹한 모습 등으로 인해 국제적인 관심도 끌고, 특히 비슷한 체형을 지닌 대한민국의 싸이와 라이벌 구도(?)를 띌 정도로 세계에 (나쁜 의미로의) 유명인으로 등극했다. 심지어 그 악명으로 인해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순위에서도 나름대로 선방할 정도로...[64]
5.1 친동생 살해설
1945년 해방 후 김일성의 집은 평양부 상수구리[65]에 있었다. 1946~8년 초여름 김일성의 아들인 유라(김정일)와 슈라(김만일)가 여기에 있는 연못에서 함께 놀았다. 장난꾸러기였던 유라는 슈라에게 물을 억지로 먹이거나 다리를 끌어당겨 물 속에 빠뜨리곤 했다.
그러는 동안 둘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연못 가장자리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유라는 깊은 곳으로 점점 빠지는 것이 두려워서 4m깊이의 연못에서 나오려는 동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동생이 얕은 곳으로 가려고 하면 거꾸로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어푸, 어푸’ 하면서 동생은 물을 마시고 있었으나 유라는 그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곳에 함정이 있다’는 말처럼 동생은 익사해버렸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일성은 ‘연못의 물을 전부 빼버리고 흙을 채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오늘날 그 곳에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잔디만 자라고 있다. #
5.2 김일성 간접 살해설
제1차 남북 정상 회담을 며칠 앞두고 사망한 김일성.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사인은 심근경색에 의한 쇼크사였다. 하지만 김정일이 악천후 속에서 굳이 헬기로 김일성을 호송하려 했던 일’이나 ‘특각에서 의료진을 모두 철수 시킨 일’, ‘가까운 병원이 아닌 먼 거리에 있는 평양까지 옮겨 치료를 하려고 했던 일’, 등 김일성 사망 당시 납득할 수 없는 김정일의 행동들을 했다. 그리그 그 후 김일성이 사망한 장소인 특각을 철거한 사실이 밝혀 지기도 했다. #
6 평가 및 이모저모
파일:/mypi/gup/182/4942 1.jpg
스티브 잡스와 같은 해에 죽어서 나온 짤. 잡스의 의미는 "헝그리 정신을 가지고 우직하게 밀어붙여라" 정도의 의미였지만, 김정일에게 붙여놓으면 그냥 "평생 힘없고 멍청한채로 복종하고 있으라"는 의미처럼 느껴진다.
인민을 굶어죽게 하면서 핵을 만드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 - 황장엽
맹목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여 인민들의 삶을 도탄에 파뜨렸고 주변국과의 외교에서 큰 실점을 얻었다. 김일성, 김정은과 마찬가지로 암군이자 폭군인 지도자였다. 허나 종북들 사이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은보다 더 높게 평가받는걸로 보인다.
특이하게도 김정일에 대한 동정론적 시각이 꽤나 존재한다. 실제로도 김정일이 죽었을 때 이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김정은은 말할것도 없고, 김일성조차 동정적 시선을 못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의 영문이름 표기는 Kim Jong-il. i가 대문자 'I' 로 쓰일 때는 뒤의 소문자 'ㅣ'과 합쳐저 로마 숫자 II와 똑같아지므로 '김정 2세 / Kim Jong II(2)' 로 보인다. [66] 실제로 일부 해외 사이트에서 이 사람을 "김정" 이라 부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 보면 된다. 비슷한 논리로 마지막 글자 '일'이 il, 즉 '아프다'는 뜻의 ill과 l 한글자 차이만 나는 관계로 김정일 투병 소식이 퍼지면 '이름이 김정일(ill)만 아니었어도…' 하는 조롱이 넷상에 올라오곤 한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를 띄워주려는 북한 정권의 무한한 상상력은 끝이 없겠지만 2006년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났던 산불이 김정일이 축시법[67]이라는 기술로 낚은 군용기가 냈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 쪽이 취향인 듯하다. 두 대통령의 방북 당시 자료의 표정을 비교해보면… 사실 위의 성격 항목을 참조해보면 알 수 있듯, 또한 일생토록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해온 독재자임에서 충분히 추정할 수 있듯, 거칠고 직설적인 노 전 대통령보다는 온화하고 우회적 표현을 즐겨 사용했던 김 전 대통령이 보다 대하기 편했을 것이다.
