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

조선의 붕당
훈구파사림파
동인서인
북인남인소론노론
대북소북청남탁남준론완론시파벽파
* 붉은 계열은 강경파, 푸른 계열은 온건파


西人

1 개요

조선붕당 중 하나였던 파벌.
사림의 동서분당 당시 형성되어 인조 이후 주도권을 잡은 당파이다.

처음엔 심의겸의 친구와 그 무리(윤두수, 김계휘 등)를 칭하더니 다음엔 서인을 구원하는 자(정철 등)를 일러 서인이라 하였고 그 뒤엔 중립하여 치우치지 않는 자(이이, 성혼)를, 마침내는 이이와 성혼을 높이는 자(조헌을 비롯하여 이이, 성혼의 제자들)들을 서인이라고 합니다.
- 선조 20년 3월 조광현의 상소

2 변천사

사림들 가운데 주로 선배 인물들(명종 대에 이미 정계에 진출한 인물[1])이 모여 형성된 붕당이다. 분파의 계기가 된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쪽에 있었다고 해서 서인이라고 한다.

율곡 이이, 성혼기호학파[2] 위주로 세력이 형성되었다. 정작 이이나 성혼은 붕당에 끼지 않고 해결하려고 했으나 현시창.

일단 수 자체가 서인이 열세였기 때문에 동인이 우세한 상황이었다[3]. 다만 율곡 이이가 갈등을 봉합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일이 커졌다. 이이는 나름대로 당쟁을 평등하게 해결한다고 한 것이 사실상 다수인 동인에게는 서인을 편드는 것으로 보였던 것. 결국 이이는 선조 15년에 서인 선언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붕당에 뛰어들었고, 결국 서인은 이이와 기존의 성혼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겨우 학파로서의 붕당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한동안 정권은 동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갔으나, 송강 정철 등의 주도로 정여립 사건의 규모가 커지면서 잠시 서인이 우세한 상황이 되었다[4]. 이로서 서인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입지를 넓힐 수 있다고 여겨졌으나, 얼마 후 정철이 후계자 문제(건저 문제)로 삽질을 하면서 실각하고 다시 정권을 잃었다.

임진왜란 때 서인은 전쟁을 예견하고 동인은 그러지 못했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지만[5][6] 실은 그렇지 않다. 동인인 서장관 허성[7]도 동행한 무장 황진[8]도 정사 황윤길의 주장에 동감했었다. 즉 수많은 통신사 일행 중 부사 김성일을 빼고는 다 쳐들어온다고 했지만 조정에서는 일방적으로 김성일의 말을 밀어준 것이다.[9] 조선이 준비를 못해서 초반에 털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어느정도 낌새를 눈치채고 준비를 했지만 20만 폭탄드랍까지는 대비를 못해서 털렸다는 것이 옳다.[10] 당장 이순신이 갑자기 전라좌수사가 된 것도 이런 준비의 일환이다. 마찬가지로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 백의종군 문제 등도 동서인간의 권력다툼보다는 선조의 의중이 강하게 비쳐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정작 북인 이산해와 이순신의 후원자인 남인 유성룡을 비롯한 모든 조정 관료들이 죄다 이순신을 까내린 점을 상기해보라!
당시 조정에서 이순신을 옹호하는 사람은 이원익[11]이나 정탁[12] 정도였다. 심지어 이 두 사람은 희안하게도 이순신을 보필한다는 최측근이라 평가되는 안위와 기막히게도 악연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제일 중요한 경상우수사를 원균한테 하는 것이 누구 배경으로 이루어졌을까? 물론, 위 논란에서 동인들과 야합하여 나온 결론이겠지만, 후에 나오는 상황까지 염두한다면, 녹둔도 항목에도 나오듯이 이일이 반역죄로 사형 당할 수준급 거짓말한 것이 물증으로 들통났음에도 유야무야한 것처럼 적을 얕잡아보는 패턴이 붕당 내 이기주의로 무시되었다는 해석이 강하게 제기될만한 요소이다.

