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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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성길(金誠吉)
金本 誠吉(카네모토 세이키치)
생년월일1956년 5월 22일
출신지일본 아이치
학력츄우쿄오고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78 한큐 브레이브스 6순위 지명
소속팀한큐 브레이브스(1978~1986)
삼성 라이온즈(1987~1992)
쌍방울 레이더스(1993)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7번(1988~1992)
김기태(1987)김성길(1988~1992)박충식(1993~1999)

1 소개

한큐 브레이브스(현 오릭스 버팔로즈),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활약했던 재일교포 야구 선수. 우완 사이드암 투수이다. 별명은 깡마르고 검은 피부가 닮았다고 해서 부시맨. 등번호는 17번으로 이후 박충식이 물려받았다.

츄우쿄오고 진학 후 언더핸드 투수로 전향해 1학년 때부터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1972년 코시엔 8강, 1974 코시엔 봄대회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또한 고교 재학 중 꾸준히 재일교포 팀으로 봉황기에 참여했다.

요즘에 부각되는 삼성 라이온즈의 살림꾼.. 그리고 181구의 박충식을 넘어 198구라는 초인적인 공을 던졌던 장사.

2 선수 생활

2.1 일본 시절

고교 졸업 후 프로에 지명받지 못해 실업팀인 혼다에 입단했다가 1977년 열린 1978 드래프트 때 한큐 브레이브스에 6순위로 지명받고 입단했다.

한큐에서만 9년간 있었으며, 대다수 시즌을 1,2군을 오가는 패전처리로 보냈다. 9년간 성적은 78경기 등판 184이닝 1승 7패 2세이브 평균자책 4.89.

2.2 한국 시절

김성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재일교포로 알려져 있던 터라 한국프로야구에서 여러 차례 영입을 추진하였다.

1986년 해태 타이거즈가 영입을 추진했고, 한큐와도 얘기가 잘 돼 해태 입단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김성길 본인이 해태 입단을 거절했다. 재일교포로 이미 해태에서 활약했던 주동식이 해태에서의 푸대접 때문에 만류한 것도 있고, 삼성 라이온즈가 한큐 구단이 아닌 김성길 본인과 접촉했기 때문이다. 김성길은 무조건 삼성 아니면 안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해태는 김성길 영입에서 발을 뺐다.

1987년 7월, 한큐에서 김성길을 임의탈퇴 처리하자 여러 팀에서 그를 영입하려 해 그의 몸값은 더욱 올라갔다. 결국 삼성이 4천만엔(당시 환율로 2억원 이상)으로 김성길을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1군에서 고작 1승 밖에 올리지 못한 선수를 김일융보다 더 비싸게 데려 온 것. 물론 언론에는 낮은 가격으로다운계약서 발표했다.

1987년에는 시즌 중에 입단해 11경기 밖에 등판하지 않았지만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하며 그 몸값을 톡톡히 해냈다. 1989년에는 14승, 1990년에는 13승을 올렸고 특히 1989년에는 233⅔이닝을 소화하며 김시진을 잇는 삼성의 에이스로 올라섰다.[1]

30대 중반에 접어든 김성길은 마무리 투수로 전향했지만 1991년 부임한 김성근 감독은 기존 마무리 보직 외에 중간계투, 심지어 선발까지 보직을 가리지 않고 애니콜로 굴렸다. 이때문에 만 35세의 구원투수가 선발 3경기 완투를 포함헤서 무려 52경기 188이닝을 던지면서 철저하게 혹사당했다. 이 혹사는 1991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절정에 달했는데, 1차전에 구원등판해 80구를 던지면서 승리투수가 되었고, 불과 이틀만인 3차전에는 1회에 선발투수 성준을 대신해 구원등판, 198구를 던지며 12.1이닝을 소화하며 13회까지 던졌다. 이는 포스트시즌의 명승부 중 하나로 손꼽히면서도 김성근 감독의 대표적인 혹사로 언급되고 있다. 오죽하면 혹사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하던 당대에도 8개구단 팬들이 "김성길은 저러다 죽는거 아니냐"고 입을 모았을 정도이다, 그리고 포스트시즌이 끝나고 식사를 하려고 하였을때 밥숟가락도 못들었다. 이 정도로 혹사가 심했다니 상상이 잘 되지 않을 정도이다.

