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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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卯胡亂(정묘호란)

"조선 국왕은 지금 정묘년 모월 모일에 금국(金國)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도록 하고 잗단[1] 일로 다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다. 만약 우리 나라가 금국을 적대시하여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며, 만약 금국이 불량한 마음을 품고서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역시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니, 두 나라 군신은 각각 신의를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천지 산천의 신명은 이 맹약을 살펴 들으소서."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3월 3일 경오 2번째 기사

1 개요

1627년 1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만주에 본거를 둔 청나라의 전신(前身)인 후금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전쟁.

2 배경

1616년 만주에서 세워진 후금은 광해군의 적절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큰 마찰이 없이 지냈으나,
1. 반정[2]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뒤 정권을 잡은 인조가 '친명배금' 정책을 표방[3] 후금과의 외교를 끊었고
2. 요동을 수복하려는 모문룡 휘하의 명나라 군대를 평북 철산의 가도에 주류시켜 이를 은연히 원조하였고 청나라 입장에선 조선이 반국가단체를 지원한 것
3. 더 큰 원인이라고도 볼수있는 극악한 식량 부족에 시달려있었던 경제적인 문제도 겹치는 상황인지라 이를 타개함과 동시에
4. 명나라(중국 본토 진입)를 치기 위해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정복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5. 또한 앞서 서술했듯이 후금은 명나라와의 싸움으로 경제교류의 길이 끊겨 심한 물자부족에 허덕여 이를 조선과의 통교로써 타개해야 할 처지에 있었고,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들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4]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6. 조선에 대해 온건하던 태조 누르하치[5]를 이어 집권한 태종 홍타이지는 아버지 누르하치와 달리 조선에 대해 강경한 대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는 그것을 실행에 옮길 현실적 여건이 되었다.

3 전개

1627년 1월 아민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략하고 이어 용천, 선천을 거쳐 청천강을 넘었다.[6] 그들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진군하여 안주, 평산, 평양을 점령하고 황주를 장악하였다. 조선에서는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싸웠으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그 본진이 개성으로 후퇴하였고 인조 이하 조신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서 분조 활동을 했다.

참고로 정봉수라는 사람이(민간신분) 평안북도 철산군의 용골산성에서 적들과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항전은 나름 당하기만 한 전황상 의미가 매우 크다. 이후 평안북도 용천군의 이립이 의병을 모아 적의 배후를 끊었다.

황주까지 이른 후금군은 2월 9일 부장 유해를 강화도에 보내 명나라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7] 이에 양측은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하여 정묘조약을 맺고 3월 3일 그 의식을 행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측은 왕자 대신 종실인 원창군(성종의 아들 운천군의 증손)을 왕의 동생으로 속여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하였다.

4 전쟁 이후

사실 후금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3만이라는 적은 병력으로 침략해 왔기에 내부 고립의 위험이 있어 빨리 화약을 맺을 필요성이 있었고, 이로 인해 화약의 내용은 후금 입장에선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8] 실제로 화약 과정을 보면 주거니 받거니 협상도 제법 이뤄지고, 후금쪽에서 화친을 재촉하기도 하는등 이후의 굴욕처럼 조선 입장에서도 차마 눈뜨고 못볼꼴은 아니었다. 유생들을 위로한다고 강화도에서 과거 시험을 치루질 않나, 상소에 "항복"이라는 표현을 쓴 관리를 파직시키라고 인조가 몽니를 부리질 않나.[9] 후금이 급한걸 알긴 알았는지 때아닌 여유(?)를 부리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화약을 통해 조선과의 교역을 열어 부족한 물자를 확보하고, 압록강 이남에 군대를 주둔[10]시켜 가도의 모문룡의 명나라 군대와 조선의 준동을 사전 차단함으로써 내몽고 지역 등 근처 유목부족들을 규합, 세를 불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으니 후금 입장에선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11]

이후 후금은 자신들의 세를 불려 나가며 1632년에는 '형제의 맹'에서 '군신의 의'로 양국관계를 수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많은 세폐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경제적 부담이 되어왔던 세폐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오랑캐와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군신의 의'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절화의 태도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정묘호란 발발 10년째인 1636년 다시 후금은 국호를 이라 고치고 사신을 보내 청태종의 존호를 알리고 신사를 강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조선은 나라와 전쟁을 선포하고 만다. 결국 이후 12월 나라의 침략으로 병자호란이 발생하고, 이후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흑역사를 남기고 만다.
  1. 자질구레한
  2. 다만, 광해군의 중립외교 자체가 성공적일 수 있는 배경은 바로 친조선파인 누르하치가 있었다. 그러다 정묘호란 전에 영원성전투에서 누르하치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 때도 조선 정벌을 주장하여 광해군이 조선의 제일 큰 위험으로 생각하며 극도로 경계하며 포섭하려던 홍타이지가 즉위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는 홍타이지는 다시 영원성에서 패배한다. 그리고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이 때 이괄의 난으로 조선 국경이 와해되었다는 소식을 반란군에게 듣게 된다. 조선의 국경이 무너진 것이 당시 홍타이지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3. 광해군과 비교하면 중립 외교가 아닐 수 있지만, 딱히 후금에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다만 광해군이 만들어 놓았던 후금과의 핫라인은 무너져 버렸다. 이 때 반대한 사람이 정충신. 또한 국교단절까지 했었고, 즉위 초반에는 광해군이 마련해놓은 군사를 보고 자신감에 차 후금을 위협할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4. 이괄의 난(인조 1년)으로 인해 북방 방어선이 사실상 붕괴되었다.
  5. 영원성 전투에서 대패한 뒤 급사했다.
  6. 실록을 보면 후금의 길잡이로 돌아온 강홍립을 두고 조정에선 "얘를 죽여 살려"하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인조 선에서 삭탈관직으로 정리.
  7. 협상 과정에서 "천계" 연호 사용에 대해서 유해가 구체적으로 지적한 기록이 여럿 있다. "발끈 성을 냈다" 라고 표현되어있는데 그에 대한 조정의 해결책은 "시비 붙지 않게 답서 보낼때 그냥 날짜를 쓰지마"(...)
  8. 당시 화약을 주도했던 후금 관리는 이후 목이 잘렸다. 또한 이 당시의 후금이 품은 불만은 이후 병자호란이 터지는 계기가 된다.
  9. 웃긴건 "얼른 항복하세요" 하고 상소를 올린게 아니라 "아 쪽팔리게 왜 오랑캐한테 항복하나요 ㅠㅠ 나가서 싸우죠 ㅠㅠ"라는 상소를 올린것. 인조도 쪽팔린건 알았는지 "야 우리가 지금 화친협상 하는거지 항복 협상하는거냐? 너 지금 나 놀리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10. 화약 내용을 사실상 어기고...
  11. 그렇게 불려진 세는 병자호란에서 압도적인 규모로 표출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