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목왕후

조선의 역대 왕비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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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인목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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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자의대왕대비
호칭인목왕후(仁穆王后)
시호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정숙인목왕후
(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正肅仁穆王后)
출생지반송방 사저
(현 서대문구 충정로 근교)
사망지인경궁 흠명전
본관연안(延安)
배우자선조(宣祖)
아버지연흥부원군 김제남
어머니광산부부인 노씨
생몰
기간
음력1584년 11월 14일 ~ 1632년 6월 28일
양력1584년 12월 15일 ~ 1632년 8월 13일(향년 49세, 만 47세)
재위
기간
1602년 ~ 1608년(왕비)
1608년 ~ 1618년(왕대비 재위기간)
1618년 ~ 1623년(서궁 유폐 시절)
1623년 ~ 1624년(복위)
1624년 ~ 1632년(대왕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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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에 보물 제1627호로 지정된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로, 안성시 칠장사 소장. 인목왕후는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고 전해지며, 그녀의 딸 정명공주도 상당한 명필이었다고 전한다.

1584 ~ 1632

1 개요

조선 선조의 계비이자, 정명공주영창대군의 어머니. 연흥부원군 김제남[1]과 광산부부인 광주 노씨의 차녀이다. 광해군인조때까지 생존해서인지 인목대비라 불리는데, 실제 대비로서의 존호는 소성대비였다. 인목왕후나 소성대비라 불러야 맞다. 참고로, 인목대비나 소성대비로 검색해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

2 생애

2.1 왕비 간택

일단 광해군에게 계모이긴 한데 광해군보다 나이가 9살이나 어렸다. 왕비로 간택되었을 때의 나이는 19세. 보통 왕비 간택의 대상이 되는 나이는 13-16세였으며 일반적인 양반 집안 처녀들도 17~18세를 미혼으로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늦은 나이였다. 전쟁 때문에 혼처를 정할 틈이 없어 혼기를 놓친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도 재혼이었던지라 다소 많은 나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선조도 이미 환갑이 넘은 나이라 적손을 보려면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바로 임신할 수 있는 나이의 처녀[2]를 왕비감으로 간택했다고 보기도 한다.

2.2 왕후 시절

왕후가 세상을 떠나면 재혼하는 일 자체는 특별할 것 없는 관례였지만,[3] 많은 여인들 중 그녀가 선택받은 데에는 선조의 의중이 작용했다. 그녀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은 유생들이 자기들끼리 무리짓는데 거부감을 느끼고 잘 어울리지 않았던 무당파적 인물인데도 친정 가문 자체(연안 김씨)도 김안로가 몰락하면서 완전히 기울어 있어 지나치게 세도를 부릴 위험이 적었다. 또한 김제남의 첫째 사위 심정세가 인빈 김씨 소생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뒷날 인조)의 이종사촌이고 심정세의 아버지 심엄이 광해군의 처남 유희발과 인척이라 기존 왕실 구성원들과도 큰 충돌없이 잘 섞일 수 있다 판단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왕비였다. 다만 너무 어려서 처신을 잘못한 점은 있었다. 신성군을 세자로 만들려고 암암리에 움직이다 광해군 세자 책봉 후엔 재빨리 광해군으로 갈아타 관계를 개선한 인빈 김씨와 비교하면[4] 처세술이 모자랐다.[5] 때문에 영창대군을 마치 세자처럼 차려입게 해서 다니고, 친정아버지인 김제남과 함께 치부에 힘을 써서 재물을 모으는 데 열중하여 눈총을 사기도 했으며, 오히려 주변의 입방아에 휘둘리고 중궁전 소속 나인들이 동궁 소속 나인들을 핍박하거나 광해군 앞에서 방자하게 구는데도 이를 제어하지 못하였다. 특히 인목왕후의 나인들은 인목왕후가 궁 내부 사정을 잘 모른다는 것을 이용하여 온갖 행패를 부리다가, 정작 광해군이 임금이 되고 영창대군에 역모에 휘쓸리자 너도나도 있지도 않은 거짓고변을 하여 인목왕후를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또한 인목왕후 본인도 궁중의 법도를 어기고 영창대군을 세자처럼 입히는 등 철없고 위험한 실책도 저질렀다.

