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후 전투

薩爾滸之戰

명청전쟁의 시작

1619년, 명나라누르하치후금이 벌인 대전. 이 전투에는 조선의 군대도 파견되어 명군을 위해 싸웠으며, 후금군의 대승으로 끝나 만주족이 요동 지역의 패권을 손아귀에 완벽하게 쥐게 되는 결과를 남기고 말았다. 싸얼후 전투, 부차 전투, 혹은 심하 전투라고도 한다.

사르후 전투에 관심이 있다면 이글루스의 이 도 추천. 관련 연구자가 직접 다루어 내용이 상세하다.

사르후 전투
날짜
1619년
장소
중국, 무순(撫順)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명(明), 조선(朝鮮)후금(後金)
지휘관양호
두송
왕선
마림
유정
이여백
강홍립
김응하
김응서
누르하치
홍타이지
다이샨
토토
아민
병력10여만(10~17만 추정)불명
결과
후금군의 대승
기타
요동에서 후금의 세력권 확립

1 여진족의 상황

금나라 멸망 후, 여진족은 완전히 분열되어 버렸고, 중국의 사가들은 그들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했다. 길림성(吉林省)의 건주 여진(建洲女眞), 흑룡강성(黑龙江省)에 있는 해서 여진(海西女眞), 그리고 야인 여진(野人女眞)으로, 건주 여진과 해서 여진은 사는 곳에 따른 이름이고, 야인 여진은 그 생활수준이 미개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에서 지어졌던 것이다.

한때 엄청난 기세를 자랑하며 패권국을 과시했던 여진족은 삽시간에 추락해버리고 이제 조선과 중국 양쪽에 시달리며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며 고생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명나라는 이들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오이라트타타르를 막아내는 첨병으로서의 역할이 기대되었던 것이다.

건주 여진은 요동의 산지에서 많이 지냈고, 위치가 가까워 명나라가 시행한 포섭의 대상이 되었다. 후라가이(胡里改路)의 부족장 아하추(阿哈出)는 1403년 명나라에게서 건주의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자리를 받게 된다. 그렇게 수장이 명나라의 영향을 받게 되자 자연히 생활 습관도 중국화가 많이 되었으며, 한족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문명화된 여진족이었다. 기본적인 역량이 있었던 것.

영락제(永樂帝) 시기에 이르면 요동 지역에서 마(馬) 시장이 열렸고, 부족장들에게 성을 주거나 지위를 하사하면서 조공의 권리들을 내렸다. 홍치제(弘治帝) 시기에는 건주 여진과의 관계가 많이 개선이 되기도 했다.

명나라는 당초 해서와 건주의 여진족 중, 나름대로 위세를 떨친다는 인물을 무려 300명이나 찾아 일일히 관직을 주고, 중국에 조공 할 수 있는 권리 ─ 즉 일종의 무역 허가증을 주었다. 여진족에게 있어 명나라와의 교역은 생존에 직격이 되는 문제였고, 이러한 권리를 300명에게 각각 분산화 시킨다면 힘의 집중을 막아 그들의 협력을 저지시킬 수 있었다.

1.1 우리 살람 농사도 잘 짓는다해

여진인들의 생활 양식에 대해 말하자면, 몽골 등 몽골 고원에서 발흥한 유목민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목은 가장 주요한 생업이 아니었다. 그러니 '유목민'이라는 호칭도 많이 어색하며, 차이점도 상당하다. 여진인들은 수렵에 힘을 더 쏟았고, 이로서 여우, 담비, 표범, 호랑이, 바다수달, 강수달을 잡고 그 모피를 팔았으며 인삼과 진주 등이 주요 교역품이었다. 오히려 교역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주로 무순(撫順) 등에서 교역을 벌였다.

또한, 이미 이 시기부터 농업에 매우 집중했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없지는 않았겠으나,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수준에서는 농업을 했다.

* "서(墅) 가운데 일구지 않은 곳이 없고, 산 위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많이 개간했다."
─ 신충일(申忠一)
* "토지는 비요(肥饒)하고, 화곡(禾穀)은 심히 무성하다."
─ 이민환(李民寏) 건주견문록(建州見聞錄)

물론 어느 정도의 유목을 하기는 했다. 이렇듯 여러가지 면모가 공존하고 있는데다, 이미 이 시기부터 여러 한족들이 농경민으로서 존재하고 있었고 유목에 종사하는 몽골족들도 있어, 이 지역은 인종적으로도 복잡한 면모가 있었다.

건주 여진이 중국과 가까이 지낼때, 해서 여진 역시 힘을 키웠다. 그들 자신들은 서로를 '훌라운' 이라고 불렀고, 야인 여진은 물론 건주 여진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우월감을 가진 부족이었다. 다시 해서 여진도 우라(烏拉), 후이파(輝發), 예허(葉赫), 하다(哈達)의 네 부족으로 나뉘었다. 이 가운데 본래 강한 것은 예허부였고, 하다부의 왕타이(萬汗)[1]라는 영리한 수장이 있던 당시에는 명과 사이가 좋아 교역에서 우대를 받아 세력을 불렸으나, 왕타이가 죽고 난 뒤 혼란이 벌어져 다시 예허부가 큰 힘을 발휘했다.

같은 해서 여진이라도, 예허부는 과거 몽골에서 이주해 온 부족이었다. 그 때문인지 친명적인 태도를 취하는 하다부와는 사사건건 대립을 벌였고, 항쟁이 줄곧 일어났다. 이 두 부족이 머리를 맞대고 으르렁거릴때, 건주 여진의 한 집안에서, 한명의 사내 아이가 태어나게 된다.

2 부흥을 위해

2.1 이성량

이성량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주러 온 이여송은 잘 알려져 있다. 이성량은 그러한 이여송의 아버지로, 요동의 실질적인 제왕으로 군림하던 인물이었다.

이성량은 선조가 조선에서 넘어온 후, 계속 철령위의 첨사(僉事)를 세습하였는데, 위(衛)의 장관이 지휘사, 그 밑 차관이 지휘동지, 첨사가 그 밑의 직급이라고 한다면 하잘 것 없다고는 못해도 대단히 높다고도 말할 바 없는, 그런 자리였다. 그리고 세습이라고 하지만, 상황을 보면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으려면 북경으로 가서 수속을 밟고 돈도 상당히 들었던 모양으로 보이며, 이성량 대에 이르자 집안까지 가난해져서 직책을 세습할 자금조차 없었다. 이에 이성량은 무려 40세가 될 때까지 백수 노릇을 하며 아무런 자리도 차지 하지 못했다.

이때에 이르러 순안어사(巡按御史)가 그의 기량을 보고 인정하여 북경으로 데리고 왔고, 간신히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공을 인정받아 요동 험산(險山)의 참장(參將)이 되었고, 1567년 토만(土蠻)이 영평(永平)을 침공하자 자원하여 나서 공을 세워 부총병이 되었고, 요양으로 이동했다. 이후 1570년 총병 왕치도(王治道)가 전사하자, 그 대신 도독첨사대리가 되었다.

40세까지 아무런 재주도 발휘하지 못했던 이성량은, 한번 관직에 오르자 끊임없이 성과를 내고 승진하여 이미 이 시기에는 사단장에 해당하는 직위에 올랐다. 당시 명나라 동북변에 한부(漢部), 태평부(泰平部), 타안부(朶顔部) 등 온갖 부족들이 난립하며 지난 10여년 동안 명나라의 많은 장수들이 사망했는데, 이성량이 군비를 갖추고 장교들을 선발하여 4만 군대를 갖추자 그 위용이 천지를 진동시켜 명군은 다시 싸울 의욕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해 5월, 토만이 대거 침공하여 명군이 막아내지 못하자, 이성량은 적의 본거지를 공격하여 수장들을 죽이고 500여명이 넘는 적군을 섬멸했다. 그 후에도 토만의 공격을 계속해서 막아내었고, 타안부가 4천기로 공격해오자 이 역시 저지해 내었다.

이때 건주 여진의 왕고가 명나라 군관 배승조(裵承祖)를 살해하자, 이성량은 나서서 왕고의 공격을 물리치고 무려 천여명이 넘는 적을 일거에 섬멸했다. 1575년에는 심지어 2만명이 넘는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화기를 이용해서 단박에 적을 깨부수기도 한다.

이미 이성량은 영원백(寧遠伯)이라는 직위를 가졌고,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공훈을 끊임없이 올렸다. 1584년에는 여러 부족이 연합한, 무려 10만이나 되는 엄청난 군대를 격파해 내는 가공할 위업까지 세우기도 한다.

