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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길버트 제이 아레나스 주니어(Gilbert Jay Arenas, Jr.) |
생년월일 | 1982년 1월 6일 |
출신학교 | 애리조나 대학교 |
신장 | 188.5cm (6' 2.25")[1] |
체중 | 98kg (215 lbs) |
포지션 | 포인트가드 |
드래프트 | 2001년 드래프트 2라운드 2순위(전체 30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지명 |
소속팀 |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2001~2003) 워싱턴 위저즈(2003~2010) 올랜도 매직(2010~2011) 멤피스 그리즐리스(2012) 상하이 샥스(2012~2013) |
등번호 | 0번(골든스테이트, 워싱턴) 1번(올랜도) 9번(복귀 후 워싱턴) |
수상내역 | NBA Most Improved Player (2003) NBA All-Star 3회 (2005-2007) All-NBA Second Team (2007) All-NBA Third Team (2005, 2006) NBA Rookie Challenge MVP (2003) |
2003년 NBA 올해의 기량발전상 | |||||
저메인 오닐 | → | 길버트 아레나스 | → | 잭 랜돌프 |
1 개요
'Impossible is nothing' 해석은 여기로
NBA에서 활동했던 농구선수. 2라운드에 뽑혀 주목받지 못하다 올스타급으로 성장함과 동시에 특이한 정신세계 및 기행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나 빠르게 몰락한 괴짜 가드. 아디다스 광고 모델로 한 때 주목 받았다.
2 입단 전
길버트 아레나스는 플로리다 탬파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약물중독에 빠져 LA로 이주해 홀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어렸을때부터 농구에 빠진 아레나스는 그랜트 고등학교에서 농구선수로 대활약했으며 당시 등번호인 25번을 영구결번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고등학교가 농구 명문은 아니여서 크게 인지도를 얻지는 못하고, 그는 애리조나 대학교에 진학한다. 아레나스가 성공하리라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몇몇은 심지어 아레나스의 출장시간이 0분이 될거라고 무시하기도 했다. 이에 아레나스는 자신의 등번호를 0번으로 정하게 된다.
아레나스는 1학년때부터 평균 15.4점을 득점해 사람들의 의견을 불식시켰으며 2학년때는 16.2점을 기록하며 애리조나대를 NCAA 토너먼트 파이널까지 올려놓는데 공헌했다. 자신감이 붙은 아레나스는 2001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는데...
3 NBA 커리어
3.1 골든스테이트 시절
대학리그에서 준수한 커리어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아레나스에 대한 평가는 '운동능력이나 슛은 뛰어나지만 포인트가드와는 성향이 맞지 않고 슈팅가드를 하기에는 키가 작은 어정쩡한 선수' 였다. 2000년대 후반부터 데릭 로즈나 러셀 웨스트브룩등 듀얼가드가 활약하기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타입의 선수에 대한 평가가 안좋았다.
1번, 2번 사이의 트위너였던 아레나스는 드래프트 1라운드가 끝날때까지 호명되지 않았으며 결국 2라운드가 돼서야 전체 30번이라는 낮은 순위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입단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코트에서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하고 벤치나 덥혀야 했다.
골든스테이트의 부진으로 헤드코치가 교체되고 나서야 아레나스는 출장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두각을 드러낸다. 연속으로 두자리 수 이상의 득점을 올리며 선발멤버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 4월에는 이달의 신인으로 뽑히기도 하며 루키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2년차에는 모든 경기에서 선발출장하며 18.3득점 6.3 어시스트 4.7 리바운드라는 좋은 기록을 뽑아내며 기량발전상을 수상했다. 루키 챌린지 게임에서 소포모어 팀으로 참가해 MVP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2라운드 출신인 아레나스는 바로 프리 에이전트가 된다.
