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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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영공을 비행하는 미,영 연합군의 군용기

이라크 전쟁 관련 사건
이라크 자유 작전이라크 무장투쟁(2003-2011)이라크 내전(2006-2007)미군 철수(2011)이라크 내전(2014)

2003.03.20 ~ 2011.01.23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벌어진 수니파, 시아파 무장조직간 항쟁은 이라크 내전 2번 항목 참조
2014년부터 전면전으로 과열된 현상황은 이라크 내전 3번 항목 참조

21세기 현재까지 미국이 저지른 가장 최악의 실책
제2의 베트남 전쟁

1 개요

미국이라크를 침공하여 사담 후세인 정부를 완전히 무너뜨린 전쟁. 테러와의 전쟁 중 두번째 전쟁이다. 1991년의 걸프 전쟁에 이어 두번째로 일어났다고 해서 제2차 걸프전쟁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2014년 5월부터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3차 걸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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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어제의 이라크 (후세인의 명찰에 쓰인 말은 '바그다드의 도살자')
오른쪽: 오늘날 이라크

2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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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클 샘: 나를 다치게한 놈들을 찾아라!!
개 = 조지 부시[1]
나무 = 이라크

알 카에다9.11 테러이후 미국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던 이 행위에 더불어 이라크가 유엔이 금지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정보가 미국 귀에 들어갔다. 특히 트레일러를 개조한 이동식 실험실에서 탄저병생물학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정보가 이라크 망명자들에게서 나왔다. 이들은 후세인 정권이 1981년 이스라엘군의 오시라크 원자로 폭격으로 좌절됐던 핵무기 개발도 재개했으며, 화학 무기에 관련된 자료도 제시했다. 미국의 조지 부시 행정부는 이와 관련한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이라크를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국제 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인 이라크 침공을 결정하였다. 구체적으론 사담 후세인 바트당 정권을 타도하여 독재에 신음하는 이라크 민중을 해방시키고,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여 세계평화에 기여하며, 이라크에 (친미)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여 중동을 민주화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론 석유중동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이란 주장이 많았다. 현대 문명을 좌지우지하는 석유의 보고 중동을 확실하게 미국의 영향력 하에 두기 위해서, 세계 2위의 석유매장량과 중동의 한복판이란 전략적 요충지인 이라크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아버지 부시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겁도 없이 암살(!)까지 시도했던[2] 사담 후세인에 대한 아들 부시의 복수심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다는 추측도 나왔다. 부시 효자네

당시는 셰일 가스신재생에너지 개발이 지금처럼 진척되기 전으로 중동석유는 미국과 전세계 모두에게 지금보다도 훨씬 더 중요했다.[3] 따라서 미국의 세계 패권에 중동의 안정은 필수적이었다. 문제는 중동 한복판에 시리아-이라크-이란으로 이어지는 노골적인 반미 국가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역대 미국 정부는 중동내 국가와 이슬람 종파간의 대립을 이용해서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했지만, 아들 부시와 네오콘은 단순무식하게 때려부시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조지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를 점령하고 친미정권을 세우는데 성공하면, 바로 시리아 혹은 이란을 공격할 것이란 예측도 많았다.[4]

중동에서 이라크가 첫 목표가 된것은 걸프전이란 원죄를 비롯하여, 사담 후세인의 가혹한 독재를 물리치는 민주주의의 수호자 깃발을 들 수 있고, 게다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증거까지 나왔으니 조지 부시 행정부는 이정도면 명분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양념처럼 들어가는 것이 냉전 종식 이후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던 군수업체들과 이들과 긴밀히 연결되있는 군부와 정계 인사들 소위 군산복합체가 전쟁을 원하고 있었다는 배후조종설이다. 보통 이라크의 석유를 탐내던 석유자본들도 함께 거론된다.[5] 일단 군수업계와 석유자본이 공화당(미국)의 주요 자금줄이고, 조지 부시 행정부가 일관되게 이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밀고 나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6] 당연히 전쟁은 무기업체에겐 호재이고, 이라크가 친미국가가 된다면 자기들한테도 기회가 올꺼라 생각하는 석유자본들도 환영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헐리웃 영화마냥 단순히 이들이 배후조종해서 이라크 전쟁을 결정했다는 건 지나친 비약이자 명백한 음모론이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설명되지 않는, 오히려 상충되는 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조지 워커 부시 행정부가 유독 많은 적수들[7] 중에서도 사담 후세인을 가장 위험한 상대로 보고 그를 끝까지 제거하려고 전쟁을 벌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8]

헬리버튼을 비롯한 민간군사기업들의 부정부패와 만행, 그리고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 없이 미국기업들의 배만 불려주는 것으로 끝난 이라크 재건사업을 예로 들면서 이것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헬리버튼 대주주 딕 체니 부통령을 위시해서 공화당과 네오콘 인사들이 이 과정에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 사실도 함께 들고 나온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의 심각한 정경유착과 이런 부정부패를 견제하지 못하는 허술한 시스템을 보여주는 결과론이지, 이게 전쟁의 원인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반대로 전쟁으로 인해 채굴이 힘들 정도로 치안이 막장인 상황과 심각하게 불어난 전쟁비용 때문에 각종 신무기 개발사업이 대부분 취소된 점을 들어서 군수업체와 석유자본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것도 결과론에 불과하다.

군수업체와 석유자본이 부시 행정부의 의사결정을 완전히 좌지우지한 것도 아니지만, 반대로 완전히 연관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공화당과 네오콘의 자금줄이자, (단기적으론) 그들에게 전쟁은 명백한 호재였으니까. 9.11 테러로 호전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자 전쟁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 정도가 진실에 가까운게 아닐까 하는 추측들이 많다. 이 부분은 지금도 정치권, 언론,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므로 조금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또 하나 이라크 전쟁의 배경에는 9.11 테러로 촉발된 '새로운 전쟁'[9]에 대한 수뇌부들의 이해력 부족도 원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를 비롯한 미국 수뇌부들은 여전히 과거의 전략개념에 사로잡혀 있어서 "국가도 아닌 일개 테러조직 따위가 이런 작전을 펼칠 능력이 있을리가 없다! 분명 기존의 적성국가들 중에 이녀석들을 지원한 놈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유력했던 게 그들의 입장에서 보기엔 같은 이슬람이고 9.11 테러 이후로도 주제도 모르고 공공연하게 미국에 적대심을 보여 온 사담 후세인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보였던 것이다. 사실 중동과 이슬람에 대해서 조금만 알고 있다면, 이게 얼마나 무식한 이야기인지 알 수 있지만, 이 시기 대외 정책 수뇌부들은 전통의 적수 러시아와 새로운 적수로 부상한 중국 관련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자기들의 전문 분야가 아닌 중동권에 대해서는 무지를 드러냈다. 따라서 이슬람의 복잡한 종파관계나 중동의 정치 환경이 어떤 지도 모른 채 이슬람 근본주의자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와 아랍민족주의/세속주의 성향의 후세인 바트당 정권이 협력관계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10][11][12] 실제로 이들은 정권 인수인계 작업을 할때, 클린턴 민주당 행정부 인사가 알카에다를 조심하라고 조언하자, 알카에다가 뭐요?라고 반문했을 정도로 중동과 이슬람에 대해서 무식했다.[13]

2.1 실상

2016년 기준으로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후세인을 쫓아내려고 거짓 정보를 제공한 이라크 망명자들의 말만 믿고 다른 정보들을 무시한 수뇌부의 총체적 무능으로 결론으로 나는 중이다.[14]

전쟁이 끝난 후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Weapons of Mass Destruction)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미국과 영국, 호주 정보기관이 중심이 된 이라크사찰단(Irag Survey Group)은 이라크 전역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대량살상무기를 찾지 못했다. 이들은 1년이 넘는 활동 끝에 2004년 10월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에 제출한 1000페이지 분량의 최종보고서에서 "지난해 미국의 침공 때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라크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UNIAEA 사찰단은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WMD)가 없으며, 대량살상무기 개발 흔적도 없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전후에 진행된 이라크사찰단과 미국 상원의 조사도 똑같은 결론을 내린 것이다.

또한 CIA 등 정보 기관에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100% 확신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점을 부시 행정부에 보고했지만 무시당했다는 것이 전후 미상원의원위원회 보고서에서 드러났다.

무엇보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 직전인 2003년 1월 28일 국정연설에서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운게 "이라크가 아프리카에서 대량의 우라늄을 구매하였다."라는 것이었다. 민간용 핵프로그램도 없는 이라크가 우라늄을 산다는건 핵무기 개발용이라는게 부시의 주장이었으나, 이 정보는 신빙성이 부족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영국 정보국(SIS)가 제공한 이 정보에 대해서 CIA는 근거가 부족하다면서 연설문에서 빼라고 요청했으나, 백악관이 무시했다고 한다. 이라크 전쟁 직후에 영국 하원 외교위원회는 정보의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보고서를 발표했으며, 부시 행정부도 잘못된 증거라고 공식인정하였다. 참고로 미국은 이라크에서 단 1g의 우라늄도 발견하지 못했다.

또한 미군은 이동식 생물학 무기 실험실인 트레일러 2대를 발견했다고 발표했으나, 이 조차도 오해로 드러났다. 기상관측용 열기구를 위한 수소 생산 시설이었다고.

나중에 밝혀진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이라크 망명자들이 거짓 정보를 계속 제공했다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들은 이들에게 많이 의존하고 있었는데, 망명자들은 미국과 영국을 부추겨서 후세인 정권을 압박하기 위해서 위에 언급된 우라늄 구입설, 이동식 생물학 무기 실험실 등의 조작된 증거를 계속 만들어 냈던 것이다.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 관련한 정보는 대부분 이들에게서 나왔는데, 모두 조작된 것으로 판명됐다. [15]

공화당(미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이라크망명자 그룹[16][17]이 제공하는 조작된 증거 때문에 미국의 부시 행정부와 영국의 블레어 내각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대규모로 은닉하고 있다는 확신를 가지고, 이와 상충된 다른 증거들은 고의로 무시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답정너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이다. 여기에 미국내 국방부, 국무부 및 CIA, DIA 등 여러 정보기관들간의 경쟁과 폐쇄성, 정보공유 부족이 상황을 더욱더 복잡하게 만들어서 여러가지 서로 상충되는 정보 속에서도 백악관이 자기들 맘대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전후 밝혀진 이런 사실은 정부가 전쟁을 위해서 국민을 기만한 WMD게이트라는 표현까지 등장할 정도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2005년 12월 부시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다른 정부들의 정보기관들이 제공한 정보를 과신한 것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고, 정보기관 개혁에 착수했음을 밝혔다.