이렇게 이성량의 동북변에 머문지 22년, 조정에 보낸 대승의 보고만 무려 10여 차례를 넘었고, 그를 따르는 장수들도 모두 높은 보상을 받았으며, 서달과 같은 개국의 시조들을 제외하고선 지난 200여년간 변경에서 이렇게 공을 세운 장수는 척계광(戚繼光)을 제외하면 없다시피 했다. 황제는 계속해서 이성량에게 어마어마한 재물들을 포상으로 주었고, 결국 이성량의 집안은 물론 그 하인들까지도 서로 재물을 가지고 있을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역전의 명장 이성량은 신분이 높아지자 점점 사치스러워졌고, 승리를 거둘때마다 더욱 거만해졌다고 한다.사실 거만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진족과 누르하치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한 것도 거만해서 그렇다라고 보기보다는 누르하치와 여진족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럴만도 한것이, 이 지역에서 군자금, 말의 판매 차익, 소금에 대한 세금, 상금, 세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이성량의 손아귀에서 이루어졌다. 즉 이성량은 이 지역의 실제적인 지배자이자, 제왕이었던 것.

2.2 누르하치의 대두

누르하치

이성량은 여진인 왕고를 물리쳤는데, 왕고의 양아들 아타이(阿臺)는 하다부에서 아버지를 팔아넘겼다고 여기며 하다부와 대립하던 예허부와 손을 잡고 군대를 계속 동원했다. 이에 이성량은 하다부를 도와 아타이를 공격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누르하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휘말리고 말았다.

교창가(覺昌安)는 누르하치의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이고, 교창가의 손녀딸이 다름아닌 아타이의 아내였던 것이다.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교창가와 아버지 탁시는 이 싸움에서 명나라의 편을 들었는데, 이와는 별개로 교창가는 손녀를 구하기 위해 아타이가 있는 성에 들어섰지만, 아타이가 딸을 내어주지 않아 억류당했고, 탁시 역시 따라 들어갔다가 억류 당했다. 그 직후 이성량은 화공을 구사했고, 아타이는 죽었으며 교창가와 탁시 역시 불에 타 죽었다.

이에 관한 다른 이야기로는 손녀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타이에게 항복을 권유하러 들어갔다가 붙들렸고, 교창가는 불에 타 죽었으며, 탁시는 난입해 온 명군이 오인하여 죽여버렸다고 한다. 1583년의 일이었다.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는 명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개죽음을 당했다. 누르하치는 비범하게도 이성량이 자신에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하게 된다본격 정신승리 이를 의식했건 하지 않았건, 도덕적으로 보면 이성량은 25세의 장성한 청년, 누르하치에게 큰 빚을 진 셈은 맞다.

누르하치는 이성량과 아주 잘 맞는 청년이었다. 어리고, 똑똑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어쨌든 명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이성량은 결과적으로 누르하치에게 그들의 죽음에 대한 사과의 보상으로 30통의 칙서와 30필의 말을 내주었다.

청나라 태조의 첫 번째 군자금은, 아버지할아버지의 목숨 값이었던 것이다.

2.3 만주 통합

이러한 이성량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누르하치는 차근차근 여러 준비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첫번째로는 건주 여진의 통합으로, 만력 11년에 시작된 전쟁은 만력 17년(1589년)이 돼서 끝나, 누르하치는 건주 여진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해서 여진을 통합하게 될 기반을 다진 것이었다.

앞서 여진에게 있어 교역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고 말한 바 있다. 이때 누르하치는 무순, 청하, 관전, 애양 등 네 곳의 관에서 명나라와 활발하게 통상을 하여 내실을 키웠는데, 교역을 하는데 문제가 되는건 안전성이고, 이제 통합이 된 건주 여진은 매우 안전했으므로 상품 유통은 아주 원활했다. 만력 19년 경에는 압록강로도 손에 넣어 조선과의 교역길까지 열게 된다.

반면에, 해서 여진은 예허부와 하다부의 오랜 대립으로 혼란스러웠고, 교역로는 폐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주, 모피, 인삼 등의 교역품이 건주를 경유하게 되면서 각지의 상인들이 건주에 몰려들었고, 해서 여진 4부는 금세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해서 여진 중 가장 강력한 예허부가 앞장서서 나왔다. 예허부는 사자를 보내 누르하치에게 영토 할양을 요구했고, 이는 사실상 시비나 다를 바 없었기에 누르하치는 화를 내며 거절했다.

"나는 곧 만주이며, 너는 곧 후룬이다. 너의 나라가 크다 해도, 내 어찌 취하겠는가? 내 나라가 넓다 하여도, 너 어찌 나누어 가질 수 있겠는가?"

만주라는 단어의 어원에 관에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어찌되었건 누르하치는 이 당시부터 자신과, 자신의 세력을 일컫어 '만주'라고 하며 개별적인 태도를 취했다. 즉 이 당시 누르하치에게 만주란 건주 5부족인 것이다. 그러면서 예허부와는 같은 나라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태도를 취했다. 여진족이 새로이 만주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누르하치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 법했고, 공포심을 느낀 해서 여진은 변경의 각 집단에도 호소하여 누르하치가 말한 '만주'라는 괴물을 쳐부수려고 했다. 어느 순간 그들이 가지던 모든 이권 ─ 교역에 관한 부분도 저 만주라는 괴물이 집어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모두의 이해관계가 절충된 끝에, 1593년 해서 4부족에 석백족(锡伯族)등이 포함된 9부의 연합군이 편성이 되었다. 그 숫자는 3만에 달했다.

그러나, 이 '만주'라는 정체불명의 괴물은 상상보다도 더욱 공포스러운 적이었다. 누르하치는 9부의 연합군을 격파했고, 연합군에 가담했던 장백산의 주사리부(주셔리)와 눌은부(너연) 너머로 원정, 그 지역마저 모두 합병해 버렸다.

새롭게 깃발을 내건 만주의 기세는 꺼질 줄을 몰랐다. 이 시기, 누르하치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야망으로 인하여, 20만의 일본군이 조선을 침공,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미래의 청태조에게 또다른 희소식은, 1591년 11월, 어사 장학명(張鶴鳴)의 주청으로 요동의 황제, 이성량이 해임되었다는 일이다. 이성량이 열심히 뇌물을 먹인 유력자들이 조정을 떠난 탓에 아군이 일시적으로 없어졌던것이 원인이었는데, 영원백이라는 작위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후임자들이 차례로 요동에 파견되었다.

물론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도 이성량의 엄청난 영향력은 요동에 분명히 남아 있었고, 후임자들은 그 영향력때문에 제대로 일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성량이 문제가 많다고 여겨지는 사람이지만, 능력 하나 만큼은 천하의 명장이라 할만 해서, 이성량이라는 큰 기둥을 뽑은 요동은 10년동안 군사 책임자가 8번이나 교체되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성량은 한참 후인 1601년에 노령의 나이로 다시 복귀한다.

어린 누르하치에게 있어서, 이성량은 너무나 버거운 상대. 그는 요동에서 신이나 다름없었고, 이성량이 마음만 먹으면 누르하치를 개미 잡아 죽이듯 찍어 누르는 것은 일도 아닐 테다. 하지만 이성량이 어찌되었건 실무에서 잠시 손을 떼는 모양새가 되었고, 저 멀리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함으로서 명나라의 시선은 완전히 그쪽에 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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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누르하치는 히데요시의 결정 때문에 정말 좋은 기회를 얻었다. 때마침 이성량도 개입 못할 그런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9부 연합 등을 물리치고 세력을 크게 확장시킬 절호의 찬스를 얻은 것이다.

이성량의 후임으로 온 사람들은 저마다 모두 일이 손에 안맞아 허둥대며 현지 사정 파악을 제대로 하는 것도 힘들었고, 계속 교체되었다. 누르하치는 이 기회에 자신의 세력, 즉 '만주'의 힘을 크게 늘리면서 해서 4부를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히데요시가 야망을 버리지 않고 정유재란을 일으킬 당시에 해서 4부는 울며 겨자먹기로 강대해져가는 만주와 화약을 맺었고, 전쟁이 끝나던 1599년에는 기어코 하다부가 만주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 당시 누르하치는 무엇보다 명나라와 우호관계였다. 이성량이 밀어준 누르하치 아닌가. 해서 4부를 굴복시켜도 명나라에 대한 반항이 아니게 되니, 저지할 만한 세력도 없었다. 그런데 이 즈음, 하다부를 예허부가 충동질했고, 하다부의 공격을 만주가 격파한 일이 있었다. 이때부터 명나라와 만주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2.4 만주의

명나라의 사자는 누르하치를 힐문하기 위해 만주에 왔다. 슬슬 이쪽에서도, 누르하치가 너무 강대해져 가는 것에 대해선 경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르하치도 할말은 있었는데, 때마침 어려운 하다부를 예허부가 공격한 일이 벌어진 있었는데, 서로 하다부를 공격한 건 마찬가지니 저쪽을 힐문하라고 요청했지만, 명나라는 만주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어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예허부에 조금 더 힘을 실어주었고, 자주 하던 방식대로 서로 싸워서 기를 꺾게 하려고 했다.

