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년 6월 봉기

1 개요

1832년 5월 16일 의회장 카지미르 페리에의 콜레라로 사망 2주 후 일어난, 1832년 6월 봉기는, 7월 왕정을 타도하려는 공화주의자들의 시도의 시작을 위한 것이었다.

2 39인 보고서

공화주의자 몇몇과 많은 반(反)오를레앙파로 구성된 39명의 야당 위원들이 5월 22일 자크 라피트의 집에서 회동하여 자신들의 선거구 유권자들을 위해 자신들의 활동을 결산하고 자신들의 행동과 표결활동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알리는 한 보고서를 발간하기로[1] 결심하였는데, 실상은 그 보고서는 1831년 3월 13일 라피트 내각을 대신하여 세워진 페리에 내각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쓰여지게 된다. 여섯명으로[2] 구성된 소위원회에 의해 기안된 초안이 28일 39명 위원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 보고서가 1789년의 프랑스가 그랬듯이 1830년의 프랑스(7월 왕정)도 "인민을[3] 위한 제도를 갖췄으므로 자유의 제원칙과 양립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라고 생각되던 왕정을 규탄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보고서는 '3월 13일 정권'을 잡은 사람들[4]이 내세웠으나 '준-적통적 체계'가 지키지 못한 약속들을 열거했다.

보고서는 정부가 자유를 반복하여 유린하였고, 소요를 부채질하고 무질서 상태를 방치하고 있다고 비난하였고, 국제사회의 차원에서는 (폴란드인들을 위시하여) 억압받는 민중들에 대한 지원을 거부한 것이 <왕들의 유럽>, 그리고 신성동맹이 지향하는 유럽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거라고 규탄하였다. 부정적인 상황을 잔뜩 열거하고 난 연후에, 그 보고서는 반혁명의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고, 그 움직임이 승리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 '왕정복고와 대혁명이 대치하고 있는데 우리가 끝났다고 믿고 있던 싸움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요약하자면, 비록 '공화국'이나 '공화주의자' 라는 용어를 한번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보고서는 7월 왕정을 세운 사람들을 공격함으로써 7월 왕정에 대해 가장 신랄한 규탄을 하였고 또한 "프랑스가 40년 동안이나 지키기 위해 싸워 온 위대하고 숭고한 대의에 대한 한결같은 충정으로 뭉쳐진 우리에게 있어서, (...) 우리는 그 대의에 우리의 목숨을 걸었고, 그리하여 우리는 그 대의가 승리할 것임을 믿는다." 라고 쓰여진 보고서의 결론은 체제를 전복시키고 공화국을 건설하자는 암시된 호소라는 것이 분명하였다.

이 선언문이 발표되자마자 마치 폭탄이 터지는 듯한 반응이 촉발되었다. 그 선언문은 공화파 야당을 열광시켰다. 공화파 야당은, 7월왕정 시대에 종종 그랬듯이, 혼란을 이용하여 득을 얻을 수 있기를 항상 노리고 있는 정통왕조파(샤를 10세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양쪽 모두 아주 작은 사건이라도 일어나면 그걸 이용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예를들면, <라 골루아즈>란 공화파 모임의 의장이자 폭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데샤펠은 샤를 10세 망명 정부의 오'에게르티 조신들과 동서지간이기도 하면서 또한 숙부였다.

3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

1832년 6월 2일, 결투 도중에 죽은 젊은 공화파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의 장례식이 야당에게는 워밍업의 구실을 했는데, 야당 지도자들은 공화파 거두들 중의 한명이면서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여 6월 5일 장례를 치를 예정이던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은 엄청난 민중이 몰려들 것이 틀림없었는데, 그것은 공화파 비밀조직들이 열심히 준비하고 있던 폭동을 촉발시키는데 절호의 상황이었다.

6월 5일, 장례 행렬은 오스테를리츠 다리까지 큰 길을 따라 행진했는데, 오스테를리츠 다리에서 그 장례행렬은 붉은 기를 앞세운 이끌려 시위로 변하였고, 그 시위는 질서 유지를 위해 파견된 군대와의 충돌로 악화되었다. 국가경비대의 일부는 본연의 위치를 이탈하여 폭도들의 편을 들었다. 싸움은 우열이 불분명하여 저녁때까지 계속되었다.

4 봉기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1세를 콩피에뉴에서 마중을 하고 나서 6월 1일 샤토 드 생-클루 성에 머물기 위해 갔던 루이 필리프 왕은 6월 5일 부관 중의 한명인 에이메스 장군으로부터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왕은 그 즉시로 마차에 올라 왕후 마리-아멜리에와 아델라이드 부인을 대동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튈르리 궁전의 카루젤 안뜰에서 왕은 자신의 침착함과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전선부대와 국가경비대의 사열을 받았다. 그날 밤에는 무통 원수가 지휘하는 군대들이 파리의 주변외곽지를 소탕하고 폭도들을 파리의 역사적인 중심지 안으로 몰아 넣었다.

