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시절 | 노년 |
樋口 季一郎
생몰년: 1888-08-20 ~ 1970-10-11
1 개요
일본 제국 육군 중장(최종계급)이다. 복어계획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2 출생과 성장
일본 효고 현 미나미아와지 시에서 5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1살 때 부모가 이혼하여 어머니가 그를 맡게 되었다.
18세에 기후의 귀족 집안인 히구치(樋口)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다. 육군사관학교(제21기)에서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육군대학(제30기)도 수석 졸업한 후 거쳐 만주와 러시아 방면 부대에서 주로 활동했다.
2·26 사건 당시 해당 사건을 일으킨 청년 장교와도 각별한 사이로 무력에 의한 실력행사를 조장했다. 또한 아이자와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사건 당사자인 아이자와 사부로의 직속 상관이었다.
3 선행
3.1 복어계획 입안
1937년 12월 26일, 하얼빈 특무기관장으로 복무하고 있던 히구치는 제1회 극동 유대인 대회가 개최될 당시 관동군의 허가를 얻어 3일간 열릴 예정이던 이 대회에 유대인통으로 알려진 육사 동기 야스에 노리히로(安江 仙弘) 대좌와 함께 참석했다. (이 사람은 히구치와는 달리 육사 성적이 형편없었다.) 이 자리에서 히구치는 삼국 동맹을 맺은 동맹국이던 독일의 반유대정책에 대해 <유대인 추방에 앞서 그들에게 땅을 제공하라>라는 간접적인 비판을 역설해 유대인들의 갈채를 받았다. 물론 이건 립서비스 의도가 강했다.
1938년 3월, 18명의 유대인들이 나치의 박해를 피해 소련과 만주국의 국경인 시베리아 철도의 오트포르(Otpor) 역에 피난했다. 그러나 이들은 망명지를 찾아나서기 위해 통과할 수 밖에 없는 만주국에서 외교부의 입국 거부로 발이 묶여 식사 등 거주에 큰 고통을 받았다. 히구치는 이 사실을 알고는 즉시 옷과 음식을 제공하고 병자들을 치료하도록 지시해 만주국을 경유하여 상하이 조계로 갈 수 있도록 조치했다.
3.2 난징대학살 성자설
난징 대학살 때 "모든 인간을 죽여라"라는 공지에 의문을 품어 포로 1500명과 민간인 30000명을 석방했다고 서술한 내용이 이 문서에 있었는데, 저런 성자가 있었다는 관련 내용을 찾을 수가 없다. 위키피디아의 각종 언어판들이나 아이리스 장의 책(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 난징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 / 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에도 난징 대학살 관련 언급이 없는걸로 보면 리그베다 위키에서만 퍼져나간 헛소리인 듯 하다. 일본군/인물 항목에 이와 비슷한 선행을 한 훌륭한 인물들이 몇몇 보이는 것으로 볼 때 아마도 그들의 일화가 섞여들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덕분에 이 문서를 출처로한 뻘글이 인터넷 곳곳에 퍼져 나갔다. 이 글의 내용이나 이 문서의 복붙을 보고 속은 사람들은 참고하자.
4 전투
1942년 8월 1일, 삿포로에 사령부를 둔 북부군(훗날 제5군으로 개칭) 사령관으로서 북동부 지역의 작전을 지휘한 히구치는 아투 섬 옥쇄, 키스카 섬 철수, 패전 후의 시무슈 섬, 가라후토(사할린)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히구치 장군은 키스카 섬 철수에서 매우 현명한 판단을 내린 적이 있었다. 당시 철수 작전을 맡았던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은 구출 함정에 병력들을 많이 수용하고, 빨리 키스카에서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기 위해선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화기까지 버리고 철수해야 된다고 판단하였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선 북부군의 책임자였던 히구치 장군의 협력이 필요하였는데, 히구치 장군은 기무라 마사토미의 청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상급 부대에 알리지 않고 현장 지휘관의 책임으로 육군 부대의 장병에게 개인화기를 바다에 버리고 구출 함정에 승선할 것을 지시하였다. 빈손으로 돌아온 장병들을 보면서, 일본 육군의 윗사람들은 히구치의 처사를 비난하였지만, 히구치는 이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5 전후
전후 그가 전범으로 체포되자 세계 유대인 협회가 필사적으로 로비 활동을 벌여 그의 전범 지명을 막았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히구치의 신병 인도를 거부해 재판에 내세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