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 중기 광해군 시기의 문신이자 실권자. 대북의 영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처형당했다.
직함상 광창부원군이라 불렸으며, 당대의 권신 '삼창(三昌)' 중 필두이기도 하다.[1]
2 가문
조선 초기 최대 벌열 가문 중 하나인 광주 이씨 출신으로 연산군 당시 김일손을 무오사화에 연루 시켰다고 알려진 이극돈의 5대 손자이다[2]. 그러나 이 가문은 연산군대인 갑자사화로 멸문당했다. 억울하게도 이세좌(이극돈의 조카)가 폐비 윤씨 사사 집행을 봉행하는 역할을 성종에게 강요당했기에 그것이 화근이었다. 연산군이 축출되면서 그나마 정상이 참작되고 명종 이후로는 이세좌의 손자인 이준경이 재상을 지내는 등 어느정도 가문의 위세를 회복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이이첨이 활동할 당시의 광주 이씨는 그다지 큰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이이첨도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자라났다. 이극돈의 후손이란 것 때문에 출세 전까지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다. 벼슬 좀 오르려다가도 두고두고 탄핵당해서 파직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그래서 가문의 뒷배경도 없었고, 그런지 스승이 없었다. 말하자면 이이첨은 순전히 자기 능력 하나만으로 재상까지 오를 만큼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임진왜란 때 온몸을 날려 불타는 창고에서 세조의 어진을 구해낸 것이 대표적.
하지만 현대 사회와 달리, 당시엔 학맥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뒷배경이 없다는 것은 출세하는데 큰 걸림돌이었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른바 라인이 없으면 줄고생하긴 하지만 그래도 대놓고 차별하지는 않는다. 중세시대였던 조선, 특히 이이첨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누구 누구 제자라는 타이틀이 없다는 것 자체가 대놓고 약점으로 지적되던 시대였다. 비슷한 사례가 대표적으로 율곡 이이와 정여립. 실제로 이이첨은 승진 때마다 제대로 된 줄(?)이 없어서 많이 고생을 한다. 이이첨은 자신의 편을 만들기 위해 임진왜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대북파의 산림 영수 정인홍과 접촉해 그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한다.[3]
3 어진을 구해 벼슬에 오르다
임진왜란때는 능참봉으로서 광릉에 있는 세조능의 위패를 지키고 세조의 어진을 혼자 들고 나온 일로 선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당시 세자로 분조를 이끌며 각지를 위무하던 광해군과 함께 임진왜란 내내 위험한 지역을 누볐다.
사실 이이첨의 이런 공로는 엄청난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세조의 영정은 봉선사로 옮겨졌는데 하필 이때 일본군이 들어와 봉선사를 불태웠다. 광릉참봉이던 이이첨은 도망가는 승려들을 붙잡아 영정의 위치를 묻고는 홀로 불타는 절간을 헤치고 들어가 영정을 끌어냈다. 이후 영정을 안전하게 호송하기 위해 홀로 머나먼 여정을 떠나게 되는게 낮에는 숨고 밤에 90리를 걷는가 하면, 2번이나 몰래 일본군 진영 한복판을 통과했고. 심지어는 중간에 의병 부대에 합류해 전투까지 치르는 등 갖은 고생을 다한 끝에 의주로 세조의 영정을 무사히 호송했다. 이쯤 되면 인생 자체가 판타지다. 이 때 남아난 초상화가 태조와 반쯤 타버린 문종 그리고 이이첨이 찾아온 세조의 것이 전부다. 물론 후대에 태조의 것을 빼고는 모두 불타서 없어지지만.
훗날 광해군으로부터 호감을 얻었던 것도 이 때고 아직은 이이첨이 초심을 잃지 않고 민생을 염려하던 모범적인 시기에 해당한다. 이 초심을 끝까지 유지했어야 하는데…. 전쟁 이후에는 시강원 사서로서 일하며 이 때에도 젊은 광해군과 이해를 같이 하며 더 돈독한 관계로 발전한다.
