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弘立
1560 ~ 1627
조선의 무장.
1 생애 초반
본관은 진주(晋州)이고, 자 군신(君信), 호 내촌(耐村)이다. 본디 문관의 가문이였으며 강홍립은 임진왜란 기간중인 1597년 과거에 급제했다. 그 이후 선조 치세 말기동안 이런저런 관직을 거치며 이러는 사이에 광해군의 눈에 들어왔다.
이후 1605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이 때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명나라로부터 허락받는데 성공하여 강홍립은 광해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 와중에 선조가 사망했다.
2 밀지설과 실상
당시 강홍립은 임금으로 즉위한 광해군에 의해 5도 도원수로 임명되었는데 이 때 명나라는 누르하치의 후금을 막기 위한 구원병력을 요청했다. 여기서부터 광해군 옹호론자의 '밀지설'이 시작된다.
밀지설에 따르면 광해군은 이 상황에서 조선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로 훌륭한 선택지를 택하는데 일단 겉으로는 명나라를 도와주러 가는 것처럼 하고 싸워봐서 안될거 같으면 청나라에 붙으라는 밀명을 내렸다. 이에 강홍립은 정병 1만3천명을 이끌고 명나라로 향했다.
그러나 1619년 명나라군과 조선의 연합군은 부차에서 청나라 군대에 패하였고 더군다나 강홍립은 이때 명나라의 상태가 어떤지 간파해버리고 만 탓에 포로로 붙잡히는 척하면서 청나라에 투항했다. 청나라 군대와 싸울때도 일부러 화살촉을 뺀 빈 막대기를 활로 쏘는 등 청나라 군대를 상대로 자신들이 이 전투에 어쩔 수 없이 참전했음을 확실하게 어필했다. 강홍립이 직접 청나라 군대에 임진왜란때 명나라가 도와준 것도 있고 해서 명나라를 도와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청나라를 싫어하진 않기 때문에 굳이 이런 방법으로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렇게 청나라와의 외교관계도 잘 되나 싶었다. 청나라 측에서도 강홍립 등 10여명의 수뇌부를 제외한 나머지 병력들을 모두 석방해서 조선으로 되돌려보냈다. 억류된 강홍립 역시 사실은 그냥 풀어주면 조선이 청나라와 손을 잡았다고 명나라쪽에서 의심할까봐 일부러 억류하고 있는 것이였으며, 대외적으로는 감옥에 갇혔다고 공표했으나 실제로는 청나라 궁궐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이 밀지설의 요지.
그러나 실상은 이와 다르다. 밀지설에 따르면 마치 강홍립이 의도적으로 항복한 것으로 주장된다. 하지만 사르후 전투항목에서 처럼 당시 명군은 전멸한 상태였고, 조선군은 이 상황에서 엄호하기로 한 명군도 없으니 그냥 조총병만 데리고 평지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가 수만의 기병에게 얻어맞고 5천 명이 전사. 좌우군은 완전히 궤멸당했다. 그리고 중앙군이 고립된 상태에서 남은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이다. 과연 강홍립이 상황을 보면서 항복을 하려 했다면, 원정군 1만 3천중 겨우 8천여명이 남았고 좌우군의 주요 지휘관이 전사할 때까지 항복하지 않은건 말이 안된다.[1] 광해군이 제대로 양면외교를 시작하는 것은 사르후 전투 이후이다. 사르후 전투는 본래 지기가 힘든 전투를 명나라에서 바보짓과 날씨 때문에 진 전투인만큼 이 이후로 광해군일기 1621년 6월 6일자에도 나와있듯이 광해군은 명이 후금을 멸하기 불가능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양쪽에 손을 뻗고 강홍립에게서 후금 내부의 정보를 편지를 통해 받아보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강홍립이 청에 억류 되었을때 광해군이 후금과의 관계를 위해서 긴밀하게 연락을 했다는 것이 광해군일기에도 기록되어있고, 광해군이 대체 강홍립의 편지를 받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하는 말도 있지만[2] 출병당시부터 강홍립과 광해군의 의도적으로 항복설은 인조반정당시 서인이 내세운 주장일 가능성이 높다. 당장 의도적으로 항복했으면 귀국 이후 기존 관직의 삭탈 선에서 마무리가 된 것. 그리고 그것도 항복한 죄가 아니라 청의 길잡이를 한 죄로 삭탈관직을 당한 것이나, 강홍립을 제외한 나머지 원정군에게는 아예 처벌이 내려지지 않은 점을 절대로 설명할 수 없다.
