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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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정규리그 고별전 시구 때.

이름박충식(朴衷湜 / Chong-sik Park)
생년월일1970년 9월 3일
출신지광주광역시 동구
학력광주중앙초-무등중-광주상고 - 경희대
포지션투수
투타우언우타
프로입단1993년 2차지명 1라운드(전체 7순위)
소속팀삼성 라이온즈(1993~1999)
해태-KIA 타이거즈(2000~2003)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7번
김성길(1988~1992)박충식(1993~1999)전병호(2000~2008)
KIA 타이거즈 등번호 19번
이강철(1989~1999)박충식(2000~2001)이강철(2002~2005)
KIA 타이거즈 등번호 15번
강영식(2000~2001)박충식(2002~2003)허준
당시 연장 15회 제한이 없었으면 난 20회, 30회도 던졌을 거다.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던지겠느냐고? 물론이다. 그게 내가 아는 야구다.

1 소개

KBO 언더선발 계보의 중심 축

전 야구선수. 포지션은 투수. 한희민-이강철-박충식-김병현-정대현으로 이어지는 언더핸드 투수 계보의 한 축. 이승엽이 만개하기 전, 원조 라이언 킹.

2 아마추어 시절

원래는 광주 출신으로 광주상고에서 뛰었다. 1988년 대통령배에서 광주상고가 우승했으나, 당시에는 큰 활약은 없었던 편.[1] 경희대 졸업 당시 당연히 해태 타이거즈에 갈 줄 알았으나 하지만 7년 뒤에 오게 되었으나 더 이상 설명을 생략 해태 타이거즈이종범을 1차 지명했고, 박충식은 삼성 라이온즈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2] 대학 시절 당시 고려대의 이상훈(LG 트윈스)과 친분이 있었는데, 야구부의 선배들을 무서워해서[3] 이상훈은 경희대학교로, 박충식은 고려대학교로 도망다니다 자주 마주쳤다고 한다.

3 프로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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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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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을 보냈던 고향 팀 KIA 타이거즈 시절.

1993년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신인으로 14승(팀 내 최다승) 7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2.54를 거두면서 사이드암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등번호는 17번(삼성)-19번-15번(이상 KIA).

요새야 새로울 것도 없지만 그 당시에는 사이드암임에도 불구하고 최고 구속이 140km/h가 넘는 희소성 있는 투수[4]였으며, 거기에 엄청난 각도의 슬라이더와 강력한 싱커로 1990년대를 풍미하였다.

박충식 하면 대부분의 팬들은 문희수-선동열-송유석 3명의 해태 에이스를 상대로 밀리지 않는 피칭을 하며 15이닝 2실점 무승부를 거둔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을 떠올리지만당시 그의 활약상 그의 진가는 1994년 14승,(김태한과 함께 팀 내 최다승), 1995년과 1996년에는 방위병 복무로 홈경기에만 출장하면서도 각각 9승과 8승 12세이브, 1997년과 1998년에는 각각 13승과 11승을 거두는 등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매해 150이닝 이상을 던지는 꾸준한 활약을 펼쳐 김태한, 김상엽과 함께 삼성 마운드의 트로이카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으며, 1990년대 중반의 삼성 암흑기 동안 마운드를 지탱해 1990년대 후반 이후 재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 중요하진 않지만, 1997년 5월 4일 삼성이 한 경기 팀 최다 득점 기록을 세우던 경기의 승리투수였다.

그러나 1999년 부상으로 수술을 받아 재활했던 그는 2000년 이강철의 보상 선수로 해태 타이거즈에 이적하게 되었다. 당시 삼성 구단에선 '설마 부상 중인 선수를 데려가겠어?'라는 생각에 보호선수 명단에 묶지 않았는데, 그 설마가 사실이 되었다.(…).[5] 이후 선수협 파동과 열악한 해태의 재활 시스템으로 제대로 된 재활을 하지 못했음에도 중간계투로 나서서 2001년에는 3승 2패 3세이브 2홀드를, 2002년에는 5승 3패 8세이브 12홀드를 기록하는 등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나름대로 한몫했다. 그러나 부상이 재발해 2003년은 재활로 보내며 결국 시즌 종료 뒤 은퇴하고 가족들이 있던 호주로 건너갔다.

고향 팀으로 이적한 후 없다시피한 재활 시스템[6]과 쌍팔년도 수준의 구타, 폭력에 황당했다고 한다. 막상 고향에 와 보니 좋다 말았다. 멀리 있긴 해도 차라리 친정 팀이 더 좋았지.

4 은퇴 이후

호주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유소년 야구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가 2011년 10월에 귀국했고, 11월에 양준혁이 이사장으로 있는 양준혁 야구재단에서 창단한 '멘토리 야구단[7]'의 초대 감독으로 취임했다.

