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대군

1 개요

永昌大君
1606년 4월 12일 ~ 1614년 3월 19일

조선 선조의 14왕자 중 막내. 인목왕후의 소생으로, 선조의 유일한 적자(嫡子). 정명공주의 동복 남동생. 본명은 이의.

조선 역사상 가장 불행한 정실 소생 왕자. 공주로 태어났다면 더 좋았을 뻔한, 태어나면서부터 불행이 예정되어있던 아이. 다른 불행한 왕자도 많지만 이토록 어린 나이에 참담한 고초를 겪으며 죽은 왕자는 이의가 유일하다. 어린 나이에 죽었지만 존재 자체로 광해군에게 폐모살제를 저지르게 하여 그가 반정으로 쫓겨나는 가장 큰 명분을 제공했다는 데서 그 존재감은 작지 않다. 만일 이 아이가 딸이었다면, 혹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죽었다면 역사가 바꼈을 지도 모른다.

광해군 3년(1611년)에 봉해진 군호인 "영창"은 명나라 황제의 옥새에 세겨진 수명어천, 기수영창(受命於天, 旣壽永昌, 하늘의 명을 받으니 '수명이 길고 창성하다)라고 쓴데서 따왔다고 한다. 사실이면 정말 아이러니한 작명이 아닐 수 없다.

2 출생 과정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 박씨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두지 못했다. 대신 후궁들에게서 많은 서자를 두었는데, 그 중 가장 총명하다고 평가받는 차남 광해군임진왜란 발발 시에 임시로 세자로 삼았다.

전쟁이 끝나고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이 직접 말을 꺼내 연안 김씨 가문 김제남의 차녀를 계비로 맞았는데 이가 인목왕후다.

승하하면 세자가 뒤를 잇는 왕과 달리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는 자리가 비면 왕이 다시 가례를 올리는 것 말고는 들여올 방법이 없다. 따라서 왕비가 왕보다 먼저 사망하여 자리가 비면 왕이 재취하는 것은 특별한 게 없는 일이었지만[1] 전란으로 혼기를 놓쳐 당시 기준으론 나이가 있었던 인목왕후를 선택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칠서의 옥 이후 대북과 원수가 되면서 완전 서인으로 분류되긴 했지만, 선조 시절 김제남은 유생들이 자기들끼리 무리짓는데 거부감을 느끼고 잘 어울리지 않았던 서인 무당파적인 인물이었고,[2] 가문 자체(연안 김씨)도 김안로가 몰락하면서 완전히 기울어 외척으로서 세도를 부릴 위험이 적었다. 또한 김제남의 첫째 사위 심정세가 인빈 김씨 소생 능양군(뒷날 인조)의 이종사촌이고 심정세의 아버지 심엄이 광해군의 처남 류희발과 인척이라 기존 왕실 구성원들과 잘 섞일 수 있다 판단했을 것이다.[3] 아무튼 인목왕후는 1603년 정명공주를 낳고, 1606년 영창대군이 되는 왕자 이의를 낳았다.

3 출생 직후

왕자 이의, 즉 영창대군이 휘말린 소용돌이를 파악하려면 임진왜란 이후 정국변동과 선조의 추락한 권위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임진왜란 직후 집권당은 북인이었는데 전쟁 기간 동안 강경책을 제시했고 정인홍, 곽재우 같은 조식의 제자들이 낙동강 서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손쉽게 집권당이 되었다.

서인 역시 의병장은 다수 배출했지만 정철(1593 卒), 성혼(1598 卒), 윤두수(1601 卒)같이 당파를 이끌 거물 정치인들이 차례로 병사하고, 조헌, 고경명, 김천일 같은 서인계 의병장 대부분이 금산전투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해버려 성격 불같은 이귀나 당색이 옅은 김류 정도를 빼고는 한동안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집권당이었고 향촌거점인 영남 동부가 왜군에게 짓밟힌 남인은 류성룡, 김성일 등 조정과 정규군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유성룡이 종전을 앞두고 주화오국했다는 북인의 탄핵과 류성룡과 조목의 대립으로 촉발된 남인 자체의 내분으로 실각한 상황이였다.

전쟁 이후 북인 내부에서는 홍여순의 대사헌 임명건을 둘러싸고 남이공, 김신국과 홍여순이 대립하면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었고 남이공, 김신국이 파직되며 대북이 우위를 점했다. 대북은 다시 이산해 중심의 육북, 홍여순 중심의 강경파 골북,[4] 류몽인 중심의 중도파 중북으로 나뉘었다.

