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R. 맥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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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ert Raymond McMaster
1962년 7월 24일 펜실베이니아필라델피아 출생.
미 육군의 군인으로, 2016년 4월 현재 계급은 중장이며 보직은 육군교육사령부 부사령관. 기갑 병과 출신이지만 미국육군사관학교에서도 강의한 역사학자로도 유명하다.

1984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육사 시절엔 럭비를 했다고. 1991년대 걸프 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에도 불구하고 단 9대의 전차만으로 이라크 전차 80여 대를 무찌른 희대의 무쌍난무 덕에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당시 전투는 '73 이스팅 전투'(Battle of 73 Easting)로 불린다. #

1997년에는 소령으로 복무 중에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채플힐 캠퍼스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땄는데, 당시 논문의 일부를 단행본으로 출간하여 많은 높으신 분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 책의 제목은 <직무유기(Dereliction of Duty>로, 베트남 전쟁 당시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등으로 이어지는 대통령의 내각과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을 보좌해야 할 군인들, 특히 합동참모본부 포스타들의 온갖 병크를 통렬히 까발리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맥마스터는 군대는 정치/외교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면서 맥스웰 테일러[1]를 비롯한 수많은 월남전기 합참 장성들을 비판하였다.

이후 이라크 전쟁에도 기갑장교로 참전하였는데, 2005년 기갑연대장으로 참전했던 탈 아파르 전투에서 미군으로서 보기 드물게 이라크 현지인들과의 친화력을 기르는 대민친화정책을 펴며 탈 아파르에서 알 카에다를 축출하기도 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상부의 지휘/명령 체계를 씹어먹은 것 때문에 도널드 럼즈펠드 같은 높으신 분들에게 많이 밉보인 전력이 있어서 이후 불이익을 보게 되는데, 2006년과 2007년에 장군 진급심사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피트 게렌 육군청장이 일부러 그를 높이 평가하던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장군을 소환해서 2008년 세번째 진급심사에 배석시켜서야 겨우 진급이 승인되어 2009년 별을 달았는데, 이후에도 육군 높으신 분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고,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갔다온 뒤 2011년 소장 진급심사에서도 1차에서 탈락했다. 마틴 뎀프시 합참의장이 "우리 준장들 중 얘가 최고인듯"이란 발언까지 했는데도 겨우 2차에서야 진급심사를 통과했다. 이후 교육사령부 관련 보직들을 거치면서 경험을 쌓다가 2014년에는 척 헤이글 국방장관이 밀어주며 중장 진급이 확정되어 교육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영전했다.

미군 내에서의 평가는 형식과 절차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지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2014년 4월 타임지에서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타임지에서는 맥마스터를 '미 육군의 미래를 건설할 사람'이라 소개하기도 하였다.

실전에서 무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학문 및 정책 부문에서도 가시적인 성과를 나타내는 등 문무겸비의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여담으로 파워포인트를 까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헌데...

‎"파워포인트는 우리를 멍청하게 만든다 " - 매티스 장군
"파워포인트는 이해했다는 환상과 통제하고 있다는 환상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 - 마스터(이름 참...) 장군

  1. 합참의장으로 퇴역한 후에 남베트남 대사로 가서 롤링썬더 작전의 배후로 활동, 군대를 외교의 수단으로 써먹었다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