이 즈음 하다부는 계속된 패배와 식량 부족으로 몹시 곤궁해져 있어, 명나라에 도움을 구했지만 이미 예허부를 파트너로 선정한 명은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다부는 결국 누르하치에 만주에게 항복하고 말았으니, 일의 전말이 이렇게 되었다.

이제 명나라와 만주는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한다.

본래대로라면 이성량이 고삐를 쥐고 누르하치라는 맹수를 적절히 조율해야만 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번성했고,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누르하치가 이성량에게 잘 보이려 여러가지 행동을 취했을 것이라 상상하는 것은 그다지 무리라고 볼 수도 없는 일이다. 또한 22년간 재임하며 이성량은 상당히 나태해졌고, 중간에 파면까지 당했으며 복귀했을 때는 나이가 많았다.

누르하치는 기세를 타고 거침없이 성장세를 달렸다. 하다부에 이어 후이파부가 1607년에 멸망했고, 누르하치는 해서 4부 가운데 2부를 병합했다. 그 다음으로 누르하치에 대적한 해서여진의 부는 울라부인데 울라부와 누르하치는 후이파부 멸망 직후인 1607년에 격돌한다. 그런데 이들이 조선 영내에서 싸우느라 함경도 종성이 한바탕 난리가 난 바가 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피해 뿐만 아니라 누르하치의 군세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상세히 알 수 있다.

함경북도 병사(咸鏡北道兵使) 이용순(李用淳)이 치계하였다.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엽(鄭曄)의 치보(馳報)에 ‘싸움에 임하여 황급하였으므로 적의 정세를 이제서야 비로서 연유를 갖추어 알린다. 이번에 도임한 뒤로는 성식(聲息)을 진고(進告)하는 일이 아주 없었으므로, 8월 14일 해돋을 때에 능사군(能射軍) 30여 명 가운데에서 유진군(留鎭軍)을 헤아려 남겨두고 칠탄(七灘)의 수호군(守護軍) 각각 3명을 정하여 보내어 농민을 거느리고 강가에 나가게 하였는데, 진시(辰時)에 수호군과 봉군(烽軍) 등이 급히 고하기를 「죽기동(竹基洞)·문암(門巖)·쌍동(雙洞) 세 곳의 동구(洞口)에 적기(賊騎)가 수를 알수 없이 많고 오갈암(烏碣巖)에서 금경륜탄(金京倫灘)까지 20여 리의 땅에 가득 깔려 곧장 나와 강물을 건넌다. 」 하였다. 이에 오래 앓던 끝에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성에 올라가 보니, 수많은 적병이 창과 갑옷으로 무장하고 곧바로 성 밑에 이르렀는데, 군관(軍官) 두셋과 지친 사군(射軍) 10여 명이 있을 뿐이므로 사세가 급하여 어찌할 수 없었다. 곧 성문을 닫고 판관(判官)을 솔령장(率領將)으로 차정(差定)하여 군관과 토병(土兵) 6∼7명 및 포수(砲手) 5명을 주어 나가 싸우게 하였더니, 다들 죽을 힘을 다하여 계속해서 포를 쏘았는데, 적이 점점 물러가 저편으로 도로 넘어가 유둔(留屯)하였으므로 성 안의 노약한 남녀와 맹인(盲人)을 찾아 모아 성 위에 벌여 세웠다. 이어서 생각하니 적이 혹 다시 오면 전혀 지탱할 수 없는 형세인데, 강을 넘어오도록 유인하여 선봉(先鋒)을 급히 쳐서 그 형세를 조금 꺾으면 혹 의구심(疑懼心)을 일으키게 할 수 있을 듯하였다. 망령되게 요행을 바라는 생각을 하고는 솔령장과 토출신(土出身)인 전 만호(萬戶) 김사주(金嗣朱)·박응참(朴應參)과 토병 4∼5명과 포수 5명을 시켜 곧바로 강가에 달려가 위아래서 유인하게 하였더니, 적병 30여 기(騎)가 먼저 건너와 바야흐로 접전하는데 적이 또 무수히 이어서 건너왔다. 성 위와 성 밖에서 한꺼번에 포를 쏘았더니, 적의 선봉이 점점 물러가므로, 곧 전령(傳令)을 보내어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이때부터 바깥 마을에 사는 백성과 품관(品官) 및 경원(慶源)의 군사 15명과 온성(穩城)의 군사 10명이 성 안으로 들어왔으며 우후(虞候)가 포수 9명을 거느리고 잇따라 성에 들어왔으나, 모양을 이루지 못하여 보기에 한심하였다. 15일 새벽에 적의 무리가 강여울을 오르내리며 깊이를 살폈다. 주회(走回)한 번호(藩胡)들이 진고하기를 「이들은 홀라온(忽刺溫)인데 그 장수 만도리(萬都里)가 지난해에 조선에서 살해되었으므로 복수하려고 군사를 3운(運)으로 나누어 부성(府城)을 침범하기도 하고 바깥 마을을 약탈하기도 한다. 」 하였다. 호인(胡人)의 말은 믿을 만하지 못하나 적의 정세를 살펴보면 애막(艾幕)을 크게 설치하여 오래 머무를 생각이 있는 듯하였다. 이어서 번호를 분탕(焚蕩)하여 타는 불길이 하늘에 찼고, 번호들은 높은 봉우리에 의지하여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방어할 생각을 하였으나 적이 곧 층루(層樓)을 만들어 한꺼번에 목책을 넘어갔는데, 그 쳐죽이는 소리가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 없었다. 그 형세를 상세히 보니 결코 맞설 수 없으므로 우후와 함께 의논하여 밤을 타서 강을 건너가 야습할 방책을 쓰려 하였으나 이틀 동안 계속해 비가 내려서 강물이 깊어지고 포를 쏘기도 어려워져서 바야흐로 염려하고 있던 중 16일 미시(未時)에 적병이 도로 죽기동으로 향하였는데, 해가 진 뒤까지 계속하여 철수하였다. 번호와 후망군(候望軍)이 진고하기를 「동중(洞中)의 깊은 곳에서 말에서 내려 모여 있다. 」 하고, 밤이 깊은 뒤에 산 위에 숨어있던 호인들이 잇따라 진고하기를 「심처 풍가(深處豐家)로서 향화(向化)한 오랑캐인 어구대(於仇大) 부락을 분탕하려고 선발대가 어젯밤 비내리는 중에 이미 떠나갔다. 유둔(留屯)하였던 적은 16일 미시에 죄다 들어갔다. 」 하였다. 동관(潼關)의 치보에는 「지금 학쌍이(鶴雙耳)·차일(遮日) 두 부락에 머물러 있는데 흉모를 헤아릴 수 없고 진군 방향을 모르겠다. 」고 하였다. 대개 이 적의 형세는 눈으로 본 것과 이곳 장사(將士)의 말을 참고하면 그 진퇴하며 합전(合戰)하는 상태가 자뭇 기율이 있어서 예전의 잡호(雜胡)에 견줄 것이 아니었다. 장수 2명이 각각 붉은 형명(刑名)을 설치하고, 호령할 때에 고둥부는 소리가 멀리 부성(府城)에 들리고, 갑옷·투구·창·검과 전마(戰馬)가 매우 정건(精健)한 것은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다. 이 적이 있는 곳은 멀리 15∼16일정(日程)에 있어 번호들도 미처 알지 못하였고 앞서 살륙당하여 남은 자가 거의 없었으므로 이 뒤로는 성식(聲息)을 더욱 듣기 어려운데, 만일 갑자기 변란이 일어나기를 번번이 오늘의 일과 같이 일어난다면 방비할 근심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포수(砲手)와 정병(精兵)을 급히 보내고 뒷일을 선처하는 방책도 계문(啓聞)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두 번째 접전할 때에는 죽은 전사(戰士)가 한 명도 없다. 포수 조응례(趙應禮)와 노(奴) 응상(應祥) 등 3명이 바로 앞에서 포를 쏘다가 칼을 맞아 다쳤으나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봉수군(烽燧軍) 오정(吳井)이 적을 만나 살해되었고, 농군(農軍)은 산골짜기에 숨었다가 거의 다 들어 왔다.’ 하였습니다.
이 적의 왕래는 갑작스러워서 물러갔다 하더라도 다시 오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으므로 신칙(申飭)하여 변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대개 홀라온은 종성·온성(穩城)·경원(慶源) 등의 번호와 원수를 맺은 지 이미 오래 되어 전혀 왕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홀적(忽賊)의 동지(動止)에 대해서는 번호가 전혀 알지 못하고 침입하여 성까지 온 뒤에야 비로서 적이 온 줄 알게 되니, 뒷날의 근심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선조 166권, 36년(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9월 1일(갑인) 5번째기사
오랑캐 침입에 대한 함경북도 병사 이용순의 치계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가 승리하고 1608년에는 울라의 이한(Ihan) 산성을 공격한다. 그리고 6년 뒤인 1613년에 울라부가 멸망하고 울라부 수장인 부잔타이는 예허부로 망명했다. 부 하나를 멸망시키는 사이에도 만주는 내부적 역량이 차곡차곡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예허부 뿐. 예허부는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명나라는 유격 마시남(馬時楠) 주대기(周大較) 등에게 1천명을 주어 보내는 등 공개적으로 누르하치의 반대편을 들기 시작했다. 아직 명나라와 싸우기엔 시기상조여서, 이때 누르하치는 일곱 개의 성 등을 함락시키고 일단 물러났다. 1616년 정월, 누르하치가 드디어 가한, 즉 칸(Khan)의 자리에 올랐다.

