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9월 요르단에서 벌어진 내전급의 진압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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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과 배경
1947년 말, 유엔이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내놓으면서 팔레스타인 내부는 유대인, 팔레스타인인, 영국군의 피터지는 삼자대면이 이루어졌다. 결국 영국이 GG치고 물러남과 동시에 1948년 5월 이스라엘은 우왕ㅋ굳ㅋ 님들 이제 우리 독립임이라고 외쳤고 이 사건은 아랍의 어그로를 끌어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한다. 결국 49년 유엔의 중재로 협정이 맺어졌고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지역은 각각 이집트와 트랜스요르단의 통치지역으로 남는다.
그런데 웨스트뱅크지역을 통합하고 이스라엘에서 도망쳐 나온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받고보니 얼레 되려 요르단 원주민이 소수민족이 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요르단의 원 거주민들이 인구의 3분의 1, 웨스트뱅크의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이 3분의1,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요단강 동쪽에 40만명이나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곧 팔레스타인인들이 요르단 국내 정치와 안보문제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말이었고, 당시 후세인 국왕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가리켜 살기 아니면 죽기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결성한 팔레스타인인들은 요르단 내에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고 아랍 세계에서 여러방면으로 원조를 받고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집트의 나세르는 정치적인 후원을 해주고 있었고 사우디 아라비아는 경제적인 후원을 뒷바침 해주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팔레스타인 조직은 국경너머 이스라엘을 향해 심심하면 레이드를 갔고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보복 레이드를 오는지라 국경상황은 매우 안좋았다. 이 때문에 요르단은 비밀리에 이스라엘과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접촉을 했고 이를 위해서 후세인 국왕이 내린 침공금지명령은 불복종되었다. 심지어 일부 요르단 장교들과 지휘관들은 대놓고 명령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소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레이드를 도와주기까지 했다.
웨스트뱅크를 빼앗긴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 다음해인 1968년에는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민병대를 공격하기위해 국경을 넘어 카마라 마을에 진입했고 피터지는 전투가 벌어진끝에 이스라엘 군이 물러났지만인용 오류: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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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숫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설명적인 이름을 사용하세요 요르단군도 적지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에서 가장 득을 본것은 아라파트와 파타당으로 아랍 세계에서 큰 명성을 얻었고 파타당은 PLO의 주도권을 획득한다.
이런 군사적인 분쟁말고도 내부문제도 어느정도 있었는데, 당시 요르단내 팔레스타인 캠프의 지배자는 팔레스타인 민병대였다. 요르단 경찰이나 군대는 아예 간섭을 못했다. 심지어 이들은 캠프에 검문소를 설치해서 통행세를 갈취하기까지 했다.
결국 1968년 11월 후세인 국왕과 PLO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져 7개 조항이 합의가 되었다.
- PLO의 요원들은 도시내에서 무장을 하거나 제복차림을 해서는 안된다.
- 시민들의 차량을 정지시켜서 검문하는것은 금지된다.
- 모병문제로 요르단군과 갈등이 있어서는 안된다.
- 요르단의 신분증명서를 가지고 다닐것.
- 차량에는 요르단번호판을 달고다닐것.
- PLO가 저지른 범죄는 요르단의 조사를 받는다.
- PLO와 요르단정부와의 분쟁은 요르단 국왕의 대표자와 PLO 대표자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다룬다.
조항은 만들어졌지만 PLO는 이 조항을 잘 지키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민병대 내부의 규율은 완전히 퇴갤수준이었고 카마라 전투 이후 여러 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다보니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중앙조직의 힘도 전무했다. 더구나 시리아나 이라크의 지원을 받고 생겨나는 단체들도 있었고 어떤 단체들은 급진주의적인 자세를 취해 요르단 왕가의 권위에 반박하면서 저항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어떤 단체는 깡패조직화 되어서 차량을 탈취하질 않나 상인들에게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돈과 물품을 강탈하기 까지 했다.
1968년 중순과 1969년 말 사이에는 갈등이 더욱더 고조되었다. 요르단군과 팔레스타인 민병대는 수시로 충돌했고 폭력행위와 납치가 수시로 벌어졌다.
심지어 당시 팔레스타인 민병대가 요르단 군인을 죽인뒤 그 군인의 머리를 잘라서 축구를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다음해인 1970년 2월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후세인 국왕은 PLO의 활동을 제한하는 칙령을 내렸고 결국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처절한 시가전이 벌어져 300명이나 사망했다.
1970년 7월 이집트와 요르단이 유엔 안보리 결의안 242호를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상황은 점점 심각해진다. PLO와 이집트의 좋은 시절은 끝이 나버렸고 PLO는 이왕 이렇게 된거 요르단이랑 끝장을 보겠다면서 발악을 한다.
후세인 국왕에 대한 여러번의 암살시도와 함께 PLO내의 강경분파이던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은 우리한테 관심 좀 가져달라능을 외치면서 여객기 여러 대를 납치해 요르단내의 다우슨이란 옛 영국 공군 활주로에서 화끈하게 날려버린다. 더불어 여긴 해방구역 우왕ㅋ굳ㅋ이란 선언까지 한다.
이는 후세인 국왕을 빡치게 만들었고 결국 9월 15일 계엄령이 선포된다. 요르단군은 전차를 몰고가서 수도 암만의 PLO 본부를 급습했고 동시에 요르단 내의 팔레스타인 민병대 기지도 공격했다
이로 인해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여기서 내쫒긴 팔레스타인 민병대는 레바논과 시리아로 옮겨갔다. 또한 팔레스타인 과격분자들은 이를 요르단의 배신이라고 성토했고, 이 원한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훗날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단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였던 "검은 9월단"은 이 사건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