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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
이름 | 모윤숙 (毛允淑) |
출생 | 1910년 3월 5일, 함경남도 원산 |
사망 | 1990년 6월 7일, 서울특별시 |
본관 | 광주 모씨 |
직업 | 시인, 국회의원 |
1 소개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영문학) 선과[2]를 수료했다.
그의 작품 렌의 애가는 김기영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함경남도 원산시 출신으로 이북출신들이 대개 그렇지만 몸으로 체득한 반공 성향이 있었다.
2 설명
1948년 제3차 UN총회 한국대표로 참가해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는데, 사실 모윤숙이 제대로 활동한 것은 이승만 지지를 위한 로비 활동이었다.
당장 1948년 당시 남한 단독 정부를 반대하던 인도의 외교관 벵갈릴 크리슈난 크리슈나 메논[3]과 교제하면서 이승만 지지측으로 회유시켰다. 모윤숙은 이에 대해서 "만일 나와 메논 단장과의 우정 관계가 없었더라면 단독 선거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계셨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4]라고 했고, 메논은 이 심정 변화에 대해서 "외교관으로 있던 오랜 기간 동안 나의 이성(reason)이 심정(heart)에 의해 흔들렸다는 것은 내가 유엔 조선 임시 위원단 단장으로 있던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나의 심정을 흔들었던 여성은 한국의 유명한 여류 시인 매리언 모(모윤숙)였다."라고 표현했다[5]. 이후 건국의 아버지는 크리슈나 메논이고, 건국의 어머니는 모윤숙이다라는 비웃음이 당시 세간에 퍼졌다.
그리고 6.25 전쟁이 지속중이던 외국인 대상 사교클럽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것이 1951년[6] 이승만의 지시로 만들어진 낙랑클럽이다. 모집 조건은 영어능통한 이화여전 출신자였고, 총 100여 명 정도[7]가 소속되었다. 이들은 이화여전 혹은 숙명여대 출신[8]으로 영어능통자라는 조건 때문에 여기에 당시 고관들의 부인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본문에서 언급되는 전숙희의 책에서도 이야기가 나오고, 모윤숙 자체도 인정한 내용이다. 모윤숙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중심 인물이 손원일 제독의 부인 홍은혜,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 부인 허숙자 등이다. 총재는 김활란 회장은 모윤숙이었다. 이후 이 단체에 대해서 부인들의 민간외교라는 주장도 존재하지만, 역시 낙랑클럽에 소속되어 있었던 김수임을 변호하기 위해서 전숙희[9]가 쓴 책,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에서도 이 단체는 유사매춘단체에 가깝게 묘사된다. 단적으로 지나친 로비문제와 김수임 사건 관련으로 이 단체를 조사한 미군 CIC도 당시 조사보고서에서 이 낙랑클럽을 로비를 위한 고급 호스티스 단체로 규정해버렸다[10].
이후 이 두가지 사건은 스캔들 차원에서 다루어졌으며 쉬쉬되었으나, 뉴라이트 관련 출판사인 기파랑에서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을 출판하면서 대놓고 민간외교로 격상시켜버리기도 했다. 물론 모윤숙 본인은 논개 드립을 치면서 미인계를 포함해서 모두 민간외교로 싸잡아서 인정했다. 물론 기파랑 책에서는 미인계 운운은 안나오고 순수한 문학적이고 문화적이며 로맨틱한 교류에 대해서만 주로 언급된다#.
초기작품인 피로 색인 당신의 얼골을은 '일제 치하에서 민족적인 진로를 모색하는 의미와 정열적인 삶을 추구하는 시인의 지향'이 엿보인다지만,이런 해석은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다.
그외에도 민족의식이 뚜렷한 시들을 발표해서 1940년 경기도 경찰국에 구금되었다는데, 이 역시 루머. 그 외에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11] 프로파간다스러운 시도 발표했다. 뭐 전쟁중이니깐 이건 어쩔수 없다고 치자, 이런 예는 전쟁 전에 상당히 많아서 군대 정훈교육 시간에 들어 보셨을 육탄 10용사도 실제로는 원래 있었던 일을 좀 부풀린것에 가깝다.