정유재란에서 선조 사망까지의 간극 시기, 광해군의 가장 중요한 후원인인 대북과 남명학파의 영수 정인홍이 경상남도에 머무르게 되었고, 이이첨은 사실상 조정 내에서 대북을 이끄는 리더였다. 하지만 그는 긴 세월 조정에 봉사하고 노구를 이끌어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정인홍만큼의 무게감은 없었다. 이것이 이이첨의 발목을 잡는다. 그는 정인홍에 비해 역량이라든가 입김이 여실히 미치지 못했다. 선조가 광해군을 의심하고 양위 소동을 벌이기도 할 때 정인홍 만큼 직설적인 상소를 올리지 않은 것에서도 이이첨의 약점이 드러난다[4]. 하지만 이 정도로는 광해군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4 광해군기의 실세
광해군 즉위 이후 궁궐공사 문제에서 광해군과 죽이 제대로 맞아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광해군의 환심을 사는 동시에 조정 내부에서 대북파의 영수로서 자신의 역할을 차츰 차츰 넓혀나가 사실상 재위기간 내내 국정을 주도한다. 여기에는 광해군이 전면에 나서기 꺼려하는 태도와 불안한 즉위기반 때문에 반역을 경계하는 성격도 일정 부분 도움을 주었다. 이이첨이 권력을 강화해나가는 과정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무고 사건 발생 -> 광해군 반대의사 표시 -> 이이첨 대북파 들고 나가 상소 -> 광해군 반대 -> 이이첨 다시 강경하게 나감 -> 광해군 처벌 -> 이이첨 다시 강경하게 나감 -> 광해군 처벌 강화.
이러한 이이첨의 공격패턴이 봉산옥사와 칠서의 옥에서 꾸준히 반복되었기 때문에 차츰 그에게로 권력과 악명이 가중된다. 영창대군과 인조의 형 능창군도 이렇게 죽었다.[5] 적어도 폐모살제에 대해서는 광해군이 이이첨에게 끌려다녔다는 말도 일리 있다고 볼 수 있다. 칠서의 옥에 연류 될까 두려워 한 허균을 행동대장으로 부리고, 그가 불안하게 행동하자 즉각 죽여버린 것이 백미(;;)
하지만 다른 안건에 있어서는 광해군과 정면 대립하는 일도 많았다. 주로 후금에 대한 외교에서 였는데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주창한 반면 이이첨은 "후금 사신 목을 베고 후금과 한판 싸워보자"고 맨날 선동하고 다녔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척화파였다! 광해군이 하도 열받아서 "니가 한번 붓으로 싸워보지 그래?" 라고 하니까 이이첨은 "부모와도 같은 명나라 사마가 맹수 같은 오랑캐들에게 당하는데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찌 가만히 있을수 있겠냐"고 당당히(...) 항변했다. 황당해한 건 광해군 뿐이고, 소북의 류희분 등 유자들인 조정은 오히려 감동(...) [6].
그래서 광해군은 말년이 되자 이이첨 처리문제로 골치깨나 썩었다. 대북은 물론 조정 전체에서 그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것이다.
문제는 이이첨의 권력이 강해졌다고 해도 그 위치 또한 어중간했다는 것이다. 대북파의 실질적 영수였으나 그보다 더 경륜 있던 정인홍의 관록을 넘을 수는 없었고, 그래서 무슨 일을 하고 싶어도 정인홍을 비롯한 여타 대북파 주도자들과 항상 타협을 해야 했으며, 때로는 본인이 필요 이상 더 강경하게 나가야 할 때도 있었다.