김정일에 대한 일생을 자세히 다룬 다큐는 국내에서도 여럿 제작되었지만 가장 최근에(2011년 12월 김정일 사후) 제작된 다큐로는 <KBS 대기획 김정일 3부작>이 있다. 상세한 일생을 알고싶다면 참고하자.
패션관련기사에서 언제나 세계 제일의 워스트 드레서로 선정된다. 하지만 놀랍게도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도 되었는데 그 까닭은 '옷에 자신의 사상을 잘 투영했다'는 게 그 이유. 똥같은 사상에 똥색 인민복
북한의 문자규격에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이름에 사용되는 글자가 따로 특수문자로 입력되어 있다.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북한 '콤퓨터'에서 사용되는 북한 전용 폰트에서 그의 이름을 입력하면 반드시 김정일로 자동 강조되고, 특수문자화 된다.[68] 붉은별 같은 컴퓨터 운영체제는 물론 삼지연이나 아리랑 같은 조선식 운영체제 탑재 기기에서도 같은 기능이 있다. 그 외에 각종 서적이나 신문 등지에서도 반드시 그와 김일성의 이름은 강조체로 나온다. 추가로, 이 사람의 이름을 입력하면 그 이름이 반드시 줄의 맨 앞으로 오도록 자동정렬된다. #컴퓨터도 세뇌시키는 돼지의 위엄
파일:Attachment/김정일/kimpig.jpg
아이구 우리 애기들 잘 지내시였지요?
김정일을 매우 닮은 사람이 있는데, 김영식이라는 한국사람이다. 원래 도장 가게를 하던 분인데 김정일을 닮아서인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나오게 되었고, 이 인연으로 서브컬처에서 김정일 역으로 많이 나왔다고. VJ 특공대 2012년 9월 7일 방영판에 나온 바 있다.
김정일의 요리사에 따르면 구 일본군 군가/전시가요였던 라바울 속요를 즐겨 불렀다고도 한다.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목했을 때 이에 불만을 품은 김정남이 김정은을 죽이고 김정일을 유폐하고, 김정일은 남한으로 망명해 제2의 견훤이 되는 것 아니냐는 반 농담식의 예측도 있었다. 김일성의 충신으로 주체사상 정립에 크게 기여한 황장엽이 훈장을 받고 국립묘지에까지 묻히자 김정일도 귀순하면 크게 우대해주는 거 아니냐는 얘기에 기반한, 실현가능성이 없진 않으나 극히 적은 농담에 가깝다.
북한식 햄버거인 고기겹빵을 발명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나라살림이 어려워도 새 세대는 튼튼하게 키우고 싶다"면서 “돈이 얼마든지 들어도 좋다”며 고기겹빵 공장을 건설시켰다는 주옥같은 명언은 덤. 이 일화는 트로피코 5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일본의 식물학자가 베고니아의 일종인 김정일화라는 꽃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69] 어이없어했다고.
남조선에 대한 열폭이 심했다고 한다. 류경호텔도 63빌딩을 보고 빡친 김정일이 남조선이 63층을 쌓으면 자기네들은 126층짜리를 쌓을 수 있다면서 시작한 것이고,[70] 남북 정상회담 때 북한 대표단이 남한제 자동차를 타고 회담지에 향했다는 말에 빡쳐서 부랴부랴 전국의 공장에 자동차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하지만 이는 5대만이 생산되었으며, 그 5대도 엉성한지 계속 문제가 생겨서 견인차들이 앞뒤를 둘러싸고 있었다.
최진실 지옥의 소리로 알려진 모 교회의 고인드립 시리즈에서도 고인드립 대상이 되기도 했다. 뭐 당해도 싼 작자이긴 하지만. 참고로 그 애비도 이 교회에 의해 함께 고인드립당했다.
7 서브컬처에서의 김정일
파일:LasMhjc.jpg
작품은 모에모에 북조선 독본.