임진왜란을 다룬 매체에서 초장에는 선견지명을 발휘하다가 이순신이 등장하면서 본격 간신, 악역으로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의 한계로 봐야 한다. 원균을 옹호했기에[13] 악역 1위로 꼽히는 윤두수요동으로 피하려는 선조에게 '필부'라는 막말까지 쓰며 막았고, 700의총으로 유명한 조헌은 정여립 사건 당시 서인의 행동대장이었다. 당시 서인들이 전쟁의 흐름을 못 읽고 권력다툼에 매진한 경향이 크지만 그걸 서인 전체로 보면 안 된다는 것. "충신은 충신, 간신은 간신" 사관으로 끌고가다보면 졸지에 원균을 동인으로, 이순신을 서인으로(..)모는 경우도 있다. 이 점도 이순신이 살아생전 받은 최고위급 직책이 유명수군도독이 가지는 의미를 안다면, 서인 원흉설은 한편으로는 생명력을 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생명력을 더욱 얻을 수 있는 이중적 요소가 부여된다. 당장 이 호칭이 있었다는 것을 안 것이 어느 왕 때에 직접 시호를 불러, 실록이 기록되었겠는가?

하여튼 임진왜란 이후 정국은 의병을 주도적으로 이끈 북인[14][15]에게 넘어갔으나, 인조반정을 성공시키면서 극적으로 역전하여 정권을 장악한다. 이후 서인은 반정에 참여한 김류, 최명길, 김자점 등의 공서파,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김상헌 등의 청서파로 나뉘었다. 공서파는 대부분 에 대한 강화를 주장했으나, 효종 때 김자점이 제거되면서 사실상 사라지고 청서파가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이때부터 서인은 본격적으로 정계의 여당으로 등장한다. <당의통략>에 의하면 인조반정 때 반정 수뇌부는 이런 맹약을 했다고 한다. "왕가와의 혼사를 놓치지 않으며, 산림山林[16]을 숭용한다." 그리고 반정 이후의 서인 정권은 이 맹약을 철저히 지켜나갔고, 결국 수차례의 환국 끝에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카더라.

효종 초기에 산림의 지지를 받는 송시열, 송준길 등의 산당과 김육 등의 한당으로 분열되었으나 점차 남인의 세력이 강해지게 되고 현종 조에는 예송 논쟁이라는 키배에서 패했다.[17] 하지만 숙종 때 세 차례 환국을 겪으면서 끝내 서인은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고[18], 이후 남인은 완전히 몰락한다. 하지만 경신환국 때 노장파(대 남인 강경파, 명분과 민생 중시)는 노론, 소장파(대 남인 온건파, 실용과 북방 개척 중시)는 소론으로 분열되었고, 이는 경종 대에 연잉군(영조) 대한 지지 문제로 더욱 본격화 되었다.

소론은 경종 때 잠시 세력을 얻은 적은 있었지만, 이후 영조 집권기에는 망하고(특히 이인좌의 난 때 강경파인 준론은 전멸했다) 탕평파라는 이름으로 박문수, 조현명, 송인명,조재호(이 아저씨는 사도세자 사후 홍봉한 등의 주장으로 사사되었다.) 등의 온건파만이 살아남았다. 한편 집권한 노론은 '벌열'이라는 문벌 집단을 구축하고 장기집권한다. 하지만 후에 영조가 자꾸만 의리를 내세워 귀찮게 구는 노론 명문가들에게 짜증을 느낀 나머지 홍봉한, 김한구, 김귀주, 정후겸 등 척신들을 등용하여 조정을 주면서 영조조 후반의 조정은 척신 천하가 되어 당파 자체가 의미없는 세상이 되었다.

흔히 벽파와 시파의 분류를 사도세자와 연관지으려는 말이 많은데 우선 벽파 시파의 구분 자체가 정조 때의 일이며 벽파는 척신 홍봉한에 맞서려는 청명당 즉 김종수, 심환지, 윤시동 등의 젊은 선비들로 구성된 무리가 시초였고 그 반대쪽이 홍봉한에 영합하여 권력을 얻으려던 탕평당의 무리였다. 벽파는 사도세자가 살아있던 시절에는 존재한 적조차 없고 그들의 전신인 청명당이나 노론또한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별 책임이 없다. 사도세자 항목 참조.