또한 부시 행정부가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던 후세인-빈라덴 협력설도 어떠한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라크 감옥에서 수감중이던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만 확인됐을 뿐이다.[18]

여담이지만 2014년 10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가 이라크, 시리아 일대에서 실제로 겨자 가스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알고보니 부시가 다른 의미로 옳았던 것 아니냐라는 의견도 등장하고 있으나 애당초 이라크 내에서는 폐기되거나 주인을 잃은 독가스 무기들은 있었다. 그리고 부시가 말한 대량살상무기는 환경에 따라 살상력이 차이가 나는 독가스 따위가 아니라 핵무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19]

2016년에 발표된 영국의 이라크 전쟁 조사 보고서인 칠콧 보고서에서도 전쟁을 결정한 수뇌부들이 이라크에 대한 잘못된 정보에 더 관심을 보이고 상충되는 정보들은 무시하였다는 정황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심지어 정보원들이 제공한 내용 중에는 영화 더 록의 내용을 베낀 황당한 내용의 정보도 있었음에도 이를 믿은 것이 드러났다. 그 외에도 군사 개입이 아닌 다른 옵션들도 충분히 고려해봄직했음에도 고려조차 안한 것, 전쟁에 돌입했는데도 이와 관련된 준비는 하나도 하지 않은 점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3 전개

3.1 너무나도 쉬웠던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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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사상태의 전갈(이라크 게릴라들.)이 독수리(미군)에게: "항복... 아직... 안했냐?"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기관의 보고서를 확대해석하여 이라크 침공을 준비한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보고서가 나오기도 전인 2002년부터 이미 CIA와 군정보부대의 정찰조를 이라크에 잠입시켜 치밀하게 사전준비를 하였다. 이들은 사전정찰은 물론 이라크군의 주요 지휘관들을 포섭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후세인 정권에서 탄압받고 있던 쿠르드족과 같은 소수민족을 부추켜 침공시에 미군을 돕도록 사전 정지작업을 폈다.

많은 중동 전문가들이 이미 후세인 체제 전복은 헬게이트를 열 것이라고 여러번 경고를 했다. 그러나 미국의 네오콘, 그리고 공화당(미국)의 지지기반 중 하나인 근본주의 기독교 우파 세력은 노골적으로 전쟁을 부추겼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팻 로버트슨을 선두로 미국의 극우 목사들이 줄줄이 나서 중동의 복음화를 위해 부시 대통령에게 힘을 줘야한다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기도 했다. 부시 자신은 중동국가들의 반발 때문에 저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부시 스스로 제2의 십자군 전쟁이라고 떠들었다.[20] 물론 이슬람권의 반발 때문에 바로 말을 돌렸지만, 미국 내부적으로는 극우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제2의 십자군전쟁이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떠들고 있었다. 미국 내 여론에서도 이라크에서 이 시기 미국인들을 비통하게 했던 STS-107 컬럼비아 우주왕복선 사고를 두고 고인드립을 친지라[21] 이라크에 대한 감정이 영 좋지 않았다.

2003년 3월 10일, 미국은 사담 후세인에게 조건부 개전선언이 포함된(48시간 내 이라크를 떠나지 않을 시 군사작전 돌입) 최후통첩을 전달했고, 이라크는 이를 간단히 씹었다.

2003년 3월 21일, 공습을 받은 바그다드 후세인 대통령 관저 (충격과 공포 작전)

2003년 3월 20일 바그다드 현지시각 오전 5시 34분에 미군의 침공이 개시되었다. 침공군 총사령관은 미 육군대장 토미 프랭크스 장군이었고, 작전명은 이라크 자유 작전 (Operation Iraqi Freedom). 총 침공군수는 미군 24만, 영국군 4만5천, 오스트레일리아군 2천, 폴란드군 194명으로 어림잡아 30만여 명. 이들은 공습 뒤에 북부 쿠르드지역과 남부 쿠웨이트로부터 동시에 침공했다. 여기에 쿠르드 지역군 7만 명이 가세했다.

이렇게 보면 정당한 선전포고가 없었던 것으로도 보이지만, 부시의 최후통첩에 조건부 개전선언이 포함되어 있었다.(48시간 내 이라크를 떠나지 않을 시 군사작전 돌입) 이건 최후통첩과 선전포고를 동시에 한 것이다. 보통 최후통첩을 적국에 전달하고 출병 직전 개전선언을 하는 것이 원칙이나, 부시는 조건부 개전선언을 넣은 것으로 이러한 부분을 처리했다. 물론 애시당초 선전포고가 있었건 없었건 명분 자체가 없는 전쟁이라서 의미는 없다. 거기다 침공 직전에는 사담후세인의 자진퇴진여부와 상관없이 군사작전에 돌입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사실상 후세인 퇴진이라는 침공명분은 허구였음이 입증되었다.

이라크군과 민병대는 산발적 저항을 하기는 했으나 막강한 미군 및 동맹군을 저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남부 지역에서의 전투는 패배를 거듭했고, 4월에 이르러 사막의 모래 폭풍으로 미군의 진격이 잠시 묶인 틈을 타 공화국수비대를 투입해 공세를 벌였는데 그나마 이라크군 내에서 정규군이라 할 법한 유일한 병력이었지만[22] 전면 대결에 나섰어도 미군에게 피해를 강요할수 있었을 리가 없다. 이라크전 때와 비교할수 없이 강성하던 걸프전 시절에도 탈탈 털렸던 이라크군이었고, 이라크전 때에도 이건 변하지 않았다. 미군은 항공전력을 동원한 대규모 융단폭격으로 대응하고, 하필 전면 충돌 직전에 모래바람이 걷히는 바람에 결국 붕괴되고 남은 병력은 중장비를 버린 채 퇴각. 물론 역으로 그 덕택에 대부분의 병력이 건재한 상태로 전장을 이탈하여 후일 후세인 일파 소속의 저항군으로 합류하게 된다.

이외 사담 후세인의 저항도 상당했지만 역시 미군에게 끈질긴 저항으로 다수의 사상자를 강요하는 것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다만 이들의 준동으로 후방 지역에서의 미군의 피해가 상당했고, 역시 전쟁 이후에도 대부분이 살아남아 저항세력에 합류하게 된다.

이후에도 진격이 계속되어 침공 2주만인 4월 9일 바그다드는 함락되었고, 후세인 정부는 붕괴했다. 4월 30일까지의 이라크군의 전사자는 9,200명, 민간인 사망자는 7,299명, 그리고 미군은 139명, 영국군은 33명이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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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1일 링컨함에 내린 조지 W. 부시 대통령

2003년 5월 1일 조지고 부시는 미국의 제43대 대통령S-3를 타고 산디아고에 정박중이던 링컨함에 착륙해서 후세인 정권 붕괴와 종전을 선언했다[23]

우선 미군의 전쟁수행 자체는 굉장히 우수했다. 걸프전도 그랬지만 각각 공화국 수비대의 격멸(걸프전)과 바그다드 점령(이라크전)이라는 목표를 깔끔하고 효율적으로 완수하였고. 걸프전과 마찬가지로 군 전체 병력은 25만 이상의 대규모였지만 대부분이 비전투부대 및 이를 호위하는 병력으로 실제 전선에 적극 투입된 건 2~3만명 밖에 되지않았는데 미군은 이런 소수의 전투병력으로 강력한 항공지원 아래 기동전을 펼쳐 이라크군을 연파. 단숨에 이라크의 전쟁수행 능력을 무너뜨렸다. 이는 풍부한 기갑전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군을 벤치마킹 한 것.

그러나 이렇게 깔끔하게 보이는 전과는 사실 이라크군이 경제난으로 완전히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때 100만명의 병력에 세계 4위의 군사력이라고 평가되던 이라크군은 1991년 걸프전 당시 주력부대가 거의 다 소멸되고 경제난까지 겹치면서 대폭 감축된 상태였다. 2003년 개전 직전에는 병력은 30만 안팎으로 떨어져 있었으며, 그나마 제대로 굴러가는 부대는 수만 명의 공화국 수비대 정도고 기타부대들은 동원마저 제대로 되지 않았다. 1990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금수조치 때문에 전차 같은 중화기는 거의 없었고 작전가능 항공기는 50여 대 이하였다. 이렇다 할 중장비마저 없었으니 공략의 난이도는 걸프전 때보다 현저히 낮다고 할 수 있다. 이라크가 전쟁 직전에 서방의 평화운동가들과 개전 반대 정치인들을 대거 자기네 돈으로 초청해서 자국의 이런 막장 상황을 견학시켜주면서 국제사회에 개전을 저지해 달라고 애처로울 정도로 애걸하기도 했을 정도.[24]

3.2 수렁 속으로: 점점 꼬여가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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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아들 왈: "어머니. 만일 미국인들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면, 그 모습이 어떨까요?"
어머니 왈: "좋겠지, 아마도... 우리가 그걸 알 수 있을날까지 살아있었으면 한다!"
- 미국이 외국에 개입해 봐야 민주주의를 심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걸 풍자한 것이다.[25]

2004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수렁으로 묘사된 이라크 국기로 빠져드는 미군).
- 실제로 이 때부터 미군은 말 그대로 소모전의 수렁에 빠진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2005년: '$1600억 달러 소녀.'[26]
소녀 = '이라크 신정부'.
왼쪽 글러브: '질서 유지'.
오른쪽 글러브: '민주주의 유지'.
부시: 봐라봐라... 계집애 기준의 터프함으로는 충분치 않아! (밀리언 달러 베이비 대사의 직접인용이 이루어진 부분.)
- 이라크 신정부의 무능과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심는 게 얼마나 골치아픈 일인지를 부시가 모르고 있음을 비꼬는 만평. 매번 전투는 이기지만, 민심은 얻지 못하고 전쟁에선 밀려나는 게 미군의 현실이었다.

2006년: '불행 완료.'
65,320, 65,321, 65,322, 65,323, 65,324... 번째 이라크 시민 사망
- 공식 집계된 사망자 수. 실제로는 이 시점에 이미 10만이 넘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종파분쟁 등으로 인한 사망자는 계속 나와 2015년 시점에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와의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포함해 20만에 달한다.

2007년: 4년째. 부시: "더 많은 인내심이 필요!!", 미군: "더 많은 환자가 있소!!" [27]

바그다드 병원 응급실 ->.
- 계속 사람이 죽어나가고 끝날 조짐도 보이질 않는데 부시는 오직 의지드립만 치는 것을 비꼬는 만평.

2008년: 5년째.
- 5라는 글자의 윗부분에는 제대로 된 관이 있고 여인이 통곡하고 있다. 그 안에 미군의 시신이 들어 있음을 시사한다.[28] 그리고 아래에는 제대로 된 관조차 없고 죽은 이라크 청소년의 시신 앞에 이라크 여인이 통곡하고 있다. 전쟁은 모두에게 상처만 남긴다.
- 더 중요한 것은 미국과 이라크에서 계속 사망자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2007년 미국이 수니파 온건 세력 포섭에 겨우 성공하면서[29] 일단 수습은 됐다. 딱 5년간만...