이에 선조는 견제차원에서 밀리던 소북의 대신 류영경을 영의정으로 삼아 힘을 실어주어 선조 말년에는 소북이 힘을 얻었다. 류영경의 권세가 강해지자 소북 내에서 다시 반발하는 인사가 나와 남이공 중심의 청소북[5]과 류영경 중심의 탁소북[6]으로 나뉘었다.

한편 선조는 임진왜란 이후 땅에 떨어진 권위로 고심하고 있었다. 파천도 파천이었지만 전쟁 중에 왕이 요동으로 망명을 추진하거나 이순신을 파직시켜서 수군을 궤멸시키고 삼남지역을 통째로 내줄뻔 하는 등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반면 세자 광해군은 임란 기간 분조활동을 통해 선조가 위협을 느낄 정도로 권위가 강해져 있었다. 때문에 신하들이 선위를 요구하는 반역에 가까운 일이 발생했다. 유생 남이순·송희록은 선조에게 직접적으로 선위하고 물러나라는 상소까지 올렸고, 신하들도 내색은 안했지만 선조가 보여준 한심한 행태와, 혹시나 선조가 요동으로 도망쳐버리면 제대로 정사를 보는 게 불가능하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내심 선조가 양위를 해주기를 바랬다.

당장 평양을 나와 의주로 튀던 중 선천에서 유성룡과 정철이 선조에게 직접적으로 양위해줄 것을 요구하려 했다가 서로 말을 못 꺼내서 실패했고(선조실록 1592년 6월 18일) 선조의 충신이었던 이항복과 이덕형조차 분조 후 즉위한 당숙종의 사례를 거론하며 대놓고 선위를 주장했다.

더군다나 임란 이후 집권당은 정인홍 같은 광해군 과잉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북인이었다. 서인도 정철은 아예 광해군을 염두에 두고 건저의 문제를 일으켰고, 이귀 역시 광해군을 호종했다. 남인도 당장 수장 유성룡이 개경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만든 사람이였고 위에서 언급한대로 선조에게 양위를 주장하는 등 광해군 지지파에 가까웠다.

다른 왕자들을 살펴보면 선조가 좋아하던 신성군은 이미 전쟁 중에 병사했고 그나마 나이가 찬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은 세자는 커녕 사약 마시고 온전히 죽으면 다행일 정도로 강력범죄자들이였다. 결국 광해군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붕당의 고른 지지를 받고 있었고. 결국 자의든 타의든 광해군은 선조의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선조로선 왕 노릇을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광해군을 어느정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마다 선위 카드를 꺼내들어 선수치고 후세사람들이 보기에는 굴욕적일 정도로 명에게 기대는 방법으로 어떻게든 권위를 끌어 올리려는 무리수를 썼지만 당연히 한계에 부딛쳤다.

이런 와중에 선조는 50살이 넘어서 적자 이의를 낳았고, 류경영을 중심으로 한 극소수 탁소북이 왕자 이의를 지지했다. 그리고 선조는 광해군 견재를 위해서 법도에는 어긋났지만 이의을 지지하면서 광해군을 상대하는 류영경과 탁소북을 선조가 굳이 내버려두고 어떤 측면에서는 탁소북을 육성했던 이유다.

  • 아버지가 아들을 경계해 견제한다는게 언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왕조국가에서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당장 위에 언급된 당현종과 숙종만 해도 현종이 계속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숙종을 견제하면서 조정이 갈라졌고 정쟁 끝에 현종 지지파가 귀양가는 걸로 막을 내렸다. 뒷날의 인조는 소현세자를 들어 수차례 겁박을 일삼는 청의 태도에 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조선왕이 탄생할 가능성을 바짝 경계했고 결국 민회빈 강씨를 사사하고 세손들을 귀양보내게 되었다. 흔히 철없는 왕자의 비행과 철혈군주의 애처로운 부정(父情)으로 설명되는 태종과 폐세자(양녕대군)의 관계조차 태조가 내정한 적장자 대신 자신의 즉위명분인 택현(擇賢)에 맞는 후계자(세종대왕)를 세워 자신의 권위를 굳건히 하려한 태종의 노림수로 보는 연구가 있다.[7]

따지고보면, 세자의 경우 적장남이 되는 게 우선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례가 꽤 많았다. 대표적 사례로는 태조 이단(이성계)의 막내 아들 폐세자(의안대군) 방석과 정종의 아우인 태종, 태종의 3남인 세종대왕인데, 간략히 상황을 따져보자면,