여튼 훗날 홍씨와 정씨 그리고 김씨들까지 모두 정조에 의해 숙청된 이후 본격적으로 벽파, 시파가 대두되었는데 이때 벽파는 의리를 내세워 역적의 무리인 남인, 소론과는 한 조정에서 있을 수 없으며 사도세자 추숭 또한 의리를 내세워 집행한 일로 추숭을 거행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조정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추숭을 한다는 말은 사도세자의 죽음 자체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고 당시 조정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이 국본을 해친 역이라는 주장으로도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노론의 일망타진을 불러올 수 있었다. 그러니 벽파는 추숭에 찬성할래야 찬성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러나 역으로 찍혀 입지가 취약한 소론과 체제공을 위시로 한 남인이 시파의 입장에 서고 정조의 뛰어난 자질과 능력에 규장각을 통해 성장한 소장파 들과 공신 정민시 등이 시파에 합류하는 등 시파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정조는 벽파에게 고난당한 것이 아니라 벽파를 같은 정국 파트너로 생각했으며 이는 심환지에게 '우리 벽패는...'이라며 어찰을 보내 동지의식을 드러낸 것에서도 나타난다. 각설하고 정조가 죽으면서 수렴청정정순왕후 김씨의 오빠인 김귀주(정작 김귀주는 정조 때 죽었다.) 김관주, 김용주, 김일주 등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 가문으로 이루어진 벽파가 5년간 정권을 장악하지만, 이후 물러나고 시파인 김조순 중심의 세도정치가 등장한다.

3 서인은 악의 축이었나?

친일파와 영남 패권주의의 뿌리라 카더라주장도 있지만 억지로 끼워맞추기 식이라 전혀 근거 없다. 영남은 역사적으로 쭉 동인의 텃밭이었다(경상좌도의 이황 학파와 경상우도의 조식 학파가 양립하는 구도)[19].

막장으로 치달은 조선 말기 실정의 책임을 일당독재로 돌리는 이들은 서인을 역사의 오점으로 생각하기도 하며 송시열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서인을 그냥 공리공담만 일삼는 꼰대 집단 정도로 폄하한다.

하지만 실제로 서인의 학설은 이이부터 시작된 이기이원론에 기반하여 신분 간 격차를 없애는 방향을 지향했다. 예송논쟁 당시 왕과 사대부를 같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계급 간의 차이를 비교적 적게 잡았다는 반증이 될 것이며[20][21][22], 노비종모법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결국 이루어낸 것도 서인이었다[23].

또한 여성의 권리나 교육에 대해서도 서인 쪽이 오히려 훨씬 더 호의적이었다. 여군 창설까지도 논의했던 송시열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현재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제사에 참여하고 있는 집이 있다면 과거 본인의 문중이 서인, 특히 노론 쪽에 속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기호학파에서는 <예기(禮記)>의 "제사는 부부가 함께 올린다"라는 구절과 주자가례에서 여자도 남자와 함께 참례하게 되어 있다고 쓰여 있는 점을 근거로 들어 무조건 며느리라고 해도 함께 제사를 지내도록 하게 했다. 또한 제사 때에 두번째로 올리는 잔인 아헌(亞獻)과 밥에 수저를 꽂는 삽시정저(揷匙正著)는 반드시 제주(祭主)의 부인이 하도록 정해두었다.

노론 집안에서는 여성들에게 <소학>, <열녀전>, <여계>와 같은 책들을 읽혔으며 우암 송시열의 경우 엄청난 양의 계녀서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여성들이 기록한 글들이 대부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소실된 데 비해 노론은 이러한 여성들의 글을 책으로 엮는 것에 거부감을 갖지 않았으며 소설을 짓는 것과 독서에도 관대했다.[24] 심지어 당시 노론의 선비 중 하나인 어유봉은 남녀의 차이가 없고, 오히려 남자보다 나은 여자도 있다는 주장마저 했다!