3.2 워싱턴에서의 전성기
03-04 시즌을 앞둔 시점에서 워리어스는 샐러리 캡 때문에 주전이 된 아레나스와 고연봉으로 재계약하는게 불가능하게 되었고 많은 팀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아레나스는 워싱턴과 6년 $60M의 계약을 맺는데, 이때 갈 팀을 동전던지기를 해서 정했는데 LA 클리퍼스가 워싱턴 위저즈보다 많이 나왔는데 더 적게 나온 워싱턴을 골랐다나 뭐라나.
워싱턴에서의 첫 시즌에서 복근 부상으로 몇 경기를 날려먹기는 했으나 19.6득점 5.0어시스트를 뽑으며 적응을 완료했으며 04-05 시즌부터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골든스테이트 시절부터 함께 뛰기도 했던 앤트완 재미슨, 슈팅가드인 래리 휴즈와 같이 워싱턴을 오랜만에 플레이오프로 이끄는데 성공했으며 최초로 올스타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2005년 플레이오프에서 시카고 불스와 1라운드에서 만났을 때 2:2 동률 이후 5차전에서 버저 비터를 꽂으며 6차전에서도 승리했다. 2차전에서 마이애미 히트에게 스윕당했지만. 다음 시즌때는 커리어 하이인 평균 29.3득점을 기록해 워싱턴의 확실한 에이스가 되었다. 단 06년 올스타전에는 뽑히지 못해 저메인 오닐의 대타로 참가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만난건 리그 최강의 선수가 되어가던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르브론에게 뒤지지 않는 활약을 펼쳤으나 시리즈 스코어는 2:3으로 뒤쳐지는 상황에서 맞이한 6차전.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막판 아레나스는 자유투 찬스를 얻는다. 첫번째 자유투를 실패하자 르브론이 다가와 "이번에 실패하면 너희는 ㅃㅃ2라능." 이라 말을 걸었고 아레나스는 다음 자유투도 실패한다. 이후 데이먼 존스가 역전포를 꽂으며 113-114로 워싱턴은 짐을 싸야 했다.
이런 안습한 일도 있었지만 아레나스는 이후로도 훌륭한 플레이을 보여주는 한편 하프타임동안 포커 게임을 한다던가 유니폼을 입은 채 샤워를 하는 등 기행을 해 '길버톨로지' 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대스타가 된다. 한국에서도 '길교주' 라는 별명이 붙고 워싱턴의 동료인 앤트완 재미슨은 '안장로', 캐런 버틀러는 '캐집사' 라고 덩달아 불리기도 했다.
2007년 1월 유타 재즈전에서의 버저 비터. 공이 들어가는걸 확인하기도 전에 뒤로 돌아서서 양손을 펼치는 모습은 그야말로 간지폭풍.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아디다스의 대표모델도 되고, NBA 라이브 08의 표지에도 등장하기도 했으나 여기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3.3 부상
06-07 시즌이 끝나가는 4월, 아레나스는 샬럿 밥캣츠의 제랄드 월러스와 충돌하며 무릎을 다쳐 시즌 아웃된다. 위저즈는 아레나스뿐만 아니라 버틀러도 부상을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다시 만난 클리블랜드에게 탈탈 털려야 했다.
다음 시즌이 시작된 후 8게임을 뛰었지만 회복이 덜됐기 때문인지 부진을 겪어 오랜 기간동안 결장하게 된다. 위저즈의 플레이오프 진출이 간당간당해진 막판에 복귀해 벤치멤버로 뛰고 클리블랜드와 또다시 1라운드에서 만나지만, 완치도 안됐으면서 4차전에서 무리하게 뛴 나머지 또다시 나가떨어지고 만다. 결과는 르브론이 미쳐 날뛰면서 2-4로 클리블랜드가 진출.
이후 아레나스는 재미슨과 같이 워싱턴과 재계약하지만 2007년부터 시작된 부상에 시달리며 08-09 시즌에 거의 뛰지 못했다. 워싱턴은 이 시즌에 동부 꼴찌를 차지한다.