  • 의안대군은 막내아들이고 나이도 어렸지만, 조선의 건국이념과 건국주도세력의 의중이 작용했다. 조선건국을 주도한 정도전과 그를 지지해준 태조는 새 왕조가 모든 면에서 구 왕조와 완벽히 결별하길 바라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세자 책봉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다음 왕이 흔들리지 않고 건국의 이념을 계승해 가려면 고려 구 세력과 이어지지 않아야 된다고 보았다. 신의왕후 소생 5왕자는 건국과정에서 제각기 공이 있었으나 태조가 고려정계의 일원이었던 시절에 혼기가 찼던지라 권문세족으로 통칭하는 고려 구 세력과 혼맥으로 밀접히 이어져 있었다.[8] 남는 건 왕비의 자식이면서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아 고려 구 세력과 뚜렷한 연결고리가 없는 방석 뿐 이었다. 자연스럽게 방석이 건국 이전부터 세자로 낙점되었다.[9] 현 왕비의 자식이고 동복형 방번은 처음부터 경쟁 대상이 못 되었으며[10], 고려 제일의 무장이었던 건국자 태조와 정도전, 남은같은 핵심 공신들, 매형 이제등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기반이 약하지도 않았다.
  • 태종은 정종의 아들이 아니라 동복 동생이다. 적장자 계승을 명분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에게 적장자가 없다는 점을 노려 일어난 2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한 태종은 정계를 장악하고 형의 양자가 되어 적장자 계승 명분으로 왕위를 승계했다. 다만 이 명분을 끝까지 끌고가지 않고 정종을 슬쩍 묻어버리며 택현(擇賢)을 명분으로 세워 족보를 정리하고 자신을 실질적인 창업주로 내세워 권위를 강화한다.
  • 형을 밀어내고 즉위한 세종은 태종이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폐하고 세자로 세웠는데 그전에 양녕을 지지할 만한 외척세력과 경험이 부족한 세종을 뒤흔들 공신세력이 모두 제거되었다. 태종 본인의 즉위명분이 택현(擇賢)이었으며 무엇보다 양녕이 수 년간 쉬지않고 파행을 저질러 명분을 퍼다줬다. 게다가 즉위 후엔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심온 사사로 조정을 한 번 더 정리해줬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적장남보다 약한 정통성을 보완해줄 기반이 확고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의안대군은 신덕왕후의 사망과 태조의 병환이란 변수 아래 쟁쟁한 이복형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무인정사(1차 왕자의 난)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선조도 추정컨데 정말로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주려 했을 가능성은 없다. 말년에 어린 자식이 눈에 밟혔을 가능성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여지가 없었다. 본인 권위가 떨어져서 십수 차례 선위파동을 일으키고 신하들이 대놓고 선위 운운한 마당에, 10년 넘게 아무 문제 없이 능력을 인정받은 세자를 2살짜리 어린애와 교체하는 무리수를 두는 건 불가능했다.

광해군은 세자 책봉 이전부터 동서인이 모두 인정한 후계자 1순위로였고 이후 10년 간 세자자리를 지키면서 능력과 지위가 더욱 탄탄해졌다. 조선에서 세자의 실무경험은 혈통만큼 큰 정통성을 부여해 주었다.[11] 거기에 임진왜란 때 활약으로 민간의 지지도 높았다. 광해군이 차남인 점은 장남 임해군이 워낙 심한 개망나니라서 처음부터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12] 또한 건강에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니니 허약하다는 걸 핑계로 세자 자리에서 폐할 수 없었다. 유일한 약점은 서자라는 점이었지만, 정명공주가 태어나기 전까지 선조에게 왕비 소생의 자식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아니었다.

  • 사실 혈통가지고 따지면 선조의 정통성이 더 허약했다. 적어도 광해군은 선조의 친자식이지만,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3남, 즉 중종의 서손이다. 명종이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다면, 그의 삼촌들이나 형 하원군, 하릉군[13]이 후계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다만 하원, 하릉군의 경우 명종 사망 당시 20살을 넘겼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훗날의 서자출신인 영조형을 독살했다는 혐의가 문제가 되었지 자신이 적장자 여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면 선조의 손자 인조는 선조의 희망처럼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귀양보내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는데, 덕분에 인조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까지 이 문제로 고생을 했다. 적자가 계승을 했는데도.