남편 선조 탓도 있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선조의 위신은 크게 하락했다. 파천도 파천이었지만, 요동으로 망명을 추진하거나 멀쩡한 이순신을 파직시켜 수군을 궤멸시키고 삼남 지역을 통째로 내줄 뻔하는 등의 행위로 위신이 땅에 떨어져 류성룡을 비롯한 신하들이 선위를 요구하려다 차마 말 못하고 물러가는, 다른 때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 발생했다. 선조의 총신이었던 이항복이덕형당현종안록산의 난을 피해 피난 간 사이 분조를 이끌던 태자가 제위에 올라 숙종이 된 고사를 거론하며 대놓고 선위를 주장하는 일도 있었다.

그때마다 선위 카드를 꺼내들어 선수치고 후세 사람들이 보기에는 굴욕적일 정도로 명나라에 기대는 방법으로 어떻게든 권위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아들 광해군이 임란 기간 분조 활동을 통해 선조가 위협을 느낄 정도로 권위가 강해져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활약을 통해 대북, 청소북은 물론 재야유림까지 광해군에 대한 지지가 확고했고 민심도 두루 사고 있었다. 선조는 왕 노릇 계속하기 위해 광해군을 어느 정도 견제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어린 영창대군과 어심을 읽은 줄 알고 부화뇌동하는 탁소북 유영경을 이용했다.

2.3 대비 시절

선조 승하 시점에서도 나이가 너무 어린 탓에(20대 중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선조 40년 10월에 선조가 쓰러졌을 때 숨이 가빠지자 세자에게 전위(傳位)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정 내에서 유일하게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탁소북 영수 유영경은 천부당만부당하다며 반대하자 당황한 인목왕후는 유영경과는 다른 처신을 하였다. "성상께서 병중에 계신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심기 불편하심이 전보다 배나 더하오. 지금 성상의 전교를 따르지 않으면 환우가 더욱 위중해질까 염려되니 대신들은 전섭의 명을 따르도록 하오."라고 언문으로 명을 적어내 광해군의 지위를 확실히 인정했다. 영창대군이 광해군의 정통성에 장애가 되었다는 주장은 사학계에서 진지하게 다뤄진 바 없으며 2000년대 광해군 옹호 바람이 불면서 나온 인터넷발 설이다. 광해군은 탁소북을 제외한 전 당파와 재야의 지지를 받았고 16년에 달하는 실무 경험에 종법 해석 상으로도 우위에 있었다. 영창대군이 왕비 소생이란 점도 31살이라는 엄청난 나이 차이 앞에선 고려 대상이 못되었다.

문제는 조선 27왕 중 최다 친국 기록을 가진 광해군의 의심병. 조작된 옥사에 휘말려 친정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당하고[6] 자신의 아들 영창대군이 유배에 처해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7] 자기 자신도 폐모론에 말려들었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은 특유의 '분위기 다 조성해 놓고 자기는 슬쩍 빠지는 방법'을 써서 폐모 교지는 내려지지 않았지만, 대비 자리에서 쫓겨나 서궁(덕수궁)에 5년 동안 유폐되었다.

인목왕후 입장에서 광해군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8] 비록 그녀가 처신에 실수는 했지만 광해군을 밀어내려는 망상을 품진 않았고[9] 유영경과 달리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지원해 다른 뜻이 없음을 밝혔다. 그런데 광해군은 본인의 정통성이 탄탄해[10] 별 위험도 되지 못하는 영창대군을 경계해 인목왕후의 아버지와 오빠, 동생들, 영창대군을 모두 죽였으며, 겉으로는 대북의 폐모론에 반대하는 척하면서 대비를 폐할 생각이 없었다 하면서 반대하는 이들은 귀양 보냈고, 강경책을 편 이들은 벌하지 않았고, 폐모론을 주장하는 대북에게 계속 힘을 실어주었다.