3.4 병크와 몰락
2009-2010 시즌 길버트 아레나스는 건강을 되찾고 길교주로서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는 듯 싶었다. 그러나 락커룸에 총기를 가져와 도박빚 문제로 팀메이트인 자바리스 크리텐튼에게 겨누는 초대형사고를 치고 만다. 최고 징역 5년까지 선고받을수 있었으나 보호관찰 2년 및 사회복귀훈련 30일 선에서 끝났는데, 아레나스는 정신 못차리고 얼마 뒤 손가락으로 총 쏘는 흉내까지 냈다. 빡친 데이빗 스턴 총재가 출장정지 명령을 내리고 워싱턴은 당연히 09-10 시즌도 말아먹는다. 아레나스의 인기에 한몫한 돌아이 기질이 최악의 경우로 발현된 사건.
이후 아레나스는 절치부심하는 심정으로 등번호를 '에이전트 제로' 라는 별명을 선사한 0번에서 9로 바꿨지만 이미 팀의 중심은 루키 존 월이 되었고, 부상과 불미스러운 사건을 겪은 아레나스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결국 2010년 12월 18일 올랜도 매직의 라샤드 루이스와 트레이드되면서 쫓겨난 뒤 올랜도에서 별 활약을 하지 못한다. 이때는 페니 하더웨이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1번을 달고 뛰었다.
올랜도에서도 방출당한 아레나스는 멤피스에서 잠깐 백업멤버로 뛰다가 11-12 시즌이 끝나고 CBA의 상하이 샤크스로 떠난다. 2라운드 출신 스타의 최후는 너무나도 허무했다.
4 기타
길버트 아레나스가 워싱턴 위저즈로 이적하게 된 사건은 이후 길버트 아레나스 룰이라는 규정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 원인을 자세히 설명하면.
1. |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에 지명된 선수는 계약할 경우 지명순번과 리그 규정에 따라 연봉이 무조건 고정되고 3년+QO 1년 총 4년의 계약기간이 보장되는 반면, 2라운드에 지명된 선수는 팀의 의사에 따라 계약기간을 정하며, 첫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제한적 FA자격을 얻게 된다.[2] |
2. | 제한적 FA는 다른 팀들과 자유롭게 계약 협상을 할 수 있지만 원 소속팀은 다른팀과 계약시 같은 조건을 제시하면(이를 계약 매치라고 한다.) 원 소속 구단에 무조건 잔류해야 한다. |
3. | 래리 버드 예외조항에 의해, 한 선수가 방출등의 로스터 이동조치 없이 팀과 3년 계약을 모두 수행하면 버드권리를 갖게 되어 원 소속팀과 샐러리캡 제한없이 재계약을 할 수 있다.[3] 만약 3년을 못채우고 2년을 채우게 되면 얼리 버드 예외조항에 따라 얼리 버드권리를 얻는데, 이 경우는 리그 평균연봉만 제시가능하다. |
4. | 한 팀은 매년 1명씩 MLE(Mid Level Exception) 예외조항에 따라 선수 영입을 할 수 있으며 이때는 리그 평균연봉을 제시할 수 있다. |
길버트 아레나스가 2라운더로써 워리어스와 2년 계약을 마쳤을때 그는 2번 조항에 따라 제한적 FA가 되어 다른 팀과 협상중이었는데, 아레나스의 소속팀 워리어스는 아레나스와 계약하지 않았을때 이미 샐러리캡 제한을 넘어선 팀이라서 아레나스와 재계약을 하기 위해서는 3,4번 규정을 이용해서 리그 평균연봉을 지불하는 재계약만 제시할 수 있었다.