무엇보다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났다. 영창대군과 광해군의 나이 차이는 무려 31살, 어머니 인목왕후조차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렸고, 광해군의 아들인 조카 이질은 후술하겠지만 세손 임명을 고려해야 할 나이(10살 전후)였다. 설사 광해군의 입지가 취약했다 쳐도 2살 유아가 어머니보다 나이 많은 형과 경쟁이 될 리 없었다. 게다가 당시 예학의 종법 해석으론 광해군이 영창대군보다 정통성에서 우월했다.# 참고 글 당장 명나라도 당시 만력제가 억지로 아무 문제없는 적장자를 대신해 3남을 황태자로 삼으려고 한 "쟁국본" 때문에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라고 반대한 거지, 광해군의 능력과 차기왕권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강제로 폐하고 세자인 광해군을 세울 생각까지도 했던 명국이었다. 그저 쟁국본 및 책봉문제를 핑계로 조선을 길들여 이익을 얻고자 했을 뿐이다. 그냥 명나라 조정이 개점휴업 상태라 그런걸지도 실제로 명국은 선조 승하 후엔 못이기는 척 광해군의 승계를 인정했다.

종합하면 광해군의 신료들의 지지, 실무경험, 나이, 종법 등 모든 면에서 우월하여 그 기반이 결코 불안하지 않았고 선조는 세자 교체할 힘 같은건 처음부터 없었으며 견제용도로 활용했을 뿐 이다. 실제로 선조는 죽음이 가까워오자 전위의 명을 내렸으며, 이때마다 전위에 적극 찬성하는(!) 정인홍 등 과잉 충성파는 제어하면서도, 세자가 석고대죄 할 때마다 세자의 지위를 흔들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몇 번씩 했다. 류영경도 당연히 "전위는 안 되지만 세자의 지위는 흔들 수 없다"는 해명문을 올려야했다. 그만큼 광해군의 승계는 당연시 되었던 것이다. 류영경 등이 선조가 장수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14]에 바탕을 두고 세자를 교체하는 계획을 세웠을 정황은 높다. 그러나 유교국가 조선에서 군신의 의리는 한 번 정해지면 뒤집을 수 없다는 명분을 뒤집기란 어려운 것이었고, 류영경 조차도 겉으로는 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선조입장에서만 해아린 것이고 광해군 입장에서 왕자 이의는 초특급 불안요소였다. 전후관계를 따진다 하더라도 광해군과 아버지 선조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어려웠고, 이유야 어찌되었든 전쟁 때문에 세자가 되기는 했지만 명나라를 이유로 선조는 죽을 때까지 세자로 정식 책봉을 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진짜 명나라가 이유라면 하다못해 세자의 권위라도 살려줘야 하는데 툭하면 선위소동으로 세자의 자리를 불안하게 했다.[15]

이런 와중에 이 태어나고 그 다음달에는 나이가 찬 원손(광해군 아들 이질)에게 세손으로 임명도 하지않고 그냥 세손처럼 공부하라는 의무만 주어진다. 원손이 세손이라는 권한없이 공부하는 일은 자칫 광해군 아들이 공부를 게을리한다는 이유로 원손도 폐할수도 있는 일이였다.

이런 와중에 소북 영의정 류경영은 노골적으로 세자교체에 열을 올렸고 인목왕후는 궁중법도를 어겨가며 이의를 세자처럼 입히고 다니는 상황이였다. 광해군 입장에서는 이러다 이의가 일반적으로 세자에 책봉되는 10살 전후에 세자교체와 숙청을 충분히 우려할만한 상황이였다

거기에 선조는 이의파를 키워주기 시작하는데, 일례로 김제남이 자신의 아들인 김규(이의의 외삼촌)를 선조의 사돈이던 서경주(徐景霌)의 장녀과 결혼시키려 했는데, 서경주는 훗날 왕이 될 광해군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던 서경주는 이 혼사를 거부했다. 그런데 대뜸 선조가 서경주에게 편지를 보내 김규와 결혼할 것을 요청하고, 왕명을 거부할 수 없었던 서경주는 자기 딸과 김규를 결혼시킨다.[16] 원래 부마의 집안은 조선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들이고, 세자책봉은 왕족들의 입김이 강한 부분 중 하나인데, 아버지 선조가 이의파를 키워주는 행보는 광해군을 더욱 불안하게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때문인지 훗날 민인백의 태천집에는 진위는 불분명하지만 서경주가 사돈 김제남에게 보낸 편지를 기록했는데 여기서 서경주는 이의가 창진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역병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침을 놓아서 소경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으니, 그 방법을 이용하여 이의가 눈을 멀게 하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김제남은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고 한다. 만일 서경주의 말대로 이의가 눈이 멀었다면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았겠지만 비참한 죽음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조 때 죽었을지도 죄없는 어린아이를 장님으로 만들자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당시의 분위기는 일촉즉발 같았고, 여기에 양당사자의 애비 선조는 의도야 어찌됐든 불을 넘어서 네이팜을 들고와 도배를 하는 꼴이였다.