유인의 아우 군산은 재주 있는 기질이 보통이 아니어서 문장이 우뚝하니 아주 일찍 이루어졌고 훌륭한 또래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다 ‘선생에게 훌륭한 아들이 있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유인은 더욱 차분히 생각하고 깊이 집중하니 군산과 달랐고, 깨달아 알고 이해하는 것이 두루 통하였으며 또 군산보다 뛰어나기도 했다. 선생께서는 어려서부터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것처럼 책을 즐기시어 책에서 의미를 찾을 때면 사물이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아 오롯이 하루 종일 자는 것과 먹는 것을 잊었고, 깊이 이해하면 하나 되어 즐기니 이른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고 들었는데, 유인이 실제로 그분과 같았다. 애석하다! 그는 불행히도 남자가 되지 못했구나. 유인이 학문에서 (능력을) 크게 펼쳤더라면 그 이룩한 것이 군산보다 뛰어났을 것이니 선생의 도를 더욱 빛나고 크게 했을 것이다.

여기서 유인은 안동김씨의 여성 문인 김운을 의미하고 군산은 그의 남동생 김숭겸을 말한다. 김운은 김숭겸과 같은 자리에서 함께 공부하기도 했으며 그녀의 아버지 농암 김창협도 이를 권장했다.

요즈음 『강목』을 계속해서 보고 있느냐? 방안에 단단히 붙어 앉아 전심하여 읽고 이따금 네 누나와 강론하고 논평하도록 하거라. 그리고 들을 만한 훌륭한 인물의 좋은 일이 있거든 네 어머니에게 들려드려서, 병으로 인해 불편한 심기를 풀어드린다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느냐?

그녀가 사망했을 때 수많은 노론 문인들(남성들)이 줄줄이 애도문을 보냈고 조선 역사상 가장 많은 애도문을 받은 여성으로 남게 되었다. 노론의 여성 교육에 대한 인식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예이다.

노론 사부 김종수 등에게 교육받은 정조도 영조와의 문답에서 여자 역시 지혜로우면 참정의 자격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단 양 난 이후 성리학의 경직화 경향을 피하지 못했으며, '그들만의 리그'로 불리는 붕당 정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점은 결국 조선 후기 정치를 장악한 서인에게 어느 정도 책임을 물게 한다. 하지만 이는 조선의 정치 체제 자체의 문제가 될 것이며, '동인은 안 그랬는데 서인만 그랬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흔히 이덕일 등이 '노론 사관'이라면서 주류 학계를 까대지만 근거는 없다[25]

4 나무위키에 등재된 서인 인물

4.1 노론 계열

  • 동춘당 송준길
  • 서포 김만중
  • 홍국영: 정조를 다룬 사극에서 정조의 최측근으로 등장하며 정조의 정적으로 묘사되곤 하는 '노론 벽파'와 대립각을 세운 덕에 대중적으로는 노론이 아니었다고 오해받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노론이 맞다. 애당초 홍국영은 영조 때의 세도가 홍봉한, 홍인한과 같은 노론 명문가 중 하나인 풍산 홍씨. 단 노론 내에서도 노론 탕평파로 분류된다.
  • 연암 박지원: 노론 명문가인 반남 박씨 집안이며 흔히 노론 계열 실학자로 분류된다.
  • 풍고 김조순: 본디 노론 시파계열이다. 정조에게 중용되었고 세도정치의 시대를 열었다.
  • 추사 김정희: 노론 벽파의 명문가인 경주 김씨. 정순왕후 김씨의 친족이기도 하다.


서인 중에서 노론 계열, 특히 노론 벽파 계열이 수꼴이나 악의 축으로 매도되는 경향이 심한 편인데 실상을 보면 다르다. 노론이나 소론 내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이는 동인 계열 당파인 남인과 북인도 마찬가지다.