김성근 감독 첫해인 1991년 김성길은 다승 4위, 세이브 2위, 그리고 팀을 정규시즌 3위로 이끄는 등 기록상으로는 최고의 해를 보냈지만 결국 말도 안되는 혹사 때문에 몸이 완전히 망가지면서 부상을 얻었다.

혹사의 후유증 때문에 부상을 얻은 김성길은 이듬해인 1992년에 급격한 하향세를 보였다. 그해 김성길은 불과 17경기에 등판하여 1승7패1세이브 평균자책점이 5.14의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본인이나 김성근에게나 손해인 것이, 92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은 롯데에게 속절없이 무너진다. 일부 삼성 팬들은, 김성길이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고 보고 있으며, 김성근의 혹사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예시이다.

1992 시즌이 끝나자 결국 김성길은 신경식과 함께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되었다.[2] 경질된 김성근체제 정리 차원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김성길 본인의 부상과 그로 인한 기량의 급격한 하락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된 김성길은 재기를 다짐했지만 이미 그의 나이 서른 일곱. 혹사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해(1993년) 고작 2승[3]을 거두는 데 그치며 시즌이 끝나고 은퇴했다.

재일교포 투수들 중 장명부, 김일융 다음 가는 성적을 기록했지만 그 말년은 초라했다.

대한민국에서 기록은 7년간 211경기 등판 925이닝 54승 46패 39세이브 평균자책 3.38.

2.3 은퇴 이후

은퇴 이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 생활고에 시달리며 택시운전기사, 주유소 직원 등을 전전했다고 한다.

주유소 직원으로 일하던 2001년 1월 업무상 횡령 혐의로 구속되었다.

3 연도별 성적

3.1 일본 시절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1980한큐 브레이브스9300216.60351018
198115430104.40411417
19821군 기록 없음
198329701314.50761936
198431⅓00027.00431
19852136⅔0004.17441024
1986130003.00123
통산781841724.892015899

3.2 한국 시절

  • 투수 기록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1987삼성 라이온즈11310133.1931913
198838151⅓8462.801503662
198934233⅔
(3위)
141122.812197197
199033166⅓13
(5위)
633.301686151
199152
(1위)
18816
(4위)
1218
(2위)
3.301646494
199217701715.14733330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1993쌍방울 레이더스2684⅔2563.93943440
통산2119255446393.38899308387
  • 타자 기록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
1991삼성 라이온즈11.0000000000
통산11.0000000000

4 이야깃거리

삼성이 1987년 7월 김성길을 영입한 후 선수 등록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당해 2월 28일을 넘기면 군제대 선수, 트레이드 선수 외에는 추가등록이 불가능하기 때문. 그러나 삼성은 한큐에서 트레이드한 것으로 등록, KBO는 그걸 그대로 인정했다. 11년 앞선 KBO 리그의 외국인(?) 선수 영입

해태와 삼성이 김성길 영입에 열을 올리던 때에 당시 장명부는 김성길에 대해 "4류투수"라고 말했다. 근데 당시 장명부는 그보다도 못던졌잖아 또, 1987년 8월 12일 한국 프로야구에 첫 등판한 김성길의 투구를 본 한 심판은, "그 정도 투수에게 2억원씩이나 줘야 한다면 진동한은 3억원짜리."라고 평했다. 즉,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오버페이'라는 것이다.
  1. 참고로 이 해에 삼성은 팀 평균자책점이 4.42로 7개 구단 중 최하위였다. 그야말로 김성길 혼자 팀을 이끌어 간 것.
  2. 여담으로 트레이드 대가는 선수가 아닌 쌍방울의 2차 1라운드 지명권.(정영규)
  3. 2승5패6세이브 방어율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