스프라이트(음료)의 패러디 광고.
네덜란드의 보험회사 델타 로이드의 광고에 나오는 김정일. 2001년 광고다. 하지만 김일성, 장성택을 더 닮았다. 참고로 주인공은 얼핏 보면 김정남과 닮았다. 한글이랍시고 나오는 문자는 기하학적 문양(…)이며, [71]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차라리 중국어와 비슷하게 들린다. 다만 퍼레이드에서 울려퍼지는 남녀 목소리는 북한말의 백마스킹. 녹음과 백마스킹이 가능한 위키러는 확인해 보자.
- 도시정벌 : 정치적인 문제라 그런지 이름을 약간 바꿨다. 상당한 개념인. 스스로의 권력을 내려놓고 대한민국에 흡수 통일시키려고 한다. 그때문에 반대파에게 습격당해 혼수 상태에 빠지기도.
-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 쫓겨났다가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통일을 언급하며 피터팬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일이 끝나고 배신했다가 끔살.
- 심슨 : 일반적으로 서양에서 생각하는 전형적인 김정일의 이미지.
- 홈프론트 : 오프닝에서 장례식이 나온다. 게임 시작부터 고인드립.
- 헌터X헌터: 동고르트 공화국의 지도자를 보면 딱 김정일을 모티브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라 돌아가는 꼴만 봐도…
- epic rap battle of history: Episode 5에서 헐크 호건을 바주카포로 공격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마초맨이 태그로 난입한다.
- 동방의 빛 : 김일성이 고자가 되면서 끔살.
김정일, 김정은: ??? - 스탈린의 편지 : 동북아전쟁 중에 김일성이 김정일과 다른 자식들을 내버려두고 도망갔다. 여기서 김정일은 아버지에게 두드려맞은 트라우마 때문에 자기 발바닥을 물어뜯는 괴상한 버릇이 생겨버렸다.
발이 입에 닿긴 하나?김일성이 처형당한 후 김정일은 동생들과 함께 미국 알래스카 주에 사는 한 네이티브 아메리칸 물개 사냥꾼인 왈라스 헤지호그에게로 입양 가게 된다. - 소꿉친구는 대통령 : 일본에 핵미사일을 쏜다. 그러나 에제키엘에게 격추당하고 푸틴의 위엄으로 GG 치게 된다.
- 필라델피아는 언제나 맑음 : 시즌3 6화에서 경쟁하는 맥주집은 한국인이 경영하는데 여주인의 옷과 모습이 영락없는 김정일이다.
- 팀 아메리카 : 관심 받고 싶어서 미국의 유명 연예인들을 초대해서 세뇌하려는 사상 초유의 찌질한 계획을 세운다. 덤으로 김일성은 외계인.
- 독재자(영화) : 개봉 기념으로 '독재자' 와 함께 미국을 방문해 아카데미 시상식장에 난입했다. 물론 유골함에 담긴 상태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고인드립 당했다.(…)
- 트랜스포머 G1 : 김종두, 항목 참고.
-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한손의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는 1953년 당시 12살이었던 김정일이 등장하는데, 이때 김정일은 메레츠코프를 사칭하는 주인공 알란 엠마누엘 칼손을 진짜 메레츠코프로 여기고 따랐다가[72] 김일성에 의해 가짜임이 들통나고, 때마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평양직할시를 거쳐 기어이 선양까지 쫓아온 진짜 메레츠코프가 들이닥치자 칼손을 향해 "죽여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뛴다. 그러다가 때마침 김일성과 회견차 선양에 와 있던 마오쩌둥이 그가 전에 자신의 처 장청을 국부군에게서 구해준 사실을 알게 되고, 메레츠코프 역시 그가 자신의 원쑤이기도 한 베리야 원수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 굴라그로 유배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분위기가 뒤바뀌는데, 이때에도 분위기 파악 못하고 "저놈 당장 죽여버려라"며 날뛰다가 김일성에게 싸대기를 맞는다.