이이첨이 바보도 아니고 당시 정세를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립외교를 주장하는 광해군에게 그냥 동조를 해버리면 자신의 권력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이이첨으로서는 어쩔 수없이 계속해서 강경 반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광해군은 왕자 시절 이이첨에게 보낸 신뢰를 점점 거두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다른 시대의 권력자들과 달리 뒤에 숨지 않고 앞에서 행동대장으로 움직여야 했다.[7] 광해군 시기 이이첨이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어쨌든 이이첨이 지나치게 권력을 잡았던 것도 사실이고, 그 반동으로 당시 왕권이 다소 약화되어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광해군은 말기에 이이첨을 견제하고 균형잡힌 인사를 추진하려 했고, 이에 대북은 광해군과 슬슬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이를 틈타 서인 세력이 정권을 탈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인조반정의 성공 요인이 된다. 심지어 반정 직전에 치명적인 기밀이 누설됐으나 광해군은 이를 접했음에도 이이첨의 농간이라 보며 큰 신경을 쓰지 않아 역모 진압의 중요한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5 최후
평생을 '광해군의 충신'이라 자처했으나 정작 광해군은 반정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첫 반응이 "이이첨이 일으켰느냐??" 였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의 이이첨은 반정 당일에 고향으로 도망가다가 붙잡혔다. 그를 독사, 전갈보듯 하며 집안의 대문 조차 "외문"이라고 불렀던 박승종은 그래도 의병이라도 일으키려고 했었는데...[8]
붙잡힌 후엔 반정 주동자이자 1등 공신인 이귀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대감이라면 제 마음을 알 것이오. 제 덕분에 인목왕후가 죽음을 면했다" 운운했다. 그러나 이귀는 "원래 다 네가 사주한 거 아니었느냐. 죽기 전에 이런 말 하려고 니들 쫄따구 시켜서 했니? 네가 그렇게 잘 보호했다면 대비께서 어찌 서모로 강등되셨겠나?"라고 응수하였다.
처형 직전에 "하늘이 나의 무죄를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다. 살아서는 효자이고 죽어서는 충신이다!"라고 외쳤다. 어쨌든 청렴하게는 살았던 걸 보면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듯;;(...)
그런데 그의 심복이던 이위경이 "닥쳐라. 이놈아, 너 때문에 나도 이렇게 죽지 않느냐?"(...)라고 반발했다고 한다. 이위경은 원래 서인계 인물이었으나, 이이첨의 사주를 받아 인목왕후의 폐위를 앞장서 상소하였다. 그 대가로 이조참의에까지 올랐으나, 반정으로 같이 죽게 된 것이다. 이위경으로서는 억울했을지 모르나 애초에 당시 정계라는 게 피도 눈물도 없었다(...)
당시 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반정이 일어나던 날 이첨이 가솔을 모두 데리고 남쪽 성을 넘어 도망가서 이천(利川)의 시골집에 갔는데, 군인이 뒤따라가서 잡아왔다. 이첨이 처음에 신경유(申景裕) 등이 거의했다는 말을 듣고, 경유의 누이는 이대엽의 아내였으므로, 먼저 대엽의 아내를 보내어 빨리 성에 들어가서 경유를 만나보고 석방시켜주기를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미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첨이 금오에 나아가 밤에 공사(供辭)를 쓰면서 함께 구속된 유희량(柳希亮)에게 말하기를 “상께서 이 공사를 보시면 필시 나의 무죄를 밝혀주실 것이다.” 