예를 들어 광해군이 인목왕후 폐비에 대해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참가한 인원이 전현직 관리 970명, 종실 170명과 도성에 사는 많은 백성들이었는데, 실록에서조차 이이첨이 자파세력을 동원해 여론 조작을 했다는 것이 명백히 기술되어 있다. 또 신료들 대부분이 찬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 폐모론에 반대한 서인 남인 원로대신을 광해군이 다 쫓아내 대북세력만 남은 상황에서 여론조사를 했으니 당연히 찬성이 높게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당시 대북이 얼마나 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대북 독재 정권을 만들어 준 광해군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있나……. 이러니 대북에 더 힘이 실리고 대북파들은 죽자살자 폐모론을 주장하니 인목왕후 입장에서는 배은망덕,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이때 그녀의 딸 정명공주옹주로 낮추어져 함께 유폐되었는데, 광해군이 출궁을 허가하지 않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야 혼인할 수 있었다.

폐모살제로 북인을 제외한 서인, 남인, 지방사림의 지지를 상실한 광해군은 결국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광해군이 폐위되자 인목왕후는 대왕대비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광해군의 처분에 대한 교지를 보면 광해군에 대한 인목왕후의 적개심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알 수 있다.[11] 대비로서 여생을 마쳤지만 모순적이게도 유배된 광해군보다 자신이 더 일찍 죽었다.

홍길동전 저자 허균이 인목왕후를 무척 증오해서 폐모론에 적극 앞장섰으며, 심지어 암살기도까지 획책했던 것도 유명한 일화. 더욱이 허균영창대군이 선조와 인목왕후의 아들이 아니라 민가의 아이를 주워다 왕자로 꾸며냈다는 과감한 주장도 폈다. 이는 그의 교유관계 때문이었는데 계축옥사의 시작이 된 칠서의 옥의 주인공인 박응서, 서양갑 등 서자 7명과 친밀한 사이였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목왕후를 밟아야 했다.

3 죽음

그토록 증오하던 광해군보다 빨리 죽었다

4 평가

인목왕후 본인은 크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왕비였다. 그녀에겐 이전의 문정왕후 윤씨나 뒷날의 정순왕후 김씨 같은 정치력이 없었고, 폐비 윤씨처럼 말도 안되는 야심을 품지도 않았다. 친정 집안의 세가 약하고 나이도 어려서 대비가 된 이후에도 권위가 크진 않았다. 선조가 그녀의 아들 영창대군광해군 견제의 수단으로 쓰지 않았거나 광해군이 조성한 살벌한 공안정국이 아니었다면 그냥 어른 대접 받으며 평범하게 살았을 텐데, 남편과 (종법상)아들 잘못 만나서 불행한 인생을 산 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인목왕후가 허물 하나 없는 성인군자는 아니었고 처세술에서도 미숙하기는 했으나, 아버지와 형제, 아들을 모두 허망하게 잃어야 할 정도로 큰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계축일기 등을 통해 '어린 나이에 늙은 왕에게 시집 가 당쟁에 휘말려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가련한 왕후'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선 광해군 긍정론의 역풍을 온몸으로 받아 실제로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려려는 야심이 있었다느니, 복수심에 매몰되어 인조 정권의 권위 확립에 이용당했다느니 하는 부정적인 평가 일색이다.

2010년대 들어 제도사, 정치사 중심으로 광해군의 거품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한 다음부턴 그녀에 대한 일방적인 저평가도 진정되는 중.[12]

5 대중매체에서

그녀 혹은 그녀의 나인, 혹은 딸 정명공주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전소설 계축일기에서는 완벽하게 선량한 피해자로 등장, 악당 광해군과 교활한 김개시의 온갖 핍박을 이겨내고 마침내 인조반정으로 대비의 자리를 되찾는 인생드라마를 찍는 것처럼 묘사된다. 계축일기는 그야말로 말 그대로 소설이라 혜경궁 홍씨한중록처럼 사료적 가치는 없다.