8 별명
특유의 헤어스타일 때문에 남한에서는 대체로 뽀글이나 뽀그리우스로 많이 불린다. 그래서 붙이는 개~접두사도 붙는데 이 발음을 변형한 '개정어리'라고도 불린다.(주로 나이 든 보수 네티즌들이 그렇게 불렀다.)
또, 아버지가 '수령님'인것을 감안해 '장군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있다 (...) 물론 아들은 '대장님'
- 뽀그리우스
- 핵종(核宗) : 북한, 혹은 김조("김씨 조선")이 사실상 전제군주제 왕국임을 빗대어 갖다 붙인 개드립 묘호. 물론 왕조 제2대 군주는 보통 태종(太宗)을 묘호로 받지만, 이 인간에게 태종이라는 묘호를 내린다면 아마 다른 태종들이 지하에서 통곡할 것이다.
묘호를 주자면 시법에서 말하는 악시인 양종(煬宗) or 양조(煬祖) 또는 여종(厲宗) or 여조(厲祖)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실제로 시법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煬은 여자를 좋아하고 예를 멀리함 인데 김정일은 기쁨조 따위를 운용하고 예를 멀리했으므로 이에 부합하며, 厲는 죄 없는 사람들을 살육한 경우인데 김정일 역시 죄없는 인민들을 살육했으므로 이 조건에 매우 부합한다. 800년 전의 어떤 개막장 군주가 환생한 게 아닐 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폭정을 저지른 막장 군주였다. 아니 그 개막장도 이놈 앞에서는 개념인으로 보일정도다.
의외로 북한에서도 다양한 멸칭을 가지고 있다. 2,400만 주민들의 지극한 떡밥거리라서 그런지, 그 디스의 스펙트럼이 남한에 비해 넓다.
- 고도, 10cm : 김정일의 높은 굽을 비꼬는 말.
- 수령은 짧고 인민은 길다 : 김정일의 작은 키를 비꼬는 말.
- 추세머리 : 북한판 뽀글이.
- 올챙이, 올챙이 배때기 : 김정일의 배를 비하해서 부르는 말.
- 돌망치, 햇내기 : 무능한 김정일을 비꼬는 말.
- 1호 대상자 : 인민들이 진심으로 뽀글이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을 담아 지어준 별명.
- 뻘눈이 : 감시만 한다는 뜻에서 지어준 별명.
- 조선성(朝鮮省) 성장(省長) : 지나치게 친중적인 태도에 반감을 가져 생긴 별명. 우리나라에서 간혹 나오는 '미국의 51번째 주' 운운하는 자학적 드립과 궤를 같이한다.
South Korea주 주지사
- ↑ 본래는 그의 형제들인 김평일, 김영일, 김만일과 함께 한 일(一) 자 돌림자를 쓴 金正一이었으나 아버지 김일성의 '日(날 일)' 자를 취함으로써 자신이 정통 후계자임을 내세우기 위해 金正日로 개명하였다.
- ↑ 북한에서는 1942년생이라고 한다. 김일성과 생년을 맞추려는 의도로 추정된다.
- ↑ 1947년생. 후술하겠지만 김정일이 건든 여자가 하도 많아서 정식 배우자는 사실상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 ↑ 숨겨둔 자식이 27명이라는 설이 있지만 정식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참고자료
- ↑ 사망 당시를 기준으로 한다.
- ↑ 이는 공식적으로 북한 지도자였을 때의 기간이며 실질적으론 이미 1970년대 중후반부터 실세로 자리 잡았었다.(주로 1974년부터 37년간 집권했다고 알려졌다).
- ↑ 한결같이 신비주의 기조를 견지해온 김정일이 대중 앞에서 한 몇 안되는 연설의 워딩. 사실 김정일은 자신의 부정확한 발음과 좋지 않은 목소리를 콤플렉스로 여겨 목소리를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 ↑ 확실하지 않다. 자세한 건 아래의 사망 문단을 참고.
- ↑ 재임 1994년 ~ 2011년
- ↑ 초대 김두봉과 2대 최용건도 북한의 국가 원수였지만 사실 김일성이 실권을 잡고 있는 상태로, 헌법상으로만 국가 원수였다. 이 때문에 김일성이 국가원수으로서는 3대에 해당된다. 이에 따라 김정일은 명목상 4대 국가원수.