4.2 소론 계열

5 서인의 역대 영수

이후에 노, 소론 분당이 이루어진다.
  1. 정확히는 을사사화 때 살아남은 사림. 이 때 숙청당한 이언적이 동인 계보도의 큰 스승격이 되기 때문에, 동인은 이 시기 외척 세력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주장했다.
  2. 경기의 기와 호서(충청도)의 호가 합쳐져서 기호지방이라고 한다
  3. 동인 항목에도 적혀 있지만 초기 서인은 훈구파와 타협하거나 훈구파인 심의겸의 도움으로 정권에서 살아남은 기존 사림이 주축이었다. 때문에 훈구파를 몰아낸 동인에게 명분부터 밀렸다.(반대로 말하면 짬밥 좀 먹은 베테랑 관료는 서인이 많았다는 뜻도 된다.) 결국 초기의 동서 대립은 동인의 정치개혁 요구에 서인들이 두들겨 맞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4. 그러나 이 상황에도 경상도 지방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전주시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방 출신 선비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것이 후에 남북인 분열을 낳는다.
  5. 이건 이이의 십만 양병설과 함께 임진왜란 이전 관련 대표적인 오류이다. 사실은 임진왜란 이후 동인에게 밀렸던 서인 세력이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명분 다지기에 들어가면서 어느정도는 각을 잡아 놓은 것에 가깝다.
  6. 다만 십만양병설이 거짓이란 보장은 없다. 박시백 화백 등의 말에 따르면 수정실록은 그래도 균형을 잡기 위해 오히려 서인인 황윤길 등을 깎아내리는 등 의외의 모습을 많이 보여줬는고로 특정 사실에 무게를 실어준다거나 과장, 축소는 있을 수 있어도 없는 사실을 창작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본다.
  7. 동인 명문가 출신이다!
  8. 조선의 뛰어난 육군 장수로 용인 전투, 웅치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훗날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다.
  9. 후술하겠지만 그렇다고 준비를 안한 것도 아니고 유성룡의 주장에 따르면 김성일은 전쟁 났다고 했다가 나라가 혼란해질까봐 그랬지 전쟁 안난다는 보장은 없다고 했다한다. 다만 이 말은 창작의 혐의가 있다.
  10. 이 정도 규모의 외침사례는 고려초 거란의 침입 이후 없었다. 조선인들로선 당연히 상상도 못할 수밖에. 조선이 가장 근래에 접한 대규모 외침인 을묘왜란에서는 수군은 고전을 했지만 정작 상륙한 왜구들은 화살비에 녹아 내렸다. 그래서 육지는 성곽 보수 및 동원체계 점검에 신경쓰고 수군은 왜선을 크기와 내구성에서 누를수 있는 신형전함 판옥선을 개발했다.
  11. 원균은 탐오하며 애당초 자기 함대 다 때려부수고 달아난 놈 아닙니까? 라고 비판했으며 이순신은 지극히 청렴한 것을 내가 확인했고 말끝마다 겸손한데 원균 그놈아는 뭐 물어보면 발끈거린다며 성격이 글러먹었다고 또 깠다.
  12. 잘못을 했더라도 장수를 갈아치우는 법이 어딨냐고 항변했고 선조가 이순신 죽이졈? 하자 신하들이 콜! 콜! 하는데 공이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냐고 제동을 걸어 이순신의 목숨을 보전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13. 옹호라는 것이 경상우수사 선정에 누가 개입되었나를 강하게 추측할 요소이기도 한데, 선견지명 부분에서 미화다. 엄청나게 미화.
  14. 사실 일반인들에게 이름 알려진 유명 의병장은 서인이 더 많고 실제 따져봐도 호서, 호남에서 일어난 서인계 의병장들이 경상 우도에서 일어난 북인계 의병장들보다 적지않다. 다만 서인계 의병장들은 임진년의 전라도 방어전(웅치, 이치, 1, 2차금산 전투)과 2차 진주성 전투때 거의 다 죽었고 북인 의병장들은 살아서 종전을 맞이한 덕에 의병활동 내세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것 뿐 이다.
  15. 곽재우는 남명문하라는 이유로 북인으로 곧잘 분류되나 실제론 무당파 내지는 남인에 가까웠다. 그의 의병활동이 가능하게 만들어준 은인인 김성일이 남인이고 김성일 사후에도 이원익, 류성룡같은 남인계 인사들의 후원을 받았고 서인계인 윤두수, 윤근수와도 관계가 괜찮았다. 오히려 북인들때문에 정치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한적이 많았다.