이때 샐러리캡 아래라 마음껏 돈을 쓸 수 있던 위저즈가 아레나스에게 계약 첫해 850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계약을 제시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워리어스는 2번 조항에 따라 아레나스의 계약을 매치할 권리는 가졌지만, 샐러리캡을 넘어섰기 때문에 4번 규정에 나와있는 리그 평균연봉 이상, 당시 기준으로는 500만 달러가 넘는 연봉을 지급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조항에 모순이 생기며, 워리어스는 길버트 아레나스의 계약을 매치시키는 것이 불가능해 졌다. 때문에 워리어스는 눈 뜬채 팀의 에이스를 위저즈에 뺏길 수 밖에 없었다.
아레나스의 이런 사건 이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2라운더 스타 파워포워드였던 카를로스 부저가 똑같은 방식으로 유타 재즈로 거액의 돈을 받고 이적하면서 이 조항에 헛점이 있다는 걸 인식했다.[4][5] 결국 사무국은 조항을 수정하여, 2년 계약을 마친 2라운더 이하 선수가 제한적 FA 자격으로 다른 팀으로 FA이적할때 계약 첫해 연봉을 리그 평균연봉보다 높게 받더라도 원 소속팀이 매치 가능하도록하게 바뀌었다. 이 경우 계약 첫해 연봉은 무조건 리그 평균 연봉으로 고정되며 남은 금액은 뒤로 밀린다. 이를 길버트 아레나스 룰이라고 부른다.
현역시절 괴짜스런 언행으로 유명했던 아레나스답게 2007년 자신의 25번째 생일을 맞아 1백만달러짜리 생일 파티를 연 적도 있다. 워싱텀에 위치한 나이트클럽에서 열린 이날 파티의 진행은 힙합스타 p. diddy가 맡았으며 수많은 유명인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캘리포니아의 슈팅게임에서 하도 많이 양학을 해서 상품을 쓸어가는 바람에 참가금지를 당했다 카더라...
- ↑ 2001년 드래프트 측정 결과 맨발 신장 6' 2.25" = 188.5cm
- ↑ NBA에서 5년간 활동하기 전까지는 계약 만료때 무조건 제한적 자유계약선수가 된다.
- ↑ 물론 샐러리캡 오버로 내는 사치세는 내야한다.
- ↑ 부저는 더 질이 나쁜게, 부저는 데뷔후 3년동안 캡스와 뛰다가, 마지막 팀옵션 60만불 1년계약이 남았던 원 소속팀인 캡스를 상대로 자기를 믿고 옵션을 파기해주면 팀과 연장계약을 체결하겠다는 제안을 해서 캡스를 솔깃하게 해서 팀옵션을 파기해서 제한적 자유계약선수가 되자마자 에이전트를 해고하고, 바로 유타 재즈와 아레나스와 유사하게 캡스가 매치할 수 없는 조건의 연장계약을 체결해서 캡스에서 도망갔다. 한국이었으면 금지어가 되어도 할말 없을 뒤통수에 풀스윙을 갈긴 셈.
- ↑ 이렇게 부저를 영입한 유타 재즈는 공교롭게도 2008년 같은 2라운더로 팀의 주전 포워드가 된 폴 밀샙이 2년 계약 마치고 제한적 FA가 되었을때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게 똑같은 상황을 당한다. 이때는 아레나스 룰이 생긴 뒤라 폴 밀샙을 뺏기지 않았지만, 매치한 계약 첫해에 사이닝보너스라는 독소조항을 삽입해 그해 내야할 연봉이 1000만 달러에 육박했기 때문에, 1000만 달러 + 샐러리캡을 넘어서 지불한 사치세라는 이중과세 크리를 맞았다. 거기다 이 계약을 매치시키려면 사이닝보너스를 정해진 날짜까지 즉시 입금시켜야 했기 때문에, 급전을 땡기는 추가부담까지 지어놨다. 이 급전은 케이블 TV FSN UTAH와의 독점 중계 계약금으로 충당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유타주 주민들은 그동안 공중파인 KJZZ에서 유타 재즈의 홈 경기를 볼 수 있던 것을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유타 주의 재즈 팬들 입장에선 짜증이 샘솟을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