2.5 팔기와 문자의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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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황기(鑲黃旗)

칸의 자리에 오르고, 명나라와 적대하게 된 누르하치는 만주라는 새로운 조직의 수장에 올라 더욱 확장해 나가야 했고, 여러가지 문제가 놓여 있었다. 우선, 한 다리 건너면 알고 있는 공동체 개념에서 벗어나 더 큰 조직을 꾸리는 일이다.

여진족이 유목보다 오히려 사냥이나 교역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말은 앞에서 했다. 사냥은 또한 일종의 군사훈련이나 다를바 없었고, 훗날의 강희제 등도 사냥을 군사훈련과 연결시키는 행보를 자주 보였다. 여진족은 이렇게 보면 끊임없이 군사훈련을 하고 무기를 잘 다루는 존재들이었다. 이런 그들을 규율에 잘 복종시켜서, 단결시키면 상당한 전력이 될 것이 분명했다.

여진어 중에 니루(niru)라는 것이 있고, 이는 본래 커다란 화살을 이르는 말이다. 수렵 집단인 만큼 수렵에 참가하려면 정해져 있는 인원수가 있었고, 이 10명 정도의 집단을 지휘하는 사람을 니루이 어전이라고 불렀다. 어전은 주인이라는 말인데, 사냥시에 여러가지 독재적인 권한이 있었다. 만일 사냥 시에 누군가가 함부로 움직이거나 해서 사냥감이 도망간다면 큰 타격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일이었다.

누르하치는 수렵 단위였던 이 방식을 전투 단위로 바꾸었다. 300명을 1니루로 하였고, 다시 5개의 니루를 1잘란(甲喇), 5개의 잘란을 1구산(固山)으로 삼았다. 그리고 구산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기(旗).

즉 살펴보면 이렇게 된다.

1잘란 ─ 1500명
1구산 ─ 7500명

누르하치가 가한에 즉위할 당시 만주의 니루는 총 400개였고, 이는 대략 12만 정도가 된다. 그리고 여러 기를 두어 이를 색으로 나누어 구분했다. 니루는 사냥을 할때 지휘통제를 위해 깃발을 사용했는데, 최초의 팔기인 4기(즉 이 시점에선 팔기라는 명칭이 아닌)는 황색, 남색, 홍색, 백색을 상징으로 했다.

누르하치는 기존에 있던 남, 황, 백, 홍색 기는 정기(正旗)로 삼고, 또한 새로 4기를 더 창설하여 양기(鑲旗)라 칭하였는데, 남, 황, 백기는 홍색 테를 두르고, 홍기엔 하얀 테를 둘러 단일 색으로 된 정기와 구별하였다. 누르하치는 이런 깃발을 사용해 만주족을 군사체제 국가로 만들었고, 이 팔기는 각각이 군단인 동시에 백성들의 소속집단이 되었다. 즉 만주족이란 예외없이 누구든 이 팔기의 일원으로 속해 있다는 것이다. 한족 사람들이 절강성 출신, 복건성 출신 등으로 구분한다면 만주족은 정황기 사람인가, 양람기 사람인가 하는 식으로 서로를 구분했다. 만주족을 일컫어 기인(旗人)이라고 하는건 이때문.

누르하치가 이런 체제를 선택한 것은 만주족들이 개별적으로 전사이기도 하고, 또한 워낙 숫자가 적은지라 만주족 전체를 군사집단화 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기도 했다. 팔기에 대해서는 팔기통지(八旗通志)라는 기록이 있는데, 근세부터 근현대까지 존재했던 거대제국 청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라는 점에 비하면 의외로 기원이나 여러가지 면에서 기록이 부실하고 명확하지 않은 부분들이 존재한다.

팔기통지에 따르면 누르하치 즉위 직전에 있던 400여 기루 중에 만주와 몽골의 기루는 308개, 몽골의 니루가 76개, 한군의 니루가 16개였다. 이는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인데, 만주족과 몽골의 혼성 니루가 있고, 몽골인의 니루가 무려 76개나 되며, 한족 니루 또한 16개나 되는 숫자로 보면 5천명 가까이가 된다. 숫자가 적은 만주족 공동체에서 이는 매우 많은 숫자로, 이 정권은 여러가지로 기묘했다.

누르하치의 정권이 이러했고, 누르하치 본인도 만주어, 한어, 몽골어 등을 구사하는 국제적인 색깔을 보였다. 다만 이 시기에는 만주어는 있어도 그 글자는 없었다. 물론 금나라 시절 만들어진 여진 문자가 있긴 했다. 하지만 금나라 문자는 동아시아 문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한자를 지나치게 의식해서 결국 이와 비슷해졌고, 그 금나라 문자 역시 금나라의 한화(漢化) 등으로 별로 쓰이지가 않아서 사용하기에 불편했다. 당장 금나라 문학들은 대부분 한자로 쓰여졌다.

이러한 금나라 말을 공식문서로 쓰고는 있었지만, 애시당초에 그것은 만주족 내에서도 극소수나 쓸 수 있고, 또 쓴 사람이나 읽을 수 있는 문자이니 애시당초 쓸만한게 못 된다. 그래서 오히려 주로 사용되는건 몽골문이었다.

여기에서 착안한 누르하치는 몽골문을 기반으로 해서 만주어를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문자의 작성을 명령했지만 쉬운일이 아니었다. 누르하치가 처음 이 쪽에 손을 댄 것은 1599년 즈음이니, 즉위하기 한참 전에도 이 문제를 고민했던 것이다. 여기서 누르하치가 무언가 더 큰 어딘가를 보고 있는 느낌은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여러가지 일에 분주하던 누르하치는, 갑자기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명나라의 움직임은 분명 주목하고 있을테지만, 명은 군사 한명 파견하지 않고 누르하치에게 절대적인 타격을 가했다.

교역 정지 명령. 하늘과 땅을 뒤덮는 100만 대군도, 가공할 화포도 아닌 단지 이 한장의 명령서로 인해, 누르하치는 엄청난 위기에 몰리고 말았다.

3 개전

3.1 굶어 죽어라

여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교역이라고 말한 바 있다. 누르하치가 빠른 속도로 발전 할 수 있는 이유도 4개의 관을 이용한 활발한 무역이었고, 해서 여진이 몰락하는 이유도 교역의 어려움 측면이 강했다. 이 시기쯤 되었다면 교역도 오랫동안 했을 테니, 당연히 누르하치도 인삼 등의 재고를 계속 보유하고 모피를 대량으로 사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는 교역을 중단시켰다. 100만 대군도 아닌 이 단 한번의 명령으로, 누르하치는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교역이 멈추었다면 사 놓은 인삼이나 모피 등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리고 한껏 팽창시킨 영역과 백성, 그리고 군대를 먹여살릴 방법 또한 없다. 쉽게 생각해서, 현대의 국가에 국제사회가 합세하여 모든 무역 활동을 정지시킨다면, 그 나라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면 된다. 이미 우리 사회는 과거 중동에서 석유 제재 조치를 취하자 그것만으로 전 세계가 발칵 뒤집힌 전례가 있다.