2009년: 전차 = 미국.
전차 아래는 미국 내부에서의 이라크 반전 운동.
전차 앞에는 국제적 이라크 반전 운동.
- 이 시점이면 미군의 전사자는 4,400명에 이르게 된다. 당시 상시적으로 이라크 땅에 유지된 미 지상군. 그 중에서도 일선 전투병이 고작 2~3만 명인데 그 중에 4400명이 죽은 것이다. 부상자까지 합치면 3만 6,000명에 달해 한해 유지되는 미군 전투병 이상의 병력이 죽거나 다쳤다. 참고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폐인이 된 미군은 이 계산에 포함도 안 됐다. 이들은 사회로 내몰린 뒤 현재 노숙자로 살아가고 있다.

2010년: 양쪽 전선(코끼리[30] 왼쪽: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코끼리 오른쪽: 이라크 전쟁.)으로 돈들이 끝없이 들어가다 못해 미국은 2010년 쯤엔 고갈 상태.
- 사실상 자본주가 말라 비틀어졌는데도 계속 돈을 요구하는 두 전쟁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국가를 잘 말아먹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2011년. '7년 반동안의 싸움: 무엇이 완수 되었는지 모르겠네.'
- 결국 해놓은 건 하나도 없었다.

위의 그림은 1차 이라크 전쟁 시작부터 끝을 간략하게 묘사했다.

병력이 적은 탓에 점령지역의 뒷정리가 미흡했고 그 때문에 전투부대 뒤에 따라오던 비전투 병과의 피해가 컸다. 이유는 기동성을 바탕으로 한 속도전 위주의 작전 때문이다. 선봉이 적진을 돌파하면 적 방어선을 뚫어놓고 유유히 다음 작전지로 돌진하면 그만이지만 뒤따라오던 후속부대는 정신차리고 반격준비를 마친 적 방어병력과 진짜 전투를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31]

소규모 정예 병력을 이용한 기동전으로 이라크군을 무너트리는 것은 철저히 럼즈펠드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놀라울 정도로 성공했다. 그러나 이라크군과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이후가 문제였다.

당시 에릭 신세키 미 육군 참모총장은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에게 점령지의 치안유지와 안정화를 위해선 침공때보다 훨씬 40-50만 정도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럼즈펠드는 이를 철저히 씹었을 뿐만 아니라 "침공보다 점령에 병사가 더 필요하다니 그 사람 제정신인가"라고 말하며 공개적으로 신세키를 비웃었다.[32] 상관이 이렇게 씹었던데다가, 신세키의 임기가 1년 가까이 남았는데 예스맨 후임자[33]를 지명해버림으로서 신세키의 리더십은 무너졌다. 신세키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대규모 병력를 파병하고 기존 이라크군도 치안유지에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장군들도 …. 전부 짤렸다. 안습.

럼즈펠드의 전략은 정규군과 정규군의 전쟁이었다면, 또한 이라크가 미국과 유사한 서양기독교문화권이었다면 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는 민주주의의 기반이라곤 전혀 없는 제3세계였으며, 전근대적인 이슬람근본주의가 활개치는 곳이었으며, 전후처리에서도 미국의 무능과 부패가 겹치면서 오히려 훗세인 정권때가 차라리 나았다는 의견이 이라크 민중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아무런 대책없이 기존 이라크군과 경찰을 모조리 해산시켜 버리면서, 이라크 전역에 엄청난 숫자의 반군이 출현하였다. 이제 현지 문화에도 불친절해서 민심을 얻지 못하며 고질적인 병력부족 때문에 치안유지도 제대로 못하는 미군과 구 체제의 잔당과 이슬람근본주의가 결합한 다수의 무장세력간의 내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자기 의견 안 따르는 장군들을 잘라내며 시작한 전쟁의 결과는 모두들 알고 있을것이다. 다만 럼즈펠드가 장군들의 말을 따를 수가 없었던 것은 현실적으로 미국의 국력이 더이상은 군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전비로 돈을 퍼붓고 있는데, 그보다 더 병력을 늘리게 되면 전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34] 이는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부시의 정책과도 모순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천하의 천조국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것들보다 훨씬 더 큰 문제는 나라살림 어려운 줄 알면서도 굳이 이라크를 쳐서 전선을 2개로 늘린 네오콘 그 자체였지만.

그런데 사실 이라크 치안 문제는 후세인 축출 후 이라크의 치안유지 인력을 제대로 보존하는 데 성공하기만 하면 그래도 부담이 덜어지는 문제였다. 아프가니스탄과는 달리 이라크는 준 근대화 국가였으므로 군대와 경찰의 수는 충분했기에 미군이 이들의 지휘권을 확보하고 이들을 치안유지로 돌린다면 미군의 치안유지 부담은 매우 줄어들 것이었고 부시 대통령도 치안유지에 이라크군을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CPA의 폴 브리머가 독단으로 이라크군을 전부 해산시켜버리고 바트당원들도 전부 숙청해버린 것이었지만.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바그다드 점령 후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가 나중에 미군 특수부대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당했다. 사담 후세인이 도망치는 과정에서 사담 후세인의 두 아들인 우다이 후세인쿠사이 후세인은 미군을 상대로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너무 쉽게 사살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전쟁 초기, 쉽게 끝날 것 같은 전쟁 이후 이라크 민중은 미군을 환영했다. 그러나, 몇달도 안가 그 환영은...

3.3 막장 전후 처리

전후 처리가 아주 심각할 정도로 개판이었다. 책 그린존[35](라지브 찬드라세카란 저, 북스토리)을 참고하시라. 그 세계 최강 미국이 한 짓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수준이었고, 무엇보다도 이런 무식한 정책을 몇 년이나 밀고 나갔는데도 결실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에서 막장이었다(...) 한마디로 미국 내외의 전문가들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것들만 골라서 했다. 이라크전쟁 내내 그랬다. 베트남 전쟁 당시 비효율의 극치였던 미군의 남베트남 정책마저도 이 따위는 아니었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전후 혼란스러운 이라크를 수습하는 역할을 맡았던 ORHA를 승계한 CPA 수장의 인사였는데 CPA의 수장으로 등극한 폴 브리머[36]는 자기만의 독선과 아집으로 이라크를 통치하려 했다. 그는 이슬람 문화에도 관심이 없었고 경제문제도 몰랐다. 그런 주제에 이라크에는 민주주의를 이룩하겠다고 선언했는데 문제는 그가 이라크 국민들을 바보로 여겼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심어주겠답시고 한 짓은 매우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이라 조직 내부에서도 큰 반발을 사게 되었고 이라크의 사회구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현실과는 동 떨어진 정책을 수도 없이 내놓았다. 게다가 브리머는 국무부와 국방부, 심지어는 백악관까지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통치했는데 이라크군 해산, 바트당 축출같은 초대형 삽질을 벌일 때도 한 마디의 통보도 없어서 조지 부시 대통령을 포함한 미 수뇌부를 멘붕시켰다(...). 게다가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어 가는데도 럼즈펠드는 가끔 자기 영역 침범할 때 종종 화를 내는 것 뺴고는 브리머가 무슨 짓을 하든 신경을 꺼 버렸고 백악관도 브리머의 행동을 딱히 문책하거나 해임하지도 않는 등 브리머의 막장행각을 내버려뒀다. 그만둬! 그리고 그 결과 이라크는 통치한지 몇 년 지나지도 않아 생지옥으로 변하게 된다.