싸움은 6월 6일 아침에 시작되었다. 국가경비대는 항전을 했고, 폭도들은 곧 생-메리 지역으로 물러났는데, 그곳에서 약 800명의 희생자가 난 치명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정규군은 55명 사망에 240명 부상, 국가경비대는 18명 사망에 104명 부상하였으며, 그리고 반란군 쪽에서는 93구의 시신과 291명의 부상자를 수습하였다. 앙리 지스케 경찰청장은 자신이 쓴 보고서에서 국가경비대는 18명 사망에 104명 부상, 전선군은 32명 사망에 170명 부상, 파리 경찰대는 사망자가 20명, 부상자가 52명인데, 여기에 이 세 부대에 소속되지 않은 희생자는 포함하지 않았다고 보고하면서, 반란군 쪽 손실은 최소한 80명이 죽고 200명이 부상했으며 1500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주동자들은 도망을 하거나 또는 체포되었다. 5일 저녁, 라피트나 바로와 같은 야당 국회의원들은 보고서에 서명을 하고 라피트의 집에 다시 모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주저하다가 결국 6일 아침에, 루이 필리프 왕에게 특사를 보내 정책을 바꿈으로써 유혈사태를 종식시키라는 요구를 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6일 오전, 왕은 샹젤리제 거리와 콩코르드 광장에서 군대를 사열한 다음 파리 북쪽 구역에 있는 군인들과 국가경비대원들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왕은 "대왕님 만세!" "공화파들을 처단하자!" "샤를 왕당파를 타도하자!" 라는 함성과 함께 환영을 받았다. 오후 세시 반에 튈르리 궁에서 라피트, 오딜롱 바로, 아라고 를 접견하면서, 왕은 그들에게 마지막 저항 거점이 방금 무력화되었으며, 따라서 협상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통고할 수가 있었다.


혼란의 원인은 V.M.정부의 노선이, 7월 혁명의 결과로 사람들이 당연히 기대할 수 있게 된 것들에 대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혼란의 원인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바로에게 왕은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7월 혁명의 목적은 1830년 헌장을 위반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었는데, 헌장은 온전히 유지되고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개선되기까지 했었다.(...) 따라서 1830년 헌장은 이제 나를 안내하는 지침이 되어 있는 바, 왜냐하면 내가 여러분에게 약속했고, 내가 유지하겠다고 맹세했고, 또 앞으로도 내가 피를 흘리더라도 언제까지나 수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 헌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약속을 공시했고 또 나의 그 약속을 엄수하여 지켰기 때문에, 사람들이 소위 "시청 계획"이라는 것에 대해 지어낸 그 모든 황당한 이야기들을 내가 들을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라피트 경은 나와 함께 시청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비앙네 경이 읽은 선언서 말고 다른 계획은 없었다. 나는 그렇다는 사실을 라파예트 경에게 여러번 말한 적이 있는데, 지금 여러분에게 그런 계획은 완전히 지어낸 것이고 황당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다시 확실히 말하게 되어서 기쁘다.

5 진압

6월 6일, 승리를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내각회의는 왕으로 하여금 파리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칙령에 서명하도록 만들었다. 그 당시 소요는 끝난 상태였으나, 내각은 중죄재판소의 배심원들이 1830년 이래 공화파 선동자들이 관련된 소송에서 종종 그래왔듯이 권한을 남용하여 무죄석방을 평결할까봐 두려워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정상적으로는 문민 권력자에 의해 행사되던 권력이 군부 권력자들에게 이양되기 때문에, 피의자들을 훨씬 더 엄격한 군법회의에 불러 세우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6월 18일에 언도된 첫번째 사형 판결은 항고되었으며, 최고파기법원은 1832년 6월 29일의 결정판결에서 군법회의의 판결을 파기하고, 특별법정의 설치를 금지하고 배심원단의 판결을 보장하는 1830년 헌장의 53, 54 및 56조에 위반된다는 이유를 달아 소추사건을 보통법 재판소로 되돌려 보냈다.

최고파기법원의 결정판결이 내려지던 바로 그 날, 루이 필리프 왕은 굴복을 하고 자신이 내린 6월 6일 칙령을 폐기하기에 이른다. 공화주의자들은 크게 기뻐하였고, 이후 오랫동안 그 1832년 6월 쿠데타를 비난하게 된다. 빅토르 위고는 '헌장의 제 14[5]조를 사라지게 하고, 자신들을 위해 계엄령 설치를 술잔의 이중바닥 안에 숨겨 남겨 둔 정치적 야바위꾼들'을 규탄하였다. 만평화가들이 줄줄이 등장하여 이런 현실을 비평하였다.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민중 배심원들은 82명에 대한 유죄판결을 내리면서 7명에게는 사형을 선고하였다. 루이 필리프 왕은 사형을 선고 받은 자 모두를 유배형으로 감형을 하였다.

6 소설 속에 묘사된 폭동

1832년의 공화주의자 폭동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생-드니 거리에 설치된 폭도들의 바리케이트 장면에 소설의 주요 인물들의 대부분이 등장하며, 상당수가 그 곳에서 죽는다.

  1. 이 부분은 자연스럽게 네케르의 '왕에게 드리는 보고서'를 연상하게 한다. 라피트는 그의 직업, 그의 막대한 부, 인기를 얻고싶어 하는 마음, 그리고 변덕스러움으로 왕을 연상하게 한다.
  2. 샤를 백작, 라파예트, 라피트, 오딜롱 바로, 모귄, 코르므냉
  3. 1830년, 라파예트는 공화주의적 법에 보호받는 시민에게 사랑받는 왕좌를 바랬다.
  4. 페리에 장관은 1831년 3월 13일에 취임했다.
  5. 임시 법정 금지령에 관한 헌장 54조에 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