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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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李山海)

1539 ~ 1609

1 소개

조선 중기의 문신, 정치인, 시인, 서예가.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여수(汝受), 호 아계(鵝溪)·종남수옹(綜南睡翁), 시호 문충(文忠)이다.

동인이었다가 북인의 당수가 되고 세 번 영의정을 지낸 인물 이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순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인물로 나오는데 실제도 그랬다. 이는 이순신남인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1]

2 집안 내력

고려말 유학자인 목은 이색의 7대손이다. 즉 이산해의 고조할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가 이색. 이산해의 고조부인 이우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와는 사촌관계다. 이우와 이개는 이색의 증손자이다.

이산해의 숙부는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이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의 장인이기도 하다. 이산해의 둘째 딸은 이덕형의 부인이었고 임진왜란중에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었다.

3 일생

전설에 의하면 명나라에 외교관으로 파견된 그의 부친이 산해관에서 그를 잉태하는 태몽을 꾸어 이름을 산해라 지었다고 한다. 어려서 글씨에 능했으며 그의 총명함이 궁궐에 전해져 명종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고 전해진다.[2]

그의 아버지 이지번은 현감에 그쳤지만 삼촌 중 한명은 그 유명한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이다[3]. 5살 때에 시를 지었고 6살 때에는 장문의 글을 지은 신동이었다.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그의 집안이 화를 입게되자 고향인 충청도 보령으로 이주하였다.[4] 삼촌인 이지함이 직접 글을 가르치다가 아까운 인물이란 생각에 남명 조식에게 보내고, 이어 이황의 서원에도 출입하여 제자가 되었다.

그뒤 초시를 거쳐 성균관에 들어가 성균관 유생으로 학문을 배우고 1561년(명종 l6)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뒤 이량과 이감의 탄핵을 받았으나 극적으로 기사회생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다.

그뒤 동서 분당김효원을 따라 동인에 가담하고 대사간과 이조참의를 반복해서 역임하다가 1578년 서인인 윤두수, 윤근수와 그의 조카 등 3윤씨 등의 죄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그뒤 병조참판, 이조참판, 이조판서를 지내고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뒤 다시 이조판서가 됐으나 서인들의 반발로 순탄치 않은 관직생활을 했고 이후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대제학, 판의금부사 등을 겸직하였다.

그뒤 우찬성과 좌찬성, 대재학을 거쳐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1590년 영의정에 올라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에 책록되었다.

1591년 1월에 정철류성룡과 더불어 세자책봉을 건의하려고 해서 이산해에게도 연락을 했는데 이때 이산해는 병을 핑계로 회의에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세자책봉 건의안을 올리는게 자꾸 늦어졌는데 갑자기 1월 29일에 건의안을 올리기로 했던 부제학 이성중이 충청 감사로 전임되었고 이바람에 세자책봉 건의안은 공중분해가 되어버린다.[5] 더불어 정철 또한 좌의정 지위에서 물러나고 영돈녕부사로 체직되었다가 파당을 만들어 명경, 사대부들을 모함한 죄로 유배당한다. 급작스럽게 전개된 이 사건을 보면 정철이 자행한 기축옥사로 피해를 입은 동인들이 이산해를 중심으로 치밀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서인 세력이 몰락하고 동인이 집권했는데 서인 세력 처리 과정에서 온건파였던 류성룡 등과는 달리 이산해는 강경한 태도를 보여 이로인해 결국 동인은 온건파인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분당된다.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낸 뒤 영돈녕부사, 영중추부사, 대제학을 지냈다. 조선시대 서예의 8대가의 한사람이었다. 그리고 오성과 한음 중 한 명인 이덕형을 사위로 두었다.[6]

하루는 조정에서 큰 연회가 있어서 모든 대신들이 다 간 일이 있었는데, 이산해는 다른 일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고 시를 지어 보냈다. 그리고 끝에 자기 호인 '아계'를 변형해서 '아옹(鵝翁)'이라고 호를 적었는데, 이를 본 정철이 "이산해가 오늘은 제대로 자기 소리를 냈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옹'의 읽는 음이 고양이 우는 소리와 비슷한 것에서 이산해를 고양이 같은 사람이라고 디스한 것이다. 이를 들은 이산해도 정철에게 크게 유감을 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어디서나 드러나는 정철의 인성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그러나 1589년 한직에 있던 이순신을 불차채용으로 추천한건 이산해였다. 다만 이 때는 북인과 남인이 분당하기 전이다.
  2. 김시습이나 남효온도 세종대왕의 귀에 들어간 천재들이었다.
  3. 다만 토정비결은 이지함의 이름을 빌어 다른 누군가가 지은 것으로 본다
  4. 윤원형이 그의 재주를 알아보고 사위삼자고 했으나 난정의 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아버지 이지번이 "NO"했다.
  5. 송강연보 등의 문집에는 정철이 선조 앞에서 세자책봉을 건의했다가 노여움을 샀다고 나오는데 정작 실록에는 이런 말이 없다. 더구나 정철이 탄핵당한 죄목 중에도 세자책봉과 관련된 말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6. 오성인 이항복은 서인 쪽에 가깝고, 이덕형이 당색으로는 남인 쪽이라 은근히 놀라운 데가 있다. 일화에 따르면 숙부 토정 이지함이 한양에 온 이덕형을 보고 판서이던 조카를 찾아가 불문곡직 사위로 맞아들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숙부가 지인지감이 있는 것을 아는 이산해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