  • 막나가는 인선: 전문가고 뭐고 민주당원이면 말할 것도 없고 온건 공화당원조차 공화당원답지 않다고 나가리(...). 조지 부시/공화당 충성도를 체크해 관료를 뽑아 보냈다. 그리고 이들은 주변에서 추천해주는 이라크에 관련된 논문이나 학술서, 전문가의 충고를 완전히 무시했다. 게다가 럼스펠드의 국방부를 비롯한 네오콘들은 여기에 더해 자신들이 전후 이라크의 차기 지도자로 내정한 이라크 출신 망명자 아흐메드 찰라비를 지지하고 있었고 아흐메드 찰라비와 의견이 다르거나 그를 방해할 수 있다고 여겨진 인사들에게 압력을 가하거나 자리에서 내쫓거나 협조를 취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여기에는 대 이라크 전문가와 국무부 인사, 심지어 자신들이 임명한 이라크 담당 부서 직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게 이들은 네오콘들이 내정한 인사들이 앉기 전까지 잠시 맡는 바지사장 역할만 맡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이들이 전문가였고 네오콘들이 앉히려는 인물들은 공화당 충성도 테스트를 통과한 것 말고는 능력도 없었던 것이지만(...). 그 결과로 맨 처음 이라크의 수습을 맡았던 제이 가너의 ORHA는, 한국으로 비유하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 것도 없이 네이버 지식인에 의존하여 나라를 통치하는" 지경에 이르러야 했다.뭐? 지식인에 의존했다고? 의존조차 없었다
  • 소수 정예를 통한 소규모 정밀 타격 전략은 이라크군을 무력화하는 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혼란에 빠진 이라크의 치안을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고 그 결과 전쟁 초기에 이라크에서 벌어진 폭동으로 주요 관공서들이 모조리 불타거나 도난을 당하기 시작했다. 이들 자료들은 당연히 전후 이라크 재건에 필수적인 정보들이었고 ORHA는 국방부에게 이들 관공서를 지킬 병력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럼즈펠드는 씹었다.
  • 괴상한 정책: 이를테면, 실행되던 배급제를 완전 철폐하고 '충전식 현금 카드'를 배포하였다. 말만 들으면 전자화로 효율이 좋아질게 아닌가 싶으나 이게 실행되던 2003년에서 2004년 당시, 이라크에는 현금 인출기나 카드 리더기가 아예 없었다. 카드고 뭐고 기계가 있어야 써먹을것이 아니겠는가. 덤으로 이라크의 전기, 통신 체계도 낙후되고 전쟁통에 손상되어 엉망진창이었다. 당장 이라크의 도시 한가운데만 나가봐도 현금 카드는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알 수 있었을 터, 카드 도입을 생각한 책임자는 이라크의 상황이 어떤지 조금의 조사조차도 안해봤다는 것이다.
또한 금연 켐페인에 열을 올렸다. 이건 뭐가 문제냐면, 당시 환자로 넘쳐나는 이라크 병원들에는 약이고 물자고 모자라서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당장 전쟁이나 사고로 다친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약품류 충당은 커녕 웬 금연이란 말인가.
한마디로 책임자라는 사람들이 철저한 책상물림 및 비전문가들 뿐이라 현실 감각이 전혀 없었던 것. 급기야 CPA의 이런 짓 때문에 골치를 썩던 미군들, 특히 민정대들(영어론 Civil Affairs Detachment)은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CPA가 Can't Produce Anything(아무것도 못 해요)의 약자라고 비아냥거렸다.
  • 전쟁통에 이라크의 회계, 재정관련 서류들이 엄청나게 손실되었다. 당연히 국가를 안정시키려면 이런 판국에서도 남은 서류를 긁어모으거나 생존자들의 증언을 어떡해서든 찾아야 한다. 그런데 계산하기 귀찮다고(…) 이라크 국영기업들의 예금과 부채를 죄다 0으로 맞춰버렸다. 이건 일단 국제법 위반 사항에, 부채가 쌓여가던 망하는 기업이 살아나고 예금이 쌓여가는 멀쩡한 기업이 망해버리는 파국을 불러왔다. 전후처리가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 있는 일화.
  • CPA에 부임하면서 입에 올린 자결권은 온데간데없이 총선거, 지방선거를 무효화하고 지도자를 지명하는 식으로 오히려 민주주의를 뿌리째 뽑는 일을 벌여서 내심 선거를 통해 영향력 확대를 기대하면서 미군을 환영하던 시아파의 지도자들도 적으로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민주적인 기준 하에 이라크 인들의 지지를 받는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게 될 경우 이런 법안을 절대로 통과시킬 수 없을 테니. 물론(?) 시아파 지도자들에 대한 대우 자체도 개판이었다. 이라크 시아파의 실질적인 수장인 아야톨라 올 오즈마와 협상할 때 미국 측에서 대표로 보낸 이는 어느 비뇨기과 의사였다. 이유는 그 의사의 아버지가 이라크 출신 이민자라는 것 뿐이었다. 사실 애초에 선거 자체도 불가능했던 것이, 수십년간의 바트당 독재 하에서 선거가 치러져 본 적이 없어 선거명부 자체가 없었으며, 이를 대체할 인구조사 자료는 바그다드 약탈 당시 미군의 방관(!) 하에 모든 기록이 불탔다. 이후에는 이라크의 극심한 혼란때문에 인구조사 자체가 불가능했다.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들어왔던 셈. 문명4에서처럼 민주주의를 선택하는 것만으로 민주주의가 알아서 될 거라고 생각한 건가?
  • 게다가 CPA는 미군과도 제대로 협조체제가 구축되지 않아서 자신들이 하는 일에 조언을 구하거나 의견을 물어보거나, 혹은 이를 미리 통보하거나 하지 않았다. 이라크 군대를 해산시킬때도, 알 사드르의 신문사를 폐쇄하고 심복들을 잡아가둘 때도 미군에게는 전혀 알리지 않았다.[37] 그 결과 CPA와 미군의 사이가 껄끄러워졌음은 물론 이라크 복구나 재건도 엉망진창이 되었다. 온갖 국제분쟁에 개입한 경력이 있는 미군이니 만큼 전후 복구나 재건에 경험을 갖춘 이들이 여럿 있었으며 이들을 잘 활용하면 괜찮은 결과를 얻을수도 있었다. 하지만 CPA는 막무가내였다.
  • 전쟁 직후의 혼란통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이라크 경찰을 그대로 방치해두었고 그 결과 2003년~2004년 당시 9만명 정도 됐던 이라크 경찰관들은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했고 장비도 형편없었다. 한 예로 이라크의 한 경찰서에는 140명의 경찰관이 있었다. 그런데 소총은 10자루, 차량은 3대, 무전기는 딱 2대있었다. 당연히 치안상태가 점차 나빠지다 온갖 범죄가 판을 치더니 급기야 2004년 중반부터는 이라크 각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도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반면 이들을 공격하는 반군은 농민들을 시켜 수입을 어느정도 나눠주는 조건으로 양귀비를 재배케 하여 밀매하는 방법으로 돈을 벌어 압도적인 무장과 화력으로 이라크 경찰을 공격했다. 게다가 미국을 몰아내려는 이라크 국민들의 여론 및 주변국의 대규모 지원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특정 국가가 가진 저항 여력은 한계가 명백했지만 외부에서 계속 지원이 들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결국 이라크 경찰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경찰서는 심심하면 반군의 공격을 받아 일하던 경찰이 사망하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경찰들에게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장비의 수준이 반군들에 비해 한참을 밀리는 수준이라 암시장에서 본인의 자비를 들여 무장을 해야했다. 물론 그럼에도 경찰이 꾸준히 충원되긴 했는데... 그 이유가 걸작이다: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 전후 복구 사업도 기업들에게 맡겨놨는데 사업을 따낸 기업이 하청을 주면서 일부를 떼먹고, 하청을 받은 업체가 다른 업체에 하청을, 그 업체가 또 다른 업체에 하청을 주는 식(...)으로 그야말로 수십다리를 건너버렸다. 왠지 엄청 익숙하다?당연히 실적은 '0'에 가까웠다. 한 건설회사는 의료시설 142곳을 건설하기 위해 1억 8600만 달러를 지급받았으나 완공된 것은 단 6개 시설, 그것도 정상적인 이용조차 의심될 상태였다.
이런 범죄자 중 단지 일부만이 사기혐의로 버지니아주 법원에서 소송을 당해 유죄 판결을 받고 1000만 달러를 배상하라 했으나 우리는 미국 정부 소속이 아니라 연합군 임시행정처 소속이다. 그러므로 미국법에 따른 이 판결은 무효라 주장했는데 이게 진짜 법적으로 문제가 없어 재판에서도 먹혀들어갔다. 민영화를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 좋은 사례. 말 그대로 대의는 전혀 없고 장삿속만 잔뜩 있으니 이라크인들을 위할 만한 일을 해줄 리가 없다.
이 꼴이니 미국의 '국익'을 위한 이라크 내 석유 시설의 복구 및 운영도 개판이긴 마찬가지여서 실질적으로 미국 국내의 석유 공급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라크의 자유'와 같은 어설픈 명분이 아닌 실질적인 전쟁 원인이 석유 확보인 주제에 말이다. 차라리 미군이 19세기 식민지 경영처럼 대놓고 석유를 착취하려 작정했다고 쳐도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 이라크의 실질적인 치안을 담당하는 미군 병사들의 질적 수준이 점차 낮아졌다. 전쟁이 계속 길어지며 사상자는 날로 늘어나는데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평범한 미국인들 사이에서 전쟁에 대한 염증이 시나브로 확산되었다. 당연히 군지원자들도 점차 줄어들었고, 병력충원에 애를 먹게된 미군은 어쩔 수 없이 병사 선발 기준을 대폭 낮추게 된다.[38] 이러면서 정신이상자, 극우꼴통, 인종차별주의자, 단순 범죄자에서 심지어 갱단원 등 군복무는 커녕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할지 의심스러운 사회부적응자들이 대거 군대로 유입되었다. 안그래도 미군은 언어/문화/종교가 다른 현지인들하고 잘지내지 못하는걸로 유명한데, 군인들의 수준이 하락하면서 온갖 엽기적인 사건사고가 폭발하였다. 의사소통조차 원할하지 않은 이라크인을 상대로 검문에 불응한다 싶으면 일단 발포하는 미친짓을 저지른 끝에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들이 무지막지하게 발생했다. 전쟁스트레스에 찌들은 미군병사들은 게릴라, 테러범들에 의해 아군 병사가 죽으면 다른 이라크인에게 화풀이하거나 가축에게 총을 쏴버리기도 했다. 심지어 단순한 화풀이나 복수를 넘어서 말 그대로 재미삼아서 사람을 학대하고 죽여버리는 등 민간인 피해가 속출하였다. 2004년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는 포로학대 사건까지 터졌다.당시 사진[39] 미국이 아닌 영국인들이 벌인 짓이긴 하나, 김혜자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책자를 보면 이라크 전쟁 당시 영국군 병사들이 이유도 없이 이라크 소년을 때려죽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병사들은 즉각 구속되어 재판을 거쳐 수감되었는데, 이 가해자들의 변명이 기가 막힌다. 이 소년이 폭탄 테러를 저지를 것 같아 정당방어 차원에서 살해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 쓰레기들은 이 이라크 소년을 수십 분에 걸쳐 웃고 떠들며 때려죽였다고 한다. 살해당한 소년의 유족들에게는 보상금 명목으로 양 90마리가 지급되었다. 결국 이라크 사람들은 미국에 대한 증오가 쌓이다 곪아 터지기에 이르렀고 늦게서야 상황을 파악한 수뇌부가 병사들을 단속하고 처벌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이라크인들의 분노는 돌이킬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른 것, 결국 치안유지는 커녕 반란군만 폭증했다. 여기에 영어를 하지 못하는 불법이민자 청년들을 시민권을 조건으로 입대시키자 미군 병사들 사이에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문제까지 발생했다.