그리고 이 당시, 만주에게 있어 명나라는 전세계나 다름없었다. 만주 사회를 유지시키고, 살 수 있는 방법은 명나라에 고개를 숙이는 방법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굴복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지금 머리를 숙이면 당장의 일신은 모면할수 있지만, 결국 영원히 명나라부터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결정으로 인해 쟁여놓은 인삼 등은 썩어버리고, 모피 등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걸레가 되어버렸겠지만, 누르하치는 다른 방식을 찾아보기로 한다.

여진족이 이미 농사를 할 수 있는 대로 짓고 있었다는 이야기 또한 했다. 누르하치가 원하는 건 경제적인 부분에서 자립이었고, 그렇다면 역시 불안정한 교역보다 농업을 육성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옛 하다부 남쪽에 있는 시하(柴河)·범하(范河)·삼차얼(三岔兒) 등에서 누르하치는 대규모 개간 사업을 시작했다.

명나라 역시 그러한 사정은 알고 있었다. 총병 장승음(張承蔭)은 사람을 보내 이번에 개간 사업을 시작하는 세 곳의 작물을 수확하는 것은 이치가 맞지 않는다고 따지며 견제 행위를 벌였다. 여기서 물러나면 방법이 없었기에 누르하치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바닷물은 넘치지 않고, 황제의 마음은 옮기지 않는다. 그렇게 들었다. 지금 명은 이미 예허를 도왔고 또한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벼를 예확(刈穫) 하지도 못하게 한다. 묻노니, 바야흐로 황제의 마음은 이미 옮겨갔는가? 명나라는 물론 대국이다. 하지만 어떤 성에도 1만의 병사를 주둔 시키지는 못할 터, 만일 1천의 병사만을 주둔시킨다면 그것은 우리가 포로로 삼기에 아주 적당한 숫자가 아니겠는가?"

어마어마하게 강도가 높은 발언이다. 이 시기는 1615년이고, 중국의 황제로 말하자면 만력제 43년의 일이다. 또한 누르하치가 내부 기반을 어느정도 다져놓은 상황이었다. 이 시점의 누르하치가 거대한 대제국 건설에 대한 구상이 있었을까 라고 묻는다면, 아마 회의적인 대답을 하겠지만, 최소한 명나라의 영향력을 벗어나고자 했다면 분명히 그랬다. 바로 다음해, 즉 1616년 정월에 그는 '대금(大金)'이라는 국호를 삼고 천명(天命)이라는 연호를 내세웠으며, 흥경(興京)을 수도로 삼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후금(後金)의 탄생이다.

금. 곧 아이신. 이 말을 듣는 여진인들은 모두 천조제의 70만 대군을 깨부순 아골타와 송나라를 남쪽으로 몰아넣은 금태종의 영광을 떠올리며 피가 끓어오를 것이며, 반대로 중국의 한인들에게는 여러모로 불길한 이름이었다. 건국 초기에 여진 동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한다면 금이라는 국호는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

한참 음침한 항쟁들이 일어나던 명나라의 조정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들려왔고, "남송과 금의 역사를 되풀이할 것인가?" 라는 이야기도 나왔다.근데 만력제부터 사실상 내전의 분위기가 있었고 명의 황제와 신하들은 서로를 더 위협적인 상대로 여겼다. 누르하치, 곧 천명제(Emperor Tiānming of Qīng)는 즉위 2년이 되자 칠대한(七大恨)이라는 개전 이유를 내걸고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칠대한의 내용은 예허부를 편애한 것, 개간 사업을 한 세 땅을 내놓으라고 협박한 것, 천명제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죽은 것 등의 이유다. 전체적으로 보면 왜 우리만을 괴롭히냐, 하는 뉘앙스도 있었다. 태조실록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늘이 대국의 임금을 세움은 곧 천하의 공주(共主)로 삼으려 함이거늘, 어찌 오로지 우리나라에게만 원한을 맺으려 하는가?"

이 시점까지를 보면 누르하치도 명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인정은 하고 있었다. 다만 어찌하여서 우리만을 그렇게 괴롭히고 다른 부족들은 편애하냐는 식이다.

3.2 무순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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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에게 항복하는 이영방의 모습

명의 교역 중단조치에 크게 빡친 누르하치는 무순으로 진격해 나갔다. 무순성의 수장인 유격 이영방(李永芳)은 누르하치의 항복 권고문을 받자마자 곧바로 항복을 해버렸는데, 이후 이영방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누르하치의 손녀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총병으로 승진했다. 이는 사전에 무언가 이야기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무순은 여러 상인들이 많았는데, 누르하치는 상인 16명을 불러 여비를 주고 칠대한의 문서를 건네주고는 돌려보냈다. 주민들은 모두 포로로 삼았는데, 이 시점의 누르하치에게 가장 급한 일은 어마어마한 거대 제국 명나라에 비하면[2] 터무니없이 부족한 만주의 세력을 조금이라도 늘리는 일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사람'은 무엇보다 귀중한 자원이었던 것.

일단 누르하치는 주민들을 포로로 삼고는, 무순의 성벽은 훗날을 위해 파괴하고 되돌아가고 있었는데, 소식을 들은 총병 장승음은 1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둘러 팔기군을 요격하려고 추격했다. 누르하치 역시 맞서 싸우기 위해 군대를 돌렸는데, 이 순간 하늘이 그를 돕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 갑자기 커다란 바람이 불면서, 모래먼지가 명나라 군사를 덮쳤고 만주 팔기는 아직 싸울 준비가 안된 명나라 군대를 신속하게 덮쳤다. 이 싸움은 그야말로 대승으로 끝나, 총병 장승음을 포함한 명나라 간부 군인들은 전원이 사망했다. 엄청난 대승이었다.

광녕 순무 이유한(李惟翰)은 싸움이 끝나자 누르하치에게 사람을 보내 포로 송환 문제를 논의하려고 했지만, 누르하치는 이렇게 말하면서 거절했다.

"사로잡은 것은 곧 나의 백성들이다. 어찌 송환할 수 있겠는가?"

역시 인적 자원이 가장 급한 만주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실상 그들에게는 토지보다도 사람들이 더 필요했다. 이 시기 누르하치는 마을 주민은 데려오고, 점령했던 땅은 그냥 내버려 둔채 되돌아오는 약탈식의 싸움을 많이 벌였다. 이 시기에 만주에 귀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그 '귀부'라는 것은 실상은 납치되어 잡혀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3.3 명나라 조정의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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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순 함락은 명나라 조정에 충격을 주기엔 충분했다. 위험성이 있는 가능성에서 실질적인 위협으로 대상이 변모한 것이다. 이에 명나라 조정도 큰 마음을 먹었고, 결정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적이 더 기세를 타기전에 대군을 동원하여 완전히 짓밞아 버리자는 것으로, 상황을 생각하면 오히려 시기적절한 판단이었다.

1619년, 임진왜란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병부시랑 양호(楊鎬)가 요동 경략에 임명되었고, 사로총지휘로 심양에 주둔하였다. 사로총지휘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명군은 네가지 길을 이용해 누르하치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로의 사령관으로 동원된 총병과 총병 경험을 가진 인물이 6명이었다. 총병은 지금의 기준으로는 사단장급의 인물이므로 적어도 6개 사단 정도의 병력이 참여한 것이다.

유명한 무장으로는 산해관 총병 두송(杜松)[3]과 보정 총병 왕선(王宣), 개원 총병 마림(馬林)과 임진왜란에 참여했었던 요양 총병 유정(劉綎) 등이 참가했다. 이성량의 아들이자 이여송의 동생인 이여백(李如栢)은 퇴역해 있었는데 다시 현장에 복귀했다. 요동 사정을 잘 알고 있을것이라는 판단으로 보이는데, 준비도 제법 철저했다. 조선의 지원군도 파견되어 유격 교일기(喬一琦)가 이를 지원했다. 그리고 만주가 망하기를 가장 바라고 있는 예허부도 1만 5천명을 지원했다.