게다가 그 8천 명의 미래도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청은 이들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자국 백성 혹은 군인으로 강제 편입시켰고 겨우 1,500명만이 탈출 혹은 협상의 형태로 귀환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나중에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때 조선에 투입되기도 했고, 심지어 명을 멸망시키는 전쟁에 투입하기도 했다. 조선의 입장에선 1만 3천의 군사가 고스란히 증발한 셈.
3 인조반정 이후
사르후 전투에서의 투항 이후, 후금에서 지내던 강홍립은 변발을 거부하고 한족 여성과 결혼을 했다. 그러다가 후금의 2대 황제가 된 홍타이지는 조선을 침공하려했고 후금의 1차 조선 침공, 즉 정묘호란에서 조선인이었던 강홍립은 길잡이를 강요받아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가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루 평균 진군거리가 100KM가 넘는 후금군의 경이적인 쾌속진격.
정묘호란 이후 청나라의 주선으로 강홍립은 조선에 다시 들어오게 된다. 신료들은 적에게 항복했다는 사유로 강홍립을 참하라 했으나 인조의 의지로 강홍립은 삭탈관직 선에서 정리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후 병으로 사망했다. 사후 복권되었다.
4 평가
밀지설을 그대로 믿는다면 임금의 특명으로 적지에 파견된 특수임무 수행자였으나 정권의 색깔 때문에 모든 것이 망한 비운의 인물. 하지만 밀지설 자체가 말 그대로 설이고, 그나마 신빙성과 타당성이 그런 거 없다 수준이니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다만 적극적으로 청에 협력하지 않고 길잡이도 조선으로부터 사실상 버림받은 뒤 마지못해 한 것인데다 정묘호란 당시 청과 조선 양측을 교섭하는 역할을 맡은 점. 청에 남지 않고 귀국한 점은 인정되며, 인조 정권에서도 이 점을 참작하여 역적으로 대우하지는 않고 파직하는 선에서 끝났으며, 사후 복권되었다.
5 강홍립을 연기한 배우
- 이 드라마에선 강홍립을 가여운 장군으로 묘사했다. 광해군의 명으로 전쟁을 치루지않고 항복했으며 이괄의 난때 달아난 한윤이 청으로 달아나서 강홍립에게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왕이 바뀌자 조정에서 강장군 및 부관들의 식솔을 3대 몰살시켰다고 거짓말을 하는 통에 경악한다. 부장인 김경서가 피를 토하고 분통터져하다가 분사하고 강홍립의 꿈에 나와서 왜 우리들 식솔이 억울하게 죽어야 하냐며 조선이란 나라는 이제 조국도 아니라고 하소연하며 청군을 도와 그 조선을 뭉개시오! 라고 피를 토하며 애통해하는 꿈에 괴로워한다. 결국 청군이 조선으로 쳐들어올때 도우며 비로소 한윤이 거짓말을 한걸 알고 조선에 남는데 그의 처형을 주장하던 대신들에게 인조가 거부하고 조선에 살게한다.
- 강홍립은 유배되어 있던 광해군에게 찾아가서 "전하의 생각이 맞았사옵니다. 그저 전하를 몰아내고 쓸데없이 명나라나 찾다가 결국 청에게 이렇게 시달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라며 아쉬워한다.
- 화정 - 정해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