  • 이라크 현지 문화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통치 방식도 최악이었다. 모스크는 이슬람교의 '신전' 개념이다. 당연히 경건하게 신발을 벗고 조용하게 입장해야하고, 지역에 따라서는 입장 자체가 이슬람교도만 가능한 모스크도 있다. 그런데 미군 병사들이 마스지드(모스크)를 처들어가 강제 수색하는데 이런 장소를 최소한의 예의는커녕, 무슨 적군 본거지 수색하는 것마냥 밀고 들어간 것이다. 당연히 현지인들의 분노는 커지기만 했다. 뭐만 하면 총을 갈겨 살해하고, 신분확인을 한답시고 니캅이나 차도르 차림의 여성들에게 강제로 얼굴을 내보이게 하여 여성들은 겁에 질려 울기까지 했으며 남자들은 격노하여 격하게 항의했으나 좋게 끝나봐야 무시, 총으로 위협하거나 사살당하기만 했다.
이슬람 문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게 수십 년을 교류한 혈맹조차 하루아침에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들 최악의 행위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이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집에 타인을 가급적 들이지 않음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사실 무엇보다, 이슬람을 떠나서 어떤 문화권에서도 웬 총 든 군인이 자기 집 문을 와장창 부수고 들어와 테러범이 있는 게 아니냐며 윽박지르는 게 용인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거기다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나라에서 여성들의 얼굴을 억지로 들추며 희롱하는 행위까지 아무렇지 않게 해댔으니 분노가 폭발할 수 밖에 없다. 결국 현지인들을 완벽하게 적으로 돌리고나서야 자기들이 사고쳤다고 깨달은 수뇌부가 수색은 정중하게 행하고, 모스크에는 현지인으로 구성된 이라크군이나 경찰만 들여보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미 늦었다. SBS 뉴스 PD인 김영미는 2004년 이라크를 가서 현지 취재를 하며 저항세력까지 만나 인터뷰했다.(미국에게 자료 넘기지 말고 복면하고 그 자료를 자기에게 줘서 확인하게끔 하면 인터뷰에 응해주었다고.)
이렇게 미국이 적대적으로 돌린 현지인들 중에는 후세인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처음에는 미군을 환영했지만 저지르는 갖은 병크와 만행에 놀라 반군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김영미 PD는 저항세력에 이어 미군 병사들 상대로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이 병사들은 우리가 이라크에 자유를 찾아주고, 지원도 해주니 당연히 이라크인들은 고마워해야 한다는 식의 사상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이때는 전쟁 초기였다. 나중으로 갈수록 미군 병사들의 질적 수준이 마구 떨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나중에는 어떤 정도였는지 대략 감이 온다. 황당해진 취재진이 당신네들 집에 누가 처들어와서 들쑤시고 돌아다니고 돈을 던져줘도 좋겠냐고 묻자 병사들이 뭐라 반박하지 않고 그냥 인터뷰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미군은 수렁 속으로 알아서 들어간 셈이었다.
  • 그린존 내에서 일하는 이라크인 관료 및 통역사 등에 대한 문화적 배려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한 예로 그린존 내의 식당들은 미국인들이 '마치 고향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도록 베이컨, 핫도그, 폭찹 등의 미국 요리들을 제공했다. 문제는 이라크인 직원들도 이걸 먹어야 했다는 것이다. 무슬림들에게 돼지고기가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다는 이야기이다. 당연히 이라크 직원들은 욕을 퍼부으며 안 먹고 나가버렸고 그린존 내 군목 직업을 때려치기 일쑤였다. 그나마 상식이 있던 몇몇 미국 관료들은 개인적으로 따로 이라크인 직원들을 불러내어서 이라크 현지식을 대접하고, 주기적으로 날을 정해서 가끔이라도 이슬람식 식사를 제공하자고 상부에 건의했다. 하지만 이 건의는 당연히 묵살당했다. 참고로 그린존의 식당에서 '프렌치 프라이'는 팔지 않았었다. 대신 '프리덤 프라이'가 있었다. 그러나 몇 해 안가 슬쩍 프렌치 프라이로 이름이 돌아왔다...
  • 아주 조금의 아랍어도 모르는 병사들이 가득한데, 미군은 어설픈 통역조차 제대로 고용하지 않았다. 김영미 PD가 취재한 내용에서도 두 부모와 아이 3명의 한 이라크인 가족이 탑승한 차량을 미군 병사들이 검문을 위해 멈추게 했는데, 이때 미군 병사들은 아랍어로 '뒤'라는 뜻의 말만 내뱉었다. 차의 이라크 사람은 당연히 차를 후진시키라는 소리인줄 알고 차를 후진했는데 다짜고짜 총격을 가해 차에 탑승한 일가족 모두가 몰살당했다. 알고보니, '뒤' 소리를 연발한 미군은 차량 뒤 트렁크를 열어라라는 뜻에서 '뒤' 소리를 했던 것이었다.
살해당한 가족들의 친척, 이웃들은 격분하여 이 학살자들을 비난하고 처벌을 요구했으나 미군 기지로 몰린 수십여 명의 시위군중을 상대로 미군은 경고사격을 가했다. 결국 며칠 안가 분노한 사람들이 기지를 마구 공격하고 인근 지역 사람들이 통역이고 뭐고 미군에게 그 어떠한 협조도 하지 않아 미군은 낭패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더불어 취재진이 다른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니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고 한다. 미군 고위 관계자들에게 이 일화를 말해주자 그들도 당황해하면서 대충 영어만 통하거나 어찌 고용하면 될지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고 자신들의 준비 소홀을 인정했다.
  • 병력부족도 심각했다. CPA는 그린존 안에서만 상황을 보고 있었지만 이라크 전체의 상황은 안전한 그린존과는 180도 달랐다. 특히 미군의 경우 병력 부족이 너무나 심각했는데.. 원래 이라크전을 하기 전에 공격병력에서만 최소 2개 기갑사단이었고 점령 후 통제 안정화에서만 40만 병력 소요를 분명하게 했었다. 이는 각종 악재조건을 적용하고 적용해서 이라크 전체를 안정화 작전에 소요할 수 있는 미군 지상군 병력이 40만이라는 걸 그전부터 미국 내 전문가들은 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던 사항이지만 럼즈펠드가 과감하게 씹었다. 덕분에 미군은 부족한 병력으로 치안유지를 해야했고 지원을 할만한 동맹군들도 그들이 원하는 수요의 병력을 보내지를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동맹군들을 지원받는 데에도 여러가지 논란이 휩싸였다. 게다가 이라크 군경을 미군을 보조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병력부족은 심각했고 그 덕을 대량으로 본 게 바로 PMC들이었다.
  • 영화 그린존에서도 나오지만 이라크의 원래 기반 인력들을 초반부터 원큐에 날려버리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 미국 정부는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나오는 바트당 사람들을 전혀 몰랐고(...), 폴 브리머 군정장관이 탈바트당화라는 명분에 집착해 사방의 경고를 씹더니 바트당 관료 축출-이라크 군대 해산이라는 엄청난 짓을 저질러버렸다. 이 미친 짓거리는 이라크군을 확보해 부족한 치안유지병력을 확보하려 했던 국무부와 국방부는 물론 백악관의 부시 대통령까지 멘탈을 붕괴시켜버린 엄청난 삽질이었다. 덕분에 기존의 바트당 온건파[40]나 미국의 협조를 주장했던 세력은 완전히 몰락했다. 이라크 육군, 해군, 공군, 정보부 등을 무조건 해고하면서 기존의 이라크군 병력이 게릴라로 돌변하고 싸우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한마디로 정치적인 적과 군사적인 적을 대량으로 만들지 못해서 안달을 한 격이다. 적을 못 만들어서 안달하는 정책을 남발하면서 게릴라들을 대량으로 만들었던 데다가 나중에야 그 조치를 단계적으로 풀었지만 수니파나 바트당 등의 일원들은 미국을 믿지 않았다. 참고로 이런 혼란에 대해 럼스펠드는 "자유는 원래 어수선한거에요."라는 명언(?)을 남겼다.그리고 이라크 전쟁에서 굴욕적으로 물러났을때 "어수선한 자유가 이렇게 오래 갈지 아셨습니까? "라고 비아냥거리듯이 질문하는 기자들을 피해 다니며 입을 다물었다.
  • 바트당을 소멸시키며 수니파를 완전히 적으로 돌려버린 상황에서 그나마 남아있는 시아파와도 협조하지 않았고, 결국 시아파와 전혀 협의나 공조 등등이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국가 지도층에 앉혀 침략자 미국에 분노하는 수니파 민중 + 공조도 안되고 말도 안통하는 노답 시아파 근본주의자 국가 수뇌부 라는 절망적인 구도를 만들어놨다. 점령을 제대로 하려면 잠재적 저항세력을 몇가지 부류로 나눈 뒤 한 쪽을 끌어앉는 divide & rule 이 제국주의 시절 식민통치의 방식이었는데 나누기만 해놓고 통치는 못한 셈. 국가지도층과 민중이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된 상황에서 한쪽을 끌어들이지도 못하고 양쪽 모두 적이 된 상황이다. 물론 이라크정부는 겉으로는 친미를 표방했지만 이 시기 미국과 이라크 관계는 오늘날 중국과 북한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다(.........). 시아파 종교 지도자인 알시스타니와 폴 브리머 사이에는 전혀 교류가 이어지 않았고 초기 정권이양을 가지고 싸웠으며, 이는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 바트당 축출 또한 철저하지 못했다. 이라크의 핵심 공업도시 중 하나였던 팔루자는 열혈 바트당 지지세력으로, 우리나라 진보의 광주나 보수의 대구와 1:1, 아니 그 이상으로 대응되는 도시이다. 바그다드 못지않게 중요한 도시였으나 수도 점령만을 우선시한 미군은 이 지점까지 아예 오지도 않았으며, 이라크군이 해산되면서 팔루자의 무기와 공업생산력은 알카에다와 저항세력의 손에 고스란히 떨어졌다. 이후 2003년 4월까진 사실상 저항세력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4월 이후에는 대놓고 중앙정부의 지시에 반항하며 곳곳에서 저항활동이 벌어졌다. 이 저항은 2004년 4월까지 이어졌는데, 이 모든 사태의 정점은 "팔루자를 제압한 미국이 저항세력을 해산시키기는 커녕, 팔루자 여단이라는 이름 아래 저항세력을 공인하고 팔루자의 실질적인 통치를 맡겼으며 무기까지 제공한 것"이다. 이 팔루자 여단은 사실상 알카에다 하수세력이였으며 7개월 뒤 2차 팔루자 전투(....)로 와해되기 전까지 수많은 전사와 무기를 여러 은거지로 빼돌렸다. 더불어 2차 팔루자 전투는 팔루자를 거의 밀어버리다시피 했기 때문에 1차 때 그냥 민간인 희생을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라는 점이 중론이다.
  • 옛부터 타국을 점령하려면 우선 그 주민의 신뢰를 얻는 것이 우선이었다. 옛날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고 어떤 꼴이 났는지를 기억하자. 침공국 입장에서 가볍게 짓눌러 버릴 수 있는 완전 소국이거나 그게 아니라도 외부 지원 루트를 완전히 차단가능한 곳이 아닌 다음에야 이는 변함없는 법칙으로 역사에서 이미 여러 번 증명되었다. 바로 옆나라도 아니고 중동까지 원정온 소수의 미 원정군이 할수 있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자 유일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점령 방식은 민사 작전으로 이라크인들의 신뢰를 얻으면서 후세인 잔당과 이라크인을 분리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식의 형편없는 전후처리와 통치 방식을 남발한 미국은 이라크를 제어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버렸다. 사담 후세인 때보다도 훨씬 상황이 안 좋아진것이, 이제 이라크에는 국민감정상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이 들어설 가능성이 사라져버렸다. 실제로 이 꼴을 보고 이란 망명자들은 한 목소리로 이란에 대한 군사 공격에 결사 반대하게 된다. 미국이 이란에 쳐들어가서 이라크 VER 2.0을 연출할 것이 뻔한데, 그럼 이란인들은 당장 신정체제에 합류하여 다 같이 미국에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란은 인구 수로는 이라크의 2배가 넘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훨씬 넓은 땅에 그나마 사담 후세인을 죽여준 것을 고마워하기라도 하는 이라크인들과 달리 팔레비 왕조를 밀어준 것에 대한 반감이 커서 이라크처럼 내부분열로 내전보다는 미군에 대하여 힘을 합쳐 더 맹렬하게 공격할 가능성이 더 압도적이다.