이윽고 선조는 세자 승계를 교지로 내리고 눈을 감는다. 선조는 어린 자식이 걱정되었던지 류영경 등에게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왕자 의를 잘 부탁한다는 유지를 남겼다는 것이다. 유언에서조차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이의를 네가 지켜야 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뒤에 보겠지만 결국, 그 사랑이 이의의 목숨을 앗아갔다. "동기를 사랑하라"는 선조의 유언이 아이러니 하게도 사랑하는 막내아들의 목숨까지 흔드는 행동이 된 것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하 <박시백의 조조록>) 영조실록의 표현을 빌리면, "현재의 권력이 미래를 규정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역사는 늘 증명하지 않았던가?" 이 와중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류영경이 왕자 교지를 감춰버려서 계승에 차질을 빚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대비가 된 인목왕후가 이미 대세가 넘어간 것을 파악하고 광해군의 즉위를 왕의 훙일 다음 날로 서두르면서 광해군은 그대로 왕위를 승계한다.[17] 어심을 읽은 줄 알고 줄을 잘못 선 류영경과 탁소북은 즉각 제거되었다(...)

결국 이러한 선조의 견제와 류영경의 부화뇌동은 겨우 2~3살짜리 왕자를 광해군 최대의 정적으로 만들어 버렸고, 광해군과 대북파가 왕자 이의를 숙청대상 톱순위로 세우는 한 요인이 되었다. 덧붙여 광해군도 이와 관련된 여파로 인해 결과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4 9살의 짧은 생을 마감하다

왕자 이의는 6살이 된 광해군 3년에야 영창대군으로 봉해지게 된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1613년(광해군 5년), 칠서의 옥을 통해 역도들이 옹립하려 했다는 혐의로 폐서인되어 강화도(교동도)에 위리안치되었고 결국 다음 해인 1614년 음력 2월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이렇게 죽은 나이 당시 나이가 겨우 만 8세. 어린 나이에 비참한 죽임을 당한 고려 창왕보다도 1살 더 어렸다.

칠서의 옥은 처음엔 강도 살해 사건에서 시작되었는데 대북의 침소봉대식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18] 이 일당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전직 영의정 박순의 서자 박응서의 고변으로 영창대군의 연류는 결정지어졌는데, 응서는 이후 실수라며 이 밀고를 번복한다. 그러나 한 번 걸린 고변을 놓치지 않은 이이첨, 김개, 김창우 등의 주도로 압슬형을 비롯한 각종 고문을 통해 영창대군과 연관된 반역 사건으로 몰고 갔다.

어찌되었든 광해군은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창대군이 병으로 죽은 것을 어린 아이를 섬에 보낸 자신의 탓이라며 대군의 예로 후하게 장사지내도록 시킨다.

강화 별장 이정표(李廷彪)가 의(㼁)의 죽음을 치계하였다. 전교하기를, “내가 덕이 없어 이 고아로 하여금 섬에서 병으로 죽게 하였으니, 비통하기 그지없다. 장례를 치르는 일과 제물을 올리는 일을 본관으로 하여금 각별히 살펴서 치르게 하라. 내가 마땅히 중사(中使)를 보내어 염(斂)하는 것을 살피도록 하겠다.” 하고, 이어서 전교하기를, “의의 장례를 대군(大君)의 예로 치르도록 하라.” 하였다. (음력 2월 10일자 기사)
도승지 이덕형[19] 등이 아뢰기를, "역적 영창의 죽음에 특별히 장례와 제전을 후하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신들이 전하의 우애하는 지극한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영창대군이 종묘 사직에 죄를 지어 속적이 이미 끊어졌으니, 관에서 장례를 도와주는 것은 공론에 거슬리는 점이 있습니다. 신들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받들 수가 없으니, 황공하오나 감히 아뢰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일은 규정을 따지며 막을 일이 아니다. 전례에 따라 속히 하유하라."