당시 양호가 누르하치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이 당시 명나라의 군대는 무려 47만

물론 이는 누르하치를 겁주기 위한 것으로 실제 병력은 10만~16만 가량으로추정된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만주를 평정하고 위험 가능성을 내포한 누르하치를 물리치기에는 적절한 숫자였다. 만약 그대로 싸움이 벌어졌다면 누르하치가 고대 이집트람세스 2세처럼, 스스로 신이 되어 적군을 물리치거나 하지 않는 한 무슨 재주를 가졌다고 해도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산도 대첩이나 칸나이 전투 등 전술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전투들이 있는 반면에, 그 전개과정 자체가 그다지 후대가 전술적으로 보고 배울 것은 없는, 말도 안되는 기적으로 가득찬 전투들이 있다. 그리고 대다수 이런 전투가 후대에 모범으로 쓰기 힘든 것은, 아군이 잘하기를 떠나 우선 적군이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질러 먼저 틈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전쟁과 전투든 어느 정도는 그런면이 있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사르후 전투는 명군에게는 불행히도 후자의 대표주자격이었다.[4]

3.4 전략 측면에서의 대삽질

보통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의 패배에 대해서는 두송 등의 현장 지휘관들이 제멋대로 행동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물론 해당 행위가 엄청난 삽질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전에 이미 명나라가 전략적인 면에서 대실수를 한 것은 교묘하게 가려진 측면이 있다. 당장 해당 시기의 사람들도 이를 어느 정도 인정했기에 총책임자인 양호가 큰 처벌을 받았다.

3.4.1 명군은 쇠퇴했습니다

사실, 이때 명군의 경우 크게 쇠퇴한 상태였다. 장부상으로는 3백만의 병력을 자랑하지만 이미 이 시기쯤 가면 대부분이 사실상 세력가의 사병에 불과했다. 명 조정의 실병력도 다 털어봐야 1/3에 불과하며, 그나마 상당수가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무늬만 병력인 상태였고, 전투에 쓸모없는 노약자의 숫자도 많은 상태였다. 그래서 조선 파병 당시에도 명군은 화력에 의존하는 한편 소위 가정이라 불리는 군벌 휘하의 정예 사병들이 선두에 서고, 후속 병력이 전투를 마무리짓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사르후 전투에서 주력이 되어야 할 가정 집단은 임진왜란과 뒤이은 만주의 혼란 및 명 내부의 문제점 등으로 인해 거의 소멸된 상태였고, 결국 오합지졸들만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5] 물론 명도 이 사실을 잘 알았고, 조선군 파병을 그렇게 강조한 것도 실상은 정예병이 하나라도 더 필요해서였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당시의 명군은 나름대로 엄선했다고는 하지만 객관적인 면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 결코 정예병력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문제는 작전수립과정에서 이런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3.4.2 이것도 작전인가

양호가 짠 작전은 간단하게 설명해서 군대를 4개로 나누어서 적진으로 쳐들어간 다음에, 누르하치의 본거지 코앞에서 합류해서 해당 근거지를 포위, 압박하는 작전이다. 겉보기에는 양호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최악의 작전이었다.

  • 작전지형을 무시했다. 일단 4개의 군대가 접근하는 길의 험준함 자체가 차이가 크며, 적군이 방해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어야 하므로 실제로는 목적지에서 합류하기 힘든 경우가 발생한다.
  • 병력특성을 무시했다. 당장 명군의 쇠퇴현상이야 이미 언급한 상황이지만, 본질적으로 기병위주의 누르하치군을 누르하치군의 본거지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보병위주의 명군이 같은 기동력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발상이다. 만일 누르하치군이 싸우지 않고 도망을 택하더라도 포위작전은 커녕 명군이 추격전을 벌이기도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 병력을 딱 각개격파당하기 좋게 분산했다. 가장 큰 실수로, 그냥 한덩어리로 뭉쳤으면 추정병력 3만 ~ 4만 정도의 누르하치군이[6] 건드리지 못할 수준의 병력이 되며, 같은 만주족인 예허부의 병력까지 합세하면 기병전에서도 절대 밀리지 않을 수준이 될 것을 4개로 나누는 바람에 각 병력이 많아봤자 2만에서 3만대라 병력면에서는 누르하치군과 동일하거나 약간 열세하며, 병력특성및 앞서 언급한 조건을 따지면 누르하치군이 압도하는 현상을 만들게 된다.
물론 10만 명 내외의 병력을 한꺼번에 운용할 기동로나 평야지역이 없어서 작전 환경에 맞춰 선택한 방안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대규모 병력을 통합운용할 만한 다른 전장을 선정했어야지 4개로로 병력을 나누는 게 답은 아니다.
  • 병력의 집결지를 잘못 선택했다. 이건 병법을 설익힌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인데, 적을 빠르게 공격하기 위해 다양한 통로를 활용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는 경우라도 가급적 적이 모르는 사이에 빨리 합류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그러면 각개격파당하기 딱 좋다. 그리고 아군 병력이 그런 능력이 없다면 차라리 안전한 아군지역에서 먼저 합류한 다음에 한덩어리로 뭉쳐서 전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문제는 양호는 이런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가장 최악의 수인 적지 깊숙이까지 분산해서 행군한 후, 적군 주력 코앞에서 합류하기를 택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만사가 다 잘되는 최상의 상황이거나, 아군이 적을 포위할동안 적이 나 잡아줍쇼 하고 가만히 보고만있지 않는 이상 실패하기 딱 좋다.
  • 현장을 통합지휘할 지휘관이 없다. 사실 총사령관인 양호가 이 역할을 담당해야 하지만, 본인이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이상 연락체계를 잘 짜서 현장지휘가 최대한 가능하게 만들거나 적어도 현장을 총지휘할 지휘관을 임명해야 하는데, 그것도 하지 않았다.
이는 아주 안좋은 결과를 불러오는데, 당장 총병들은 서로 대등한 계급이며, 단지 군경력의 차이로 살짝 구분되는 처지라 누구도 다른 총병의 말 따위는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면 누가 습격당해도 다른 사람이 무시하는 등의 엽기적인 사태가 나며, 이런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결국, 안그래도 상태가 안 좋은 명군이 최악의 작전을 선택한 셈이므로, 이 시점에서 이미 명군의 패배는 기정사실화된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선 지휘관의 대삽질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대삽질만 안했어도 그렇게 큰 참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3.5 두송의 삽질

그렇다면 명군에서 시작되었을 그 이상 현상은 무엇인가. 첫 시작의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은 산해관 총병인 두송이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사로의 명군은 3월 1일에 전원 집결해야만 한다. 그런데 두송이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에 먼저 군대를 움직였다. 두송은 평소에 자신의 몸에 생긴 칼자국을 자랑하고 다녔고, 공적을 위해서라면 부하들의 고생 등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즉 용맹함 밖에 모르는 장수라는 말인데, 뛰어난 사령관의 부장으로 일선에서 칼을 휘두르는 일이라면 몰라도 한 군을 이끄는 지휘관으로서는 썩 좋지가 않은 인물상이다.

그렇게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군대를 재촉해서 혼하(渾河)를 건넜다. 워낙 물살이 센 강을 말을 타고 급하게 건너는 일이라, 이 과정에서도 이미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강을 건넌 후에 두송은 사르후(薩爾滸)에 2만의 병사를 머물게 하고, 자신은 계번성(界藩城)으로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떠났다. 누르하치가 계번에 성을 쌓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이미 단독행위를 했는데, 또 그 단독행위를 한 부대를 다시 둘로 나누는 것이었다.

명군이 들은 정보대로라면, 계번성은 1만 5천명의 인부가 작업을 하고 있는데, 지키는 장병은 고작 호위 400여명 뿐이었다. 한번 들이닥치기만 하면 승리는 기정사실로, 두송이 공을 탐내고 무리하게 일을 벌인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찰로 인한 정보는 누르하치 역시 계속 파악하고 있었다. 누르하치의 두 귀로 두송의 진로, 그리고 군대가 잘게 나눠지는 현상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다.

3.6 대재앙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기회. 누르하치는 즉시 아들 홍타이지에게 팔기 중 2기를 내주어 계번성을 구하게 했고, 실질적인 주력이 될 6기의 4만 5천 병사는 스스로 이끌고 2만 병사가 사령관도 없이 어물어물하는 사르후의 군대를 급습하려고 했다.

운이 따라주기 시작하자 이는 끝도 없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사르후에 남은 2만 병사는 계번성으로 간 병력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대기하는 부대다. 총사령관도 자리를 비운데다 대기군이라는 생각 탓에 방심하고 있던 형편이었고, 게다가 저녁이 되자 모랫바람이 그쪽으로 불어닥쳤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어 2만의 명군은 횃불을 밝혔고, 덕분에 후금군 4만 5천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불길이 있는곳으로 들이닥치는 셈이 되었지만, 반면에 2만의 명군은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군대와 격전을 벌어야 했다..

