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壬獄事
1613년(광해군 5년)에 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獄事)[1]. '칠서지옥(七庶之獄)', 그러니까 '칠서의 옥'이라고도 한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다. 그리고 그의 지지 세력이었던 대북파(大北派) 이산해(李山海),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이 실세로 떠오른다. 그들이 집권하자 대북파는 소북파(少北派)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을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막 집권한 대북파와 광해군에게는 또다른 위험들이 있었고, 위험을 하나씩 제거해 나간다.
어느 날, 강변칠우(江邊七友)[2]의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등이 조령(鳥嶺)에서 은(銀) 상인을 죽이고 은 6,700냥을 약탈한 형사 사건이 일어난다. 1608년,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김평손은 서얼(庶孼) 허통(許通)의 연명상소를 올린 적이 있으나, 이가 거절된 이후부터 그들이 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은 냉소로 바뀌어갔고,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해졌다. 그들은 점차 과격해져서 도적질 따위를 일삼았는데, 은 약탈 사건도 도적질의 일환이다. 그 무렵, 대북파는 왕위계승권 분쟁으로 장차 위협이 될 수 있는 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이이첨, 정인홍 등은 이 사건을 위조하여 그들을 제거하기로 한다.
대북파는 박응서로부터 허위 자백을 하도록 설득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응서는 박치의, 심우영 등과 역모를 모의했으며, 은 약탈은 같이 역모를 일으킬 무신(武臣)들과의 교류에 필요했기 때문에 저질렀다는 것이다. 은 등을 뇌물로 주어 정협(鄭浹)을 훈련대장에 앉히고 역모에 성공한 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한 뒤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 수렴청정을 맡기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옥사가 시작되었다. 봉산옥사에 이어, 광해군이 친국한다.
그러나 서양갑이 맨 처음 역모를 모의했던 이는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라고 증언했고, 정협 또한 역모에 고명대신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증언으로 사건을 키웠다. 그렇게 고명대신들이 끌려오게 되었는데, 대신 중 한 명인 박동량(朴東亮)은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무덤에서 저주를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렇게 김제남은 사사되었으며, 그의 세 아들도 사사되었다.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리고 남인 혹은 서인이었던 신흠(申欽),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등도 몰락하여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