4.1 선수협 사무총장

2012년 1월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 새로운 사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신임 회장인 박재홍의 말에 따르면 이 당시에 아무런 연줄이 없던 그였기에 오히려 사무총장으로 적당하다는 판단 하에 그를 밀어줬다고 한다. 그런데 여러 비리 의혹을 받고 있던 권시형 전 사무총장이 측근을 통해 '박충식이 거액의 도박빚이 있다'는 루머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또한 권시형 파에 속했던 현재윤, 이혜천, 박명환, 김상현 등이 이사회에 참여도 하지 않고는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이사회가 진행되었다는 주장과 긴급이사회에 절차상 하자가 있었다는 주장이 적힌 반대성명을 내 음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재홍이 인터뷰를 통해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언론에 퍼졌던 박충식과 관련된 안좋은 소문들은 자취를 감추는 듯 했다. 그러나...

2014년 12월 16일, 비시즌 단체훈련 금지와 관련해 김성근 감독을 거론하며 규정을 강화하게 만든 김성근이 문제라고 하여 노리타(야구)들에게 극딜을 당했으나 이는 박충식이 김성근을 노리고 독단적 발언이 아니고 한화이글스 선수단의 제보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불이익을 받게 될 까봐 제보자 신원을 고려하여 혼자 총대를 멘것이다. 사실 과거 김성근 감독이 부임했던 모든 팀에서 1,2군 신인 고참급을 막론하고 선수의 체력과 건강을 무시한 지옥훈련에 불만이 많았다는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김성근 논란 항목에 가보면 이와 관련된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8] 다만 SK 시절에는 워낙에 팀성적이 좋다 보니까, 이런 문제들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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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선수 시절. 가운데가 박충식이다. 조동찬? 왼쪽오른쪽 분설명이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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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의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 이만수양준혁과 함께 초청되어 시구를 맡았다. 그리고 폭투가 나오며 시타를 한 양준혁에게 졸지에 위협구를 던졌다 사실 경기가 끝내기 폭투로 끝낼 거라고 예고한 거였다

이후 2016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이 터진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16년 8월 11일에 사임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4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1993삼성 라이온즈32155⅔14
(3위)
72-0.6672.5412210519751441.041
199432203⅓
(3위)
1483-0.6362.35
(2위)
174163813064530.993
199519128960-0.6003.1610610397255451.039
19962989⅔8212
(5위)
-0.8002.01674145623200.825
199731170⅔
(5위)
1362-0.6844.3217418459291821.190
199824159⅓11100-0.5243.25163144010068611.180
199934000-0.0000.002013000.750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승률ERA피안타피홈런4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WHIP
2000KIA 타이거즈1군 기록 없음
2001233132310.6003.1923571811110.871
20024847⅔53812
(3위)
0.6253.9746583321211.070
KBO 통산(10시즌)241989⅓774430130.6363.07877822436013843371.054
  1. 그 때 광주상고의 에이스는 우수 투수상을 받았던 고천주였으나, 원광대학교 진학 후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송원대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
  2. 이 부분은 알려진 것과 다른데, 해태가 이종범과 함께 1993년 1차 지명 때 저울질했던 선수는 박충식이 아니라 또 다른 언더스로 투수 성영재였다. 성영재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했다.물론 성영재는 해태 - KIA에서도 뛰었지만 흑역사
  3. 군대보다도 구타가 더 심했다고..
  4. 지금이야 이전의 임창용이나 지금의 심창민처럼 사이드암이라도 150km/h를 넘나드는 속구를 가진 투수가 드물지 않지만, 1980년대-1990년대만 해도 사이드암-언더핸드는 120-130대의 속구와 슬라이더 또는 커브 그리고 싱커로 먹고사는 타입이었다.
  5. 비슷한 시기에 김동수의 보상 선수로 LG로 이적하게 된 김상엽도 같은 케이스.
  6. 손혁도 이걸 대단히 까며 트레이드를 거부해 임의탈퇴 공시된 적이 있다. 그리고 박충식이 이적했던 시기가 아직 KIA 타이거즈로 바뀌기 전인 2000년 해태 타이거즈 시절인데, 헬스장에 가 보니 무게추 대신 돌이 올려져 있었다고 한다...
  7. 저소득층 자녀나 다문화 가정 자녀로 이뤄진 유소년 야구단
  8. 이런 과도한 강훈련(?)은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다. 스포츠과학이 발달한 최근에는 적절한 휴식이 없는 장시간의 훈련은 오히려 부상과 체력, 집중력 저하만 가져온다는게 정설이다.