3.4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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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렁에 빠지다

군사잡지 플래툰지의 종군기자인 태상호 기자가 06년 플래툰 컨벤션에서 꺼낸 말에 따르면, 당시 미군도 철군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으나 자신들이 치안을 박살내 놓았고, 주변국의 '자유의 투사'들까지 미군을 잡으러 온 상황에서 손을 빼면 정말로 개막장 소리를 듣기 십상이라 철군을 하고 싶어도 못한 상황이었다.[41] 그냥 있자니 주위 놈들은 죽여도 시원찮은 침략자 취급하고(아니, 뭐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그냥 손털고 나가면 지옥이 펼쳐져서 국제적으로 욕 퍼먹을게 뻔하기 때문.

그렇게 전쟁에, 그리고 재건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은 덕분에 크루세이더 자주포 등 미군이 개발중이던 차세대 병기들이 차례차례 취소당했고 결국 살아남은 건 얼마 안 된다. 아, 옷값 많이 들어서 만든 신형전투복 ACU도….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선 과도한 전선 확대가 결국 미군에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더불어 무기업체들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양 전선을 유지하기에 힘에 부친 미 행정부는 2009년 7월부터 미군 병력이 이라크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철수해 교외로 병력을 돌렸고, 2010년 8월 20일, 마지막 전투부대가 떠났으며(참모단과 훈련단은 2011년까지 주둔 후 철수) 9월 1일, 버락 후세인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이라크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끝났음을 선언하며 이라크전에서 완전히 손을 땠다. 그러나 이미 미군이 나간다고 사태가 안정될 단계는 지난 듯 싶다. 이라크 저항세력도 하도 많이 터져서 그나마 몇 년 전보단 안정화되었다는 평가가 분명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미군이 철수하고도 과연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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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이라크군에게 괴물(반군/저항세력)이 들어있는 상자를 넘겨주며: "준비됐지?"

미군이 나가면 당연하지만 이라크군과 경찰이 치안을 대신하게 되는데, 이라크 경찰에게 미국이 지급한 글록 권총이 며칠 뒤에 암시장에서 발견된 걸 보면(…) 글쎄올시다...[42] 한술 더 떠서 이라크의 군/경찰/민병대에 입대했다가 무기를 든 채로 탈영후, 이라크군이나 경찰의 제복을 입고 저항세력에 합류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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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어디엔가에 붙어있을 광고판...
내가 아직 그립지 않니?
뉴스: 폐허가 된 이라크, 반란군 바그다드로 전진

결국 어느정도 안정세를 보이는 듯하다가도 수니파시아파간의 계속되는 갈등과 정정불안, 테러를 끝내지 못하며 중동 역사상 유래없는 지옥구덩이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라크에서 손을 땐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실패한 전쟁으로 평가하며 당시 개전을 찬성한 칼럼니스트들중 몇몇은 사과하기도 했다. 2008년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오바마힐러리 클린턴에 가장 내세울 수 있었던 점이 본인이 흑인이라는 것도 있지만, 바로 이라크전을 반대했다는 점이었다. 이라크전 개전 당시 오바마는 일리노이주 주상원의원으로서 개전을 반대했다. 그리고 선거운동 기간동안 항상 이를 강조하며, "나는 미국이 위험한 길을 가는 것을 용감히 반대했다"는 것을 내세웠다. 당시 연방상원의원이었던 힐러리는 개전에 찬성표를 던졌다가 나중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이는 진보적인 지지자가 많은 민주당원들에게 큰 약점으로 비춰졌다. 당시 수렁에 빠지고 있던 테러와의 전쟁을 볼 때, 본선에서도 오바마의 이런 반대경력은 매파인 매케인에 대해 큰 이익이 되었음은 물론이다.이 전쟁이 이라크뿐 아니라 미국까지도 침체기에 몰고갔다는 점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3.5 지옥의 문이 열리다: 이라크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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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오른쪽은 이란의 하산 로하니 대통령. 문어가 든 깃발은 ISIL의 깃발. 문어에 빨려들어가는 사람은 누리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44]

결국 전후의 혼란을 극복하지 못한 이라크에 또다시 지옥도... 아니, 그걸 넘어서 이슬람권 전체에 재앙이 강림했다. 그리고 겨우 손때고 나갔던 미국 역시 이라크에 돌아오고 말았다. 생각 같아선 그냥 자기들끼리 죽이건 말건 내버려 두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터키이스라엘, 이란이 전면개입하면서 제5차 중동전쟁이 벌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는 게 중론. 아랍인들도 외부개입이 불가피하다면 그나마 이해관계상 제3자인 미국이 낫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라크 내전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참고.

4 국제적 반응

이라크 전쟁은 국제사회의 모든 나라들을 전쟁찬성과 전쟁반대로 갈라놓는 등 큰 찬반논란도 불러 일으켰다. 이라크전을 지지한 나라와 반대한 나라들은 다음과 같다.

  • 지지한 국가 - 영국, 덴마크, 폴란드, 이탈리아, 한국, 일본, 불가리아, 쿠웨이트, 오스트레일리아,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네덜란드
  • 반대한 국가 -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알제리,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권 국가들(쿠웨이트 제외), 독일, 프랑스, 그리스,[45] 인도네시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러시아,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 뉴질랜드, 멕시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터키, 캐나다,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이라크전에 반대한 국가들로는 중동, 북아프리카 아랍권 국가들이 많았다. 1991년 걸프전쟁에서 미국 밑 서방권 주도의 다국적군에 참전하여 이라크와 전쟁을 치뤘던 이집트와 시리아, 오만, 카타르, 모로코[46] 같은 아랍국가들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석유 자원을 노린 미국의 명분없는 일방적인 침략 전쟁이라며 참전을 거부했고[47] 아랍권 최대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걸프전 당시 다국적군에 참여하지 않은 요르단, 튀니지, 리비아, 예멘, 알제리 등 일부 아랍국가들도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미국과의 회담 취소 등으로 대응하며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다.그나마 아랍국가들중에 걸프 전 당시 이라크에게 침공당한 원한이 있었던 쿠웨이트만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했지만 쿠웨이트 한 나라만으로 미국은 아랍 국가들의 지지를 얻기에는 매우 역부족이었다.

덕분에 미국으로선 큰 낭패를 겪었는데 아랍 대부분이 지지하면서 미군 주둔도 허용하고 연료도 거저로 제공하던 걸프전쟁과 달리 미군으로선 이라크 전쟁에선 모두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쿠웨이트가 돕긴 했지만 큰 도움이 되질 못했다.

유럽의 경우 전쟁에 찬성한 국가와 반대한 국가들이 극렬하게 엇갈렸다. 영국은 부시 행정부가 전쟁을 강행하자 미군과 연합하여 전쟁에 참여하였고 이탈리아, 덴마크, 네덜란드는 미국을 도와 전쟁에 참전했다. 거기다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등 친미,친서방 노선으로 돌아서려던 일부 동유럽 국가들도 이라크전에 자국군 병력을 파견하고 노후 무기들을 이라크에 판매했다. [48] 그러나 사담 후세인 정부와 석유 사업을 벌이고 있던 독일과 프랑스 등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했고 영세 중립국인 스위스도 미국을 비난했다. 이밖에도 그리스, 크로아티아,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등 기타 유럽 국가들도 이라크전에 반대하였다. 동유럽 일부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이라크 침공에 명분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대했다. 게다가 동유럽 국가들이 이라크전에 찬성하는데에는 나토 가입문제가 컸다. 즉 미국이 나토 회원국을 미끼로 동유럽국가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낸 것. 물론 이러한 처사들은 부쿠레슈티 회담에서 기존 나토 회원국들이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반대함으로써 악영향을 미쳤다. 근데 이중에 프랑스와 독일은 4월 달에 들어서 미군이 바그다드 밖 10킬로미터까지 접근하자 자국 영공 사용을 승인하며 은근슬쩍 미국 지지로 선회했다.(...)

또한 전쟁에 찬성한 국가들도 국내에선 찬성과 반대의 의견이 엇갈렸으며,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반전운동이 폭발했다.

한국군의 참전 부분은 이라크 전쟁/한국군을 참조.

전쟁을 주도했던 미국의 국내 여론도 2003년만 해도 마돈나를 비롯한 자국 가수들이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뜻을 보이자 생매장할 듯이 분노하며 전쟁을 지지했지만 전쟁이 길어지고 미군 전사자와 부상자들의 모습과 막대한 군비 소모에 미국 여론도 지겨운 전쟁 싫다고 반대하는 움직임으로 확 달라졌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부시가 저지른 삽질 때문에 어차피 오래가지는 못할 전쟁이었다.

한 미군은 그야말로 겨우 살아돌아와서 미국에서 결혼식을 치렀는데 결혼사진이 국제세계에서 동정을 샀을 정도이다. 그 미군은 온 몸이 화상을 입어 그야말로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채로 화상을 당한 얼굴이었기 때문.[49] 하지만 이는 비참한 미군의 현실이라는 동정이란 모습으로 비치긴 했어도 그게 전쟁을 정당화하지는 못하여 이 사진을 보도하던 미국 우익 언론이 기대하던 미군의 희생, 이라크 박살내자 하는 전쟁 지지에 반대로 반전적인 인식만 더 타오르게 했다.

그리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반전여론이 거세지고 찬성하던 다국적군도 하나둘 줄줄이 철군 및 반전으로 간 지 오래되었다. 적극적으로 찬성하던 스페인은 2004년 3월 마드리드 지하철 폭탄테러를 당해 2백 명이 넘게 죽었다. 당시 아즈나르 정권은 이게 ETA 짓이라고 멋대로 발표하다가 알 카에다가 우리가 한 짓이라는 발표를 하면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결국 재선에서 참패했다. 반전과 이라크 철군을 공약으로 내세운 야당이 집권하자마자 스페인군을 전면 철수했는데 스페인에서도 반대가 심했지만 장기전 상황을 보고 그 때 철군하길 잘했다는 반응으로 돌아섰다고 한다. 다만 이 일을 계기로 이슬람에 대한 혐오도 강해졌다. 동기가 어쨌건 간에 엉뚱한 민간인들에게 폭탄 던져 수백 명이나 죽인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알 카에다는 이슬람권 내부에서도 맛간 근본주의자가 아니고서야 더럽게 욕을 먹는 단체다.

더불어 찬성한 나라들이 설마하니 아랍권 반발을 받을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일본 자위대는 이라크에 가서 자위대원들에게 모두 수염을 기르게하여 현지인 남성 비슷한 모습으로 최대한 배려하라는 지시가 내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주둔지 비용을 너무 적게 지불하고 주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 대신 미군, 네덜란드군과의 치안 활동에만 치중하여 이라크인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그 덕에 반일 시위로까지 이어졌고 게다가 그 시점이 철수시점이라서 이라크에서 야반도주하듯이 철수해야 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타협한 셈.

5 평가

파일:Attachment/BqCkX5MCcAA6uKA.jpg [50]

요약하자면 이라크 전쟁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최대 실수 중 하나이자 국력 침체에 허덕이는 현재의 미국을 만든 대표적인 전쟁 중 하나로 손꼽을 수 있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수행하는 와중에 이라크를, 그것도 저항의사가 없는 상대를 침공함으로서 양다리를 걸쳐서 전선을 두 개로 늘리는, 2차 대전 독일군이 저지른 것과 비슷한 실책을 저질렀으며, 그 결과 두 전선에서 양적으로 심각하게 부족한 전쟁을 치름으로서 '전투에서 이길지라도 장악은 못하는', 결말이 안보이는 전투만을 반복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속출하는 전사자와 천문학적인 액수의 국방비 지출로 필요없는 전쟁을 벌인 대가를 현재 톡톡히 치르고 있다. 그나마 독재자 후세인의 목을 친 것으로 최소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하지만 이전에 벌인 진상짓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 후세인의 목을 친 것이 결과적으로 이라크 내전이라는 또다른 아수라장을 불러오며 인정은커녕 오히려 평가가 더욱 악화되어 가고만 있다.(...)

