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원릉

健元陵

1 개요

동구릉의 9개 능묘 중 조선 초대 임금인 태조 이성계가 안장되어 있는 왕릉이다. 이성계의 인지도와 인기에 힘입어 동구릉에서 제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라서 '건원릉은 관람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니 이곳에서의 휴식은 자제해 주세요'라는 안내판까지 있다.

영의정 하륜 등이 태조 사후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1408년[1] 6월 28일 지금의 위치로 결정하였고, 같은해 7월 5일 충청도·황해도·강원도에서 약 6,000명을 징발하여 7월 말부터 공사를 시작하고 석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9월 7일 태종이 빈전(장례 전까지 왕과 왕비의 관을 두던 전각)에 나가 견전례를 행하고 공식적으로 발인하였다.

2 특징

다른 왕릉이 꽤 단정하게 벌초가 되어 있는데에 반해 건원릉은 특이하게 억새풀이 무성한 투박한 왕릉이다. 덕분에 다른 왕릉과 다른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 벌초도 1년에 딱 한번만 한다고. 태조가 머리숱이 많았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 이런 투박한 느낌이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왕의 이미지와 부합하는 왕릉이라 볼 수 있다. 다만 동구릉에 가면 이 능침 바로 앞까지 올라갈 수는 없고 정자각 쪽에서만 관람할 수 있다.

무덤의 밑부분이 십이각의 화강암 호석(무덤 둘레에 돌려 쌓은 돌)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중심에는 태극 무늬가 있는 신령스러움을 상징하는 영탁영저문이 새겨져 있다. 각 면에는 와운문(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무늬) 중에 수관인신(獸冠人身)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겼고, 면석(面石)과 귓돌의 아래에는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영지(靈芝)를 새겼다. 호석 밖으로는 돌난간을 돌리고, 그 밖으로 석호 네 마리, 석양 네 마리를 엇바꾸어 밖을 향해 배치하였으며, 능 앞면에는 혼유석(魂遊石)과 그 양쪽의 망주석(望柱石)을 세웠다.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鼓石) 5개가 놓여 있다. 무덤 아랫단에는 석마가 한 필씩 딸린 문인석 1쌍이 있고, 그 아랫단에는 역시 석마가 딸린 무인석 1쌍이 마주 서 있다.

능의 관리를 위해 영 1인, 참봉 1인을 두었으며, 참봉은 종친부(宗親府)에서 대군이나 왕자군의 후손 중 제사를 받들 수 있는 자에 한해 자유로이 임용하였다. 태조가 살아있을 당시에 신덕왕후의 정릉고려의 능묘 관리 제도를 따라 만들어졌지만, 이 능은 조선왕조의 능제로 경영하였으기 때문에 조선 왕조 능제의 표본이 되었다. 이밖에도 고려 공민왕의 능인 공민왕릉(현릉)을 본떠 만들었으나, 나지막한 담으로 무덤 주위를 두르는 등 고려 왕릉과 차이점이 존재하며, 석호나 석양 등의 석물들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따르고 있다. 짬뽕

구리시 돌다리사거리부터 도매시장사거리까지의 길 이름을 여기서 따와 건원대로라 한다. 또한 이 도로는 도매시장사거리에서 동구릉로(43번 국도)에 합류한다. 최근에 미화 사업으로 길이 예뻐졌다

3 야사

능이 위처럼 억새풀이 무성하게 된 사연은 이성계가 죽으면서 고향 함흥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지만 이방원은 나라의 창업자인 자기 아버지를 함흥에 묻기엔 너무 멀다고 생각해서 도성 근처에 모시고자 했는데, 잔머리 대왕 답게 아예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가 이성계의 능에 심어놓았다고 한다. 또, 이성계는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가 있는 정릉에 같이 묻히길 원했으나 신덕왕후를 굉장히 싫어하던 이방원이 유언을 무시하고 새로 묏자리를 알아봐 이성계를 안장하였고 죄책감에 평소 고향을 그리워 하던 이성계를 위해 이성계의 고향인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쪽이든지간에 함흥에서 억새를 가져올 때, 그냥 파서 가져오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억새가 다 말라죽으므로 이를 고민하던 태종이 짜낸 지혜가 사람들을 일렬로 줄줄이 세워서 함흥에서 한양까지 억새를 릴레이 형식으로 운반해와서 심었다고 한다. 과연 잔머리 갑.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건원릉에 불을 질렀는데 건원릉의 정자각에서 엄청난 바람이 나와서 불을 다 꺼버렸다고 한다. 왜군이 몇번을 불 질러도 마찬가지여서 결국 포기했다고. 이외에도 여러 야사가 많다.
  1. 태조가 숨을 거둔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