3 친일
이 사람의 친일 행위는 매우 유명한 편으로 학도병 지원 글을 무수히 많이 쓰고 다녔다. 특히, 매일신보 기사글 찾아보면 고정필진급...
당시 모윤숙과 함께 친일반민족 행위에 앞장섰던 여성계 지도자들이 박마리아, 김활란, 노천명 등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여성친일파들은 해방이후 일제히 반공을 부르짖으면서 독재정권의 앞잡이가 되었다. 유창한 영어실력을 과시하면서 미국 인맥 만들기에 혈안이었던 것까지... 기회주의자들이 살고 싶어서 반공 운운하는게 다 그렇지 뭐...
파일:Attachment/모윤숙/diesay.jpg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90년대 한국군에 배포된 수양록 2페이지에 실려 있기도 한데 모윤숙의 친일 전적을 아는 신병들은 신교대에서 수양록을 받고 꽤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 시가 육군 명예의 전당에도 있어서 저거 철거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2005년 나왔고, 결국 2006년 철거 되었다.[12]
- ↑ 태평양 전쟁 당시 각종 친일 강연을 했다.
- ↑ 다른 학교에서 수학한 것을 인정받아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한 것. 수료로만 인정되고 졸업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 ↑ 단정수립 등 복잡한 상황에서 유엔 조선 임시위원회 중립국 대표로 한국에 방문했다.
- ↑ 신동아 1983년 2월호
- ↑ 런던에서 찍어낸 자신의 자서전 내용이다.
- ↑ 이건 모윤숙의 주장인데, 실제로는 미군정기에 설립되었다가 정설이다. 낙랑클럽에 소속된 인물 중 하나가 김수임인데, 김수임은 한국전쟁 직전에 이강국 사건으로 총살되었기 때문이다. 미군 CIC 보고서에 의하면 낙랑클럽의 설립시기는 1948년에서 1949년으로 추정된다.
- ↑ 적게 잡은 경우가 50, 많이 잡은 경우는 최대 300 이상. 당장 모윤숙의 말부터 논란이 있고, 관련글들마다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다.
- ↑ 많은 경우는 이화여대만 언급되는데, 머릿수를 많이 잡는 경우에는 숙명여대도 포함된다.
- ↑ 당시 유명한 여류문인으로 낙랑클럽의 인사들과는 상당한 친분관계가 있었다.
- ↑ 金祥道, "6·25무렵 毛允淑의 美人計조직 「낙랑클럽」에 대한 美軍방첩대 수사 보고서", 월간중앙 229호.
대놓고 심각한 자료는 조중동 계열에서 많이 나왔다. 이 월간중앙도 그렇고, 신동아 자료도 그렇고. - ↑ 하지만 이 시같은경우 반공적색채도 거의 없고(창작된시기가 아직 한국이 반공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한 시기가 아닌 전쟁직후였다)정말 순수하게 참전용사를 추모하는 시라 프로파간다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당장 유럽만 가도 2차대전의 전사자를 추모하는 시도 많고 국립묘지에도 적혀있다. 오히려 프로파간다 시의 사례로 꼽자면 "육영수 여사 추모시" 같은걸 꼽는게 더 적절할듯 원문을 존중해 일단 수정하진 않겠습니다.
- ↑ 시 본문에 누런 유니폼, 어깨의 표지(계급장)이 나오는데 국군의 군복은 아시다시피 한번도 누런색이었던 적이 없고, 6.25 당시나 현재나 장교 계급장을 어깨에 다는 경우는 정복 뿐이지 전투복은 옷깃에 계급장을 단다. 다만 공군의 간부의 경우 어깨에 계급장을 다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 시 자체가 누런 군복을 입고 어깨에 계급장을 달았던 일본군을 찬양하는 시였는데 국군으로 고쳐서 발표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카키 유니폼에 옷깃의 표지라고 바꿔서 발표하지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