물론 따지고 보면 어느 쪽이 사실이든 전후사정을 봤을 때 광해군이 죽인 것이나 다름 없어 보인다. 광해군의 특기가 잔뜩 분위기 조성해서 밑에서 알아서 처리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해 음력 5~6월 내내 영창대군을 죽이라는 상소 릴레이에도 짐짓 따르지만 않고 방치해왔던 모습이 대표적이고, 뒷날의 소위 폐모 여론조사 부분에서도 아주 잘 드러난다.[20] 특히 영창대군을 죽이자는 이정표의 권유를 거부한 별장 홍유의가 교체되고, 강화부사 기협은 "강화 수령으로 있을 때 역적 의를 비호하여 하지 않는 짓이 없었으며, 음식 공급을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었다"는 이유로 파직된 걸로 볼 때 광해군의 의도는 '악어의 눈물'이었을 것이다.[21]

실제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서인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이와 관련해 재조사가 이루어지는데, 이 때 영창대군이 병사가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일기>에 기록된 유력한 살해 과정은 증살(蒸殺), 방에 가두어 둔 상태에서 불을 때워 그대로 쪄서 죽인 것이다.[22]

정항(鄭沆)이 강화 부사로 도임한 뒤에 영창대군에게 양식을 주지 않았고, 주는 밥에는 모래와 흙을 섞어 주어서 목에 넘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읍 안의 한 작은 관리로서 영창대군의 위리(圍籬, 가시 울타리)를 수직한 자 불쌍히 여겨 몰래 밥을 품고 가서 먹였는데, 정항이 그것을 알고는 곤장을 쳐서 내쫓았다. 그러므로 영창대군이 이때부터 밥을 얻어 먹지 못하여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정항은 그가 빨리 죽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 온돌에 불을 때서 아주 뜨겁게 해서 태워 죽였다. 영창대군이 종일 문지방을 붙잡고 서 있다가 힘이 다하여 떨어지니 옆구리의 뼈가 다 탔다 '고 하였다. 지금의 강화도 사람들은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다만 영창대군의 죽은 사인(아사, 증살 등)은 위에서 보듯 실록 자체에서도 모호하다. 영창대군의 비문과 인조실록에는 이정표가 잿물을 먹여 죽였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이 이정표를 별장(別將)으로 삼아 지키게 하면서 몰래 빨리 죽이도록 하자, 이정표가 광해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이 거처하는 곳으로 가서 방에 불을 넣지 않았다. 이에 영창대군이 늘 의롱 위에 앉았고, 때때로 섬돌 가에 나아가 하늘을 향하여 빌기를 '한 번 어머니를 보고 싶을 뿐이다' 하였다. 이정표가 음식에다 잿물을 넣어 올리자 영창대군이 마시고서 3일 만에 죽었다. 강화 사람들이 지금도 이 일을 말하려면 슬픔으로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영창대군이 세상을 떠난 당시에도 정항은 범인으로 지목되었으며, 인조반정 이후에 임해군의 살해범으로 지목된 이정표와 함께 대놓고 처형하자는 상소가 중을 이었으나 죽지 않았다. 집권한 서인측에서도 "그런 소문만 믿고 일을 처리하면 안 된다"라는 주장이 나왔으며, 인조 역시 화를 내면서 재조사를 막았다. 폐모살제, 즉 영창대군의 죽음은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 중 하나였음에도 말이다!

실제로 정항은 영창대군이 세상을 떠나기 전날에 보낸 급박하다는 서신을 보낸 이야기가 실록에 실리기도 했다.[23] 영창대군의 죽음에 이의를 제기한 정온 역시 광해군 때 정항을 탄핵하긴 했지만 부주의를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24] 광해군은 정항을 친국했으나, 이후 풀려났다.

사실 영창대군의 죽음 자체는 조선사에서 대단한 패륜은 아니었다. 그 전부터 왕의 눈 밖에 난 형제 대군들과 왕족들이 유배 → 사사테크를 당하는 일은 적지 않았고, 영창대군은 그래도 명목상 사사는 당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이다.[25] 그래서 훗날 폐모에 반대하여 이름을 얻은 기자헌 등 중북, 무당파 대신과 대부분의 신료들조차도 눈치를 보며 "영창대군이 죽어야 나라가 편해질 것"이라며 강경하게 나섰고, 대군의 예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예외는 "죄는 크나 죽으면 안 된다"는 상소를 올린 망우당 곽재우, 한음 이덕형(李德馨) 정도였다. 병권을 쥐었던 백사 이항복은 아예 "정협(鄭浹)의 무리, 김제남의 잔당"으로 몰렸다.[26]

영창대군이 살 길은 애초에 별로 없었다고 봐야 옳다. 그래서 선조도 그런 유지를 남긴 것이다. "형을 죽이고 아우를 죽이다니, 착하지 않은 사람이 임금이 되었구나!"는 식의 말들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만 해도 매우 극단적인 재야의 인식이었다.[27]

영창대군의 죽음 자체는 일단 병일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당장 어린 나이에 유배를 당해서 고생하다가 병에 걸려 죽었을 수도 있고, 광해군도 본인이 직접 영창대군이 그렇게 죽었을 것이라고 하며 그래서 자신이 죽인 것이나 다름 없다.라고까지 말했다. 훗날 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 본인조차도 늙은 나이에 유배지를 옮겨다니는 숱한 고생을 했다. 일종의 응보였을까.