하였다. 이튿날 형을 받으려고 옥을 나갈 적에 이귀를 쳐다보며 말하기를 “대감은 나의 마음을 알 것이다. 대전께서 이제까지 보전하실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나의 공이 아니겠는가.” 하니, 이귀가 말하기를 “네가 이전에 모든 일을 자신이 하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게 했던 것은 오늘 이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진정 너의 말과 같다고 할 경우 유폐의 화액을 겪으신 것이 과연 누가 한 짓이겠는가.” 하자, 이첨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형을 받을 무렵에 또 큰 소리로 말하기를 “하늘이 나의 무죄를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다. 살아서는 효자이고 죽어서는 충신이다.” 하니, 이위경이 뒤에 있다가 꾸짖으며 말하기를 “우리가 죽게 된 것은 모두가 네가 악한 짓을 했기 때문인데, 네가 어떻게 충신이 될 수 있으며 효자가 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첨은 한찬남·백대형·정조·윤인·이위경 등과 함께 먼저 형을 받았고, 이원엽(李元燁)·이홍엽(李弘燁)·이익엽(李益燁)은 먼저 참형되었으며 이대엽은 옥중에서 죽었다. 그리고 이병(李覮)·한정국(韓定國)·홍요검(洪堯儉)·서국정(徐國楨)·채겸길(蔡謙吉)·민심(閔芯)·정결(鄭潔)·황덕부(黃德符)·이정원(李挺元)·이상항(李尙恒)·한희길(韓希吉)·박응서(朴應犀)·정영국(鄭榮國)·유세증(兪世曾)·윤삼빙(尹三聘)·조귀수(趙龜壽)·정몽필(鄭夢弼) 등 여러 총신(寵臣)들과 유희분·유희발(柳希發) 등은 차례로 참형을 받았고, 정인홍·이강(李芯)·원종(元艪)·신광업(辛光業) 등은 추후하여 형을 받았다. 그리고 성지(聖智)·시문용(施文用)·김일룡(金馹龍)·복동(福同)은 모두 도망가 숨어 있었는데, 잡아다가 참형하였다. 폐모론을 상소한 사람과 토목공사에 취렴한 사람들에 대해서 죄가 중한 자는 잡아다가 베었으며, 이첨의 무리 이하의 사람들은 차등있게 귀양보냈다. 이첨 등은 원수진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이 참형을 당하자 도성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난도질하여 시체가 온전한 데가 없었다. |
결국 인조반정으로 인해 붙잡혀 참형당한 후 광주 이씨 문중 삼대가 멸족하여 초상화는 남아 있지 않다.[9]
다만 이것이 연산군 때와 다른 점은, 당시 권력을 휘두른 주동자 일부가 죽은 것에 그치지 않고, 당시 실권당이었던 대북 전체가 씨가 마르다시피 숙청 당했던 것이다. 서인의 이와 같은 피의 숙청으로 인해 북인은 물론이고 조식과 남명학파의 계보마저 사실상 끊겨버린다.
6 평가 및 일화
대북의 영수로서 강한 권력을 휘둘러 서인 집권 이후 조선 말까지 부정적으로 평가받았던 인물이다. 왕명조차 개길 정도로 권력을 독식해 휘둘렀다는 것이 비판의 주된 이유. 그러나 실제로는 명나라에 대한 태도에서 보이듯 타 당파와 노선을 맞춘 적도 많고, 아래 내용처럼 개인적으로는 청렴했으며, 한명회 등 다른 시기의 독불장군형 권신에 비해 의외로(?) 주변 눈치도 많이 보던 인물이다.
이황, 이언적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을 두고, 사상적으로 남명학파인 그가 정인홍과 함께 반대하여 남인 계열과 큰 마찰을 일으켰다. 이후 1621년(광해군 13년)부터 이황, 이언적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것과,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동한 것에 대한 사림의 상소와 유배, 탄핵 등이 계속되었으며 그의 사후에도 서인은 물론 스승이 비판당한 남인에게서도 근세에 이르기까지 비난을 당했다. 특히 이이첨의 주도 하에 대북이 작성한 선조실록의 내용은 대북어천가에 서인, 남인 다 싸잡아 까는 내용이라 빡친 서인들이 인조반정 이후 수정실록을 간행하기까지 한다.