  16. 재야에 살면서 막강한 학문적 권위와 명망을 지닌 선비들. 주로 지방의 유명 서원이 이들의 근거지로 서원에서 자신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제자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이들이 여론주도층으로 정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히 막강했으며, 때문에 영조는 "산림인지 뭔지 모르겠으니까 그냥 당장 조정에 나와서 이야기해라!" 식으로 대처해 왕권을 높이려 했다.
  17. 하지만 정권을 놓친 기간의 합은 5년, 4년으로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18. 자세히 살펴보면 한당계의 김육의 손자 김석주 같은 인물은 사실상 이 당쟁을 관망하며 캐스팅보더 역할이나 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죽고 나서는 한당은 사실상 소멸했다.
  19. 더구나 애초에 어디에 기반을 두건간에 붕당을 구성한 이들은 모두 서울에 거주했다. 산림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은퇴하여 물러났거나 학파의 정통들에게나 붙이는 이야기지 시골 양반들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 괜히 그 정약용이 아들들에게 사대문 밖 10리를 벗어나지 말라고 권고한 것이 아니다.
  20. 물론 이건 신권 정치와도 가깝다.
  21. 비교적 서얼 철폐나 노비나 여성 등의 대우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것도 거론할 수 있다.
  22. 이황의 남인들은 이에 관해 비판적이었으며, 이황의 학문이 건너간 일본은 이념적으로 하극상 따위를 용인하지 않는 철저한 계급 사회를 고수했다.
  23. 물론 이건 학파의 영향인 동시에 집권세력이라서 수세에 필요한 평민 숫자를 늘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애초에 이건 처음 노비종모법을 주장한 이이부터가 그랬으니 말 다했다.
  24. 당시 여성들은 심지어 양반가의 규수라고 해도 글월이란 이름 석자만 쓸 줄 알면 되고, 글을 잘 알아 책을 읽으면 남편에게 좋지 못하다고 하여 기피되었다.
  25. 가끔 유림에 노론의 영향력이 강하며 퇴계이황 계열은 연구가 있지만 북인계통인 조식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부진하며, 양명학 이후의 학문 분파는 연구자도 없고 전공자도 자리가 없을 정도라며 이 주장을 옹호하는 사람이 있는데 누가 가장 마지막까지 세력을 유지했는지 생각하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가장 남은게 많고 정계에서의 족적도 크니 연구가 활발해지고 연구자수가 많으니 자리도 많아지기 마련이다. 북인은 인조반정 이후 몰락했고 양명학은 강화학파밖에 없으니 당연히 연구자가 적을 수밖에 없다.
  26. 연려실기술 제18권 선조조 고사본말 동서남북론(東西南北論)의 분열편을 보면 송상현도 서인이라고 나온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h006&gunchaId=av018&muncheId=01&finId=001&NodeId=&setid=676681&Pos=12&TotalCount=21&searchUrl=ok
  27. 훗날 서인의 종주로 추앙받긴 했어도 이이 본인은 한번도 특정 당파의 편에 서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으며 당파의 해소를 위해 노력했다. 동인의 대표적 이물인 이발 형제들도 이이를 무척이나 존경하고 따랐다.
  28. 소현세자 사후 명실상부한 조정의 수장이었지만 대표적인 친청파로 뭇 사대부의 미움을 사고 있어서 당파를 대표한다고 보기는 무리가 좀 있다.
  29. 숙종 즉위 이후에 서인이 숙청당하면서 무게감있는 서인이라고는 외척을 제외하면 김석주 혼자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수라고 보기는 역시 애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