그러나 이렇게 살형제로 불거진 광해군의 의심병은 폐모로 이어지고 말았으니, 이는 유교적 도덕 질서가 자리잡은 조선에서 있을 수 없는 패륜이었다.[28] 결국 대북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지층을 잃은 광해군은 뒤늦게 다른 당파들을 포용해 나가지만 정작 소북과 더불어서 가장 신뢰하기 시작한 서인들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몰락한다.

5 창작물에서

1995년에 KBS에서 방영한 사극 서궁에서 아역 최강원이 왕자 이의의 최후를 연기했는데, 문이 잠겨 나가지도 못한 채 연기와 열기를 못 이기고 내보내 달라고 울부짖는 묘사[29]화상을 입고 까맣게 그을린 왕자 이의의 마지막 모습이 가히 충격과 공포다. 실로 어른의 사정이 무엇인지를 웅변하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당시 이이첨을 연기했던 서인석썩소가 압권.

퓨전사극 쾌도 홍길동에서는 왕자 이의에서 모티브를 따온 창휘라는 캐릭터가 출연한다. 여기서도 이복 형인 광휘[30]를 위협할 왕실의 적통으로 궁궐을 휩쓴 화마에 의해 죽을 뻔 했지만, 대비가 왕자 이의를 살리기 위해 신임하는 상궁 노씨를 시켜서 창휘를 빼돌린다. 이후 창휘는 객주가 된 노 상궁과 함께 암약하면서 마침내 반정에 성공한다. 창휘 역은 장근석이 열연했다.

2015년 MBC에서 방영한 사극 화정에서 아역 전진서가 영창대군을 연기하였는데, 최후 부분은 과정은 나오지 않고 죽은 부분만 나옴.

