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리스트 갈루아

Évariste Galois
1811년 10월 25일 ~ 1832년 5월 31일.
파일:Attachment/에바리스트 갈루아/Évariste Galois.jpg

1 소개

프랑스 출신의 수학자로 고작 21살에 사망했지만 수학사에 한 획을 그은 천재 수학자이다. 노력하면 스무살되기 전에 갈루아처럼 수학사에 획을 긋는 업적을 남길 수 있을까? 닐스 헨리크 아벨과 함께 불행한 수학자의 대명사로 꼽히며, 그가 정립한 갈루아의 방정식은 현대 수학의 베이스가 되었으나 생전엔 여러가지 불운으로 인해 업적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논문은 사후에 알려졌으며 많은 수학자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성급히 죽음을 택한 것은 아쉽다고 할 수 있다.

2 생애

2.1 유년기

1811년 10월 25일 프랑스의 소도시 부르 라 렌 시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시골 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다 시장에 당선된 이후 17년 동안이나 쭈욱 시장을 역임했으니 갈루아는 상당히 좋은 집안 출신인 셈이다. 12살에 고향을 떠나 명문기숙 학교 '리세 루이 르 그랑'[1]에 입학했고, 언어 방면에서 천재적인 면모를 보이며 교사들 사이에서 유명해진다. 15살에 우연히 프랑스 수학자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Adrien-Marie Legendre)가 쓴 <기하학원론 Éléments de géométrie 1794>을 접하게 되었고, 2년 과정으로 쓰여진 그 책을 단 이틀만에 모조리 읽어냈다. 그것도 학생들을 대상으로 쓴 교재가 아닌 전문수학자가 수학자들을 대상으로 쓴 전문서적을 독파한 것이다. 문제는 갈루아가 수학에 대해서만은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다른 공부를 하기 싫어했기 때문에 낙제를 했다는 것. 또한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동급생이나 교사를 무시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학교내에서도 따돌림을 당했다.[2] 갈루아는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상급학교인 에콜 폴리테크니크(파리 공과대학)[3]로 가는 것과 이름난 수학자들을 만나 전문 수학을 공부하는 것만이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갈루아는 수학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여 나중엔 편집증에 걸렸다. 생활기록부도 전부 갈루아의 정신상태가 광기라고 적혀있을만큼 부정적으로 기록되었다. 이해심 많은 갈루아의 어머니조차 아들이 정신병이라고 우려할 정도였으며 후술하듯이 형제들도 막내를 제외하고 갈루아를 미쳤다고 외면했다고 한다.

2.2 아버지의 영향

부르라렌의 시장이었던 아버지는 프랑스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부친의 영향을 받아 갈루아 역시 혁명가를 꿈꾸었다. 그는 당시 젊은 혁명가들이 모이는 곳이자 유럽의 학술적 업적이 탄생하는 중심지인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불행하게도 낙방하였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재수까지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갈루아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갈루아는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왕립과학원)의 교수로 재직하던 오귀스탱 코시(Augustin Louis Cauchy)[4]에게 직접 자신의 발견을 적은 소포를 보냈다. 소포 안에는 5차 방정식의 대수적인 해법이 없음을 증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코시는 그 안에 담긴 아이디어에 매료되었다. 17살에 불과한 소년 갈루아가 당대 최고의 수학자인 코시를 놀라게 한 것이다.

2.3 첫 번째 불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그러나 갈루아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지 못했다. 갈루아가 입학 시험을 준비하던 중, 공화주의자였던 아버지가 정치적 음모에 희생[5]당해서 목을 매어 자살해 버린 것이다.[6] 이 사건으로 소년 갈루아의 삶의 토대는 산산히 부서졌고, 위대한 수학적 발견을 해서 행복하던 시간은 가장 괴로운 시간으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갈루아는 급진 공화주의자가 되게 된다.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던 갈루아는 두 번째 입학 시험에서 면접관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했고, 심지어 그들한테 니가 하는 설명은 하나도 모르겠다는 말만 듣자 칠판지우개를 던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게 면접관의 이마에 제대로 명중(...) 여기에 관해서 실은 칠판 지우개 투척 사건은 없었고 후대의 전기 작가의 창작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거말고도 갈루아의 잘못도 많았는데 면접에서 설명 과정에서 갖은 비약을 하면서 온갖 계산 과정은 건너뛰어버리니 면접관이 이해를 할리가... 살아생전에 갈루아가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귀찮은 부연설명은 다 건너뛰는 습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시험관의 보고서에 따르면[7] 갈루아는 구술 면접에서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을 " 그것은 자명하다"만 반복하며 더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냐는 표정만 지었다고 한다. 쉽게 설명해달라는 것을 자신의 뛰어난 의도를 모르는 무식쟁이라고 경멸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니 사람들이 좋게 볼리가 없었다. 모두가 당신같은 천재는 아니야.. 이차방정식도 복잡하면 암산이 안되는 판에 오차방정식을 암산으로 계산하길 바라는건가... 당연히 갈루아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떨어지고 두 번 다시 입학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 갈루아는 수학 이외의 성적은 낙제거나 평범해서 입학 자격이 안 되었다. 갈루아의 에콜 폴리테크닉 낙방의 공식적인 사유는 수학 이외의 성적 미달이다.