한편 미국 정계에서 공화당과 네오콘은 이라크에서 너무 빨리 철군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며 오바마를 비난하고 있으나, 애초에 중동의 이런 상황을 누가 만들어 놨는지는 잊어버린 모양이다. 애꿎은 오바마만 네오콘이 똥 싸지른 거 치우느라고 고생. 근데 의외로 이런 공화당의 정치 공세를 믿는 우민들이 많다. 이때문에 오바마의 지지율은 계속 하강... 그렇다고 정작 네오콘 스스로도 해결책이 없기에 민주당에서 "이 모든 게 늬들이 벌인 묻지마 전쟁과 그 뒷수습이 문제이거늘, 그걸 외면하는데 그럼 늬들은 이 상황에서 대체 무슨 해결책이 있냐?"는 질문에 답변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니 네오콘 일부에서는 다시 이라크에 미군을 파병하면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공화당에서도 "이건 아닌데..."라는 반응. 하지만 오바마가 미군철수 결정을 안했더라면 IS는 이렇게 까지 커지지 않을것이다라는게 중론이다.

그나마 IS가 막장으로 가면서 재파병이 명목을 얻긴 하지만 워낙에 막대한 군비를 날리고 여러 사정으로 다국적군 파병은 머뭇거리는 상황에 본격적인 파병 논의는 미뤄지고 있다.

앨런 그린스펀 전 FRB의장은 자서전에서 석유 때문에 벌인 전쟁이라고 평가했으며, 미국, 유럽계 다국적 석유메이저들이 많은 채굴권을 따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미국의 정유회사나 건설회사도 엉망진창인 내전 상황 때문에 생각보다는 큰 수익을 올리지는 못했다고 한다.[51] 상황이 이러니깐. 차라리 이라크의 석유를 독차지하기 위해서 세밀하게 계획을 짜서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수탈한다고 쳐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게다가 이라크 망명자들이 거짓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났다. "이라크 대량살상무기는 내가 한 거짓말 미국이 진짜 전쟁 일으켜 깜짝 놀라"

부시와 함께 이라크 전쟁 개전에 큰 역할을 한 영국의 전 총리 토니 블레어도 이라크전에 대해 결국 사과했다. 기사 하지만 사과하든 말든, 지금 이라크는 지옥이 되었고, 이는 어떻게 봐도 미국(과 영국)의 실책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이라크 전쟁은 반미국가들에게 일종의 반면교사가 되었다. 이란이나 북한 같은 국가들이 핵이 없으면 오히려 이라크 꼴을 당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더더욱 이런 대량살상무기에 집착하게 되었다. 대량살상무기도 없는데다 때리지 말아달라고 사정하는 상대를 전세계가 반대하고 UN의 승인도 없이 불문곡직하고 조져버렸는데 그 충격이 오죽하겠는가. 미국의 이런 '공정하지 못한' 전쟁이 적대국가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대화의 문을 닫아버리게 만든 셈. 덕분에 미국은 이란 등 여러 적대국가들과의 대화에 몇배로 애를 먹고있다.

적어도 이라크 전쟁 이전에 북한은 겉으로나마 핵의 평화적 운운하며 핵무기 보유는 부정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 이후에는 북한은 아예 보란듯이 핵실험을 하며 핵보유국을 천명하게 되었다. 북한이 본색을 드러내 노골적으로 핵무기 보유 선언을 하게 된 것은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했다가 체제붕괴된 이라크가 (그리고 리비아가) 나름의 명분을 제공해 줬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이다. 부시가 미국+이라크+아프간의 면적만큼 싸놓은 똥을 치우기 급급한 오바마의 고통

이미 2016년 도널드 트럼프테드 크루즈같은 공화당계 정치인들 조차 "독재자 제거보다는 그냥 놔두는게 그 지역 안정에 도움된다"고 주장하고 있을 정도로 이 전쟁은 미국인들의 대외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히려 힐러리 클린턴이 이런 면에서는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던 네오콘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이러니. [52]

5.1 영국의 칠콧 보고서

영국 정부는 고든 브라운 총리의 주도로, 2009년부터 "이라크전 참전 진상조사위원회 (IRAQ INQUIRY)"(http://www.iraqinquiry.org.uk)를 구성해 참전에 이르기까지의 정책 결정과정 및 전투 수행에 대한 평가를 실시했다. 이 위원회의 위원장은 원로 행정가 존 칠콧 경 (Sir John Chilcot )이었고, 언론에서는 위원장의 이름을 따서 칠콧 위원회라고 불렸다.

이 위원회는 1000만파운드(150억원) 15만건의 정부문서를 분석하고 참전 결정권자인 토니 블레어 당시 총리를 포함한 200여명의 증언을 청취헀다.

이 위원회는 2016년 7월 5일 12권에 이르는 방대한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활동을 종료했는데, 결론은 다음과 같다.

  • 이라크는 영국에 임박한 위험이 아니었으며, 이라크에 대한 대량살상무기 정보는 모두 과장되거나 조작된 것이었다. 영국의 참전 결정은 법적으로 부적절한 것이었다.
  • 토니 블레어는 평화로운 옵션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전쟁을 하려고 작정한 부시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했다. [53]
  • 이라크 전쟁의 결과 15만명의 이라크 민간인의 죽음 [54]으로 이어졌고, 100만명이 집을 떠나야 했다.
  • 블레어의 참전 결정은 이슬람 근본주의 및 알카에다의 위협을 (영국에) 증대시켰다.
  • 영국 정부는 이라크 전쟁의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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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고서가 발표되자, 이라크전 참전 전몰군인의 유가족은 토니 블레어를 격렬히 비난하며, 전범으로 기소해야한다고 주장. 토니 블레어는 "모두 내책임"이라고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그래도 후세인은 제거해서 세상이 더 좋아졌다"고 변명했다. 기사

한편 영국 하원에서는 블레어에 법적 책임을 물으려는 시도가 있다고 한다. 기사 하지만, 아무리 이라크전이 패전 [55]이라고 인식되긴 하지만, 정치적인 결정을 법적으로 단죄하기는 어려울 듯. [56]