현대 연구에서는 서인 집권 이후 지나치게 하향평가된 것을 보정하기 위해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지만 그래도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당대의 권력자였으며 반대세력에게 철저하게 끌어내려진 인물임에도 위에 서술했다시피 탐욕적이라는 평가는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사택을 짓는데 선조의 목릉의 나무를 쓰고 개간지를 일부 사유화했다는 점이 지적되나, 이 정도는 웬만큼 실권이 있던 인물이면 흔히들 하던 일이었고 특히 한명회, 김안로, 윤원형처럼 대놓고 부를 착복하던 인물에 비하면 시빗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평가. 가택엔 사방에 책만 둘러져 있을 뿐 어떤 사치도 보이지 않았다고 하며 심지어 평소엔 조촐하게 베옷만 입고 지냈다고 한다. 게다가 요즘에도 자주 스캔들이 터지는 여색 문제조차 전혀 시비에 걸리지 않는다는 점을 보면 이는 그의 권력을 생각할 때 놀라우리만치 근검한 면이다.[10] 야사에서도 다른 권력자들과 다르게 사리사욕은 적었다고 한다. 비슷한 경우로는 중종의 기묘사화에 가담해 조광조 등을 몰아낸 남곤, 심정이 있을 것이고, 현대에는 차지철을 예로들 수 있겠다.
다른 에피소드로 자신의 권세가 얼마 못갈 것이란 얘길 하다 몰매맞은 맹인 점쟁이 얘길 듣고는 그를 불러 위로하고 후히 대접해 돌려보냈다는 얘기도 있는 등, 나름 '체통 유지'는 했다고 하고 윤승운씨의 맹꽁이 서당에도 관련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러나 물욕이 적은 것과는 별개로 학맥 없이 자수성가한 배경이 컴플렉스로 남았는지 명예욕은 상당했던 정황은 보인다. 선조실록에 적힌 낯 뜨거운 자화자찬을 비롯하여 마지막에 충신으로 기억되길 원했던 점 등 본인은 자신의 이름이 후대까지 영예로운 이름으로 남길 매우 간절히 원했던 모양. 하지만 지금은 좋게 봐줘봐야 주군 망친 행동대장.
1908년에 정인홍을 비롯해 여러 대신들이 많이 신원되었으나, 그는 끝내 신원되지 못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신해철에 수염을 단 외모로 나온다. 전형적 '독설가'의 이미지를 따 온 것으로 보인다.
7 이이첨을 연기한 배우
- ↑ 광창 부원군(廣昌府院君) 이이첨(李爾瞻), 밀창 부원군(密昌府院君) 박승종(朴承宗), 문창 부원군(文昌府院君) 유희분(柳希糞). 다만 유희분은 외척이었으며 이이첨을 제외한 나머지 둘은 소북이었다. 통념만큼 당시 대북에 권력이 편중된 것은 아니었던 셈.
- ↑ 사실 이극돈은 상당히 억울한 케이스로 능력있고 잘 나가던 엘리트였다가 김일손 등 사림파의 경솔한 행동에 인생 꼬여버린 피해자에 가깝다. 자세한 것은 조의제문 항목 참조.
- ↑ 즉 이이첨은 대북이라고는 해도 정인홍과 달리 조식의 남명학파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 ↑ 물론 이건 이이첨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지지자들이 엄청났던 정인홍이니까 가능했던 거지만.
- ↑ 류영경과 임해군은 광해군 즉위 직후에 벌어진 옥사로 죽었다.
- ↑ 사실 폐모살제를 주장했기에 되려 이런 부분에서는 의리론을 주장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 ↑ 실제로 이이첨보다 몇 배나 강한 권력을 가졌던 한명회는 실록의 묘사대로라면 이이첨보다 약한 걸로 묘사된다.
- ↑ 박승종은 경기도를 돌다가 일이 틀렸음을 알고 음독 자결했다. 사실 박승종의 인척인 훈련대장 이흥립이 반역했기에 광해군은 박승종도 믿었을지 의문이지만.
- ↑ 의외로 반정 당시 안 죽고 유배된 아들이 있는데, 놀랍게도 유력한 반정공신인 신경진이 그를 구명했다. 실은 그의 부인이 바로 신경진의 누이동생이었기 때문. 하지만 거듭되는 탄핵에 의해 결국 유배지에서 자결로 삶을 마감했다.
- ↑ 어쩌면 그의 끈이었던 정인홍이 조식의 강건한 기풍을 계승해 꼬장꼬장하단 평까지 들을 만큼 굉장히 강직한 선비였는지라 그의 학풍을 계승하려고 그랬는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