2.4 두 번째 불운: 코시의 망각과 푸리에의 사망

갈루아는 에콜 폴리테크니크 대신 에콜 프레파라투아(École préparatoire, 예비학교)[8]에 입학하게 된다. 갈루아는 코시에게 보낸 논문에 모든 기대를 걸었지만, 설상가상으로 코시마저도 건강상의 이유로 갈루아의 논문을 발표하는 걸 미루었다가 그대로 잊어먹어 버렸다. 코시는 갈루아의 논문에 관한걸 발표하기로 예고한 당일 건강 문제로 불참하였고, 이후 다시는 코시가 갈루아의 논문을 언급하는 일은 없었다.

이에 관해선 위의 설 말고도 여러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코시가 갈루아의 논문을 분실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코시가 자기가 발표하는 대신, 갈루아가 직접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최고의 과학 및 수학자에게 수여하는 그랑프리에 도전하도록 권유했다는 설이다. 그러나 전혀 방향이 다른 설로 코시가 논문을 고교생이 썼다는 것을 알고 처음부터 읽어보지도 않았다는 설도 있다.

갈루아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한번 자기의 논문을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왕립과학원)에 제출했고, 그 논문은 장 바티스트 조지프 푸리에(Jean Baptiste Joseph Fourier)[9]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나 장바티스트 푸리에는 갈루아의 논문을 받고 몇주 후 열병으로 사망했으며, 갈루아의 논문은 또다시 그대로 행방불명되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이후 갈루아의 혁명에 대한 열정은 더욱 불타올랐다. 7월 혁명이 일어났을때 에콜 프레파라투아의 교장인 기뇨(Giniault)는 학생들에게 혁명 참여를 금지시켰고 항의하는 학생들을 퇴학시켰다. 갈루아는 그토록 원하던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학생들이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단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갈루아는 다음 번의 혁명은 반드시 자신이 주도해 나가겠다고 다짐한다.

2.5 세 번째 불운: 푸아송의 기각

갈루아는 에콜 프레파라투아의 교장은 학생들을 혁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 역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교장은 이에 갈루아를 퇴학시켜버린다. 교장은 지금껏 갈루아의 놀라운 수학적 재능 때문에 그의 오만 불손한 태도를 참아왔으나 갈루아가 신문에 사설까지 기고하며 교장을 비난하자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갈루아는 에콜 프레파라투아에서 퇴학당한 이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공개 강의를 열었다. 그는 자신의 수학적 연구 결과들을 강의에서 발표했는데, 청중 중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자 그랑프리의 심사위원인 시메옹 드니 푸아송(Siméon Denis Poisson)[10]도 있었다. 다른 청중들은 혁명가의 웅변을 기대하고 모였기에 갈루아의 강의는 얼마 후 금새 청중이 빠지고 썰렁해졌으나, 수학자였던 푸아송은 그의 강의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보았다. 푸아송은 갈루아에게 다시 한번 연구 결과를 제출해 달라고 요구했고, 갈루아는 다시 한번 인정받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몇달이 지나도록 갈루아의 연구 결과에 대해선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희망에 부풀어 있던 갈루아는 분노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취했다. 갈루아는 연회에서 공개적으로 왕을 위협하는 말을 했고, 체포당해 재판을 받게 된다. 이는 혁명적 영웅으로 투옥되고 싶은 갈루아의 의도였지만, 변호사의 재치로 인해 의도와는 달리 무사히 풀려나게 된다. 하지만 덕분에 갈루아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갈루아의 친구인 슈발리에 형제는 갈루아를 변호하기 위해 신문에 갈루아가 푸아송으로부터 다섯 달 동안이나 답변을 듣지 못해 초조해져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고 썼다. 이 기사를 읽은 푸아송은 불쾌해져서 갈루아의 논문을 불합격 처리해 버렸다.

