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전한)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11위 신무후(信武侯) 근흡12위 안국후(安國侯) 왕릉13위 극포후(棘蒲侯) 시무

王陵
(?~BC 180)

한나라의 개국공신.

공신서열 12위. 안국후(安國侯)에 봉해져 5천 호를 식읍으로 받았다.
유방과 같은 패현 사람으로 원래 그 현에서 유명한 건달이었는데, 유방 역시 젊은 시절 건달로 살아갈 때 왕릉을 형님처럼 모셨다고 한다. 패현 저잣거리를 한주름 잡고 있던 유방의 위세도 왕릉에 비할 수가 없었는데, 결코 보통 인물이 아닌 셈이다. 소문난 효심과 협객기질도 왕성해서 그를 형님처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유방이 거병하여 패공이 된 후 관중으로 진격하여 함양에 도착할 무렵, 독자적으로 수천의 무리를 모아서 남양에서 봉기해 나름대로 세력을 형성했다. 이 무렵에는 유방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으나 유방이 한왕이 된 후 촉에 있다가 항우를 공격할 무렵 군사를 유방의 한나라에 예속시켰다.

이 때 항우는 왕릉의 어머니를 잡아다가 군중에 두고는 왕릉의 사자가 도착하자 왕릉의 어머니를 후대하면서 왕릉을 초나라로 귀순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비밀리에 심부름꾼을 아들에게 보내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이 늙은이를 위해 왕릉에게 한왕을 잘 섬기라고 전해주시오. 한왕은 훌륭한 어른이시니 이 늙은이 때문에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오. 이 늙은 아낙네가 죽음으로써 당신을 전송하리다."

그리고 어머니는 칼을 뽑아 목숨을 끊고 말았다. 삼국지연의서서의 일화가 떠오르는 대목. 이를 알고 대노한 항우는 왕릉 어머니의 시체를 가마솥에 삶아버렸다. 효자였던 왕릉은 매우 분노하여 결국 항우에게 가지 않고 유방 휘하에서 장군으로 각지에서 활약, 마침내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왕릉은 옹치라는 사람과 사이가 좋았는데 이 옹치라는 사람은 뒷날 유방에게 제후직을 받기는 하지만, 이전에 유방을 배신한 경력이 있어서 유방은 옹치를 대단히 싫어했다.[1] 이런 이유도 있고 본래 왕릉도 유방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공신들보다 봉지를 늦게 받아 안국후의 작위도 늦게 받았다고 한다.

유방이 죽을 때 '왕릉은 우직하다'는 평가를 남겼을 정도로 예의가 부족하고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했으며 직언을 좋아하는 성품이었다. 서한삼걸의 일화 때 유방을 칭송하면서도 굳이 그가 성격이 더럽다는 부분을 언급했을 정도.(...) 유방 사후 여후가 집권했을 무렵 상국 조참이 죽자 우승상이 되어 좌승상 진평, 다른 개국공신 주발과 함께 국정을 이끌었다. 왕릉이 우승상이 된 지 2년 뒤에 혜제가 죽자 여후는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어 여씨 일족을 제후국 왕으로 삼고자 하여 우승상 왕릉을 불러 이게 되는 일이냐고 물었더니 왕릉은 강직한 성품답게 "안 됩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진평과 주발에게 물으니 이들은 된다고 했다. 어이가 없어진 왕릉이 진평과 주발에게 "이 인간들아. 니들이 그러고도 의리가 있냐? 지금 태후가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하는 건데 무슨 면목으로 지하의 선제를 보려고 그 따위로 하냐?"라고 따지자 이에 대한 진평의 답변이 유명하다.

"지금 조정에서 질책하고 간언하는 것은 우리가 우승상만 못하오. 하지만 사직을 보호하고 유씨의 후손을 안정시키는 것은 우승상께서 우리만 못하지요."

이 답변을 들은 왕릉은 그야말로 대답할 도리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2] 이 직후 왕릉은 여후에 의해 태부가 되었지만, 태부 자리는 실권이 없는 명예직으로 이는 승진을 가장한 좌천과 다름없는 조치였다. 이에 화가 난 왕릉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낙향하여 다시는 조정에 나가지 않고 7년간 칩거해 있다가 기원전 180년에 사망했다. 그의 작위는 아들 왕기가 이었고 현손 때까지 이어지다가 주금(酎金) 문제로 봉국을 박탈당해서 후 작위는 끊어졌다.

초한지에서는 번쾌, 관영 등과 함께 한의 맹장 중 한 명으로 등장하며 지략도 어느 정도 겸비한 인물로 묘사된다. 특히 한신, , 를 점거하기 위해 북벌을 갔을 무렵 한신을 대신해서 계략을 써 항우를 엿먹이기도 한다.
  1. 어느정도 싫어했냐하면 유방이 옹치에게 제후직을 내리니까 이때까지 불평불만에 가득찬 장수들도 딱 불평을 그쳤을 정도. 한마디로 저넘도 받았을 정도면 우리들이 못받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2. 사기에 정말로 '이 말을 들은 왕릉은 할 말을 잊었다'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