쏘아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하는 기록까지 있을만큼, 후금군에게 있어 이 싸움은 너무나도 싱거웠다. 어둠 속에서 불꽃이 있는 쪽으로 그냥 화살을 쏘기만 하면 그만이었고, 가끔 명군이 돌격해오면 어둠속에서 숨어있다가 갑자기 달려나가 격파를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명군은 총포를 쏘아 이에 대응했지만, 급습을 당해 정신이 없는 판에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에 사격을 하는 일은 절망만을 가져다 주었다.[7] 게다가 명군의 총포는 후금군을 맞추기는 커녕 모두 버드나무에 맞았다.

명군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악조건에서 싸움을 벌였고, 결국 대패하고 말았다. 마침 계번성으로 향하던 두송은 매복군을 만나 한참 고전을 하던 중에 이 소식을 들었다. 순식간에 전장병에게 패전 소식이 들려와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누르하치는 기회를 놓칠세라 승리한 6기를 빠르게 움직여 두송의 1만 군대를 포위했다.

횡시(橫屍)가 산야를 덮었다. 피는 흘러 도랑을 이루었다. 기치(旗幟), 기계(器械), 그리고 죽은 사졸들이 혼하를 덮으며, 마치 물이 없는 듯했다.

1만 명군은 문자 그대로 전멸했다. 사령관 두송도 활에 맞아 죽었다. 결국 3만의 병력중 제대로 살아남거나 도주한 병력이 극소수일 정도로 처참한 패배였다.

3.7 반종안의 삽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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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송의 군대는 이렇게 끔찍하게 전멸을 당했는데, 이러한 이변은 본래 두송이 무리하게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없었을 일이었다. 이는 여러가지 면에서 이치가 누르하치를 돕고 있음을 나타내는 사건이었다.

한번 이변이 생기자 온갖 문제가 후금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가 되었다. 두송이 전멸당할 무렵, 마림의 군대는 상간하다(尚間崖)에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으니, 다른 장수 반종안은 두송과 같은 성향의 인물이었고, 그래서 신중론을 펴는 마림을 겁쟁이라 여기고 싫어해 제대로 된 협조가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점이 또한 후금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가 되었다.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代善)이 먼저 300명을 이끌고 출발했다. 시기는 3월 2일이었고, 이쯤 되어서 마림도 두송의 참패 소식을 들었다. 마림은 신중하게 전날 밤의 숙영지로 군을 이동시킨뒤 참호를 파냈고, 대포를 배치하고 외곽에 밀집 대형의 기병을 세워 철저한 방비에 나섰다. 다이샨은 천명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반종안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누르하치는 공염수, 이희필이라는 장수들이 이끄는 2천 부대를 1천 부대로 격파한 참이었다. 적군이 참호를 파고 화기로 수비를 하기에 아예 병사 절반을 말에서 내려 적진을 돌파시킨 뒤에 뒤에 기병으로 진군하는 방법을 썼다. 그때 다이샨의 지원 요청에 왔기에 서둘러 마림이 있는 곳으로 떠났다.

누르하치는 도착하고 나서 세심하게 지리를 살폈다. 그리고 근처 산을 장악, 위에서 내려치는 형태로 싸우기로 하였는데 마림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라 그 술수를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즉시 산으로 군대를 보내 치열하게 혈전이 벌어졌다.

본래 누르하치는 말에서 병력을 내려 똑같이 화기를 무력화시킬 생각이었는데, 명군이 움직임이 상상 이상으로 재빨라서 다이샨은 그대로 돌격을 감행해 전투는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혼전으로 변모했다. 도저히 상황을 알 수 없는 싸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후금에 유리하게 전개가 되었다. 후금의 6기가 계속해서 싸움터로 달려와 바로 혈전에 참가하면서 적의 증원군이 늘어난 반면에, 마림 근처에 있는 반종안은 구경만 할 뿐 도통 구해주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이때 후금군의 기세를 꺾었다면 싸움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마림은 중과부적을 실감하며 간신히 몸을 빼 도주했다. 마림을 꺾은 누르하치는 뒤이어 반종안의 군대에 싸움을 걸었고, 본래 계획대로 일부 부대를 말에서 내려 투입하는 전략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누르하치가 끝까지 승리하기 위해서는 속도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누르하치는 바로 다시 군사들을 전열시켰는데 또다시 먹잇감이 포착이 되었다. 다음 목표는 유정의 동로군이었다.

3.8 유정의 대패

패전 소식을 전해들은 양호는 크게 놀라 이여백과 유정 등에게 진군의 중지를 명령했다. 이여백은 천천히 진군 중이었던지라 명령을 받고 퇴각을 했지만 문제는 유정이었다. 유정은 이미 적진 깊숙이 들어왔던지라 소식을 듣지 못했다. 유정은 지금의 기준으로 따지면 70kg가 넘는 120근의 칼을 자유자재로 써서 유대도(劉大刀)라고 불렸다는, 좀 상식 밖의 인물이다.

유정은 가로막는 적군도 물리치며 순조롭게 진군을 하고 있었고, 허투알라(赫圖阿拉)에 이르려는 참이었다. 조선군 및 강홍립 등이 유정과 함께 편제되어 있기에 조선왕조실록에서 강홍립이 유정과 나눈 대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는데. 유정은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죽으려고 진군하는 막장 상황이었다.망했어요.

강홍립이 유정에게 병력이 얼마냐고 묻자 서남 방면에서 자신이 지휘하던 병사들이 수만 = 사천+절강병인데 이 쪽은 수천밖에 없다고 말하며 내가 이끌던 사천지역의 강병을 증원 요청했는데 양호와 사이가 나빠 거절당했다. 아마 양호는 나와 사이가 나쁘니 내가 죽기를 바랄 것이다. 나야 나라로 부터 받은 은혜가 있으니 나는 죽기를 각오했지만, 내 아들들은 아직 국가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데리고 오지 않았다.며 오로지 조선군을 의지할 뿐이라고 말하는 비참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리 빨리 진군하냐? 고 강홍립이 묻자. 양호가 천시를 얻었다며 군령이라는데 어쩌겠냐.라고 유정이 대답하였고. 심지어 강홍립의 보고에 따르면 중국측 병력에 대포와 대기도 없었던 데다가, 지형 상태도 시망이었다고. 그야말로 총체적난국.. 막장이네.

이에 광해군은 패배를 예측하고 조선의 군사들이 죽을테고 패배하면 저기서 끝나는게 아니라 우리 나라에도 변란이 닥칠텐데 어쩌냐.. 며 비밀리에 비변사에 전교한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이 군대를 다이샨이 급습했고, 홍타이지와 팔기 중 정황기의 군대가 협공을 했다. 이때 후금의 군대는 사르후 전투 초기의 편제대로라면 누르하치가 정황 / 양황기, 대왕(大王) 다이샨이 정홍 / 양홍기, 사왕(四王) 홍타이지가 정백기, 누르하치의 첫째 아들인 츄엔의 장자 토토가 양백기, 누르하치의 아우인 수르하치의 장자 이왕(二王) 아민이 양남기, 삼왕(三王) 만구르타이가 정남기를 각각 맡았기 때문에 총 정황기, 정홍기, 양홍기, 정백기 즉 네 개의 기, 삼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는 약 2만 7천명 정도라고 생각되었던 명 조선 연합군보다도 많은 수. 후금군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교전시 병력의 우세를 지켰다. 삼면의 돌격은 막을 방법이 없었고, 앞서 녹각을 버렸기 때문에 긴급방어선을 만들지도 못했다. 결국 유정은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폭약과 장작을 쌓은 후 휘하 장수들과 함께 자폭했다고 한다.

3.9 조선군의 항복

…너무나 순식간이라 구원할 틈이 없었다. 석양 아래 쏘는 화살이 비와 같고, 철마들이 오고가는 것이 황홀하여 형용하기 어려울 따름이었다.… 이민환 <책중일록>

그리고 다시 다이샨은 군대를 움직여 곧바로 조선군을 기습했다. 이 전투의 양상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설이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건주견문록, 즉 이민환의 책중일록의 기록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논란이 벌어진 적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몇 번의 화포사격으로 적을 격퇴하였지만, 갑자기 모래가 섞인 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불이 꺼지고, 그 바람 사이로 후금군이 달려와 척살했다'고 되어 있으며, 책중일록에는 '기병이 계속 모여들어 양익을 이루다가, 단 한 번의 돌격으로 진중 안으로 돌파했다'고 되어 있다.[8] 또 다른 참전국이자 당사자인 후금(청)의 기록에도 돌격은 한번이지만, 지갑(紙甲)과 화포로 무장한 솔호(조선)와의 전투에서 큰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 돌격했다는 언급이 있다.