2.6 젊은 천재의 죽음

일주일 후, 갈루아는 사소한 시비로 체포되어 9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갈루아는 수학을 자신의 유일한 위안거리로 삼았고, 감옥 내에서 갈루아는 수학자로 유명해졌다. 그는 의외로 감옥 내에서 다른 사람과 잘 어울려 지냈다고 하며, 한번은 그가 부당한 대우를 받자 죄수들 사이에서 분노가 터져나왔다고 한다.개차반인데 감옥에서는 잘 지내다니 의외다

1832년 봄, 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했고 관계 당국은 젊은 수감자들이 감옥에서 죽는 것을 막기 위해 병원으로 이송했다. 그 안에는 갈루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갈루아는 병원에서 병원 의사의 딸이었던 스테파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스테파니는 갈루아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갈루아가 스테파니가 보낸 편지를 모두 찢어버려서 불태웠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갈루아의 수학 논문 뒷편에서 확인된 편지의 내용에 따르면 스테파니는 그냥 친구로 지내길 원한다면서 갈루아를 거절했다.

갈루아가 죽기 며칠 전의 일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사랑했던 여인 스테파니를 둘러싼 결투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혁명가인 갈루아가 스스로를 혁명의 제물로 삼았다는 말도 있다. 대개 결투 때문이라고들 한다. 결투의 방식은 이렇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총을 쏘는 것이었다. 이건 일종의 추측인데, 갈루아는 애초에 총을 쏘려던 마음이 없었던것 같다.(자신의 연구결과를 이전에 정리한 것을 보아) 게다가 자신이 죽을 걸 알았는지 후술하듯이 마지막에 연구결과를 정리한 글에 낙서로 시간이 없다, 내일이 마지막 햇빛을 보는 날이 될지도 모른다...라는 푸념이 적혀져 있었다.

어찌되었든 그는 이렇게 21세라는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결투로 인해 총을 맞아 숨을 거두었다. 갈루아가 짧은 인생동안 치른 결투가 하도 많아서, "그가 이 결투에서 죽지 않았다면 다음 결투에서 죽었을 것이다"라는 말도 있다(...). 혁명 동지들은 젊은 천재인 갈루아의 죽음을 구실로 삼아 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지만, 공교롭게도 나폴레옹의 오른팔인 라마르크 장군이 같은 날 숨을 거두고 만다.

갈루아의 죽음은 라마르크 장군의 죽음에 의해 그대로 묻혀버렸고, 갈루아의 장례식은 급히 마무리되었다.[11] 그리고 갈루아의 논문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관계로, 갈루아가 받을 수 있던 최고의 상인 그랑프리노르웨이의 수학자인 닐스 헨리크 아벨(Niels Henrik Abel)에게 대신 수여되었다.[12] 한 술 더 떠, 갈루아의 무덤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와중에 박살나서 지금 남아있지 않고 세월이 지나서 만들어진 가묘만 있을 뿐이다.

성격이 모나다보니 식구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가 병원에서 죽을 당시, 그나마 그를 유일하게 존경하던 13살 난 막내 아우만 와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13] 그는 마지막으로 아우를 쓰다듬으면서 미소를 보이며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14]

슬퍼 마라… 나이 스물에 죽는 것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거든…. 그러니, 울지 마라.

 

2.7 뒤늦은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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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 전날 밤 갈루아가 작성한 자신의 연구결과.[15]

죽기 직전 자신의 연구결과를 총정리하는 한편, 자신의 논문을 친구인 슈발리에에게 보내어 자기 대신 세상에 발표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갈루아는 본인의 연구결과가 옳은지 그른지가 아닌, 얼마나 중요한지를 평가받고 싶었다고 한다. 슈발리에는 천재였던 친구의 노력을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슈발리에는 갈루아가 죽기전에 한 부탁대로 그의 논문을 독일의 수학자인 카를 구스타프 야코프 야코비(Carl Gustav Jacob Jacobi,1804~1851)[16]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Karl Friedrich Gauß)[17]에게 보냈지만, 그들은 프랑스인의 빡빡한 논문에 시간을 할애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슈발리에는 포기하지 않고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인 조지프 리우빌[18]에게도 갈루아의 논문을 보냈고, 리우빌은 갈루아의 논문을 주의 깊게 검토해본 결과 그의 발견이 아벨과 비슷한 업적임을 이해하게 된다. 사후 10년이 지나서야 젊은 천재의 업적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갈루아의 논문을 무시했던 야코비도 그제서야 혹시 갈루아의 또 다른 논문이 없나 요청하게 된다. 가우스도 10여년이 지나서야 아벨과 갈루아를 무시했던 걸 후회하게 된다. 갈루아 사후 갈루아의 천재성이 알려지자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입시담당관들은 천재를 알아보지 못한 죄로 징계를 먹게 되었다. [19] 그리고 갈루아의 케이스는 후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입시 제도 개편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수혜자가 바로 프랑스가 낳은 또 하나의 천재 쥘 앙리 푸앵카레(Jules-Henri Poincaré) [20]. 푸앵카레 역시 갈루아처럼 수학을 제외한 다른 과목에선 낙제점(하지만 이후 천문학이나 다른 분야에서도 천재성을 발휘한 다재다능한 면을 보였다.)을 받았던 천재였다. 더불어 갈루아처럼 성격이 개차반이었지만 에르미트[21]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갈루아와 달리 프랑스 최고 명문인 소르본 대학 교수(다만 천문학)가 될 수 있었다.