그런데 누가 그렇게 생각할까 - ↑ 실제 북한의 언론들을 보라, 김정일을 1942년생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 ↑ 실제 김정은의 나이는 정확하지 않다. 1983년생이라고도 하고, 1984년생이라고도 한다.
- ↑ 그러나 2016년 들어서는 추가적인 사후 신격화가 이루어져 김일성과 김정일을 각각 '위대한 수령'과 '탁월한 수령'으로 칭하기로 하였다고(…). 즉 이제 북한에서 '수령님'은 2명이다. #
- ↑ 이 역시 사후 대원수로 추대되었다.
- ↑ 현: 우수리스크.
- ↑ 본명
- ↑ 북한에서는 신학기가 가을이라고 한다.
- ↑ 러시아 이름으로 슈라
- ↑ 김정일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김일성의 당시 주치의의 아들인 세르게이 리는 "당시 유라(김정일)와 슈라(김만일) 둘만 거기 있었는데 대체 어쩌다가 빠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 ↑ 심지어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식날 김성애가 참석하자 졸업식장을 뛰쳐나가기까지 했다. 때문에 졸업식이 며칠 연기되었다고.
- ↑ 김정일이 잠시 지나간 자리조차 우상화가 되는 곳이 북한인데, 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 또한 우상화가 안 될 수가 없다. 2015년 2월 16일 밤에 방송된 조선중앙텔레비죤 프로그램에서는 김정일 옆 자리에 앉게 된 일흔의 노인이 김정일과 있었던 일을 추억하는데, 김정일 칭찬으로 가득하다. 점심 식사시간에 잡곡밥과 오이절임 같이 평범한 애들이 먹는 도시락을 싸왔다던지, 1954년 1월 중순에는 한 학년 아래의 여학생에게 가죽 외투를 공짜로 주었다던지... 주로 방송에서 강조하는 건 '장군님은 부자와는 달리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평범한 옷차림에 평범한 식사 등등 다른 일반 애들과 다를 바 없는 인민학교 시절을 살았다!' 라는 것을 강조한다. 프로그램 후반부에서는 만경대 가문 출신임을 강조하면서 우상화로 넘어간다. 참고로 이 학교에서 있었던 기간은 5개월. 그리고 여담으로 바로 그 다음 프로그램은 김정일이 직접 창작했다는 음악이 나왔다. 사실 이 날은 김정일의 생일으로서, 이날 조선중앙텔레비전은 하루 종일 김정일 특집방송(...)
- ↑ 남한의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
- ↑ 위원장은 교사가 맡는다
- ↑ 여담으로 이후 김현식 교수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김현식 교수는 옛 정을 상기하며 김정일에게 개혁개방을 촉구하는 서한을 작성했지만, 서한을 다 쓰기 전에 김정일이 죽었다.
- ↑ 1984년 안기부가 작성한 대외비 문건에서 언급하였다.
- ↑ 북한 관련 프로인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난 후 김평일이 대학생들을 모두 모은 후 "우리 모두 전장으로 가서 승리하여 위대한 수령님을 통일의 광장으로 모시자!!"며 학생들을 독려한 후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 자원입대했다고 한다.
-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 군주 앞에서 후계자 문제 잘못 거론했다가 작살난 양반들 많은 걸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 ↑ 오히려 스탈린은 오히려 장남이 포로가 되자 히틀러가 파울루스 원수와 스탈린 아들을 교환하자고 했을 때 "원수가 중위와 같냐?"라며 거절했고, 마오쩌둥의 아들은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 ↑ 후세인의 경우에는 차남 쿠세이 후세인을, 카다피는 차남 세이프 알 이슬람을 차우셰스쿠는 장남 니쿠 차우셰스쿠를 후계자로 내세웠다. 하지만 후세인과 카다피는 아들에게 물려주기 전에 미국의 공격으로 몰락하여 각각 과도정부와 혁명군에 의해 처형되었고 차우셰스쿠도 아들에게 물려주기 전에 혁명으로 축출되어 처형당했다.