6 매체에서

이라크 전쟁 전사자들이 좀비로 소생하여 그후 그들을 이라크로 보낸 정치인을 낙선시키고자 투표권을 얻으려는 일련의 사건(...)을 담은 에피소드

그 외 추가바람
  1. 개목걸이의 "Dubya"는 조지 부시의 별명이다. 유래는 "George W. Bush"의 더블유가 부시의 정치적 기반인 텍사스 식 발음으로 Dubya인 것이다. 당연히 정식 별명은 아니고 근데 거의 정식 별명에 가깝다 가벼운 멸칭(한국한정 으로 치면 '정은이'정도?..). 참고로 미국은 조지 부시 부자가 대통령을 했기 때문에, 특히 아버지 부시(George H.W. Bush) 시절을 기억하는 중,장년층은 아들 부시를 "George W"로 호칭해 구분한다.
  2. 당시 아버지 부시는 현직 대통령이었다!
  3. 이라크 내전,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 시리아 내전으로 중동이 개판이 되고, 주요 석유산지가 내전상황인데도 2016년 현재 유가가 안정되 있는 것은 오로지 셰일 가스 덕분이다. 따라서 중동의 전략적 가치도 과거보다는 확실히 하락하였다.
  4. 대체적으로 이란 보단 만만한 시리아를 많이 예상했다.
  5. 물론 이후에 석유업체들은 큰 수익을 내기는 했다. 물론 행정처리와 치안이 위낙에 개판이라서 이라크의 석유를 대대적으로 빼내오지는 못했지만 석유값이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2008년 상반기까지 미칠듯이 올라서(물론 비슷한 시기에 중국과 인도가 급속한 경제성장을 보이면서 석유수요가 급증한 영향도 있었다.) 석유업체의 매출액도 자연히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미국내 소비자 입장에서는 전혀 좋은 일은 아니라서 울며 겨자먹자먹기식으로 소형차나 경차를 구매하는 비율이 크게 높아졌고 대형차의 수요가 줄어들어서 GM이 파산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대중교통망은 확충되었잖아
  6. "자연환경보호 vs 유전개발" 이란 문제에서 전임 클린턴 민주당 행정부는 일관되게 전자였다면, 부시 공화당 행정부는 일관되게 후자였다. 다만 셰일 가스 개발은 심각한 환경파괴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민주당 행정부도 찬성입장이다.
  7. 예를 들어 미국 코앞에 있는 쿠바와 남미의 베네수엘라가 있다. 19세기 이래 미국의 뒷마당으로 여겨지던 중남미에서 21세기 들어서 반미, 반서방 노선을 걷는 좌파 정권이 우후죽순 출현했는데, 그 중심에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정권이 있었다. 특히 미국은 국내 석유수요의 상당량을 베네수엘라 석유로 충당하고 있기 때문에, 베네수엘라 석유는 이라크 석유보다 훨씬 영향력이 크다.
  8. 물론 전쟁을 결정하면서 무기업계와 석유자본쪽에서 더 많은 정치자금과 지지를 기대하긴 했을 것이다.
  9. '헤어프리트 뮌클러'가 저술한 새로운 전쟁 참조. ‘군사적 폭력의 탈국가화’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책은 냉전 이후의 전쟁의 새로운 특징을 민간인살상, 테러, 군사용역으로 집약하고 있다.
  10. 근본주의와 세속주의는 물과 불의 화해할 수 없는 사이로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등 역대 세속주의 정권들은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고, 이에 이슬람근본주의 조직들은 암살과 폭탄테러 등으로 저항했다. 그런데 이 둘이 협력관계라니...
  11. 이슬람 근본주의는 말 그대로 성직자들이 이슬람 전통율법 샤리아로 통치하는 제정일치, 종교국가를 꿈꾼다. 이것은 시아파, 수니파 상관없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고유 속성이다. 반면에 세속주의자들은 이슬람의 가치를 존중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와 군대는 정치인의 몫이며 성직자들은 예배나 열심히 하라는 식이다. 이게 가장 구체화된게 서구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터키다. 이라크, 시리아의 세속주의자들은 여기에 아랍민족주의 속성이 추가되며 이들이 결집한게 바트당이다.
  12. 이슬람광신도(근본주의)인 IS알카에다는 아예 말이 안통하지만, 이런 세속주의 독재정권은 최소한 대화는 되고 조건만 맞으면 거래도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서 차라리 이들을 지원하는 대신에 점진적인 변화를 유도하자는 주장도 많이 나온다. 버니 샌더스가 이런 입장을 보이고 있다.
  13. 조지 부시 행정부가 이런 관점에서 워낙에 언플(여론조작?)을 많이 해서 이라크전쟁 직전에는 미국인들의 70%가 후세인이 9.11테러와 관계 있다고 믿는다는 여론조사가 나온적도 있다.
  14. 음모론과는 달리 정부도 인간에 의해 굴러가는 조직이라 의외로 간단하고 어리석은 이유로 말도 안되는 일을 벌이는 일이 많다. 세계대전 당시 각 국 정부의 수뇌부들의 삽질들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만약 미국의 수뇌부가 아랍권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있는 인물들이 많았거나 좀 더 온건한 성향의 인물들의 권한이 더 강했다면 전쟁은 어느 정도 피할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15. 이들 망명자들 중에는 독재에 저항하던 민주투사들과 인권탄압에 시달리던 쿠르드족도 있었지만, 후세인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기득권층 출신들도 많았다.
  16. 특히 아마드 찰라비가 이끄는 이라크국민회의.
  17. 미국은 걸프전 직후부터 후세인 정권 타도를 위해서 이라크 망명자들을 지원해 왔으며, 1998년에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는 "이라크해방법"을 통과시켜서 이라크 망명자들에게 구체적인 자금과 무기지원을 강제하였다. "이라크국민회의"는 이때부터 공화당과 밀접한 관계였다.
  18.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전쟁을 준비하자, 후세인은 어떻게든 전쟁을 피해볼려고 미국 석유기업에 대한 특혜와 함께 이들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19. 위에도 나오지만, 부시가 직접적인 전쟁 명분으로 내세운게 이라크의 우라늄 구입설이었다.설마 마고열에서 마법으로 사람들을 지우긴했지만 방사능은 안나오니 대량살상무기를 안 썼다고하는게 이 대목에서인가?
  20. 참고로 이 인간, 무려 예일대에서 역사를 전공했다(....)역사공부하면서 십자군전쟁을 대체 뭐라고 배웠고 생각했을까? 물론 기여입학생에 성적은 거의 낙제였지만 그래도..
  21. STS-107의 승무원 중 이스라엘 공군 대령이자 과거 이라크 오시라크 원전 공습을 수행했던 파일럿인 일란 라몬 대령이 있었기 때문에 이라크에서는 잘 뒈졌구나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쳐서 전세계의 공분을 샀다. 이스라엘이랑 계속 싸우던 이집트 같은 나라들도 이스라엘에 위로 메시지를 전한 판에 참 눈치도 없다...
  22. 이후 저항세력의 주축도 공화국수비대였다.
  23. 그리고 부시는 자신이 이라크의 평화를 가져왔다면서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4강에 오른 이라크 축구 국가대표팀 사진을 홍보에 썼다. 그러나 정작 이라크 축구선수들은 축구 아니었다면 우린 저항군 들어가서 미군을 죽였을 것이라는 증오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24. 이때 미국의 영화배우 숀 펜도 3일간 바그다드를 방문해서 열악한 병원시설들을 돌아봤다. 숀 펜은 바그다드 방문전에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워싱턴포스트 신문에 전쟁반대 광고를 싣기도 했다.
  25. 2차대전 이후 냉전시기에 미국 정부는 항상 민주주의를 외쳤지만, 실제로는 친미반공노선만 내걸면 독재라도 상관하지 않았고, 대 한국정책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제3세계에서 반미정서가 폭발하게된 원인이다. 실제로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수많은 국가에 개입했지만,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한국을 포함해서 민주주의가 정착된 국가들은 미국의 개입보다는 독재정권을 스스로 무너뜨린 국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이 더 큰 역할을 하였다.
  26. 미국이 이라크전에 부은 돈 는 2005년 기준으로 $1600억 달러. 당시 흥행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감독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패러디한 만평이다. 그러나 이건 총전비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미국이 2001년 이래 이라크-아프간에 쓴 총전비는 현재 4(trillion)조에서 6조달러로 추정되고 있다.
  27. 원문에서의 부시는 "더욱 많은 인내심을!"이라고 한다. 이때 인내심(patience)의 발음은 환자(patients)와 비슷하다는 점을 이용한 것..
  28. 일단 여인의 나이로 보건대 신분은 전사자의 아내일 것이고, 전사자의 신분은 30대 이상의 고참병이나 부사관 혹은 장교로 보인다. 전쟁이 격화되고 스톱 로스도 급증하자 30대 미군이 대거 전쟁에 투입되었고 그 중 상당수가 전사했다.
  29. 다만 그걸 이라크 시아파가 또 말아먹었다. 그걸로 이익을 본 건 물론 인간말종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
  30. 아프간/이라크 전쟁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미국)을 의미.
  31.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의 조지 패튼이 벌인 기동전이 그랬듯이 선봉에 선 패튼의 뒤에는 후속부대의 희생이 뒤따랐고, 오마 브래들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두고 패튼을 비판하였다. 물론 현재는 이러한 돌파전이 독일군의 보급선과 지휘체계를 사전에 약화시키고 상대의 방어선을 교란. 장기적으로 보면 미군의 희생을 크게 줄인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32. 이는 신세키의 임명자가 빌 클린턴이었던 점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진짜 정신나간 인간은 럼즈펠드가 되고 말았다.
  33. 후임자는 피터 슈메이커 대장으로 2000년에 전역했는데 다시 소집됐다.
  34. 징병제인 한국의 현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데, 국방예산의 주요부분은 장비가 아니라 , 인건비다. 여기서 바로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실병력이 10만 정도인 병력을 이라크에서 두세 배 늘린다는 것은 그 병력뿐만 아니라 이들과 순환할 수 있는 병력까지 합해서 수십만을 늘리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미국의 경제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재도 미국 국방비의 반은 인건비다.
  35. 그린존(Green zone)은 바그다드 시내의 후세인 궁전 및 주변 지역의 안전 지대를 의미한다. 이 곳에 이라크 주둔군 사령부와 CPA 본부 등이 위치했다.
  36. 제리라는 애칭이 있어서 제리 브리머라고 불리기도 하며 그 유명한 헨리 키신저 밑에서 일했던 인물이었다.
  37. 이 덕분에 영화 그린존의 주인공이 이라크군의 알라위 장군을 찾아갔다가 빡돈 알라위와 그의 부하들에게 죽을 뻔했다. 물론 알라위는 미군이 나선다 쳐도 독재정권의 최측근 중의 최측근이라 어차피 살려둘 수 없었고, 처단해야 할 자이긴 했지만.
  38. 징병제 부활은 반전 여론과 민심을 의식한 정치권의 반대 때문에 애초에 불가능한 상황이다.
  39. 미국이 중동에서 벌인 이런 행태들을 비꼰 게임인 스펙 옵스: 더 라인에서 저 사진을 이용한 800px이런 그림이 나온다.
  40. 이들 중에는 이라크를 이끌어가야 할 엘리트들도 많았고,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상이군인으로서 당원증을 보상으로 받았을 뿐인 애먼 사람들도 있었다.
  41. 자이툰에 한국군이 파병나가기 전 미군과 함께 이동하며 인터뷰하던 한국 기자가 한국군이 온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느냐? 라는 말을 하자 미군 병사가 기쁜 목소리로 언제 오는가? 하고 물어볼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국기자가 한국군이 와도 그냥 평화유지군이고 전투병 파병은 어려워보이는데? 라는 답변을 하자 무척 실망한 얼굴을 했다고 한다.
  42. 심지어 국내 방산업체가 수출한 K2 소총도 바그다드 암시장에서 팔리고 있으며, IS가 사용하는 모습도 확인되었다. 관련기사.
  43. 미군이 초기 이라크군과 달리 재건 이라크군 무기를 모조리 미제로 교체한 것은 이 때문.
  44. 이라크는 총리가 대통령보다 더 권한이 세다.
  45. 개전 초 전쟁을 강행한 미국을 비난하였으나 이후 장갑차 같은 무기 판매로 어느 정도 개입하기도 했다.
  46. 특히 모로코는 이라크 전 발발 당시 무함마드 6세 모로코 국왕이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등 사실상 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1991년 걸프 전쟁에서 다국적군 파병,참전을 결정했던 선왕이자 자기 아버지였던 하산 2세 전 국왕과는 달리 2003년 미국이 이라크 침공을 강행하자 같은 이슬람 형제국가인 이라크를 공격하는 기독교 강대국의 전쟁 범죄 행위에 대해 반대한다는 소리를 하며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부시 대통령과 체니 부통령, 럼스펠트 국무장관과 같은 당시 미국 지도부들을 열심히 국회와 지방 도시 시찰등 공식석상에서 비난하고 미국에게 공격 받는 이라크를 지지하는 발언들을 마구 쏟아냈다. 하지만 모로코 역시 1970년대에 스페인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하려던 서사하라를 침략, 강제합병하고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서사하라를 점령,지배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모로코도 다른 나라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도 의문인 이중적인 침략국가.
  47. 덕분에 미국은 전쟁 과정에서 아랍국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거기다 심지어 옛날 걸프전때 쳐맞고 가만히 닥치고 있는 이라크 왜 패냐며 격렬하게 비난하기도 했었다.
  48. 체코 공산정권을 무너뜨렸던 민주화 운동가이자 공산정권이 무너진후 체코 공화국 초대 대통령 하벨은 이라크 전쟁을 찬성하였다. 동유럽은 너무 소련에 시달린 나머지 미국의 정책이라면 모든게 옳다는 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민주화운동가였던 하벨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추이를 본다면 이는 하벨의 흑역사가 되었다. 설마 미국이 그 정도로 답이 없을 줄 누가 알았겠냐마는.
  49. 이마저도 엄청난 수술을 여러 번 하여 최대한 화상을 지운 상태였다.
  50. 원본사진은 2003년 당시 미군의 전차가 바그다드 개선문을 입성하는 사진이었다. 만평은 테러리스트가 다시 바그다드에 입성하는 것으로 묘사.
  51. 물론 이라크 전쟁 이후로 석유값이 크게 올라서 석유회사의 매출과 수입이 크게 늘기는 했고, 사우디 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쿠웨이트, 리비아, 베네수엘라, 러시아, 이란 등 주요 산유국들이 호황을 누리기는 했지만 그와 별개로 미국 석유회사들이 이라크에서 석유를 대대적으로 챙겨갈수 없던 상황이었다.
  52.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 재임시에 아랍의 봄이 일어나자 중동국가의 소위 "민주화"를 위해 전방위로 개입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오디세이 새벽작전. 하지만 카다피가 날라간 결과, 리비아는 카다피 시절과는 비교도 안되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53. (토니 블레어는 개인적으로 "무슨일이 있든지 나는 당신과 함께 하겠다(I will be with you, whatever)"는 메모를 보냈다고 한다
  54. 이것은 매우 보수적으로 잡은 수치이다. 집계 기관에 따라 100만명 이상으로 잡는 통계도 있다.
  55. 위의 "전쟁 목표 달성 실패"는 결과적으로 패전이란 말을 돌려말한 것이다. 물론 이라크 전쟁은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전쟁이다. 미국의 주류 의견 또한 하지 말앗어야 할 전쟁으로 일종의 흑역사가 되고 있다. 존 케리나 힐러리 클린턴 같은 민주당계 정치인들이 이라크 전쟁의 상원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진 것은 정적들에게 두고두고 공격받았다.
  56. 한국에서도 IMF를 불러온 몇몇 경제관료를 배임등의 혐의로 사법처리 해야한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실시되지 못했다.
  57. 위에도 언급된 라지브 찬드라세카란의 저서와 이를 바탕으로 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영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