현재 수학을 하는 모든 학생들은 갈루아의 업적을 배우고 있다.[22]

3 업적

현대 수학의 아주 많은 분야에 걸쳐있는 군론의 시작이 갈루아 이 사람이다. 군론이라는 것은 그 범위와 영향이 너무나 커서 위키에서 다룰만한 지식이 아니다. 수학 뿐만 아니라 물리학 등 수학으로 기술되는 하위학문들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단적인 예로 이론적으로 고려했을 때 특수상대성이론은 4차원 공간에서 회전변환에 대한 군론이다.

(아래의 내용은 갈루아의 본 업적이라기보다는, 현대수학의 언어로 다시 쓰여진 내용을 요약한 것이므로 주의바랍니다. 자세한 내용 및 정확한 정보를 위해선 웬만하면 수학사 서적과 대수학 교재를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현대대수학의 갈루아 이론은,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방정식과 그 근들을 치환하는 을 연관시켰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방정식 x2 - 2 = 0 의 근인 √2와 -√2, 유리수로 만들어진 수 집합[23] Q(√2) = {a + b√2 | a,b는 유리수} 에서 √2와 -√2를 서로 바꾸는 치환은 이 집합에 a + b√2 -> a - b√2 로 작용한다.

이를 일반화해서, 임의의 n차 다항방정식 f(x) = 0에 대해 f(x) = 0의 근과 유리수로 만들어진 수의 집합을 F라 하고, F->F의 자기동형사상(합과 곱을 보존하는 일대일함수)들의 군을 f의 갈루아 군(Galois group)이라 정의하자. 그러면 갈루아 군은 방정식의 근들을 유일한 방식으로 치환하고, 따라서 대칭군 Sn 의 부분군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위의 경우, 즉 f(x)=x^2^ -2 이고 F = Q(√2)인 경우, f의 갈루아 군은 항등함수와 위에서 생각한 '켤레연산'의 두 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근들의 집합 {√2, -√2}의 대칭군과 동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항등치환, 하나는 자리바꿈으로)

