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사화

揆園史話

조선 후기의 역사서라고 주장되지만 의심의 여지가 매우 많은 서적. 다만 북한에서는 부분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보고 있다.[1]

작가는 북애자(北崖子)라는 사람으로, 일반적으로 조선 숙종 원년에 저술했다고 말하지만 실제 저술 연도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단지 서문에서 만주족을 언급하면서 효종의 북벌 계획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원통해하는 듯한 표현이 있고 상지이년을묘삼월상순(上之二年乙卯三月上澣)에 썼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효종 이후 즉위하고 2년째가 을묘년인 경우는 숙종밖에 보이지 않으므로 해당 표현이 숙종 1년(1675)[2]을 의미한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

환빠 성향 위서들의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어서 진실성은 낮다. 그러나 정작 환단고기를 공개한(혹은 제작한?) 이유립은 규원사화가 위서라며 비난했다. 팀킬 환단고기의 내용과는 단군의 계보 등이 완전히 다른 등 명백하게 어긋나는 부분이 많아서 양쪽 다 인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북한이나 일부 사학계에서는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으나, 환단고기스러운 내용들이 넘쳐나며 텍스트 비평도 통과하지 못하는 등 많은 문제가 있어서 남한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규원사화의 내용도 인정하지 않으며 책 자체에 대해서도 결론은 위서.

내용만을 놓고 보더라도 숙종 1년인 1675년으로 볼 경우 이상한 부분이 일부 보인다. 서문에서는 "우리 선조들의 옛 강역이 적국의 손에 들어간지 이미 천여 년(我先祖舊疆, 入于敵國者已千年)"이라고 하고 있는데, 고구려 멸망에서부터 계산한다면 천여 년이 되겠지만 규원사화에서는 발해를 명백하게 우리 민족의 나라로 간주하고 있으므로 발해의 멸망인 926년에서부터 750년 정도에 불과하다. 단순히 오랜 세월이 지났음을 표현하거나, 잘 모르는 사람이면 대충 천 년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개탄하면서 역사책을 썼다는 서문에 나온 말인데 그렇게 보기 힘든 것도 사실. 아무리 문학적 표현이라 해도 역사책에 그런 걸 쓰는 것은 자승자박이 아닌가? 사족으로 발해 멸망에서 천년 후는 1920년대이다.[3] 게다가 단순히 문학적인 표현으로 보기도 어렵다. 선덕여왕대(632년~647년)에 건립된 첨성대를 천수백 년이 지나도록 서 있다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숙종 1년은 강희제의 재위기간으로 청나라가 강성한 시기인데도 여진족을 쇠미한 일족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청나라가 망한 이후에 더 강한 이웃이 나타나면 조선을 정복하고 백성을 노예로 부릴 것이라고 말하며 애통해하기까지 하는 등 일제강점기가 아닌 숙종 연간에 작성된 사료로 보면 지나치게 예언적인 구절이 많다. 더구나 규원사화에서는 초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관념대로 여진족을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 보는 관점을 그대로 취하고 있기 때문에, 압록강 북쪽의 우리의 강역을 잃었다고 슬퍼하면서 그와 동시에 여진족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가 여진족과 연합해서 중국을 무찔러야 비로소 중국의 오만함을 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는 규원사화가 실제로는 이미 청나라가 멸망한 시점에 작성되었음을 시사하며, 청나라가 만주와 중국 본토를 석권한 숙종 1년에 쓰여진 글이라고 본다면 이는 해석하기 어려운 모순이 된다.

문제는 이런 유형의 글은 사실 진서라고 한들 가치가 없다는 것. 교차검증을 해보면 다른 사실과는 죄다 틀려먹고 또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도 엇나가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취해야 맞는지 알 수가 없다.[4] 진위 논란을 떠나 규원사화가 그렇게 까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규원사화에 대한 위서론과 진서론의 비교. 한글 위키백과 링크.[5]
  1. 여기서 이상한 오해가 생겨 북한에서는 규원사화뿐 아니라 환단고기도 정서로 본다는 이야기게 있는데, 환단고기는 북한에서도 위서로 본다. 해당 항목 참조.
  2. 즉위 2년째가 왜 숙종 1년인가 할 테지만, 유교적 가치에 따라 반정 등으로 선왕을 축출하고 즉위한 경우가 아닌 한, 선왕이 통치한 마지막 해 또한 선왕의 통치기간으로 본다. 이론적으로 1월까지만 선왕이 통치하고 2월에 새 왕이 즉위했다고 해도 그 해는 선왕의 통치기간으로 잡는다. 그래서 숙종이 즉위하고 2년째 해는 유교적 셈법으로는 숙종 1년이 된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도 연산군을 폐위하고 즉위한 중종 등을 제외하면 새 왕이 즉위한 해를 즉위년이라고 칭하고 그 다음 해부터 1년으로 헤아린다.
  3. 이 때문에 '상지2년을묘'가 1675년이 아닌 1915년이며 '상'은 조선의 왕이 아닌, 1913년 3월에 취임한 미국의 우드로 윌슨을 의미한다는 말도 있다. 물론 농담이겠지만, 은근히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4. 물론 규원사화에 깔린 17세기 사대부들의 생각이나 분위기를 추측하는 자료로 기능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넘어 기재 내용 자체의 신뢰도는 설사 진서라 해도 역사에 적용할 가치가 없다. 역사학에서 사서의 내용과 동급으로 중요한 것이 교차 검증과 유물이기 때문.
  5. 한글 위키의 해당 항목은 많은 누리꾼들이 다듬었고, 지금도 다듬고 있다. 그러니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더라도 본 항목이나 해당 한글 위키를 멋대로 반달하고 무작정 환빠로 모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런 건 정말 아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