- ↑ 밑의 로동신문 사진에서 해당 보도의 전문을 볼 수 있다.
- ↑ 대한민국 정부가 북의 김정일 전용열차를 24시간 내내 감시하고 있다는 정보를 굳이 공개해서 딱히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 입장에선 업무중 산재로 포장해 놨는데, 남한 정권에서 팩트를 들이대면서 아니라고 태클거는 게 짜증날 테고, 또 자신들의 최고통치자용 전용열차가 24시간 감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운용패턴을 전면 수정할 것이다. 사실 북한 관련 정보가 무분별하게 공개되면서, 북쪽에서 거기에 대응책을 마련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고, 심지어 이 때문에 동맹국 정보기관들이 국정원과의 정보공유에 소극적이란 이야기까지 나온적도 있다.
- ↑ 심지어 조총련은 당시 중앙간부들이 평양을 방문하고 있었다.
- ↑ 그리고 이런 설에 휩쓸려 다니다가 전세계 언론사들이 오보를 숱하게 터트렸고, CIA, SIS 같은 유수의 정보기관이 개망신당한 사례도 무수하다.
- ↑ 국내언론에선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이 독보적이며, 2016년 들어서도 국정원이 숙청됐다고 확인해줬던 리영길 전 총참모장이 건재한게 확인되었다.
- ↑ 60대 남성이 배불뚝이라는 것에서 누구나 성인병을 의심할 것이다. 게다가 고도비만 체형이던 사람이 몇달동안 종적을 감췄다가 완전히 반송장 같은 홀쭉이로 나타나서 팔도 제대로 못움직이는데, 굳이 의사가 아니라도 오래가긴 힘들겠네라고 추측할 수 있다.
- ↑ 실제로 어지간히 잔혹한 악인이라도 그가 죽어가는 과정이 상상 이상으로 비참하면 동정론이 나오게 마련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반군들한테 붙잡혀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같은……
- ↑ 1994년에 김일성이 죽었을 때도 길거리에서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 ↑ 김일성 사망 때는 사망 후 며칠 지난 영결식 때에야 웃는 얼굴의 영정 사진을 선보였던 것과 달리, 김정일 사망 때는 사망 발표와 동시에 이 사진이 등장했던 정황으로 보아, 영정을 사전 제작했을 듯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
- ↑ 조선중앙TV에 리춘히가 등장하여 사망소식을 알린 것이 바로 이 글을 읽은 것이다.
- ↑ 이 인물은 문명신 2등 서기관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문제가 되어 북한 대사관 내에서 연일 심각한 회의가 있었는데, 태영호 공사의 강력한 선처 주장으로 살아났다는 증언이 있다. #
근데 태공사가 탈북해버린 지금은 그야말로 망했어요. - ↑ 다른 사회주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원허지도 않았는데 빅제가 된 것과는 다르게, 김정일은 유훈대로 박제가 되었다고 한다.
- ↑ 김일성훈장, 김일성상, 김일성청년영예상, 김일성소년영예상
- ↑ 이 경호원은 1994년에 북한을 탈출하려 했지만 발각되어 요덕수용소에서 끔찍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어찌저찌 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남한에 살고 있다. 여담으로 이 사람은 남한에 온 다음에야 김정일 김일성이 독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 ↑ 저녁이 되어 대답을 재촉하자 정동영 문화부장관이 "민족의 뜨는 기상을 표현한 뜨는 해 아니냐??" 라고 묻자 "아침에 보면 뜨는 해, 저녁에 보면 지는 해"라고 했다고.
- ↑ 일본의 스탭까지 초청했다.
- ↑ 대장금에서의 그녀의 연기에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왜 우리는 저런 아름답고 우아한 여배우가 없냐"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방북했을 당시 이영애가 출연한 작품 DVD 다수를 김정일에게 선물하자 무척 좋아했다고.
- ↑ 북한이 자체적으로 여는 피겨 스케이팅 대회인 듯. 2011년 현재 20회
- ↑ 80년대 물가임을 감안하면 지금의 3만원~5만원이다.
