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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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得九, Kim Duk-koo

1 개요

1955년 1월 8일 ~ 1982년 11월 18일

대한민국권투 선수이다.
키 :169cm
황정민을 닮은 것 같다

2 생애

강원도 고성 출신, 다섯 자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3번 결혼을 했다. 본명은 이덕구, 1967년 어머니가 김호열과 결혼하면서 그의 호적에 입적하면서 김득구로 개명했다.

호적상으로는 1955년 1월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묘비문에는 1956년 8월 10일 출생 강원도 고성 출신으로 되어 있다.

가난하게 자라났으며, 1972년 이복 형제들과의 갈등으로 14살 나이로 가출하여 서울로 상경한다. 권투 선수가 되기 전에는 구두닦기, 투어 가이드 등의 허드레일을 하면서 살았으며 검정고시에 붙어서 천호상고에 진학했다.

3 복싱 경력

동아체육관에 입문. 아마추어 선수로서 활동하다가, 1978년에 프로로 전향했다.

1980년 12월 이필구를 10회 판정으로 승리하고, 한국 챔피언 타이틀을 얻는다.

이후 OPBF 동양 챔피언 전에서 김광민에게 승리하여 동양 챔피언이 되었다.

4 일생의 마지막 경기

1982년 11월 13일(한국 시간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Caesars Palace)에서 열린 WBA 라이트급 챔피언 전에서 당시 챔피언 레이 맨시니에게 도전하였으며 그는 챔피언 전을 앞두고 맹훈련을 했으며, "관을 준비해놓고 간다. 패한다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고 한다.

당시 경기상황을 보면 9회까지는 김득구가 맨시니와 호각에 가까운 멋진 승부를 펼쳤지만[1] 10회 때부터 체력고갈로 난타를 허용하게 되었으며 11~13회에 걸쳐서 난타당하며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경기를 펼치던 중 14라운드에서 맨시니에게 턱을 강타당한 김득구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뇌사 상태에 빠진지 5일 뒤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산소 마스크를 떼어낸 뒤 향년 26세를 끝으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당시 세계복싱계에선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김득구가 레이 맨시니와 싸우게 된 것은 프로모터 밥 애럼의 농간 때문이었다. 김득구는 세계적인 강자들과 싸울만한 기량을 갖추지 못한 것이 복싱계의 일관된 평이었고, 김득구의 프로모터인 김현치 관장도 김득구의 기량이 세계적인 수준에 못미친다는 것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정한 바 있다. 레이 맨시니가 챔피언으로 활동할 때 이미 세계 랭킹엔 에드윈 로자리오등의 쟁쟁한 복서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이들이야말로 레이 맨시니와 챔피언 자리를 두고 일합을 겨루기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외모로 흥행성을 갖춘 레이 맨시니가 패배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밥 애럼은 타이틀전 상대로 위협적인 상대들을 모두 거르고, 떡밥이나 다름없던 김득구를 레이 맨시니의 타이틀 유지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밥 애럼이 이런 무리수를 던지게 된 까닭은 위와 같은 이유 외에도 레이 맨시니가 한 스포츠티비 채널과 거액의 계약을 체결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레이 맨시니가 강한 상대와 싸우다 패배한다면 모처럼 맺은 TV 계약도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세계적인 선수들에 비해 기량이 뒤떨어지는 김득구를 레이 맨시니의 상대로 링에 올릴 수 밖에 없었다.

밥 애럼은 검사출신의 엘리트이지만 뒷골목 범죄자 출신인 돈 킹보다 몇 배는 더 추악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복싱계 이면의 추악한 비지니스가 김득구의 생명을 뺏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애럼은 비난만 받았을 뿐 어떤 일도 없었고 애럼은 지금도 미국프로 권투계를 좌우하는 이름으로 군림하고 있다.

