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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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국악인. 1936년 5월 31일생. 서울특별시 출생.

가야금계의 살아있는 전설

1 개요

창작 가야금 음악의 창시자. 1952년 부산 피난 시절 경기중 2년생으로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법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7년 KBS 주최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1959년부터 서울대학교 음대 국악과에 출강했고, 1962년에 작곡을 시작, 다음 해인 1963년 첫 창작곡인 《숲》을 내놓아 '창작 국악'의 지평을 열었다.

법과대학, 그것도 서울대학교 법대 출신 국악인이라는 특이한 이력인데, 본래 가야금은 취미에 가까웠다고 한다. 대학생 시절에는 제대로 된 국악과도 없을 정도로 국악계가 안습한 시절이라서 처음부터 국악인으로 진로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고. 그러다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악과 과장으로 그를 초빙하면서 본격적으로 국악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전통 악기를 다루지만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굉장히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하는 편.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바이올린 활로 가야금을 연주하는 기법이다. 미궁 연주 영상을 보면 바이올린 활을 쓰는 걸 알 수 있다. 이 덕분에 원래 '튕기기'로 소리가 짧게 끝나는 기존의 가야금 음색이 아닌 바이올린처럼 길게 늘어나는 독특한 음색이 나올 수 있었다.

대표작으로는 전국의 수련회 교관분들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담력 테스트할 때 항상 애용하는 곡이자, 국내 게임인 화이트데이: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의 메인 BGM으로 수록되면서부터 유명해진 '미궁'이 있다. 1975년에 발표한 곡인 미궁의 내용이 매우 파격적이어서 별별 루머가 나돌았고, 심지어는 작곡가인 황병기 본인이 미궁을 작곡한 직후 사망했다는 루머도 있었다. 그래도 그의 음악은 음반을 통으로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자 정말 듣기가 난해한 프로그램인 전영혁의 음악세계[1]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현재는 대한민국예술원의 부회장 직책을 맡고 있으며,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 교수로 재직 중.

70대 후반의 나이임에도 본인께서 직접 홈페이지를 운영 중이다. 올리시는 글들을 보면 꽤 재미있고, 무엇보다 젊게 사신다는 생각이 들 거다.

가야금 제작 장인들 사이에서는 잘 만든 가야금을 시험해 본 다음에 '팔기에는 아깝다'라고 생각되면 곧바로 황병기 씨한테 기증한다고.

2015년 화이트데이: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2015)에 사용되는 미궁을 새롭게 녹음하였다. 원곡은 홍신자가 녹음하였지만, 재녹음판은 소프라노 윤인숙으로 바뀌었다.

추가 업데이트 바람.

2 가족관계

가족 이력도 화려하다. 부인은 5세 위의 소설가 한말숙 선생인데, 두 사람은 서울대학교 동문이다. 한편 장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실력있는 수학자 중 한명으로 꼽히는 황준묵 고등과학원 수학부 석좌교수다. 차남은 물리학자 황원묵이며, 역시 고등과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부모가 워낙 머리 좋으니, 자제분들도... 유전자가 어디 가겠나

우리 집사람하고 제가 결혼한 것이 1962년이었어요. 제가 스물일곱 살 때죠. 그때 집사람도 데뷔해서 소설가로 이름을 날릴 때입니다. 저희가 서로 안 지는 오래됐어요. 집사람은 서울대 언어학과를 다녔는데 국립국악원으로 가야금을 배우러 왔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둘이 같은 선생님께 가야금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만나서 사귀다가 "같이 살자" 그래서 결혼을 했어요. 집사람이 저보다 다섯 살 연상이에요. 그래서 그때는 좀 좋지 않은 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저희 부모님들은 전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쉽게 결혼을 했죠. 제가 3대 독자인데 집사람은 이 집에 들어와서 아들 둘을 낳았어요. 큰아들은 수학자고 작은아들은 물리학자예요. 재작년에는 우리가 금혼식을 했죠. 둘이 가끔 싸울 때도 있지만 오래 살다 보니까 지금은 같이 늙어가고 있는 거예요. 예전에 주례 서는 사람들이 신랑 신부를 보고 "검은 머리 뿌리되도록 해로하라"는 말을 많이들 했는데 우리 부부야말로 이럭저럭 살다 보니까 해로가 됐지요. 그러다 보면 이제 죽을 날이 오겠지요. 그러면 죽으면 되겠지요.

-황병기 교수 인터뷰 중(출처)

3 관련 항목

  1. 1986년(당시에는 "25시의 데이트")부터 2007년까지 방송한 KBS 2FM의 장수 프로그램.(중간에 KBS 대신 SBS에서 잠시 방송한 적이 있다) 음악을 깊게 아는 사람들만이 찾았던, 그야말로 매니아들을 위한 레전드급 프로그램으로, 난해한 프로그램임에도 고정 팬들이 방송 기념 행사를 열 정도로 많았다. 뮤지션들도 음악 필을 잡기 위해 들었다. 프로그램의 특성상 오프닝과 엔딩에만 DJ의 멘트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DJ 전영혁의 학력위조 사건이 터진 후 일신상의 이유로 2007년 10월 15일 방송을 마지막으로 종영했다. 그럼에도 다양한 음악의 거부감없는 수용을 통해 대중음악 발전의 디딤돌 역할을 한지라, 대부분은 전영혁을 숨은 공로자로 인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