- ↑ 김정일은 전국의 일제 승용차를 없애는 쑈까지 했으면서 정작 본인은 일본인 요리사를 고용해서 일본 요리를 즐겼다.
- ↑ 그냥 쌀밥이 아니다. 최고급 쌀에서 사람 손으로 일일이 깨진 것과 모양이 고르지 않은 것을 골라낸 쌀로 짓는 게 김정일이 먹은 쌀밥이다.
- ↑ 일본어이며, 우리말로 나도팽나무버섯이라고 한다
- ↑ 당장 이 양반이 선호했던 음식이 중국 요리와 초밥이었다고 한다.
- ↑ 열린북한방송의 <만화 김정은> 발췌.
- ↑ 좋은 말은 억대는 기본이다.
- ↑ 열린북한방송의 <만화 김정은>에서 발췌.
- ↑ 북한은 워낙에 폐쇄적인 사회라, 북한 주민들 역시 매우 높은 수준의 정보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이 북한의 이모저모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걸 잘 들어보면, 자기가 직접 본 게 아니라 누구한테 들었다는 식으로 읊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러면 당연히 신뢰도가 떨어진다. 게다가 작정하고 뻥을 치는 인간들까지 수두룩하니...
- ↑ 1997년 남파간첩에게 암살당했다.
- ↑ 이복동생인 김평일 폴란드 대사와 동명이인, 사실 얘가 죽자 김일성은 후에 낳은 아들에게 이 아이의 이름을 물려줬다. 그래서 동명이인이 된 것이다. 혹은 김만일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 ↑ 웃기는 소리지만 기쁨조는 사실 여군들로, 중위나 대위 계급을 받고 있다.
- ↑ <김정일 로열패밀리>라는 책의 저자인 故 리한영(본명: 리일남)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 ↑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의 아들
- ↑ 당시 성혜림과 동거 중이였다
- ↑ 이 2명은 사우스파크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 ↑ 알아둘 점은, 타임지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은 그가 정말 세계를 대표할만큼 위대한 인물이라는 뜻이 아니다. 물론 그런 인물들도 선정하긴 하지만, 진정한 목적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화제가 가장 많이 된 인물'을 뽑는다. 그래서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악당들도 뽑힌 적이 있고, 반대로 시위대나 미군 같이 특정인이 아닌 집단이 선정된적도 있다.
그리고 2006년의 수상자는 당신이다. '당신'이라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지금 이 글을 보는 당신! - ↑ 한 차례 평양특별시 중구 영문동으로 바뀐 다음, 지금의 평양직할시 중구역 만수동으로 바뀜.
- ↑ 참고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이름을 영어로 쓰면 Ioannes Paulus II 가 된다. 보다시피 맨 뒷부분이 II(2)로 똑같다.
물론 김정일이 요한 바오로 2세와 같은 대단한 인물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 ↑ 오탈자가 아니라 정말 저렇게 썼다.
- ↑ 이 때문에 북한 프로그램으로 작성한 텍스트를 다른 나라의 프로그램에서 실행시키면 김 부자의 이름이 깨져서 나온다.
- ↑ 영국인인데 영국은 북한에 대사관을 두었으므로 합법적으로 방문이 가능하다.
- ↑ 근데 지들이 뭘 짓겠나? 결국 짓다가 말았고 지금도 영원히 버려진 상태이다. 게다가 아직 개장도 안 했는데 이미 남조선에는 저것보다 높은 마천루들이 나와서 결국... 망했어요.
- ↑ 사실 한글을 모르는 입장에서 한글을 보면 직선, 원, 사각형밖에 안 보인다고.
- ↑ 사실 보자마자 곧바로 따른 건 아니었고, 진짜로 스탈린이 보낸 사람이 맞는지 스탈린에게 직접 물어보려고 했다. 심지어 알란이 도청의 가능성을 제기하자 스탈린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별칭으로 핵심 질문만 간단히 하자는 생각을 꺼내 나름대로 알란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전화 몇분전에 사망하면서 실패.
운빨 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