  1. 태조, 세종, 문종의 사례가 유명하고 이후로 한동안 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왕비가 없어서 왕이 새로 왕비를 들이는 게 일반적이지 않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종만 봐도 공혜왕후 사후 폐비 윤씨, 윤씨 폐출 이후 정현왕후를 들였고 중종은 단경왕후 폐비 후 장경왕후, 장경왕후 사후 문정왕후를 들였다. 태조, 세종, 문종은 상복 입느라 새 왕비를 들일 틈이 없었다.
  2. 서인 자체가 대체로 유생들의 친목질에 거부감이 있는 이들이 외척 등과 뜻을 같이한 정파였으므로 김제남을 범-서인으로 보는 것이 무리만은 아니다.
  3. 심정세는 현감을 지내다가 역시 칠서의 옥에 연루되어 죽었다
  4. 이이첨은 의외로 이산해와도 대립하고, 홍여순과도 대립해서 골북이냐 육북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다. 청소북, 탁소북의 분열 이전에 생겼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칠서의 변과 폐모론을 끼워맞추는 것이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
  5. 남이공의 성을 따 남당이라고도 불렀다.
  6. 류영경의 성을 따 류당이라고도 불렀다.
  7. 출처: 윤정 저, 국왕 숙종 잊혀진 창업주 태조를 되살리다, 여유당, 2013
  8. 예를 들어 맏이 진안대군은 정도전에게 아들과 제자를 잃은 이색과 인척이다.(이색의 손자가 진안대군의 사위다.)심지어 태종의 정실 원경왕후도 고려의 최고 권문세족으로 통했던 여흥 민씨 가문 출신이다.
  9. 방석의 세자책봉은 건국 1달 후에 이뤄졌는데 건국과 세자책봉의 텀이 짧은 점을 고려하면 건국 이전부터 이미 낙점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394년 신진 사대부 출신이자 왕씨 숙청에 참여했던 심효생의 딸과 혼인한다.
  10. 방번은 장인이 공양왕의 형 왕우이다. (공양왕이 왕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며, 왕우도 조선 건국 이후 이런 이유로 왕씨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자손은 멸족되었지만.) 방번이 세자가 되면 이성계가 도륙낸 고려왕실의 일원이 국구가 되는 사태가 일어나기에 성격 핑계로 처음부터 제쳐버렸다.
  11. 환국의 그늘아래 세자자리가 위태로웠던 경종대리청정을 통해 차기 국왕으로 자리를 굳혔다. 대리청정 중 아버지 숙종이 경종의 돌발행동에 책망을 하자 소론 신하들이 숙종을 비판했고 이것에 대해 숙종도 수긍할 정도였다.
  12. 인조반정 이전에는 생전 무사들과 즐겨 모이던 임해군의 반란 가능성은 충분히 혐의가 있다고 여겨지는 건이라, 곽재우조차도 죽어 마땅하다고 논했다. 임해군과 영창대군은 달랐다.
  13. 더구나 하릉군은 가장 서열이 빠른 금원군의 양자
  14. 선조는 16살에 즉위해 총 40년 7개월을 용상에서 보냈다. 이는 조선 27왕 전체 4위이며 그때까진 1위였다. 이의가 선조의 즉위 때 나이와 같아지려면 재위 54년을 채워야했는데, 이러려면 영조의 재위기간을 뛰어넘게 된다. 선조는 인목왕후를 맞이했을 때 50세로 조선왕 평균 수명을 넘겼고, 5년 사이에 정명공주와 이의를 낳았다.
  15. 이런 선조의 선위시위는 임란 이후만 따지더라도 부자관계가 최악이였던 사도세자를 능가한다.
  16. 출처:광해군일기(중초본) 1613년 5월 17일 기사
  17. 대부분의 신하들도 대세를 파악하고 적극 훙일 다음 날 즉위를 부추겼는데, 이에 대해서는 광해군의 즉위가 류영경에 의해 불안해질 수 있다는 것을 다수 신료들이 인지하고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18. 선조 대 기축옥사(정여립의 난)을 조작으로 보는 시선이 많은데, 칠서의 옥은 그거보다 훨씬 심했다. 정여립 때는 최소한 대동계라는 사병 집단이라도 존재했다. 광해군 대 대북 주도로 억울한 옥사가 봉산옥사, 허균의 옥사 등 한두 건이 아니었다는 점도 의심을 깊게 만든다.
  19. 당시의 정승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년~1613년)이 아니라, 5살 터울의 죽천 이덕형(竹泉 李德泂, 1566 ~ 1645)이다.
  20. 조선사의 비슷한 예로 태조 때 왕씨 몰살 때도 비슷한 여론조사가 있었다.
  21. <박시백의 조조록>에서는 광해군의 해당 발언을 대단히 의미심장하고 위선적이게 그려냈다. 따지고 보면 중종, 인조, 정조도 비슷한 행동을 하긴 했지만. 세조는 아예 대놓고 했고.
  22. 전통적인 온돌 구들장은 일반적으로도 섭씨 40도는 우습게 올라간다. 이걸 작정하고 땐다면 6~70도까지 올라간다.
  23. 다만 서신의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24. 영창대군의 사인에 대해 여러 말이 나온 것을 종합하여, 영창을 냉방에 가두며 먹을 것도 주지 않고 홀대했다가, 병이 걸리다 그제서야 군불을 막 때는 등 홀대하며 죽기를 사실상 방조한 것 아니냐는 "절충설"도 있다.(...) 참고로 잿물은 상처에 대한 소독제로서도 뿌리기도 한다.
  25. 당장 세조의 경우 어린 조카 단종 외에도 형제인 안평대군, 금성대군을 역모로 몰아 사사를 지시했으며, 인조는 신료들의 의견에 끝내 삼촌인 인성군을 사사해야 했다. 다만 인성군의 경우엔 인조가 끝까지 살리려고 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26. 곽재우는 심지어 "선조의 고명대신들이 유지대로 대군을 지키지 못했으니 죽어야 한다"는 위엄찬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 때문에 광해군 눈 밖에 나고 대북이 조작한 옥사에 휘말려 역적이 될 뻔했다가 정유재란 때 함께 종군했던 배대유의 변호로 빠져나온다. 이덕형 역시 유배론을 적극 지지했다가 대대적인 공세에 시달려야했다. 정인홍의 경우가 독특한데, 영창 사사는 반대하고 폐모는 어느 정도 합리화했다.
  27. 이 상소를 쓴 겁 없는 선비는 그대로 목이 달아나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28. 광해군의 경우는 신덕왕후 강씨의 사례를 인목왕후의 모델로 삼은 것이 분명한데, 당대 여론에 크게 힘입은 신덕왕후 격하 사례와 달리 인목왕후의 광해군은 군신의 예가 분명했다.
  29. 바닥에 닿지 않으려고 발돋움하며 창틀을 붙잡고 "어마마마 뜨겁사옵니다!!" 하고 울부짖다가 숨이 넘어간다..
  30. 광해군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가상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