위에서 언급된 각종 사료를 조합하여 그럴 듯한 해석을 보여준다. 이에 의하면, 조선군은 명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조총수들을 지원한다는 초기방침을 지키기 위해서 진군하고 있었으나, 위처럼 유정군을 비롯한 명군들이 상상 이상으로 빠른 시간에 격파당하고, 적들이 들이닥칠 징후를 포착한 조선군은 행군을 멈추고 부차 지역의 평야에서 급하게 진지를 꾸렸다.[9] 평지에서 기병 위주의 금군을 상대해야 하는 것도 불운인데, 명군의 패잔병들, 심지어는 명나라의 패장들까지 나타나면서 사기가 더욱 떨어졌다. 조선의 기록에는 군기를 망칠 것을 우려하여 패잔병들의 합류를 거절했다는데, 후금(청)의 기록에 따르면 명군의 소수 패잔병들이 조선군의 편제랑 별개로 참전했을 가능성은 있다.

줄줄이 도착한 후금군의 선봉이 500기가 넘자 돌출된 장소에 진영을 잘못 잡은 좌영을 건드려 보았으나, 빗발치는 조선군의 사격에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10] 그리고 수천기의 기병들이 도착하더니 후금군도 진영을 꾸렸고, 돌격하기 직전에 명군에게서 빼앗은 말들을 몰아서 조선군이 세워놓은 장애물들을 무력화시킨다. 그리고 수천 기에서 만 기에 달하는 기병들이 평지에서 무방비 상태에 놓인 조선군 진지를 급습하는데, 양측의 사료에는 거리를 재면서 사격전을 벌이다가, 하필이면 엄청난 흙바람이 불어서 조선군의 화포가 무력화되는 순간, 양익을 이룬 기병들이 좌영과 우영을 무너뜨린다.[11]

애당초 조선군은 조총병이 대다수였고, 본래 전략은 명군이 조선군의 화력지원을 받는 대신 엄호해주도록 되어 있었다. 심지어 조선군은 참전 규모도 1만 3천명 정도로 소수였고, 기병을 비롯한 일부 병력은 보급을 담당하느라 후방에 보낸 상태였기 때문에, 명나라의 대군이 허무하게 와해당한 순간부터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작전이 된 셈이었다. 그나마 산으로 올라가서 방어한다는 방침이 세워져 있었지만, 그런 지형에 도착하기도 전에 참전병력 전체에 필적하는 머릿수의 기병에게 공습을 받은 것이다. 강홍립의 중영은 화포를 비롯한 수단으로 어떻게든 방어에 성공했지만, 양익으로 돌격해온 후금군이 좌우의 진영을 전멸시킨 시점에서 평지에서는 항전할 수단도 마땅히 없었고 결국 항복해버린다.

자세한 전투 상황이야 어쨌든, 이로서 사르후 전투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양호는 해임당한 후 처형당했고, 이여백은 자살했다.

이와 관련해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려 항복하게 했다는 밀지설이 있지만 좌우군을 모두 말아먹고 전사자만 5천이 넘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은 낮다.

4 결과

사르후 전투는 누르하치에게 있어서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 전투의 양상을 살펴보면, 실제로 숫자가 많은 것은 명군인데 반해 거의 대부분의 접전지역에서 숫자의 우위는 오히려 후금군이 가지고 있었고, 팔기군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움직이며 기동력으로 이 우위를 굳혔다. 반면에 명군은 자신의 능력도 생각하지 못한데다가 엽기적인 작전을 짜서 패배를 기정사실화한 것도 모자라서, 일선지휘에서도 열세를 메꿀 찬스가 있었는데도 장수들의 돌출행동, 서로간의 불화 등으로 패전한 것이다.

또한 이 전투에서는 몇 번이나 흙먼지를 동반한 폭풍이 수차례 명나라와 조선의 군영에 휘몰아쳤다. 바야흐로 하늘마저도 누르하치의 편을 들었던 것이다. 과연 황제의 재목이다 게다가 당시 명나라와 조선군의 절대다수가 화약 병기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던 점도 패인으로 지목된다.[12] 만주의 흙바람마저도 동맹군들의 화포를 배신했으니...

조선군의 식량 보급 문제가 패인의 한 요인이었다는 의견도 있다.링크

이 싸움의 결과로 후금은 멸망의 위기를 벗어나 자신들의 세력권을 굳힐 수 있었고, 추가로 원응태, 웅정필, 왕화정 등이 후금군에게 당하며 누르하치는 자신의 위치를 다질 수가 있었다. 후금군의 기세는 파도 같았고, 이는 원숭환영원성 전투에서 이를 저지해낼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조선 입장에서도 사르후 전투는 재난 그 자체였다. 당시 조선이 동원할 수 있었던 정예병 13,000 중 7,000이 전사하고 남은 생존자들도 대부분 이런 저런 이유로 후금 주민이나 후금군으로 강제 편입되어 그나마 귀환한 건 2,700명 정도에 불과했다(이민환"책중일록"), 이는 훗날의 이괄의 난과 더불어 정묘호란, 병자호란 당시 후금군에게 북방이 뻥뻥 뚫리는 자동문 결과를 낳게 된다. 어쨌건 조선은 이후 이 전투의 참전을 통해 재조지은을 어느 정도 갚았다고 판단하고 명과 거리를 두게 되는데, 모문룡 덕택에 그런 경향이 더 심해졌다.

5 관련 항목

  1. 명나라에서 부르던 이름은 왕대(王台).
  2. 이때 명나라 인구는 1억 6천만이나 되었다.
  3. 용맹한 맹장이었지만 성질이 급하고 천성이 사나우며 욕심이 많았는데, 특히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무기와 갑주를 부수어 '미치광이 두(杜)'라 불렸다고 한다.
  4. 또 다른 이런 류의 전투 중 유명한 것은 파르살루스 전투.
  5. 이런 현상은 명말까지 그대로였다. 만리장성을 방어하던 오삼계의 명군이 나름 정예였다지만 3만에 불과했고, 그 병력조차 투입할 수가 없어서 이자성에게 베이징이 털린 것까지 보면 과연 말기의 명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보다 얼마나 나을까 궁금할 지경.
  6. 인구에서 정착민보다 열세이기에 유목민의 군대는 많은수가 아니다.
  7. 현대에도 야간사격은 굉장히 어렵다.
  8. 두 사료의 적절한 절충안은 적정거리에서 실랑이를 벌이며 기병이 전열을 짜고, 모래바람이 불자 일점돌파를 시도했다고 보는 것이다. 당시의 화포가 100보 이상에서는 명중이 힘들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기병돌격을 허용할 만한 거리다.
  9. 말을 막는 장애물을 비롯하여 진을 짜고 언덕 위에 좌우중 영을 나누어 포진했다고 하니, 일상적으로 보면 긴 시간이지만 병력 운용에 걸리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찰나에 가깝다. 군대에서 대략 2~4시간 정도의 간격이라고 생각해보자?
  10. 정찰급 병력들의 1차 돌진을 조선군이 막아냈다는 기록은 이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전투라기보다는 전초전에 가깝다. 사실 이어질 전투도 조선군 포수 1만 3천 가량이 금나라의 2~3만 기병에게 휩쓸린 상황이니 전투를 치뤘다고 보기도 민망하지만(...)
  11. 바람이 한번 휩쓸고 가라앉기 전에, 좌영과 우영의 전투병력이 증발했다고 한다(...). 이건 수천 명의 기마대가 일으킨 먼지바람이 돌풍이랑 뒤섞이면서 오랫동안 시야를 가린 이유도 있을 테지만, 성을 수십개 씩 접수하고 다니던 후금군의 전투력이나 평지였던 지형을 감안하면, 정말로 순식간에 승부가 났을 것으로 보인다.
  12. 아직 조총과 같은 화약병기의 집단 전투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동아시아의 전술로는, 수만기의 기병을 상대하기가 무리였다는 것이다. 설령 능통한 조총 방진을 짰다고 해도, 평지에서 최강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후금군의 수천 철기를 막아내려면 ㅎ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