갈루아 이론에서 방정식에 대한 결과만을 간추리자면, f(x)=0의 방정식을 (사칙연산과 제곱근호만으로) 풀 수 있다는 것은 f의 갈루아 군이 가해성(solvability)이라 불리는 특정 조건을 만족한다는 것과 동치이다. [24] 한편 3차와 4차 대칭군 S3 과 S4 은 모두 가해군이지만, [25] S5 는 가해군이 아니다. 따라서 5차 다항식 f의 갈루아 군이 S5 그 자체가 된다면, 그 방정식은 풀 수 없다. 실제로 실수가 아닌 근이 정확히 2개 존재하는 5차방정식이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5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갈루아 당시에는 군의 개념조차 없었다. 현대대수학의 추상적 군의 개념은 갈루아의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세워진 것이기 때문. 현대대수학의 어떤 강력한 도구도 없이, 순전히 대칭다항식에 대한 근대적 산술[26]만을 써서 이 이론을 전개한 갈루아의 천재성은 엄청나다는 수식도 부족할 정도이다. 요즘 고딩들과 갈루아를 비교해보라. 그건 갈루아가 X나 먼치킨인 거고...
  1. Lycee Louis le Grand (루이 대왕 고등학교). 이 학교 출신의 유명인으로는 로베스피에르빅토르 위고가 있다.
  2. 이는 갈루아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의사소통능력이 너무나 부족했기에 남들은 물론 막내동생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한테도 미움받는 외톨이가 되었던 것이다.
  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설립한 최초의 그랑제콜.
  4. 코시-슈바르츠 부등식의 그 분
  5. 아버지가 취미로 풍자시를 짓고는 했는데, 카톨릭 신부가 지역의 명사를 저질적으로 음해하는 풍자시를 갈루아 아버지의 이름으로 작성해서 발표해버렸다.
  6. 갈루아의 아버지를 자살하게 한 장본인인 예수회 가톨릭 신부는 이후 뻔뻔하게 갈루아의 아버지 장례를 진행했다가, 그 위선에 분노한 시민들에게 돌세례와 욕설을 맞았다.
  7. 이 보고서에 칠판지우개 투척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8. 현재는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파리 고등사범학교. 이 역시 그랑제콜의 하나다.
  9. 1768~1830. 푸리에 급수의 그 사람.
  10. 1781~1840.전자기학에 주로 나오는 푸아송 방정식의 그 푸아송이다.
  11. 애초에 폭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정부가 혁명 동지들을 수십명 체포했지만 그래도 장례식 장에서 난동이 일어났다.
  12. 그러나 아벨 역시 사후에야 이 상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별 상관 없지만, 생전에 갈루아는 아벨의 연구성과를 알고 있었고 그를 천재라고 좋아했다. 참고로 아벨은 1829년 4월 6일 27살, 갈루아는 1832년 5월 31일 21살로 삶을 마감했다.
  13. 첫째 형 알프레드가 결투 후 중상을 입은 그를 병원으로 이송했다는 말도 있다. 정확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추가 바람.
  14. 막내동생 알베르트는 1848년 2월 혁명이 성공하자 이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형의 동판화를 제작했다.
  15. 다만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한 여자(Une Femme)와 같이 수학과 관련없는 낙서들이 곳곳에 보인다. 다른 페이지에서는 시간이 없다! 같은 낙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16. 갈루아가 참가한 그랑프리에서 갈루아를 이긴 수상자였다.
  17. 이과의 사대천왕 중 한명인 그 사람 맞다. 가우스는 갈루아 뿐 아니라 아벨의 논문도 받았지만 똑같이 읽지도 않고 무시했다. 가우스의 후임에 대한 이런 태도는 가우스가 까이는 이유 중 하나이지만 가우스를 두둔하는 주장도 많다. 가우스의 지인들은 "나에게 하루에도 편지가 수십통은 오고 책도 한달에 수십권 온다네. 그들의 수학적 시도를 나 혼자 다 인정해야 하는가? 나도 처음에는 열심히 읽었으나 도무지 말도 안되는 공식을 나에게 인정해달라는 이들은 뭔가? 나도 대학교수이자 나의 수학연구로 시간이 부족하다네."라는 생전의 가우스의 말을 언급했었다.
  18. Joseph Liouville 1809~1882 최초로 초월수의 존재를 증명한 수학자. 리우빌의 정리로 유명하다. 애국자였던 그는 조국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의 존재를 알게 되자 굉장히 흥분하고 갈루아의 업적을 널리 홍보했다.
  19. 다만 면접관들도 억울한 면이 있어서 소송을 걸어 저항했는데 그 때문에 위의 칠판 지우개 투척과 같은 일화가 퍼지게 되었다. 저런 건방진 태도로 일관하는데 어떻게 제대로 평가하겠느냐고..
  20. 1854~1912. 푸앵카레 추측의 바로 그사람이다.
  21. 샤를 에르미트(Charles Hermite, 1822~1901). 수학 분야에서 상당한 천재였음에도 어릴적부터 다리 하나를 절었다는 이유만으로 퇴학당했다. 다만 이는 에콜 폴리테크니크가 항목에서 나오듯이 시작이 사관학교같은 성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퇴학당한 에르미트는 열심히 공부하여 갈루아랑 비슷한 20살 나이로 논문을 발표해 인정받아 수학적 성과를 이루자 퇴학당한지 몇년 안가 에콜 폴리테크니크 측은 에르미트를 조교로 받아들였고 그는 나중에 정식 교수가 된다. 에르미트는 신체적, 정신적 문제가 있어도 천재적인 수학자에 대하여 관대했기에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시제도 개편에 열심히 나섰다.
  22. 그래서 여기서 이런 말이 나온다. "갈루아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수학과 학생들이 배울 책의 두께는 두 배로 늘어 났을 것이다." 오죽하면 갈루아를 죽인건 훗날 군론에 고통받은 수학도들의 원한 때문이라는 말까지(...) 그 놈 그 때 안 죽었으면 우리가 죽인다!
  23. 엄밀하게는 확장(extension field)
  24. 가해성을 정확히 말하자면: 군 G에 대해 1=G0 , G1 , ..., Gk = G 의 열이 있어, Gi+1 / Gi 가 가환이다.
  25. 따라서 3차방정식과 4차방정식을 풀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갈루아 이론을 활용해서 카르다노와 페라리의 공식을 유도할 수도 있다.
  26. 과장해서 말하자면 근과 계수와의 관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