5.1 사극

  1. 중종영의정을 지낸 김전의 증손자이며, 권신 김안로의 종손이다. 더 위의 조상 중에는 이름을 말하기 곤란한 분도 있다.
  2. 당시에는 소녀들의 발육이 그리 빠르지 않아, 일반적인 왕비 간택 나이에 간택된 왕비들은 아직 초경도 시작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3. 왕이야 승하하면 세자가 이어받으면 그만이지만 내명부 수장인 왕후는 세상을 떠나면 이어받을 사람이 없으니 새로 들여야했다.
  4. 그 덕분인지 인빈 김씨의 자손들은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을 제외하고는 옥사에 휘말리지 않았다. 다만 정원군은 그 일로 상심해 죽었다.
  5. 왜란 이전 세자 책봉이 유력했던 아들 신성군을 무반 명가 평산신씨의 일원이자 조선 최고의 맹장으로 이름 높았던 신립의 딸과 혼인시키고, 정원군 역시 서인 명문가이자 평산 신씨와 쌍벽을 이룬 무반명가 능산 구씨 집안과 혼인시켜 배경을 든든히 하고, 정철을 쳐내려는 이산해와 연합하는 등, 자기 소생을 차기 왕으로 만들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왜란 이후엔 자신의 외조카를 광해군의 후궁으로 들이고 선조와의 사이에서 광해군 편을 많이 들어주는 등 광해군과의 관계 개선에 힘써, 의심 많은 광해군조차 "내가 지금 자리에 있게 된 데는 서모의 공이 컸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로 사이가 원만해졌다.
  6. 치부를 일삼기는 했는데 이 정도로 죽어야 한다면 조선왕조 500년 간 능지처참 당해야 할 왕실 구성원이 세 자리 수는 가볍게 넘긴다. 무엇보다 이 시기 부패의 끝판왕은 방납 커넥션과 연계되어 일선에서 기준치의 최대 100배에 달하는 방납가를 매기고 왕이 이들을 비호하는 형태를 취했던 광해군과 그 측근들이다.
  7. 영창대군이 죽게 된 것은 뒤늦게 전해 듣는다.
  8. 어느 정도냐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후 반정 수뇌부들에게 이혼(광해군의 이름) 부자의 머리를 가져오라면서 그들의 살점을 뜯은 뒤에야 전교를 내리겠다고 할 정도였다.
  9. 광해군 저주 건은 계축옥사 당시 고명대신으로 끌려온 박동량이 살기 위해 한 증언이다. 이후 대비전의 상궁 나인들을 고문해 목릉, 즉 선조의 능에 저주의 뜻을 담은 물건을 묻었다는 증언을 받아냈으나, 사실 확인을 위해 목릉을 파헤쳤을 때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했다. 북인의 모함일 가능성이 높다.
  10. 세자로 16년, 게다가 그 사이에는 전시에 분조를 성공적으로 이끈 경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건 문종의 대리청정 못지않은 플러스 요소다.
  11. 사실 반정이 일어난 걸 안 후 인조를 만나보고는 그 전에 광해군 부자의 머리를 가져오라며 그 머리를 씹겠다고 했다. 서인은 쿠데타에 성공한 뒤 광해군을 한동안 궁에 남겼으나, 인목왕후는 그를 처음엔 사사시켜야 한다고 윽박질렀고 이후 두 번 절하며 청한다고 할 정도로 간절하게 먼 곳으로 광해군을 유배보낼 것을 요청했다.
  12. 여담으로 인터넷발 광해군 긍정론은, 광해군 긍정론을 집대성한 한명기 교수의 견해와도 차이가 심하게 난다. 한명기 교수는 공과를 엄연히 구분해서 외치를 제외한 내치 대부분을 과오로 평했다. 그의 저서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를 펼친 군주란 부제와 달리 3분의 1 정도는 영건사업과 옥사, 수탈을 들어 비판하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