5 사후

  • 김득구는 1982년 이영미와 약혼했으며, 1983년 유복자 김지완이 출생했으며 아들 김지완은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다.참조기사
  • 김득구가 세상을 떠난 뒤 김득구의 모친은 우울해하다가 3개월 뒤 유서에 "내가 가난해서 아들이 복싱을 시작했다. 결국 내가 아들을 죽인것이다"라 쓴 채 농약을 마시고 아들의 뒤를 따랐으며, 새아버지는 맨시니가 보상금으로 뭘 준다는 사기전화에 걸려 당시로서는 꽤 큰 돈인 3백만원을 피해보았다고 한다.
  • 경기 심판 리처드 그린은 선수가 위험한 상태임에도 계속 시합을 강행시킨 끝에[2] 김득구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7개월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3]
  • 레이 맨시니는 김득구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이후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국내에는 김득구와의 경기 후에 은퇴하고 험난한 인생을 살았다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김득구와의 경기 후에도 활동하면서 8번의 경기를 더 치뤘으며 1984년까지 WBA 라이트급 타이틀을 두 번 더 지켰다.[4] 1984년 6월 1일 리빙스턴 브램블에게 타이틀을 상실하고 1985년 2월 복수전에 실패한 뒤 잠정 은퇴했다가 복귀해 1989년 헥터 카마초와 WBO 라이트웰터급 챔피언 결정전, 1992년 그렉 호건과 NABF 라이트웰터급 챔피언결정전을 치뤘으나 모두 패한 뒤 최종 은퇴한다.
  • 김득구의 죽음은 복싱계와 스포츠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복서의 안전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국 하원에서는 복싱의 안전을 위하여 청문회까지 열렸으며 또한 종합격투기를 포함한 모든 격투기 대회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생긴 룰이 바로 다름아닌 닥터스톱으로 각 선수들마다 할당된 주치의의 판단으로 심판 판정과는 상관없이 경기를 종료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 세계권투평의회(WBC)에서는 김득구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15라운드 경기를 12라운드로 줄였으며, 라운드 사이의 휴식시간을 60초에서 90초로 늘리고, 스탠딩 다운제를 도입했다. 김득구가 사고를 당한 복싱기구인 세계권투협회(WBA)에서도 1988년에 그 뒤를 따랐으며, IBF 역시 1989년에 변경을 시행했다.
  • 레이 맨시니는 평생 김득구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득구를 소재로 한 영화 챔피언이 개봉할 당시 한국을 찾았던 레이 맨시니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득구를 강인한 전사라고 칭찬하면서, 그의 죽음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바뀌고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려왔다고 말했다. 만약 하늘에서 김득구와 만나게되면 무슨 말을 해줄 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레이 맨시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무말 없이 끌어안아 주겠다는 말로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2012년이 되어서 맨시니는 김득구의 유족과 만남을 가졌는데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맨시니와 한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온 맨시니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김득구의 아들에게 이제야 오랜 세월동안 가졌던 마음속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수 있겠다고한 맨시니의 말은 많은 올드 복싱팬의 심금을 울렸다. 맨시니는 매년 복서를 꿈꾸다 세상을 떠난 형의 기일과 김득구의 기일에는 빼놓지 않고 조의를 표한다고 한다.
  • 미국에서는 권투 선수 문성길의 이름을 딴 'Sun Kil Moon'이라는 이름의 밴드가 활동할 때 밴드 멤버였던 마크 코즐렉이 김득구의 경기를 본 뒤 그를 소재로 한 'Duk Koo Kim'이라는 곡을 발표한 이야기는 스펀지 120회 방송분에서 소개되었다.

6 미디어

  • 1984년 한국영화 <울지않는 호랑이>가 김득구를 다뤘다. 이계인이 김득구를 연기했으며 감독은 여곡성, 알바트로스의 이혁수.
  • 2002년작인 곽경택이 감독을 맡은 한국영화 챔피언도 바로 김득구를 다룬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유오성이 김득구를 연기했다.

7 참조

거제시민뉴스
  1. 당시 판정을 보면 이때에도 유효타는 맨시니가 좀 더 많았다.
  2. 맨시니에게 화려한 KO 승리를 선사하게 하고 싶었던 프로모터의 입김이 착용했다는 소문이 있다.
  3. 시합에서 심판 리처드 그린이 김득구에게 불리한 판정을 했다는것은 잘못된 루머다. 적어도 9라운드 이후부터는 누가봐도 김득구의 열세였고 리처드의 문제점은 이미 제대로된 의식이 없음에도 정신력만으로 시합에 임하던 김득구를 계속 링에 올렸다는 점에 있었다. 외신에서도 비판받은 점은 선수 자신의 의사를 중시한다는 명목으로 위험한 상태인 선수를 끝까지 시합에 나서게 한 심판의 도의적 자질 문제였지 판정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았다.
  4. 다만 김득구의 사망이 그의 복싱 커리어에 크나큰 휴우증을 남긴 것은 틀림없었는데 맨시니는 김득구와의 시합 이후로 실의에 빠져 시합간의 공백기가 길었으며 그후에는 이전만한 패기있는 복싱 스타일을 구사하지 못하고 치고 빠지는 히트 & 런 전법의 조심스러운 복싱으로 스타일이 변하기 시작했다. 맨시니에 대해서 다룬 다큐에서는 불행했던 시합이 한 복서의 아까운 생명과 전도유망한 천재 복서의 커리어를 일찍 마감하게 했다고 말할 만큼 그의 복싱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맨시니 자신의 입으로도 "그 시합 이후로는 복싱에 대한 열정을 잃었고 복싱을 하는 것이 괴로웠다" 고 술회할만큼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